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제프리 초서
- 명작의 첫 문단
- 연암 박지원
- 팡테옹
- 클리셰 뜻
- 귄터 그라스
- 명작의 첫 문장
- 서긍
- 윌리엄 포크너
- 베르길리우스
- 논술
- 랍비 뜻
- 우암 송시열
- 존 드라이든
- 캔터베리 이야기
- 송강 정철
- 찰스 디킨스
- 헨리제임스
- 에밀 졸라
- 우신예찬
- 명작의 첫문장
- 투르게네프
- 월터 스콧
- 노벨문학상
- 빅토르 위고
- 프란츠 카프카
- 선화봉사고려도경
- 플로베르
- 명작의 첫문단
- 명작의첫문단
- Today
- Total
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채털리 부인의 연인-30년간 판금(販禁) 수난을 겪은 에로티시즘 문학의 정수는 시대 분석으로 시작한다. 본문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의 시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시대를 비극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큰 재해는 이미 닥쳐왔다. 우리는 폐허 한가운데 있으며, 조그마한 새 보금자리를 만들고, 조그마한 새 희망을 품으려 하고 있지만 그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미래를 향하는 평탄한 길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길로 돌아가기도 하고 장애물을 넘어 기어오르기도 한다. 어떠한 재난이 닥치더라도 우리는 살아 나가야 한다./콘스턴스 채털리가 처한 상황은 대체로 이러했다. 전쟁은 그녀의 머리 위에 있던 지붕이 무너져 내리는 것과 같은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사람에게는 살아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녀는 1917년에 클리퍼드 채털리와 결혼했다. 클리퍼드가 휴가를 얻어 한 달 동안 고향에 돌아와 있던 때였는데, 두 사람은 한 달 동안 밀월을 보내고 나서 클리퍼드는 플랑드르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그로부터 여섯달 뒤, 그는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부상을 입고 영국으로 후송되어왔다. 그때 콘스탄스는 스무 세 살이었고, 클리퍼드는 스물 아홉 살이었다.”(이은경 역, 현대문화센타, 2010)

1.첫 머리에 ‘시대’를 ‘비극’으로 규정하고 거창한(?) 철학적 사유로 시작한다. 이에 더해 전지적 시점에서 주인공의 상황도 ‘난관 상태’로 정의한다. 이는 앞으로 펼쳐질 위기와 결말을 예고하는 구성으로 통상적인 소설 작법을 뒤집은 것이라 할 수 있다.특히 대상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훈계를 하는 듯한 문체, 두 개의 ‘귀거래(휴가와 전쟁 부상)’ 대비, 밀월(蜜月-honeymoon 혹은 密月-secret moon)과 같은 중의적 의미의 단어 사용도 눈길을 끈다. 이는 신분 질서의 전복과 나른한 권태의 삶 속에서 본능에 발버둥을 치는 주인공의 행동(진정한 자유로움)을 보여주려는 상징 어법이라고 할 수 있다. 도입부 전체적으로 딱히 어려운 문장이나 난해한 단어가 보이지 않는다. 본문에 나오는 *.플랑드르(Flandre)는 현 벨기에 서부로 1차 세계대전 격전지였다. 플랑드르 뜻은 저지대, 물이 범람하는 땅이다.

