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전쟁과 평화-나폴레옹의 종말을 부른 모스크바 원정을 다룬 소설의 첫 문단은 대화체로 러시아 사회를 아우른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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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나폴레옹의 종말을 부른 모스크바 원정을 다룬 소설의 첫 문단은 대화체로 러시아 사회를 아우른다

지성인간 2024. 6. 3.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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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여성화가 엘리자베스 뵘(Elisabeth Boehm, 1843~1914)이 그린 소설 '전쟁과 평화' 여주인공 나타샤 로스토바. 엽서용 작품.photo by wikipedia

1부 1 " '그러니까 공작, 제노바와 루카는 이제 부오나르트 가문의 소유물이자 영지일 뿐이에요. 아뇨, 당신에게 경고하겠어요. 만약 당신이 지금은 전쟁이 아니라고 말하거나 여전히 그 적그리스도(정말로 난 그가 적그리스도라 확신해요.)의 온갖 추악한 짓과 만행을 옹호하려 한다면 난 당신을 아는 척도 하지 않겠어요. 이제 당신은 더 이상 나의 친구도 아니고, 당신이 말하듯 나의 충직한 종도 아니에요. 하지만 어서 와요. 반가워요. 내가 당신을 놀라게 했군요. 앉아서 이야기를 해줘요.'  1805년 7월, 여관(女官)이자 마리아 페오도로브나 황태후의 측근인 그 유명한 안나 파블로브나 셰레르는 그녀의 야회에 가장 먼저 도착한 고위직 관료 바실리 공작을 맞으며 이렇게 말했다. 안나 파블로나는 며칠동안 기침을 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유행성 감기(당시 몇 안 되는 사람만 사용하는 새로운 용어)를 앓고 있었다. 그날 아침 붉은 제복의 하인들이 발송한 작은 쪽지에는 어느 것이나 할 것 없이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백작(혹은 공작), 혹시 당신이 더 멋진 계획을 세워두지 않았다면, 그리고 가엷은 병든 여인의 집에서 저녁을 보내는 계획에 별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면 말이죠. 오늘 7시에서 10시 사이 우리 집에서 당신을 볼 수 있다면 무척 기쁠 거예요.-아네트 셰레르'. 
'이런 정말 맹렬한 공격이군요!' 안으로 들어오던 공작은 이런 식의 환영에 전혀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전쟁과 평화, 레프 톨스토이 저, 연진희 역, 민음사, 2018)

1869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나온 초판본 표지 다음장.photo by wikipedia

1. 도입부가 곧바로 대화체다. 독자가 소설 속에 바로 빠져들도록 하는 기법으로 구전 서사시 형식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대화에서 국제 정세와 권력 지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 다가올 전쟁이라는 먹구름을 암시하고 있다. 상황의 긴박함을 암시하면서도 첫 문단에 야간 무도회(夜會)를 개최한다는 초대장을  넣은 것은 귀족 지배층의 무사태평을 드러낼 의도로 보인다. 본문에 나오는 *제노바와 루카는 이탈리아 북부지역, *부오나파르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낮춰 부르는 표현이다. 또 적그리스도는 나폴레옹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유행성 감기라는  말은 당시 프랑스에서는 사용했지만 러시아에서는 쓰지 않는 말이었다. 지배층의 정서적 친프랑스를 비꼬기 위해 쓴 것으로 보인다.*마리아 페오도로브나(Maria Feodorovna, 1759~1828)황후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Alexander I, 1777년12월23일~1825)의 어머니다.독일 출신으로 당시 막후권력자였다.

