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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보물섬으로 유명한 요절 작가의 서스펜스 소설은 인물 탐구로 서두를 연다 본문
“변호사 어터슨 씨는 쉽게 미소짓지 않는 엄한 남자였다. 어쩌다 대화를 하려 해도 말투가 어눌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감정을 내세우는 경우도 드물었다. 무뚝뚝하고 따분한 말라깽이 키다리가 그였다. 그렇다고 매력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사교 모임의 와인이 입에 맞을 때면 지극히 인간적인 눈빛을 띠기도 했다. 대화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 식사 후에 은근히 표정으로 드러났고, 일상의 행동에서는 보다 빈번하고 눈에 띄게 나타났다. 생활도 거의 금욕 수준이었다. 혼자 있을 때는 진으로 고급 와인의 사치를 대신했으며, 연극을 좋아하면서도 지난 20년간 극장 문을 넘어선 적이 없었다. 하지만 타인의 행동에 대해서는 너그럽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분을 못 이겨 길길이 날뛰기라도 하면 놀라워하면서 거의 질투에 버금갈 정도로 부러워했으며, 극단적인 행동에 대해서도 나무라기보다 돕는 쪽을 택했다.”(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저, 조영학 역, 열린책들, 2011)

1.지루할 정도의 인물 소개로 도입부를 시작하고 있다. 변호사 어터슨의 인품과 성격, 심리, 기호식품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문장 하나하나도 수려하다.어려운 단어도 없고,문장 흐름이 막힘없이 깔끔하게 읽히는 첫 문단이다. 그런데 내레이션을 누가 하는 지 애매하다. 화자(話者)가 누구인지를 뚜렷하게 지목할 수 없는 것이다. 3인칭 시점인 것같지만 주인공 시점에서 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호한 화자는 서스펜스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려는 저자의 의도라고 할수 있다. 본문에 나오는 *진*은 값싸고 독한 증류주로 네덜란드에서 많이 마셨는데 1700년대 초 영국으로 넘어가 노동자들의 애주(愛酒)가 됐다.

2.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Dr. Jekyll and Mr. Hyde, 1886)’는 출간 당시보다 현대에 들어와서 더 인기있는 유명작이 됐다. 평단에서는 19세기에 본격 나온 사이언스 픽션(Science Fiction, SF) 문학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고드윈(Mary Wollstonecraft Shelley,메리 셀리,1797~1851)의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1818) 등과 함께 SF소설의 으뜸으로 꼽는다.
출간 초기에는 서스펜스적인 이야기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나 괴기(怪奇) 소설로 분류됐다. 이는 소설 구조를 잘 갖춘 베스트셀러임에도 평단의 외면을 받는 원인이 됐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 인간의 이중성을 꿰뚫는 이야기 전개로 철학적 사유 소설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1886년 1월 6일 영국 런던 롱맨드 그린 앤드 컴퍼니에서 출간했다.
원제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이상한 사건(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이다. 출간 당시에는 The가 붙지 않았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The 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로 번역된다.

3.출간 당시에 충격적인 소설로 받아들여졌다. 인간의 성격분열과 이중성을 치밀하고 철저하게 묘사해 읽는 이들의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현대에 들어와서 '지킬과 하이드'는 이중인격을 나타내는 관용어가 됐다.
이 소설의 괴기스런 내용과 파격적인 변신 등으로 인해 말도 많았다. 작가가 약(마약류)을 먹고 비몽사몽간에 하룻밤사이에 썼다는 설, 아내의 끊임없는 수정으로 걸작이 됐다는 설 등이다. 실제 병약한 작가는 집필 당시 지역 병원에서 버섯류인 맥각균(麥角, 보리에서 나오는 균)이 들어있는 약으로 치료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소설의 모티브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Edinburgh) 의 실존 인물 디콘 브로디(Deacon Brodie, 1741~1788)다. 본명은 윌리엄 브로디로 18세기 에든버러의 구의회 의원이자 길드 수장인 저명인사였다.디콘 브로디는 낮에는 존경받는 인물, 밤에는 범죄자로 활동하다 발각돼 결국 처형당했다. 에딘버러의 유명인물로 아직도 그의 이름을 딴 상점이 있을 정도다.
저자는 소설 출간이후 “모든 생각하는 존재의 마음을 때때로 습격하여 압도해버리는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강력한 감각을 이야기로 써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4.등장인물은 주인공인 의학, 민법, 법학박사인 헨리 지킬(Henry Jekyll) 박사와 친구 헤이스티 래니언, 지킬 박사와 래니언 박사의 친구(변호사) 가브리엘 존 어터슨(G.J.어터슨), 약 먹은 지킬박사 에드워드 하이드(Edward Hyde) 이다.
또 존 어터슨의 먼 친척 리처드 앤필드, 지킬 박사의 집에서 일하는 나이든 하인 ‘플’, 어터슨의 사무장 게스트, 하원의원으로, 어터슨의 친구이자 고객 댄버스 커루, 런던 경찰청의 경위 뉴커먼, 지킬 박사의 하인들 중 마부인 브래드 쇼 등이 나온다.