2.D. 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Lady Chatterley's Lover,1928)’은 20세기 에로티시즘 문학의 정수(精髓)로 꼽히는 걸작(傑作)이다. 계급과 인습을 뛰어넘는 이야기 전개로 상류사회의 위선에 메스를 가한 불멸의 고전이다. 특히 가장 많은 해적판을 양산한 유명한 금서(禁書)이기도 하다.
저자가 병마에 시달리던 1926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집필을 시작, 1927년 3월에 첫 번째 원고를 완성했다. 그런데 그 원고를 다시 고쳐 쓰기 시작해 같은 해에 두 번째 판본도 완성된다.
하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못해 또 고쳐 쓰다 1928년 1월에 최종본을 탈고한다. 7월에 이탈리아 피렌체의 서점주인 주제페 피노 오리올리(Pino Orioli,1884-1942)의 출판사에서 사실상 자비를 들여 펴냈다. 당시 초판은 200부, 최종적으로 1000부를 발행했다.
한편 첫 번째 원고는 1944년에 ‘채털리 초판본(The First Chatterley)’, 두 번째 판본은 1972년에 ‘존 토머스와 제인 부인(John Thomas and Lady Jane)’이란 제목으로 나오기도 했다.
이 소설은 1929년 프랑스에서 비공식적으로 나왔고, 같은 해 호주의 잉키 스티븐슨(Inky Stephensen)의 맨드레이크 프레스(Mandrake Press)에서도 사적(私的)으로 발행됐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비공식적으로도 나오지 못하다가 로렌스가 영면한 지 2년 후인 1932년 런던에서 소설의 여러 부분이 삭제된 채 ‘영국판 초판본’이 나왔다. 그런데 출판 즉시 적나라한 성행위 묘사가 구설에 올라 결국 판매 금지됐다. 미국에서는 같은 해 알프레드 크누프(Alfred A. Knopf, Inc.)에서 나왔지만 검열을 거친 요약본이었다.
이후 1952년 다시 나왔지만 판금됐다. 이때부터 미국과 영국에서 당국과 출판사(펭귄)의 지리한 재판 끝에 1959년 미국, 1960년 영국에서 승소했다. 펭귄 출판사의 책은 무죄 판결 후 첫날 2만 부가 팔리는 등 3개월 만에 300만 부가 팔렸다. 출판사가 돈방석에 앉은 것이다.
첫 판 이후 각국에서 사적(私的) 출판 형태로 중구난방식으로 나오는 바람에 판본이 역대 어느 책 보다많다. 이에따라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에서는 여러 판본의 문제점을 인식, 1993년 기존 판본의 생략, 탈락, 오타 등 오류를 바로잡은 ‘결정판’ 무삭제 텍스트를 출간했다.

3.이 소설은 시대 상황과 주변 정황,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가 매우 세밀해 실제를 관음하는 듯 할 정도다. 또 내용도 당대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정신과 육체 문제, 산업사회 비판, 노동계급 남성과 상류층 여성 간의 성관계 묘사, 노골적인 성애(性愛) 장면 등이 1차 세계대전 후 겉과 속이 다른 ‘신사의 시대’에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특히 저자 사후 영국 출판 작업 때는 원고 정서(正書)를 여성 타이피스트들이 모두 거부했다. 지나친 성애(性愛) 묘사때문이었다. 그래서 저자의 친한 후배 작가로 유명한 소설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1932)’를 쓴 올더스 헉슬리(Aldous Leonard Huxley, 1894~1963)의 아내 마리아 니스(1919~1955)가 원고를 정서(타이핑) 했다.
4.등장 인물은 여주인공으로 상류 계급 출신 콘스턴스 리드(애칭 코니, 채털리 부인), 남편으로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인물 클리퍼드 채털리 경, 채털리 부인의 언니 힐다 리드, 아버지 맬컴 리드 경 등이다.
또 채털리 부인과 일시적으로 불륜 관계를 한 유명 극작가 마이클리스(별명 믹), 불륜 상대이자 진정한 사랑인 채털리 가문 영지의 사냥터 지기 올리버 멜러즈, 그의 별거 중인 아내 버사가 나온다. 이밖에 클리퍼드의 유모이자 간병인인 볼튼 부인, 채털리 부인의 친구 미스 워터즈, 신부 테즈데일 등도 나온다.