2. 레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Война и мир, 1864~1869)'는 19세기 초 전 유럽을 휩쓴 나폴레옹 전쟁에 얽힌 거대한 서사를 문학으로 완성한 불멸의 명작이다. 역사와 문학성을 고차원적으로 융합한 초대형 걸작으로 꼽힌다.
격동의 19세기 유럽의 변방 러시아라는 광활한공간을 배경으로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역사를 화려한 필력으로 그려낸 전무후무한 역작이다.1805~1820년이라는 약 15년의 시간 속에 피비린내 나는 전장과 인간의 운명을 냉철하게 그려냈다. 560여명에 이르는 등장인물의 자연스러운 묘사와 역사와 전쟁을 보는 저자의 차가운 시선이 웅장한 서사시로 승화됐다.
모두 4편과 에필로그로 펼쳐진 이 소설은 1856년부터 쓰기 시작해 1865~1866년에 첫머리 2장만 '1805년'이라는 표제로 '러시아 통보(Ру́сский ве́стник, Russkiy Vestnik)'에 게재됐다. 나머지 부분은 개별 에피소드를 26번 이상 다시 쓴 후 1869년 단행본으로 일괄 출판됐다. 
초판은 사실상 저자가 돈을 낸 자비(自費) 출판이었다. 4800부 인쇄에 4500 루블을 지불했고, 총이익의 30%를 인쇄소와 교정자에게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권당10 루블에 판매된 소설은 열광적인 평가를 받으며 순식간에 동났다. 문단과 평론가들도 "새로운 유럽 문학의 가장 위대한 서사시 작품"이라고 호평했다. 
판매가 공식집계된 1918~1986년 사이 70여년동안 소련(USSR)에서만 3600만 권 이상 팔렸다. 소설은 노르웨이 도서 클럽의 가장 중요한 세계 문학 작품 목록인 '세계 도서관'에 포함됐고, 타임(Time)의 역대 가장 위대한 책 10 권에서 3위를 차지했다. BBC가 선정한 상위 200대 소설 목록 'The Big Read'에서 20위에 올랐다. 러시아 현대어 읽기로는 '바이나 이 미르(Voina i mir, 전쟁과 세상 혹은 우주)', 최초 번역국인 프랑스어로는 'La Guerre et la Paix', 영어로는 'War And Peace', 일본어로는 '戰爭と平和', 중국어는 '战争与和平'이다.한국은 일본어 번역 그대로 썼다.

출판사 티 리스(T. Ris)가 러시아 모스크바 보이코바(Voyikova) 가문을 위해 1869년 인쇄한 양장본. 전쟁과 평화 전 6권을 3권에 담았다.www.baumanrarebooks.com

3. 소설은 좁은 의미로 러시아라는 국가의 성장 소설이다. 나폴레옹 전쟁을 겪으며, 민족과 조국을 자각해 가는 러시아인들을 그렸기 때문이다. 소설 집필 당시 러시아는 흑해 지배권을 두고 싸운 크림 전쟁 (Crimean War,1853~1856, 러시아와 그리스 연합군과 오스만제국, 프랑스, 영국연합군의 싸움)의 패배로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인이 조국의 영광과 국민정신의 위대함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자각한 이야기를 부각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44여년  전인 1812년 당대 최강 나폴레옹 군대를 패주 시킨 역사적 사건이었다. 
소설의 서사 구조는 넓게 보면 개별 사건에 대한 전지적 작가 시점(전지전능한 신의 관점)에서 그렸다. 하지만 각 사건의 개별인물은 그 인물 관점에서 서술해 빠르고 매끄럽게 전개되는 기법을 적용했다. 특히 넓은 시각에서 갑자기 개인으로 좁혀지는 이야기 방식, 특정사건 확대서술 등은 현대 영화 기법과 닮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한편 소설 속 대화 일부는 프랑스어로 돼 있어 러시아 학생들도 읽기에 불편함을 겪는다고 한다.

소설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 안드레이의 모델인 세르게이 볼콘스키(Sergey Volkonsky,1788~1865)공작. 데카브리스트(Decembrist) 반란에 참가한 유일한 장군이다. 러시아 장군들의 초상화 329점을 그린 영국 초상화가 조지 도우(George Dawe,1781~1829)의 1823년 작품.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쥬박물관 소장. 아래 사진은 볼콘스키와 30여년동안 시베리아 유형생활을 한 아내 마리아 니콜라에브나 라에브스카야(마리야 볼콘스카야)의 초상화. 19세기 전반 무명 예술가 작품. 위키미디어

4. 소설에 영감을 준 인물은 세르게이 그리고리예비치 볼콘스키(Сергей Григорьевич Волконский, 1788~1865, 영어명 Sergey Volkonsky) 소장이다. 러시아 명문가 니콜라스 레프닌(Nicholas Repnin,1734~1801) 원수의 손자로 최상류 층이었다. 그런데 차르 알렉산더 1세 (Александр I Павлович , Aleksandr I Pavlovich, 1777~1825)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동생 니콜라스 1세(1796~1855)의 즉위를 앞두고 있었다. 이에 니콜라스 1세의 즉위를 막고 자유주의 개혁을 이루려는 시도인 '데카브리스트 반란(Decembrist Revolt,1825년 12월 26일 입헌주의와 농노 해방을 주장하며 일어난 반란사건)'이 일어났다. 데카브리(декабрь)는 러시아어에서 12월을 말한다. 데카브리스트는 12월주의자,즉 12월 당원이라는 뜻이다.

182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어난 데카브리스트 봉기를 묘사한 독일 화가 칼 콜만(arl Kollmann,1786~1847)의 1830년 작품 '상트 페테르부르크 광장'. 모스크바 국립 역사박물관 소장.Wikimedia Commons

볼콘스키는 입헌주의자로 이 반란에 가담한 유일한 현역 장군이었다. 볼콘스키는 반란 실패로 참수형을 선고받았다가 종신형이 확정됐다. 모든 특권을 박탈당하고 복역, 시베리아 유형 생활 30년 만에 석방됐다. 한편
저자는 1812년 러시아 모스크바 외곽에서 벌어진 보로디노 전투를 묘사하기 위해 전투 현장을 일곱 차례나 방문했다. 또 당시 전투 참가자와 생존자들을 찾아가 인터뷰해 자료를 모았다.