5.줄거리는 선과 악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인간의 본능과 모순을 탐구한다. 뛰어난 학식과 훌륭한 인품으로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지킬 박사는 어느 날 먹으면 도덕심이 없는 추악하고 잔인한 인간(하이드 씨)으로 변신하는 약을 발명한다.
선과 악의 두 성질이 한 인간에게 공존하는 것이 불행의 근원이라 생각한 지킬 박사는 약을 먹어서 한쪽(선)을 빼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약을 복용하는 횟수가 거듭되는 동안 약을 쓰지 않아도 하이드 씨의 모습으로 변신해 버린다. 그래서 영원히 지킬 박사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마침내 하이드는 살인을 하고 경찰에게 쫓겨, 체포되려는 순간 자살한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만 모든 것은 유서에 써 있다. 지킬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속속들이 알게 된다.

6.이 소설의 현대적 적용은 만화의 주인공 ‘헐크(Hulk, 1962년 3월 1일 만화 ‘인크레디블 헐크(he Incredible Hulk)’에 첫 등장)’다. 헐크는 분노나 공포와 같은 격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겪을 때마다 전면에 드러난다. 헐크는 핵 물리학자로 본명은 로버트 브루스 배너(Robert Bruce Banner)이다.
헐크는 미국 만화가 스탠 리(Stanley Martin Lieber, 1922~2018, 마블 코믹스 회장 역임)와 미국 유명 만화가 잭 커비(Jack Kirby, 1917~1994, 캡틴 아메리카 캐릭터 의 주인공)가 창조했다.
영국 유명 만화작가 앨런 무어(Alan Moore, 1953~현재)의 만화책인 ‘젠틀맨 리그(The League of Extraordinary Gentlemen,비범한 신사연맹)’를 영화로 만든 동명 작품(스티븐 노링턴 감독, 2003년 개봉)에도 지킬과 하이드가 주요 역할로 나온다. 젠틀맨 리그는 1999년 3월부터 2000년 9월까지 미국에서 연재한 6편짜리 리미티드 시리즈이다. 한국에서는 2015년 ‘젠틀맨-비범한 신사 연맹’으로 1, 2편이 정식 발매됐다.
1990년에 발레리 마틴(Valerie Martin)이라는 작가가 이 소설에서 영감을 얻어 쓴 ‘메리 라일리(Mary Reilly)’란 소설이 있다. 지킬 박사의 하녀인 메리 라일리의 관점으로 본 이야기다. 1996년 스티븐 프리어즈(Stephen Frears, 1941~현재) 감독이 줄리아 로버츠(Julia Roberts, 1967~현재)와 존 말코비치(John Malkovich, 1953~현재)를 내세워 영화로 만들었다.