5.줄거리는 20세기 초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신사들의 시대에 채털리 부인의 불륜,진정한 사랑을 통해 영국 지배 계급의 위선과 성(性) 억압에 반기를 들면서 인간다움을 찾는다는 이야기다.
상류 계급 출신으로 교육도 받고 연애도 자유롭게 했던 여인 콘스턴스 리드(채털리 부인)는 1917년 1차대전 와중에 상류 귀족의 아들 클리퍼드와 결혼한다. 한 달 간의 신혼 생활 후 영국군에 입대한 클리퍼드는 벨기에 전선에 배치되지만, 전쟁이 끝나갈 무렵, 부상으로 다리를 다치고 성불구가 되어 돌아온다.
클리퍼드의 아버지는 아들이 장애인이 되자 울화병으로 사망하고, 클리퍼드는 남작 작위를 계승, 채털리 경이 되고, 코니는 채털리 부인이 된다.
클리퍼드는 육체적 관계보다 정신적 통제와 질서가 우월하다고 주장하며 아내 코니와 맞춰 살려고 노력한다. 코니도 이런 남편을 어떻게든 사랑해보려고 하지만 꿈틀거리는 욕구를 이겨내지 못한다. 그래서 코니는 주변의 지성적 남성들에게 끌리어 관계를 맺기도 하지만 만족하지 못한다.
그런 코니에게 집 근처에서 만난 채털리 가문 영지 사냥터 지기 멜러즈는 전혀 다른 남자로 다가온다. 자연과 어우러지는 멜러즈에게서 살아 있는 존재가 주는 감동을 느낀다. 코니와 멜러즈는 이후 숲 속에서 만나 성적 결합(불륜 관계)을 하고, 둘은 더 깊은 정신적 육체적 관계에 빠져든다. 결국 영지와 마을에는 둘의 염문이 퍼진다.
그런데 코니는 멜러즈의 아이를 임신한 것을 확인한다. 이에 코니는 클리퍼드와 결별을 결심한다. 하지만 클리퍼드는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아이를 채털리 가문의 아이로 키우겠다고 한다. 이에 코니는 이혼을 서두르고, 둘은 이혼 소송이 마무리될 때까지 서로 헤어져 있기로 한다. 멜러즈는 재회를 기다리며 코니에게 편지를 쓴다.
(참고로 그 편지의 마지막 문단도 압권이다. “우리는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요. 존 토머스(남성성)가 제인부인(여성성)한테 잘 자라고 인사를 하는군. 좀 축 늘어진 모습이지만 희망에 찬 마음으로 말이오.”)

6.저자는 나중에 이 소설이 외설(猥褻) 논쟁에 휘말릴 것을 우려했다. 당대 신분 질서를 뒤집는 하류인생과 상류계급의 불륜, 노골적 성애 묘사가 영국과 미국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걱정한 것이다.
저자는 1930년 사망 직전 친구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때를 가리지 않고 하는 난잡한 섹스보다 나를 더 구역질 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 내가 방탕한 성행위를 조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다니 그건 당치않은 소리 입니다"고 썼다. 당시 해적판이 많이 나오면서 논란이 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우려는 현실이 됐다. 주류 사회는 외설보다 ‘질서의 전복’를 걱정한 나머지 ‘많은 삭제를 거친 원고’가 1932년 출판된 직후 외설을 이유로 판금 조치를 내렸다. 이후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과 미국에서 다시 많은 부분이 삭제된 채 출판(1952년) 됐으나 또 판매 금지됐다.
이후 외설이냐, 표현의 자유냐로 지리한 소송이 이어졌다. 영국에서는 1959년 ‘외설출판법(Obscene Publications Act)’까지 제정됐다. 미국에서는 그로브 출판사(Grove Press)가, 영국에서는 펭귄출판사가 소송을 벌였다.
재판에는 저명 작가인 E.M. 포스터(Edward Morgan Forster, 1879~1970)와 여성 영문학자이자 비평가 헬렌 가드너(Helen Louise Gardner,1908~1986), 영문학자이자 대중문화에 문화비평가 리처드 호가트(Herbert Richard Hoggart, 1918~2014), 소설가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Henry Williams, 1921~1988), 영국 하원 원내표이자 변호사 노먼 세인트 존 스테바스(Norman Antony Francis St John-Stevas, 1929~2012) 등이 배심원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저자 사후 거의 30년이나 지난 1959년 미국에서 무죄가 나왔다. 또 영국에서 1960년 11월 2일 승소했다. 오랜 외설(猥褻)과 예술(藝術) 논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이에따라 1960년 무삭제 원고 판권을 가진 펭귄이 무수정 버전를 출판했다. 영국에서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식 공개된 것이다. 펭귄은 1961년 나온 두 번째 판본에서 '무죄'라는 평결을 내린 12명의 배심원(여성 3명과 남성 9명)에게 판본을 헌정했다.이 재판은 2006년 BBC 웨일스에 의해 ‘채털리 사건(The Chatterley Affair)’이라는 제목으로 드라마로 방영됐다.