프랑스군의 러시아원정 실패를 가져온 보로디노 전투 직전 언덕위의 나폴레옹(왼쪽)과 프랑스군. 피곤에 지친 나폴레옹 모습을 통해 전쟁의 끝을 암시하고 있다.러시아 전쟁화의 대가 바실리 베레샤긴(VERESCHAGIN, 1842~1904)의 1897년 작품.모스크바 국립역사박물관 소장.

보로디노 전투(Бородинская битва(러), Battle of Borodino(영), Bataille de la Moskou(프))는 1812년 9월7일 모스크바에서 서쪽으로 125km 떨어진 보로디노 마을 근처에서 일어났다.  러시아 원정에 나선 프랑스군과 이를 방어하려는 러시아군이 맞붙은 전투로 러시아군은 4만4,000~5만8,000명, 프랑스군은 3만5,000~ 6만여명이 전사, 부상 및 포로가 됐다. 프랑스군이 겨우 승리했지만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 결과 프랑스군은 모스크바에 입성했지만 러시아의 항복을 얻어내는 데 실패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혹한과 러시아군의 게릴라식 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채 후퇴(패주)했다. 10월 19일 모스크바에서 철수한 프랑스군은 원정 초 병력  13만~16만 명 중 9만 2000명만 귀환했다. 러시아는 1995년 3월 13일 연방법에 러시아 군대의 보로디노 전투의 날인 9월 8일을 '군사적 영광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한편 저자는 전쟁 체험을 위해 친형이 복무 중이던 캅카스에 찾아가 포병 하사관으로 시작해 현지 임관으로 중위까지 올랐다. 크림 전쟁에 참전, 5년 동안이나 전선에 복무했다.

소설 '전쟁과 평화'에 생생하게 그려진 보로디노 전투(Battle of Borodino)를 형상화 한 그림.프랑스 장군이자 석판화가인 루이 프랑수아 르준 남작(1775~1848)의 1822년 작품. 브라이드맨아트갤러리(Bridgeman Art Library,세계에서 가장 큰 예술작품 복제 아카이브)

5. 주요 등장인물은 베주호프 가문, 볼콘스키 가문, 로스토프 가문, 쿠라긴 가문, 드루베츠코이 가문 등 다섯 가문의 사람들이다. 베주호프 가문의 부유하고 방탕한 상속자 피에르 베주호프(Pyotr Pierre Kirillovich Bezukhov) 백작과 아버지 키릴 블라디미르비치 베주호프(Kirill Vladimirovich Bezukhov) 백작이다. 
또 볼콘스키 가문의 지독한 허무주의자 안드레이 니콜라예비치 볼콘스키 (Andrei Nikolayevich Bolkonsky),  아버지 니콜라이 안드레이히 볼콘스키 왕자(Prince Nikolai Andreich Bolkonsky), 딸 마리아  니콜라예브나 볼콘스카야가 나온다.
로스토프 가문은 가장인 일리야 안드로비차 로스토프(Ilya Andreyevich Rostov) 백작과 아내 나탈리아 로스토바 백작부인, 딸 나타샤 로스토바(Natasha Rostova), 장남 니콜라이 일리치 니콜렌카 로스토프(Nikolai Ilyich Nikolenka Rostov) 백작, 딸 베라 일린치나 로스토바 , 막내 아들 표트르 일리치 페트야 로스토프, 여사촌 소피아 알렉산드로브나 소냐 로스토바 등이다.

첫문단에 등장하는 황태후.프랑스 여성화가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 르 브룬(Louise Vige Le Brun, 1775~1842)이 1799년 그린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Alexander I, 1771~1825)의 어머니 마리아 페오도로브나(Maria Feodorovna, 1759~1828) 황후. 독일출신으로 결혼전 이름은 뷔르템베르크의 소피 도로테아(Sophie Dorothea)이다. photo by wikipedia

