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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통속 소재가 세계 문학사의 걸작이 된 소설 첫 문단은 난삽한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본문
제1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제1편 어느 작은 집안의 내력 1.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
"알렉세이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는 우리 군(郡)의 지주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의 셋째 아들이었는데, 이 지주로 말하자면 정확히 3년 전에 맞이했던 그의 비극적이고도 음침한 최후로 인해 당시에는 어지간히 유명했던 인물로(하기야 우리 고장 사람들은 지금도 회상하곤 한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앞으로 적당한 대목에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지금 바로 이 '지주'(그가 자신의 영지에서 산적은 평생토록 거의 없었지만 우리 고장에서는 그를 그렇게 불렀다.)에 대해 말해두려는 것은 그저, 그가 괴상하지만 주위에서 꽤나 자주 마주치게 되는 유형, 즉 너절하고 방탕할 뿐만 아니라 아둔해빠진 인간 유형-그러나 자신의 재산과 관련된 자질구레한 일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처리할 줄 알고, 오로지 이런 일 하나만 할 줄 아는 듯 싶은 그런 자들에 속하는 유형이었다는 점이다.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그 예로, 거의 무일푼으로 시작한데다 지주라고 해봐야 가장 보잘 것없는 소지주에 지나지 않아 남의 집 식탁을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식객 자리나 노리고 살았지만, 정작 최후를 맞이한 순간에 보니 그에겐 10만 루블이나되는 돈이 현찰로 있었다. 동시에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평생 우리 군 전체에서 가장 아둔한 반미치광이 중 하나이기도 했다."(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저, 김희숙 역, 문학동네, 2018)
1.현기증 나는 첫 문단이다.문체와 문자 구성의 어지러움이라고 할 정도로 난삽하다. 치밀한 플롯에도 불구, 문장 하나하나가 너무 길어 읽기에 불편할 정도다. 원작자의 의도를 거스르더라도 번역을 할 때 과감하게 끊어서 문장을 구성했으면 어땠을 까 할 정도로 가독성이 떨어진다. 번역의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해서인지 쉼표도 너무 많다. 러시아 대문호 레흐 톨스토이가 이 소설을 읽고 문체에 대해 투덜거릴만 할 정도의 난삽한 문장이긴 하지만 번역에서 과감한 첨삭이 필요했다. 문체의 난삽함은 흠이라 할 수 있지만 독자의 주목을 받게 하는 수전노(守錢奴, 돈을 지키는 노예) 지주에 대한 설명은 흥미로운 시작과 도입부다. 소설 속 3인칭 내레이터가 작품 속에 직접 뛰어들 것같은 묘사,사실주의에 입각한 치밀한 설명은 눈길을 끈다. 첫 문단을 시작하기 전 소제목에 나오는 '요한복음 12:24(첫 머리 문장 포함)'는 저자가 사망 직전 유언처럼 한 말이기도 하다. 소제목에 나오는 요한복음( John福音,Gospel According to John)은 예수 제자 중 최연소이자 가장 오랫동안 산 사도(使徒) 요한(John the Apostle, Joannes, AD 6~100,예수가 뽑은 12사도 중 한 사람)이 쓴 것으로 추정하는 복음서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성품을 강조한 가스펠이다. 사도 요한은 이름인 존·요한·조반니·요하네스·장·이반 등과 도시인 세인트존·세인트존스·요하네스버그, 대학인 세인트 존스 대학교와 세인트 존스 칼리지 등의 유래다.
본문에 나오는 지주는 地主-땅주인이고, 식객은 食客-음식을 얻어먹는 손님이다.
2.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Братья Карамазовы, Bratya Karamazovy), The Brothers Karamazov, 1880)'은 세계 문학사의 가장 뛰어난 업적중 하나로 불멸의 걸작이다. 저자의 마지막 소설이자 최고의 소설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저자의 철학적 문학적 정수를 집약, 삶의 근본 문제인 '실존(實存)'으로 연결한 명작이다. 러시아 월간 문학 및 사회 정치 잡지 '러시아 회보(Russian Bulletin,1856 창간 1906 폐간)'에 1879년 1월부터 1880년 11월까지 연재됐다가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저자는 작품을 2부작으로 구상했으며, 20년이 지난 시점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후속작을 쓸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출간한 지 3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 2부는 1866년 발생한 러시아 제국 제12대 황제 알렉세이 알렉산드르 2세(Aleksandr Nikolayevich Romanov, 1818~1881) 암살 미수 사건(1866년 발생-나중에 처형당한 범인은 드미트리 카라코조프, Dmitry Karakozov,1840~1866)이 모티브였지만 빛을 보지 못했다. 사실상 미완성작인 셈이다.
영어 첫 번역은 미국 여류 작가이자 번역가 이사벨 플로렌스 햅굿(Isabel Florence Hapgood, 1850~1928)이 했고, 1905년 출판됐다. 이어 19세기 러시아 문학 영어 번역의 달인 콘스턴스 클라라 가넷(Constance Clara Garnett,본명은 Black , 1861~1946)이 했는데 '가장 적절한 번역'으로 평가받는다. 영국 작가 W. 서머싯 몸은 '세계 최고의 소설 10권' 목록에 포함했다.