7.다른 나라도 판금됐다. 호주에서는 이 소설과 영국의 재판을 묘사한 ‘채털리 부인의 재판(The Trial of Lady Chatterley)’도 판금조치했다. 그런데 1965년 알렉산더 윌리엄 셰퍼드(Alexander William Sheppard), 레온 핑크(Leon Fink), 켄 버클리(Ken Buckley) 등이 영국판을 국내로 1만부를 밀반입, 전국에 판매했다.
결국 이런 영향으로 그해 7월 ‘채털리 부인의 연인(Lady Chatterley's Lover)’과 ‘보르스탈 보이(Borstal Boy)’, ‘청춘의 고백(Confessions of a Spent Youth)’, ‘롤리타(Lolita)’에 대한 판금령이 해제됐다.
일본에서는 이 책를 둘러싸고 1950년부터 무려 7년 동안이나 법정 공방이 벌어졌다. 결국 출판사와 역자가 재판에서 패소해 외설물 판매 혐의로 출판인 코야마 규지로(Kyujiro Koyama), 번역을 한 이토 히토시(Ito Hitoshi) 등이 처벌받았다. 두 사람 모두 형법 제175조에 따라 외설죄 조항을 적용받았다. 한편 인도에서도 대법원에서 ‘외설적’이라고 판결, 판금됐다가 풀렸다.
8.세계 각국의 판매 금지에도 불구 문단에서는 호평했다. 미국의 저명한 문예평론가로 문학계를 주도했던 에드먼드 윌슨(Edmund Wilson, 1895~1972)은 “이제껏 영어로 쓰인 작품 가운데 성적 묘사가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또 노벨문학상(2007) 수상 작가인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1919~2013)은 ““이제껏 로렌스만큼 성(性)과 사랑의 힘 다툼을 제대로 표현해 낸 작가는 없었다”며 “역사상 아주 강력한 반전(反轉)소설”이라고 평가했다.

9.영화 드라마로도 많이 나왔다. 1955년에 개봉한 프랑스 드라마 영화 ‘채털리 부인의 연인(L'Amant de lady Chatterley, 감독 마르크 알레그레)’은 소설이 다시 화제가 된 계기가 됐다.
영국에서 1993년 BBC 드라마 4부작 ‘채털리 부인의 연인(감독 켄 러셀)’으로 방영됐다. 숀 빈(Shaun Mark Bean, 1959~현재)이 사냥터 지기 올리버 멜러즈로 나온다.
가장 유명한 영화는 1970년대 섹스 심벌인 여주인공 네덜란드 출신 여배우 실비아 크리스텔(Sylvia Kristel, 1952~2012)이 나오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감독 쥐스트 자캥, 1981)’이다. 실비아 크리스텔의 백치미가 압권으로 소설 속 여주인공 코니(채털리 부인)와 가장 잘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국에서 BBC TV 영화(2005)가 나왔다. 2006년 벨기에와 프랑스, 영국합작 영화 ‘레이디 채털리(Lady Chatterley, 감독 파스칼 페랑, Pascale Ferran,1960~현재)’로 나왔다.

가장 최근에는 2022년 로르 드 끌레르몽-토네르 감독의 넷플릭스 영화로 방영됐다. 영국 배우 엠마 코린(Emma-Louise Corrin, 1995~현재)이 채털리 부인, 잭 오코널(Jack O'Connell, 1990~현재)이 연인 올리버 멜러즈 역, 언니 힐다 역으로 조엘리 리처드슨(Joely Richardson, 1965~현재)도 나온다.
2015년에는 제드 머큐리오 감독이 홀리데이 그레인저(Holliday Grainger, 1988~현재), 리처드 매든(Richard Madden, 1986~현재), 제임스 노튼(James Norton, 1985~현재)을 내세워 BBC 텔레비전 영화로 공개했다.
소설 속 내용을 패러디한 영화는 스티븐 달드리(Stephen Daldry, 1960~현재) 감독의 ‘더 리더(The Reader, 2008, 케이트 윈슬렛,Kate Winslet 주연)’가 나왔고, 2018년에는 KBS2 TV에서 이 소설의 제목을 딴 한국의 아침 드라마 ‘차달래 부인의 사랑’도 있다.