쿠라긴 가문은 부를 위해서는 무자비한 남자 바실리 세르게예비치 쿠라긴(Vasily Sergeyevich Kuragin), 매혹적인 딸 Elena Vasilyevna "Hélène" Kuragina, 아들로 로스토바와 도망칠려고 하는 아나톨레 바실리예비치 쿠라긴과 남동생 바실리예비치 쿠라긴(Ippolit Vasilyevich (Hippolyte) Kuragin)이 있다.
드루베츠코이 가문은 가난하지만 야망있는 귀족청년 보리스 드루베츠코이(Boris Drubetskoy), 보리스의 어어니 안나 미할로브나 드루베츠카야가 있다. 이밖에 냉혹한 장교 표도르 이바노비치 돌로호프(Fyodor Ivanovich Dolokhov), 젊은 독일 장교 아돌프 카를로비치 버그(Adolf Karlovich Berg), 살롱 여주인 안나 파블로브나 셰레르(Anna Pavlovna Scherer,아네트), 모스크바 사교계의 정직한 대모 마리아 드미트리예브나 아크로시모바(Maria Dmitryevna Akhrosimova), 전형적인 선량한 러시아 농민 플라톤 카라타예프(Plato Karataev), 프리메이슨 오시프 바즈데예프(Osip Bazdeyev), 영리하고 평판이 좋은 외교관 빌리빈 등이 나온다.

러시아 화가 레오니드 파스테르나크(Leonid Osipovich Pasternak,1862~1945)가 1893년 그린 '나타샤의 첫 무도회'. 레오니드는 시인이자 소설가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Boris Pasternak,1890~1860, 소설 닥터지바고 저자,1958 노벨문학상)의 아버지다.- http://fotki.yandex.ru

6.줄거리는 러시아 짜르 사회에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이 끼친 영향과 서로 다른 러시아 귀족 가문을 따라가는 다섯 가지 연결된 이야기다. 180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안나 셰레르의 저택에서 야회(夜會)가 시작되고 사교계는 나폴레옹의 이야기로 떠들썩하다. 러시아 군대의 막강한 전력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가운데, 젊은 귀족 안드레이와 피에르는 참전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나눈다. 
로스토프가에서는 부자 가문 베주호프가의 사생아 피에르에게 나타샤가 먼저 춤을 청한다.피에르는 생명력과 활기를 느낀다. 곧 피에르는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는다. 그런데  그의 재산을 노린 바실리 공작은 딸 엘렌을 피에르에게 '사랑 없는 결혼'으로 밀어부친다.
나폴레옹 프랑스군은 시시각각 러시아로 다가오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도 전운이 덮쳐온다. 하지만 화려한 야회는 계속되면서  전쟁과 젊은 남녀의 엇갈린 욕망과 운명이 겹쳐진다. 안드레이 볼콘스키는 결국 전쟁에 참전해 싸우다가 끝내 큰 부상을 입고 후송되고, 그 곳에서 나타샤를 만나지만 끝내 생을 마감한다.
피에르는 황제가 철수한 모스크바에 남아 있다가 나폴레옹군에 붙잡혀 수용소에 들어가 고생하지만 그곳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 개혁적 긍정주의자가 된다. 소설의 에필로그에서는 피에르는 포로로 끌려가다 구출된 후 다시 만난 나타샤와 결혼한다.안드레이의 여동생 마리아 볼콘스카야는 몰락 위기의 니콜라이 로스토프 백작을 사랑해 결혼한다.니콜라이는 이 결혼으로 기사회생, 마리아의 농장을 경영하며 농노에게 주인으로 인정받는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러시아 침공 때 동행한 독일 바이에른 화가 알브레히트 아담(Albrecht Adam, 1786~1862)이 1841년 그린 '1812년 9월 모스크바 화재를 지켜보는 나폴레옹'.

7.러시아 작가이자 비평가 이반 곤차로프(Ivan Aleksandrovich Goncharov,1812~1892)는 "전쟁과 평화는 톨스토이를 러시아 문학의 진정한 사자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러시아 소설가이자 비평가,번역가로 파리에서 활동을 많이 한 이반 투르게네프(Ivan Sergeyevich Turgenev, 1818~1883)은 1885년 "사회적 서사시이자 역사 소설이며 국가 전체의 삶에 대한 광대한 그림"이라고 호평했다.
프랑스 소설가 구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1821~1880)는 1880년 1월 투르게네프(Turgenev)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쟁과 평화'에 대해 "이것은 최고의 작품이다. 톨스토이는 대단한 예술가이자 심리학자"라고 격찬했다. 플로베르는 또 "나는 절묘한 소설을 읽는 동안 기쁨의 비명을 지르곤 했다"며 " 강력하다, 정말 강력하다"고 말했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극작가 존 갈스워시(John Galsworthy, 1867~1933)는 '전쟁과 평화'를 "지금까지 쓰여진 최고의 소설"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극작가이자 소설가 로맹 롤랑(Romain Rolland, 1866~1944)은 "학생 시절 이 소설을 읽었다"며 "전쟁과 평화는 삶과 마찬가지로 시작도 끝도 없는 작품, 영원한 운동을 하는 삶 그 자체"라고 칭송했다. 
독일 소설가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은 '전쟁과 평화'에 대해 "문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쟁 소설"이라고 말했다. 영국 여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Adeline Virginia Woolf,1881~1941)는 "모든 소설가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 남아 있다. 전쟁과 평화의 작가를 달리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라고 말했다.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1899~1961) 는 "가장 직설적이고, 정직하고, 객관적이고, 냉철한 방식으로 전쟁에 대해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해 톨스토이에게서 교훈을 받았다"고 고백했다.헤밍웨이는 1955년 "톨스토이보다 전쟁에 대해 더 잘 쓸 수 있는 사람을 모른다"고 말했다.
 소련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극작가인 아이작 바벨(Isaac Emmanuilovich Babel,1894~1940, 소련 비밀경찰에 처형당함)은 전쟁과 평화를 읽은 후 "세상의 모든 이들이 스스로 글을 쓸 수 있다면 톨스토이처럼 글을 쓸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의 대조국전쟁(나폴레옹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야전사령관 미하일 쿠투조프(Mikhail Kutuzov,1745~1813) 초상화. RM 볼코프(1776~1831) 작품. www.picture.art-catalog.ru/