7.출간 초기에 인기를 끌었음에도 문학계와 비평가들은 인색했다. 당시 평론가들은 공포 장르의 괴기소설로 분류, ‘정통 예술이 아니다’며 폄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50년대 부터 비평가들 사이에서 인간의 심리와 행위를 서스펜스 속에 녹여낸 이야기로 호평이 나왔다. 특히 독창성과 소설을 끌고 가는 힘은 어느 작가 못지 않다는 평가를 받으며 걸작으로 떠올랐다.
아르헨티나 출신 유명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는 “스티븐슨은 스토리텔러 시대를 연 작가”라고 높이 평가했다. 한국의 정신과 의사 정혜신(1963~현재)은 “사람은 누구나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고 말했다.
한편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에 삽화를 그린 독일 출신 세계적인 여성 아티스트이자 일러스트레이터 티나 베르닝(Tina Berning, 1969~현재)은 “음울한 아름다움을 시각화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고 말했다.

8.수많은 연극과 영화, 드라마, 뮤지컬로 각색했다. 다만 뮤지컬은 원작을 훼손할 정도로 변질됐다. 원작에는 지킬의 약혼녀 엠마, 창녀 루시 등은 아예 없다.
가장 유명한 뮤지컬은 미국 출신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Frank Wildhorn, 1958~현재)과 영국 출신 유명 각색자이자 작사가 레슬리 브리커스(Leslie Bricusse, 1931~?)가 지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이다.
이 뮤지컬은 1990년 아일랜드 출신 뮤지컬 배우 콤 윌킨슨(Colm Wilkinson, 1944~현재) 주연으로 텍사스 주 휴스턴에서 초연됐다. 이후 수 없는 개작을 거쳐 1997년 4월 말에야 브로드웨이의 플리머스 시어터에서 공연됐다.이 뮤지컬은 어두운 빅토리아 시대의 느낌에 팝-오페라 형식을 섞는 방식으로 공연됐으나 미국에서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이 뮤지컬에서 가장 잘 알려진 노래는 ‘Once upon a dream’ 과 ‘This Is The Moment(지금 이 순간)’이다.
그런데 한국에 들여온 뮤지컬은 최고의 히트작이 됐다. 오디컴퍼니에서 제작, 2004년 7월2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초연했는데 예상외로 히트를 친 것이다. 이때 주연한 배우 조승우(1980~현재)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10차례 공연됐는데 그때마다 만원이었 다. 2024년에는 20주년 기념공연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한편 서태지와 아이들 3집 수록곡 '제킬박사와 하이드' 노래도 이 소설에서 영감을 얻었다.

9.영화는 1931년 처음으로 제작 개봉했다. 미남 연기파로 배우계의 전설인 프레드릭 마치(Fredric March, 1897~1975)가 주연을 맡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1932년 제1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의 개막작이기도 했다.
1941년 미국에서 할리우드 유명감독 빅터 플레밍(Victor Fleming, 1889~1949) 감독이 인기 배우 스펜서 트레이시((Spencer Tracy, 1900~1967, 지킬박사,하이드 씨 역)와 잉그리드 버그만(1915~1982, 아이비 패터슨 역슨)을 내세워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Dr. Jekyll And Mr. Hyde)’로 내놓았다.2002년에 영국에서도 영화로 나왔다. 모리스 필립스(Maurice Phillips,1948~2012)감독이 제작했다. 2007년 영국 드라마 ‘지킬’도 있다. 영국 프로듀서 스티븐 모팻(Steven Moffat, 1961~현재)이 만든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시퀄(Sequel, 속편)격 드라마이다.
1995년에는 미국 영화감독 데이비드 프라이스(David Price, 1961~현재)가 코믹 공포 드라마 ‘지킬 박사와 미스 하이드’를 내놓았다. 지킬박사가 약을 먹으면 여성 하이드로 변한다는 시나리오다.
2011년 BBC에서 만든 6부작 ‘지킬(JEKYLL)’이 있다. 한편 1986년에는 호주 부르뱅크 스튜디오에서 50여분 짜리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방영됐다.