9.한국에서 1980년대 초부터 나온 수많은 에로 영화의 클리셰(cliché, 판에 찍은 듯한 표현, 영어로는 스테레오 타입,stereotype)였다. 특히 실비아 크리스텔(Sylvia Kristel, 1952~2012)이 나오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클리셰의 원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시작은 정인엽(1942~현재) 감독이 여배우 안소영(1959~현재)를 내세워 만든 ‘애마부인(Madam Aema, 1982)’ 이다.
한국에서 채털리부인의 연인이 첫 번역된 것은 1952년이다. 조규동이 일본어를 중역한 것으로 ‘챠타레이 부인의 사랑(학원출판사)’이다. 책이 제대로 완역된 것은 1984년 학원사 판본(이동선 역)이다. 같은 번역자의 1955년 판(동명문화사) 도 있다.

이후 제목에서 ‘사랑’이 아닌 ‘연인’을 처음으로 쓴 ‘차털리 부인의 연인(문일영, 오정환 역)’이 1964년 동방사에서 나왔다. 이후 1970년대까지 10권이나 더 나왔다. 1985년에는 태일출판사에서 ‘차달레 부인의 사랑(정철훈 역)’으로도 나왔다.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David Hervert Lawrence, 1885~1930)=영국의 소설가, 시인 겸 비평가. 해적판 소설이 가장 많은 작가. 마지막 장편소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사후 30년 만에 무삭제 발매됐다.
1.영국 노팅엄 이스트우드 탄광마을 빅토리아 스트리트 8a(현재 박물관)에서 광부인 아버지 아서 존 로렌스(Arthur John Lawrence)와 교사인 어머니 리디아 비어드솔(Lydia Beardsall)의 넷째로 태어났다.
여섯 살때부터 7년동안(1891~1898) 부발보드스쿨(Beauvale Board School, 현 그래즐리 부발 DH로렌스 초등학교)를 다녔다. 이후 카운티 의회 장학금을 받은 최초의 지역 학생으로 노팅엄 고등학교 졸업했다.

2.중류계급 출신의 어머니 리디아는 교양 없는 광부 남편 사랑보다 자식 교육에 집중했다. 특히 자식에게는 연애에 가까운 사랑을 쏟았다. 로렌스는 고교 졸업 후 인근에 있는 헤이우드 수술 기구 공장에서 3개월 동안 일하다가 폐렴으로 그만뒀다.
이후 1902~1906년 고향 이스트우드에 있는 학교에서 학생 겸 교사(자격증 없는 비정규직)로 일했다. 그런 가운데 고학으로 노팅엄의 유니버시티 칼리지(당시 런던 대학교 외부 대학)에서 1908년 교사 자격증을 받았고, 재학 중 첫 소설 ‘백공작(白孔雀, The White Peacock,1911)’를 출판했다.
이 해에 로렌스는 런던 교외의 크로이던으로 가서 교직 생활을 하면서 1911년 출판업자이자 독자 역할을 한 에드워드 가넷(Edward Garnett,1868~1937, 영국 문학평론가)을 소개받았다. 가넷은 로렌스의 멘토 역할을 할 정도로 친했다. 하지만 그해 말 다시 폐렴에 걸렸고, 이듬해 교직을 그만뒀고, 어머니도 사망하는 아픔을 연이어 겪었다.