8.비판적 시각도 많다. 1812년 전투에 나오는 러시아 사령관 쿠투조프를 비롯한 러시아 인물들은 지나치게 관대하게 서술한 반면 프랑스군의 나폴레옹 등은 권력욕과 명예욕에 가득 찬 부정적 인물로 서술했다는 것이다.
19세기 러시아 보수문학 비평가 니콜라이 솔로비예프(Nikolai Ivanovich Solovyov (1831-1874)는 1869년 "대중의 집단 생활을 너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소설이지만 대중이 어떻게 에너지를 발전시키는지 보여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러시아 철학자이자 문학평론가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스트라호프(Nikolai Nikolaevich Strakhov, 1828~1896)는 소설을 매우 높이 평가하면서 “전쟁과 평화의 전체 이야기는 적극적인 영웅주의보다 겸손한 영웅주의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고 언급했다.
러시아 문학 평론가, 문학 역사가 파벨 바실리예비치 아넨코프(Pavel Vasilyevich Annenkov,1813~1887)는 소설을 칭찬하면서도 "작가가 자신의 사회 옆에 삶에서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는 다양한 계급과 계급의 사람들(raznochintsy)의 존재를 보여줄 필요성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는지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러시아 홍보가 이자 문학 평론가니콜라이 셸구노프(Nikolai Shelgunov, 1824~1891)는 톨스토이의 소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는 "톨스토이 백작의 소설을 읽고 나면 머리 속에 개념이 너무 모호해서 손이 포기되고 마지막 땅이 발 아래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힐난했다.
 러시아 시인 , 문학 평론가 , 역사가로 1812년 전쟁에 참여한 표트르 뱌젬스키(Pyotr Vyazemsky)는 “역사와 소설의 얽힘, 아니 오히려 혼란은 의심할 바 없이 전자에 해를 끼치며, 궁극적으로 건전하고 공정한 비평의 법정 앞에서 후자, 즉 소설의 진정한 존엄성을 높이지 못한다”며 톨스토이가 역사를 희화화했다고 비난했다 .

독일 뮌헨 출신의 화가 아돌프 노던(Adolph Northen,1828-1876)의 1851년 작품 '1812년 모스크바에서 나폴레옹의 퇴각'. www.militaryartgallery.com
러시아 화가 일라리온 프랴니시니코프(Illarion Pryanishnikov,1840~1894)가 1874년 그린 '1812 프랑스군의 퇴각'.러시아 사라토프 아스트라한스카야에 있는 체르니셰프스키 국립 연구 주립 대학 소장. http://www.sgu.ru

9.외국에서는 가장 먼저 프랑스에서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3대 거장(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중 한명인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Ива́н Серге́евич Турге́нев, Ivan Sergeyevich Turgenev,1818~1883) 소개로 출판됐다. 영어로는 처음 클라라 벨(뉴욕: , 1886)이 프랑스어 버전을 중역해 1886년 뉴욕 Gottsberger에서 내놓았다. 이후 Nathan Haskell Dole이 뉴욕 Thomas Y. Crowell & Co에서 1889년  출판했다. 이어 레오 위너가 보스턴 Dana Estes & Co.에서1904년에, 콘스탄스 가넷이 1904년 런던 하이네만 출판사에서 간행했다.
영화로는 러시아 최초로 1915 년 Война и мир ( Voyna i mir )로블라디미르 가르딘(Vladimir Gardin,1877~1965)이 감독하고 자신과 러시아 발레리나 베라 알렉세예브나 카랄리(Vera Karalli, 1889~1972)가 주연을 맡았다. 일본 영화감독 가메이 후미오(亀井文夫, 1908~1987)와 야마모토 사츠오(山本 薩夫, 1910~ 1983)가 공동으로 2차세계대전 후 '戦争と平和(Sensō to heiwa,1947)로 만들었다.