10.지킬박사와 하이드가 한국에서 책으로 나온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다. 1921년 8월 ‘제클과 하이드(원두우(元杜尤) 부인 역)’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판됐다.
원두우 부인은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1859~1916,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 서훈) 박사의 부인 릴리어스 스털링 호튼(Lillias Stirling Horton, 1851~ 1921)이다.
언더우드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13세때 미국으로 건너가 장로회 선교사가 된 인물로 1885년 조선에 왔다. 연세대학교의 전신 중 하나인 연희전문학교와 경신학교의 설립자로 두곳의 초대 교장을 자냈다.
언더우드는 1886년 병원 제중원에서 수학 물리 등을 가르쳤고, 1900년 석유회사 '스탠다드 오일'의 창립 멤버인 루이 헨리 세브란스 (Louis Henry Severance, 1838~1918)가 제중원에 거액을 기부하자 병원을 짓고, 그의 이름을 따 세브란스 병원으로 명명했다.
또 1926년 3월에는 ‘일신양인기(一身兩人記-게일, 이원모 역)’로 나왔다. 게일은 캐나다 온타리오 출신의 장로회 선교사 James Scarth Gale(J. S. Gale) 목사다.
1895년 한국 최초의 서양 책 번역인 존 번연의 ‘The Pilgrim’s Progress‘를 한국어로 번역했다. ‘텬로력뎡(천로역정)’이 그것이다. 당대 풍속화가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 생몰 미상)의 삽화를 곁들여 번역 출판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는 이후 많은 출판사에서 번역돼 나왔다. 2013년 창비에서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기이한 사례'라는 제목으로 번역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 1850~1894)=스코틀랜드의 소설가, 수필가, 시인, 여행 작가. 34세에 쓴 해적 소설 ‘보물섬’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젊은 나이에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됐다. 본명은 로버트 루이스 벨푸어 스티븐슨(Robert Louis Balfour Stevenson)이다.
1.토목 기사로 성공한 아버지 토머스 스티븐슨(Thomas Stevenson, 1818~1887)과 마거릿 이사벨라 밸푸어(Margaret Isabella Balfour, 1829~1897)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는 둘 다 독실한 장로교인이었다.

집안은 스코틀랜드 해안 주변 심해(深海) 등대 대부분을 건설한 엔지니어 가문이었다. 어머니 집안도 변호사와 교회 목사를 지낸 인물이 많은 명문가였다.
스티븐슨은 어렸을 때부터 기침과 열병을 앓아서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전담 간호사 앨리슨 커닝햄이 붙어 있을 정도였다. 당대에는 결핵이라고 했으나 현대에 들어와서 의학자들은 기관지 확장증(폐의 기도 일부가 영구적으로 커지는 질병) 또는 유육종증(폐, 피부 또는 림프절에서 시작, 덩어리를 형성하는 염증 세포의 비정상적인 집합과 관련된 질병)으로 분석하고 있다.
여섯 살 때 에든버러의 인디아 스트리트에 있는 헨더슨 학교로 보내졌으나 건강 악화로 적응하지 못했고, 11살 때 남학생 사립학교 에든버러 아카데미에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두 학교에 산발적으로 다니면서 개인교사의 교육을 집중 받았다.
이후 1867년 미들섹스(현재 웨스트 런던)의 아일워스 스프링 그로브에 있는 영어 기숙 학교를 거쳐 에든버러의 프레더릭 스트리트에 있는 로버트 톰슨의 사립학교를 다녔다.

2.17~18세 무렵 에든버러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을 다니면서도 학업(변호사가 되기 위한 법률 공부)보다는 The Speculative Society(독점 토론 클럽), 연극, 글쓰기 등에 집중했다.
이 때 공학과 교수였지만 극작가로도 활동했던 헨리 찰스 플리밍 젠킨(leeming Jenkin,1833~1885) 교수, 사촌으로 미술공부를 한 로버트 앨런 모브레이 스티븐슨(Robert Alan Mowbray Stevenson, 1847~1900)과 친하게 교류했다.