3.로렌스의 첫 여인은 로렌스 가족의 친구인 챔버스 집안의 딸 제시 챔버스(Jessie Chambers)였다. 둘을 열여섯 무렵 불같은 관계였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이후 노팅엄과 이스트우드에서 지내던 시절의 오랜 친구인 루이 버로우스(Louie Burrows)와 1911년 무렵 약혼했다.
그런데 1912년 2월 로렌스가 약혼을 파기할 정도로 사랑하는 뮤즈가 나타났다. 뮤즈는 뜻밖에도 대학 스승의 아내이자 6살 연상인 독일 귀족 폰리히트호펜 가문 출신의 여인 프리다 폰 리히트호펜(Frieda von Richthofen,1879~1956, 약칭 프리다)이었다.
프리다는 노팅엄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현대 언어 교수였던 유명한 문헌학자 어니스트 위클리(Ernest Weekley, 1865~1954)와 결혼, 세 명의 어린 자녀를 둔 유부녀였다. 3명의 자녀는 찰스 몬태규(Charles Montague, 1900년 생), 엘사 아녜스(Elsa Agnès, 1902년 생), 바바라 조이(Barbara Joy, 1904년 생)이었다.
둘은 결국 독일 프리다의 부모 집인 알자스-로렌 메스(현재 프랑스 그랑에스트)로 사랑의 도피 행각을 했다. 프리다는 결국 남편 어니스트 위클리와 이혼했다. 로렌스와 프리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영국으로 돌아와 1914년 7월 13일 법적으로 결혼했다.
그런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영국 당국이 프리다를 독일 스파이로 의심하면서 기소하는 상황에 처하자 둘은 해외로 나갔다. 이탈리아 등을 떠돌면서 소설 등 작품 활동을 한 것이다.

4.로렌스는 1913년 ‘아들과 연인’를 출판했는데 노골적 묘사 등으로 상당부분이 삭제된 채 나왔다. 이 책이 무삭제로 나온 것을 그로부터 80년이 지난 1992년이었다.
1915년 나온 ‘무지개(The Rainbow)’ 역시 성(性) 묘사가 문제돼 곧 발매 금지당했다. 1920년에는 예약 한정판으로 ‘사랑에 빠진 여인(Women in Love)’을 냈다. 이 책 역시 논란 끝에 외설로 출판금지됐다.
로렌스는 소설 ‘사랑에 빠진 여인’을 1916~17년 동안 콘월의 한 농가에서 작업했는데 윌리암 헨리 호킹(William Henry Hocking)이라는 농부와 낭만적 관계라는 소문이 많았다. 부인 프리다 역시 그 둘의 관계가 ‘성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콘월에서 지낼 때는 부인 프리다의 독일 귀족 혈동과 로렌스의 군국주의 경멸 등이 당국의 의심을 샀고, 결국 콘월 해안에서 독일 잠수함을 염탐하고 신호를 보낸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물론 국토방위법(Defence of the Realm Act)에 따라 콘월을 떠나야 했다.

5.로렌스 부부는 1919년 11월 결국 영국을 떠나 이탈리아 중부의 아브루초 지역으로 갔고, 이후 시칠리아, 카프리, 폰타나 베키아, 사르데냐, 몰타, 북부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남부 독일 등을 전전했다. 그런 후 1922년 2월 말 미국으로 이주하기 위해 인도양의 실론을 거쳐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갔다.
로렌스 부부는 마침내 1922년 9월에 미국에 도착했고, 시인 위터 빈너와 그의 연인 윌러드 존슨의 소개로 뉴멕시코 주 타오스로 향했다. 타오스에서는 저명한 사교계 명사인 메이블 닷지 루한(Mabel Dodge Luhan, 1879~1962, 미국 예술계 후원자) 등을 만났다. 이때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1932)’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1894~1963)가 방문했다.