1956년 미국에서 오드리 헵번(나타샤 로스토바 역)과 헨리 폰다(피에르 베주코프 역) 주연으로 나온 영화 '전쟁과 평화' 포스터. photo by google

미국에서는 1956년 영화제작자이자 감독, 시나리오 작가인 킹 월리스 비더(King Wallis Vidor, 1894~1982)가 제적했다. 당대 인기 배우 오드리 헵번(나타샤 로스토바 역)과 헨리 폰다(피에르 베주코프 역) 주연으로 나왔으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제작비 600만 달러를 들였으나 미국에서 625만 달러 가량 벌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 촬영은 대부분 이탈리아 사람들(스탭)이 이탈리아에서 했다. 이 영화는 한국에 21년이나 지난 1977년 9월 27일에 개봉해 서울 관객 29만명이 들었다.1983년  KBS1에서 더빙해 방영했다.1997년 KBS2에서 크리스마스 특선으로 방영했다.
러시아에서는 세르게이 본다르추크(Sergei Bondarchuk, 1920~1994) 감독이 각본, 연출,주연까지 맡아 1966년부터 1967년까지 4부작으로 만들었다. 총 상영 시간은 소련에서 484분, 즉 8시간 4분(미국판은 431분)에 달했다. 영화 역사상 엑스트라 최다 동원(75만여명)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전쟁을 실감나게 묘사해 호평을 받으며, 1969년 아카데미 국제영화상을 수상했다. 소련 내에서 4편 합쳐 1억3500만 명이 몰렸다. 또 서독에서 225만 명, 프랑스에서 136만 명이 관람했다. 미국 업체는 한 편당 150만 달러(당시 약 20억 원)에 구입해 개봉했다.한국에서는 1988년 9월 10일에 개봉했다.1991년 MBC에서 4부 전체를 5월 12일부터 4주에 걸쳐 일요일 밤에 더빙으로 방영했다.
2007년에는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러시아, 폴란드 합작 4부작 '전쟁과 평화'로 만들었다. 루마니아 출생 오스트리아의 영화 및 TV 감독 로버트 돈헬름(Robert Dornhelm,1947~현재), 주연 여배우는프랑스 배우 클레망스 포에시(Clémence Poésy, 1942~현재)가 여주인공 나타샤 역을 맡았다. 남자 주인공 피에르 베주코프 역은 독일 배우 알렉산더 바이어(Alexander Beyer, 1973~현재)가 맡았다.
2016년에는 BBC에서 폴 다노(피에르 역), 제임스 노턴(안드레이 역), 릴리 제임스(나타샤 역)를 주역으로 총 6부작으로 리메이크해 방송했다.영국에서는 2016년 1월 3일부터 2월 7일까지 방영에 들어갔으며, KBS에서 영국 방영 6일 뒤인 1월 9일부터 방영했다.

러시아 세르게이 본다르추크(Sergei Bondarchuk, 1920~1994) 감독이 각본, 연출,주연까지 맡아 1966~1967년 4부작으로 제작한 영화 '전쟁과 평화'스틸컷. photo by wikipedia

10.오페라(영화 오페라 포함)는 3번 제작됐다. 러시아 및 소련 작곡가 , 피아니스트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프로코피예프(Sergei Sergeevich Prokofiev, 1891~1953)가 '전쟁과 평화'로 1943년 첫 오페라를 제작했다. 영화 오페라는 영국에서 1991년 나왔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 공연 비디오 녹화물을제적했다. 프랑스에서는 2000년 파리 국립 오페라 공연 영상 녹화을 영화오페라로 제작했다. 음악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Sergei Prokofiev), 감독은 미국  여성 오페라 및 연극 감독 프란체스카 잠벨로(Francesca Zambello, 1956~현재)가 맡았다.
뮤지컬은 2012년 미국에서 '나타샤, 피에르와 1812년의 대혜성'이라는 제목의 오프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제작돼 호평을 받으며, 팬덤까지 만들어냈다. 한국 라이선스 공연은 2021년 3월 21일부터 5월 30일까지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공연됐다.

2016년 영국 BBC에서 총 6부작으로 제작, 방송한 '전쟁과 평화' 포스터.BBC Worldwide, Lookout Point Ltd., The Weinstein Company

11.한국어 최초 완역은 함일근(한국외국어대 노어노문과 교수)이 했다. 이 역본은1960년대 정음사 출간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됐다. 이어 1988년에는 톨스토이 번역의 권위자인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박형규가 번역(범우사)했다.박형규 번역본은 이후에도 동서문화사, 신원문화사, 범우사, 인디북  등에서도 출판했다.
2016년 문학동네에서 박형규 번역본을 개역, 세계문학전집 145~148번(전 4권)으로 펴냈다. 2018년에는 민음사에서 연진희 번역으로 출간했고, 2019년 말에는 을유문화사(3권)에서 박종소, 최종술 번역으로 나왔다.