3.17살에 개신교 서약파(17세기 장로 교회를 지키기 위해 결성된 스코틀랜드인 집단)를 추종하여 첫 책 ‘펜틀랜드의 봉기(The Pentland Rising-A Page of History, 1666)’를 썼다. 그런데 스티븐슨은 대학에 들어가서 부모의 종교에 반발, 보헤미안을 자처했다.
스티븐슨이 작가로 관심을 받은 것은 1873년에 잡지 포트폴리오(Portfolio)에 쓴 수필, ‘길(Roads)’, 1874년 맥밀런스 매거진(Macmillan's Magazine)에 쓴 ‘질서가 있는 남쪽( Ordered South)’, 그해 포트나이틀리(Fortnightly)에 기고한 평론 ‘리턴 경의 노래 우화집 (Fables in Song) 등이 많이 읽혔기 때문이다.
1873년 말 잉글랜드 서퍽에 결혼해 사는 사촌을 방문했다가 영문학자 시드니 콜빈과 프랜시스 제인 시트웰(나중에 결혼)을 만났다. 시트웰은 스티븐슨보다 7년 정도 연상으로 아들이 있는 34세의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매력과 재능에 빠졌고, 사랑하게 됐다. 하지만 시트웰은 곧 콜빈과 결혼했다.
1875년 7월 변호사 자격을 얻었으나 개업하지 않고, 호흡기 질환 지료를 위해 요양과 여행을 하며 지냈다. 이때의 감상을 쓴 책이 ‘내륙 여행(An Inland Voyage,1878)’, ‘당나귀를 탄 세벤 여행(Travels with a Donkey in the Cévennes,1879)’ 등이다.

4.1875년 무렵 스티븐슨은 기혼 미국인 여성으로 캘리포니아에서 온 패니 밴드그리프트 오스본과 그녀의 두 자녀 벨과 로이드를 소개받는다. 당시 스티븐슨은 스물다섯, 패니는 서른여섯 살이었다. 패니 오스본은 남편과 별거 중이었는데 스티븐슨은 지적이고 독립적인 미국인 ‘신여성’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패니 오스본은 2년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스티븐슨은 부모의 극구 반대에도 1879년 사랑을 찾아 미국으로 갔다. 당시는 글래스고에서 증기선을 타고, 뉴욕으로 가서 다시 기차와 마차, 말을 타고 캘리포니아로 가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스티븐슨을 만난 패니 오스본은 1년 후 남편과 이혼했고, 둘은 샌프란시스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둘은 나파밸리 인근 버려진 은광에 신혼 살림을 차렸다. 이에 스티븐슨의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재정지원을 끊어버렸다. 그러자 다음해 스티븐슨은 아내와 의붓아들 로이드 오즈번을 데리고 아버지를 찾아 스코틀랜드로 왔고, 결국 화해했다.

5.1881년 결핵 치료차 스위스의 다보스에 갔다가 몇 개월 후 스코틀랜드 브래머로 돌아와 여름을 보냈다. 이 때 의붓아들 로이드를 즐겁게 해주려고 쓴 소설이 ‘보물섬’이다. 이 소설은 1881년 10월부터 ‘선박의 요리사(The Sea-Cook)’라는 제목으로 영국 잡지 ‘영 포크스(Young Folks)’지에 연재됐다.
1870년대 중반 사촌 스티븐슨의 소개로 시인·비평가·편집인으로 활동하는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William Ernest Henley,1849~1903)을 만나 오랜 우정을 나눴다. 그런데 헨리가 스티븐슨의 아내가 부정하다는 편지를 보낸 것이 화근이 돼 둘은 싸웠고, 우정은 깨졌다. 헨리는 나중에 스티븐슨이 죽은 뒤에 악의적인 평론을 쓰기도 했다.

6.스티븐슨은 가족들과 1884~1887년 본머스에서 살면서 헨리 제임스(Henry James,1843~1916) 를 만나 사귀었고, 작품도 많이 썼다. 이때 쓴 소설 중 유명한 것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1886)’이다.
요양과 작품 활동을 병행하던 스티븐슨은 1887년 8월 가족(아내, 어머니, 의붓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에서는 유명해진 스티븐슨에게 출판업자들이 좋은 조건의 계약을 제안, 다양한 글을 썼다.

7.1888년 스티븐슨은 요양 겸 유람을 하기 위해 요트를 전세냈다. 그해 6월 가족과 함께 요트 '캐스코'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출발, 남태평양으로 향했다. 스티븐슨 일행은 처음에 마르케사스 제도로 갔다가 타히티로 옮겼다. 그리고 호놀룰루에서 머물렀다. 그러다가 이듬해 6월 사모아로 가서 6주를 보냈다.
유람을 하면서도 작품 활동은 꾸준히 해 썰물 The Ebb-Tide,1894)’ 등을 써서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이후 호주 시드니와 주변 지역을 여행 한 후 1890년 10월 사모아로 돌아와 이미 마련해 놓은 바일리마의 집에서 살기 시작했다.