6.로렌스는 1925년 3월 멕시코를 방문하던 중 말라리아와 결핵으로 죽을 위기에 처했다. 요양 끝에 어느 정도 회복은 됐지만 병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에 로렌스 부부는 유럽으로 건너와 이탈리아 피렌체 북부에 집을 마련했다.
이곳에서 쓴 책이 ‘처녀와 집시’,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다. 이탈리아에 살면서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1894~1963)와 특히 가까이 지냈고, 많은 시을 쓰고 유화(그림)을 그렸다.
그림에도 솜씨가 있던 로렌스는 1929년 중반 런던 메이페어 워렌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었는데 경찰의 급습을 받아 여러 작품이 압수됐다.
7.로렌스의 마지막 작품은 ‘요한계시록(Book of Revelation)’이었다. 묵시록에 대한 성찰, 그것이었다. 로렌스는 1930년 초부터 병세가 급격히 악화해 2월에 프랑스 남동부의 프로방스-알프-코트 다쥐르 (Provence-Alpes-Côte d' Azur) 지역의 알프 마리 타임 (Alpes-Maritimes)의 언덕에 위치한 마을 방스(Vence)에 있는 애드 아스트라 요양원에 들어갔다.
이때 ‘타임 머신’, ‘투명인간’ 등을 써서 '과학 소설의 아버지'로 불리는 H. G. 웰스(Herbert George Wells, 1866~1946)와 올더스 헉슬리를 포함한 영국 친구들의 위로 방문을 받았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3월1일 요양원에서 퇴원한 로렌스는 마을에 있는 셋집인 빌라 로베르몽으로 이사했다. 그런 다음날 영면했다. 향년 45세. 사인은 결핵 합병증이었다. 다음날인 3월4일 지역 묘지에 묻혔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아들과 연인(Sons and Lovers)’, ‘무지개(The Rainbow)’, ‘사랑에 빠진 여인(Women in Love)’, ‘채털리부인의 연인(Lady Chatterley's Lover)’ 등이 있다. 단편 ‘처녀와 집시(The Virgin and the Gypsy)’는 사후 중편소설로 출간됐다. 시도 거의 800편 있으며, 그림도 많이 그렸다.

8.로렌스 사후 애석해 하는 이들이 많았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E. M. 포스터(Edward Morgan Forster,1879~1970, 저서 ‘인도로 가는 길’)는 사망 직후 "우리 세대의 가장 위대한 상상력이 풍부한 소설가"로 묘사했다.
오랜 친구인 스코틀랜드 전기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캐서린 카스웰(Catherine Roxburgh Carswell, 1879~1946)은 3월16일에 발행된 정기 간행물 ‘타임 앤드 타이드’에 보낸 편지에서 “로렌스는 악덕이 없고, 대부분의 인간적 미덕을 지녔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 꼼꼼하고 정직한 시민”이라며 “문명의 족쇄와 문학적 파벌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영국의 저명한 문학 평론가 F. R. 리비스(Leavis, 1895~1978)는 “예술적 성실성과 도덕적 진지함이 있는 작가”라며 “ 영국 소설의 전통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옹호했다.
9.로렌스가 사망한 후 얼마 있다가 부인 프리다는 자서전 격 책인 ‘로렌스, 내가 아니라 바람(Lawrence, Not I But the Wind,1935)을 썼다.
프리다는 이후 한때 불륜관계에 있었던 안젤로 라발리(Angelo Ravagli,1891~1976, 이탈리아 장교출신 )의 편지를 받았다. 라발리는 아내와 자녀 셋이 있는 유부남이었으나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프리다는 라발리를 만났고, 뉴멕시코 타오스로 이사했다. 둘은 1950년 결혼했다.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등 친구들은 프리다의 ‘혼자 남겨졌을 때의 극도의 무력감’을 이해했고, 놀라지도 않았다고 한다.
앞서 1935년 라발리는 프리다를 대신해 로렌스의 시신을 발굴, 화장하도록 주선했다. 그리고 유골을 미국으로 가져가기 위해 배에 올랐으나 ‘유골 세금’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지중해에 유골 대부분을 뿌렸고, 일부만 가져와 뉴멕시코 타오스 목장에 안장했다.

10.고향인 이스트우드에서 2008년부터 매년 ‘D.H 로렌스 페스티벌’이 열린다. 또 2016년 9월에는 로렌스와 잉글랜드 콘월의 마을 제너(Zennor)의 인연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가 열렸다
로렌스의 논픽션 전기 ‘사랑의 사제’를 기반으로 한 영화가 1981년 동명으로 나왔다. 이안 맥켈런(Ian McKellen)이 로렌스(Lawrence) 역으로 출연했다.
로렌스를 소재로 한 뮤지컬도 만들어졌다. ‘로렌스–스캔들! 검열! 금지!’라는 뮤지컬이다. 2009년 ‘ Marquee Theatre Award’ 최우수 오리지널 뮤지컬 부문 수상했. 런던에서는 2013년 10월 브라이드웰 극장에서 초연됐다. 한편 2020년에는 한국에서 서울대 명예교수 백낙청(1938~현재)이 쓴 ‘서양의 개벽 사상가 D. H. 로런스(창비)’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