임종 몇달 전인 1910년의 톨스토이 모습. www.tolstoymuseum.ru

#. 레흐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o Nikolaevich Tolstoy,1828~1910)= 세계적인 대문호.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러시아 작가 겸 사상가.비폭력 무정부주의자. 러시아 문학을 세계의 중심에 올려놓은 작가. 1902년부터 1906년까지 매년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고, 1901년, 1902년, 1909년에는 노벨 평화상 후보에도 올랐다.

1.러시아 제국 남부 툴라(Tula)주 크라피벤스키 유예드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200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에서 니콜라이 일리치 톨스토이(Nikolai Ilyich Tolstoy,1794~1837) 백작과 마리야 톨스타야(Mariya Tolstaya,1790~1830)의 다섯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백작 가문의 태생적 금수저이지만 '조실부모(早失父母)'했다. 두살때 엄마, 아홉살때 아버지가 사망한 것이다. 하지만 워낙 부잣집 도련님이어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톨스토이(왼쪽 두번째)와 아내(오른쪽 두번째), 자녀들. 앞줄 가운데가 막내딸이다. 1892년 찍은 사진. 셰러(Scherer)와 나브홀츠(Nabholz) 공동작. https://catalog.shm.ru

2.16세 때인 1844년에 카잔 제국대학교 철학부 동양문학과에 입학했으나 1년후 법학부로 편입했다. 하지만 3년 만에 공부를 포기하고,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방탕한(?) 생활을 했다.1851년 막대한 도박 빚을 지고 나서 형이 있는 코카서스로가서 군대에 입대했다. 러시아의 지중해 출구를 위한 흑해 확보 싸움인 크림 전쟁(Crimean War,1853년10월~1856년 3월 기간에 러시아와 영불,오스만제국 연합군 간의 전투) 때는 포병 장교(중위)로 복무했다.

전쟁과 평화를 쓰기 시작한 1856년의 톨스토이 모습. 작가 불상. https://mif-mira.ru

3.이상주의자이자 쾌락주의자였던 톨스토이는 1857년부터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을 여행하면서 급변하는 문명과 문학의 흐름 등을 체득하기도 했다.또 1860~61년의 유럽 여행에서 프랑스 대작가 빅토르 위고( Victor-Marie Hugo, 1802~1885, 명저 레미제라블 작가)를 만나 정치적, 문학적 발전에 서로 영향을 주기도 했다. 1861년 3월에는 브뤼셀에서 가명으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프랑스 무정부주의자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 1809~1865,무정부주의자라고 선언한 최초의 사람 ) 를 만났고, 그의 저서 ' La Guerre et la Paix(전쟁과 평화) '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톨스토이는 나중에 자신의 역저 제목으로 '전쟁과 평화'를 사용했다. 톨스토이가 국내는 물론 세계적인 셀럽이 된 것은 전쟁과 평화(1869), ‘안나 카레니나(1877)’를 내면서다. 말년까지도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와 부활(1899)을 발표해 세계적인 명성을 더했다.

러시아 야스타나 폴랴나 영지에서 1890년대 지인들과 체스를 두고 있는 톨스토이.가운데 여성이 아내 소피아이다. www.tolstoymuseum.ru

4.1862년 소피아 안드레브나 비어스(Sophia Andreevna Behrs, 1844~1919. 톨스토야 백작 부인,약칭 소냐, Sonya)와 결혼, 13명의 자녀를 낳았다. 아내는 모스크바궁 의사이자 국무위원 인 Andrei Evstafievich Bers(1808-1868) 의 딸이다.1862년 9월 23일 모스크바 크렘린 에 있는 성모 마리아 탄생 교회 에서 톨스토이와 결혼식을 올렸다. 1863년 첫 아이 아들 세르게이를 낳았으며,  13명의 자녀 중 11명에게 모유를 먹였다.
하지만 말년의 톨스토이는 아내 소피아와 불화의 연속이었다. 부부싸움 끝에 1910년 10월 27일 가출한 톨스토이는 랴잔(Ryazan)주 라넨부르크스키 유예즈드 아스타포보역(Astapovo,1918년 레프 톨스토이 역으로 개칭)에서 11월 7일 세상을 떠났다.
역장은 톨스토이가 쓰러지자 관사로 모셨고, 주치의들이 와서 모르핀과 장뇌 주사로 회생을 시도했지만 깨어나지 못했다.
태어난 곳이었던 야스나야 폴랴나로 옮겨져 묻혔다. 장례 행렬에는 수천 명의 농민들이 참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아내 소피아는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죽어서 합장되지도 못했다. 심지어 묘도 3키로나  떨어진 가족묘에 있다고 한다.