8.스티븐슨은 바일리마에서 원주민들과 평등하게 지내 존경받으며 살았다. 그곳 기후도 잘 맞아 한결 활동적인 사람으로 살았다.
하지만 죽음은 의외로 쉽게 찾아왔다. 1894년 12월 3일 지하실에서 와인과 마요네즈를 준비하다가 쓰러졌다. 지병인 호흡기 질환이 아니라 뇌출혈이었다. 향년 44세로 허망한 영면이었다. 사모아의 추장들은 스티븐슨을 사모아인들 사이에서 성지로 여겨지는 바에아 산의 정상에 안장했다.

9.스티븐슨의 사망은 문단에 충격을 줬다. 미국 소설가 헨리 제임스(Henry James,1843~1916) 는 갑작스런 비보에 스티븐슨의 사망 소식을 믿지 않았다. 영국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Joseph Rudyard Kipling,1865~1936)은 작가의 요절에 너무 화가 나서 한 달 동안 글을 쓸 수 없었다고 한다.
친구인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1840~1917)이 W.E. 헨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토록 사랑스러웠던 우리의 친구 스티븐슨도 도중에 길을 잃고 영광스러운 이름만 남았습니다!”고 아쉬워했다.
1896년 미완성으로 남긴 ‘허미스턴의 둑(Weir of Hermiston)’이 출판됐다. 군더더기를 뺀 문체로 스코틀랜드 산문의 정수가 담겨 있어 스티븐슨의 걸작으로 꼽힌다.

10.미망인인 캘리포니아 출신의 프랜시스 패니 반 데 그리프트 스티븐슨은 저작권을 물려받아 매우 부유한 여성이 됐다. 샌프란시스코의 러시안 힐(Russian Hill)에 집을 지었고, 산타바바라 근처의 몬테시토(Montecito)에 또 다른 집을 지었다. 또 1900년 산타클라라 밸리에 120에이커의 땅을 구입, 목장을 조성해 ‘사모아 바누마누타기(노래하는 새들의 골짜기 뜻)’이라고 불렀다.이 집은 현재 국립 사적지로 지정돼 있다.
패니는 1914년 사망했고, 많은 재산은 대부분 자녀들에게 돌아갔다. 목장 사모아 바누마누타기는 아들의 친구 에델 헤드라는 여성에게 운영을 맡겼는데, 나중에 둘은 결혼했다.

11.1899년 시드니 콜빈은 스티븐슨의 편지를 편집해 서간집을 냈고, 스티븐슨이 자신의 아내 패니 시트웰에게 보낸 편지를 1949년까지 개봉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스코틀랜드 국립도서관에 기증했다.
친구였으나 사이가 틀어졌던 헨리는 사후에 스티븐슨을 '초콜릿으로 된 천사'라고 비난했다. 시샘많은 아내에게 묻혀 지낸 사람으로 비꼰 것이다.
사후에 호사가들은 스티븐슨에 대해 낙천적인 도피주의자, 행복한 병자, 천한 방탕자,틀에 박히고 모방이나 한 작가, 동화작가 등으로 낮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진면목은 지인들에게 보낸 많은 편지에서 드러났고, 동화소설이나 괴기소설로 폄하했던 그의 소설들도 1950년대들어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12.주요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보물섬(Treasure Island,1883)’, ‘오토왕자(Prince Otto,1885)’,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1886, 중편소설)’, ‘납치(1886)’, ‘카트리오나(1893)’ 등이 있다.
또 단편소설집으로 ‘뉴 아라비안 나이트(1882)’, ‘명랑한 남자들과 다른 이야기와 우화(1887)’도 있다. 이밖에 사모아에서 쓴 논픽션 ‘남쪽 바다에서(1896)’, ‘역사 각주(A Footnote to History)’, ‘사모아에서의 고난(Eight Years of Trouble in Samoa)’ 등도 있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