1900년대 초 야스타냐 폴라야 영지에서 손녀 타냐와 함께 한 톨스토이. www.tolstoymuseum.ru)

5.톨스토이는 말년에 농민의 삶에 경애심을 가졌다. 열성적인 사냥꾼이었지만 사냥에 반대했다. 또 1890년부터는 엄격한 채식주의 식단을 채택했다. 그래서 마지막 말은 '하지만 농민들... 농민들은 어떻게 죽지?'였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토지의 사유화를 반대해 헨리 조지(Henry George,1839~1897,미국 진보 경제학자) 이론을 좋아했다.그래서 조지즘(Georgism,토지 공개념)에도 몰두했다. 또 비폭력 이데올로기를 주창해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비폭력주의자 마하트마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1869~1948)와 중국 아나키스트 집단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간디는 비폭력 투쟁 ‘샤티아그라하(진리의 힘)’를 전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간디는 나중에 자서전에서 톨스토이를 "현 시대가 낳은 비폭력의 가장 위대한 사도"라고 격찬했다.

톨스토이와 아내 소피아 안드레예브나 베르스(Sofya Andreevna Bers,1844~1919)의 말년 모습. photo by wikipedia

6.톨스토이는 누구보다도 오랜 기간에 걸쳐 명성을 누리고 있는 작가다. 수많은 소설과 평론, 다양한 글을 남겼고, 많은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졌다.오죽하면 톨스토이에 관한 책들만으로도 도서관 하나를 꽉 채울 수 있다고 할 정도다. 모스크바(주소 142180 Moscow Oblast, Климовск)에는 1921년 개관한 ‘톨스토이의 집 박물관(Tolstoy Estate-Museum, www.tolstoymuseum.ru)’이 있다.2016년 러시아의 한 여론 조사에서 도스토옙스키나 푸시킨, 고리키, 체호프, 고골 등을 제치고, 러시아 최고 작가로 꼽혔다. 주요 작품으로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1869)', '안나 카레니나(Anna Karenina,1878)', '이반 일리치의 죽음(The Death of Ivan Ilyich,1886)', '가족 행복(Family Happiness ,1859)', '하지 무라드(Hadji Murad,1912)' 등이 있다.

우크라이나 마리우폴의 한 공원에 있는 톨스토이 기념 흉상. 2011년 사진. photo by wikipedia

7.미국 전기작가 제이 파라니(Jay Parini)는 톨스토이의 마지막 해와 관련, 소설 ‘마지막 역( The Last Station)을 썼고, 이는 마이클 호프만 감독에 의해 2009년 영화로 나왔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카스텔가와  우크라이나 마리우폴 시내,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시내에 톨스토이 흉상이 있다.

러시아 유명화가 일리야 레핀( Ilya Yefimovich Repin,1843~1930)이 1893년 그린 톨스토이 딸 타티아나 르보브나 수코티나,1864~1950) 초상화.야스나야 폴랴나 박물관 소장.

8. 톨스토이의 자녀들은 13명중 5명이 어렸을 때 사망했다.  생존 자녀들 대부분은 예술가로 활동했다. 첫 째 세르게이(Sergei , 1863~1947,Sergei Lvovich Tolstoy 백작)는 작곡가, 음악학자로, 딸 타티아나 르보브나 수코티나-톨스테야(Tatyana,1864~1950,1925년 프랑스 망명)은 회고록 작가, 둘째아들 일리아(1866~1933년 12월 11일,1916년 미국 이주), 작가, 회고록 작가이다. 네번째러 아들인 레프(1869~1945)는 프랑스 이탈리아 스웨덴 등에서 작가, 조각가로 활동했다.
막내딸 알렉산드라 르보브나 톨스테야(1884~1979,1920년 반체제로 체포 복역후 1931년 미국 이주)는 아버지의 조수이자 회고록 작가로 활약했다.
증손자 중 한 명인 블라디미르 톨스토이(Vladimir Ilyich Tolstoy, 1962~현재)는 1994년부터 야스나야 폴랴나 박물관의 관장을 지냈고,2012년부터 대통령궁에서 문화 문제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다른 증손자인 표트르 톨스토이(
Pyotr Olegovich Tolstoy,1969~현재)
 는 러시아 언론인이자 TV 진행자로 2016년부터 국가 두마 의원(유럽 평의회 의회 에 대한 러시아 연방 의회 대표단 단장,2017~2022)을 지냈다.  (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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