3.4부 12편으로 구성된 소설은 철학적인 전개에 가깝지만 돈, 치정, 친부(親父) 살해 같은 선정적이면서도 통속적인 소재를 리얼리즘 사조에 맞춰 썼다. 죄와 신(神), 신념에 대한 것이 종교, 철학, 심리 등 형이상학적인 주제와 어우러져 명작으로 탄생했다.
소설 모티브는 저자가 8년동안 시베리아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들었던 이야기다. 유산때문에 친부를 살해한 귀족 남자의 이야기였는데 나중에 밝혀진 범인은 남자의 약혼녀를 사랑했던 동생의 소행이었다. 저자는 이를 틈날 때마다 보충하고 메모해 30여년이 지난 말년에 소설로 썼다.
실제 저자는 1878년 5월 아들의 죽음이후 코젤스크 근처에 있는 동방 정교회 남성 수도원 옵티나 수도원(Optina Pustyn, 뜻은 은둔처)에 갔고, 그곳에서 여러 영감을 받아서 자신이 메모해 두었던 것과 합쳐 소설로 승화했다. 도시 배경은 저자가 한때 머물렀던 러시아 노브고로드주의 작은 도시 스타라야 루사(Staraya Russa)이다. 한편 소설이 나온 이후 '카라마조프적(Karamazovshchina)'이라는 말이 생겼다. '카라마조프쉬나'는 카라마조프 집안의 특성들을 의미하는 단어다. 상징주의자들이나 소비에트 학자들이 '러시아 사회의 묵시록적인 혼돈'을 상징하는 말로 썼다.
4.주인공으로 호색한(好色漢, Pervert)이자 수전노(守錢奴, 돈을 지키는 노예)인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Fyodor Karamazov)는 실존 인물에 가깝도록 묘사했다. 1860-1880년대 러시아 여성 운동의 지도자 안나 파블로브나 필로소포프(결혼 전 Diaghileva,1837~1912)의 시아버지 드미트리 니콜라비치 필로소포프(Dmitry Nikolaevich Filosofov)이다. 여권운동가 안나는 드미트리 아들로 러시아 제국 최초의 군검사였던 블라디미르 드미트리비치 필로소포프(Vladimir Dmitrievich Filosofov,1820-1894)와 결혼했다.
다른 등장인물은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의 첫째 아들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Dmitry, 미카, 미첸카, 미치카), 둘째아들 이반(Ivan, 바냐, 바넨치카, 반카), 세째아들 알렉세이(Alexei,알료샤, 알료쉬카, 알렉세이크, 료셰치카, 알료센카, 알료셰치카), 표도르의 전처 아젤라이다 이바노브나 미우소바(Adelaide Miusova, 드미트리 어머니), 표도르의 후처 소피아 이바노브나(Sophia, 이반과 알렉세이 어머니)가 나온다.
또 표도르의 집사이자 요리사 파벨 표도로비치 스메르쟈코프(Smerdyakov, 리자베타 스메르쟈샤야라는 거지 여인 아들), 표도르의 하인 그리고리 바실리예비치 쿠투조프와 아내 마르파 이그나치예브나, 드미트리의 약혼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베르호프체바(Katerina-카첸카, 카챠,카치카) 등도 있다.
이어 미인 고리대금업자 아그라페나 알렉산드로브나 스베틀로바(Grushenka Svetlova, 그루셴카, 그루샤), 미하일 라키친(Rakitin, 본명은 미하일 오시포비치 라키친. 애칭 미샤, 신학교를 나온 학생), 젊고 부유한 지주의 미망인 카체리나 오시포브나 호흘라코바와 딸 리자베타(리즈, 리자), 조시마 장로(Zosima, 알료샤의 스승), 퇴역한 이등 대회 니콜라이 일리치 스네기료프, 13세 소년 유복자 콜랴(Kolya Krasotkin, 본명은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크라소트킨), 젊은 예심 판사 니콜라이 파르표노비치 넬류도프, 그루센카의 첫사랑, 비열한 폴란드인 무샤로비치 등도 나온다. 한편 등장인물중 셋째아들 알렉세이는 1878년 요절한 저자 어린 아들 이름에서 따왔다.
5.줄거리는 제정 러시아 시대인 19세기 후반 소도시의 한 지주(地主) 집안(카라마조프 가문)에서 일어난 존속 살해 사건을 통해 신의 존재, 죄와 벌을 묻는 이야기다. 탐욕과 방탕, 인색하기까지 한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와 세 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살인과 치정 사건이다.
지주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집에 10대 후반에 나간 아들들이 20여년 만에 찾아온다. 지주 표도르가 나몰라라했던 드미트리(첫 부인 아들), 이반과 알렉세이(두번째 부인 아들들)다. 이들의 방문은 아버지와 재산 문제를 담판 짓겠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집에 온 아들들의 '사랑'이 얽히고 설킨다. 큰 아들 드미트리는 호색한 아버지가 점찍어 둔 여자에게 홀딱 빠진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둘째 아들 이반은 형 드미트리의 약혼녀를 사랑한다. 신실하고 어진 청년 셋째 아들 알렉세이는 아버지와 형들의 얽힌 애정 곡예를 안타깝게 지켜본다. 여기에 하인이지만 아버지 표도르의 사생아로 여겨지는 스메르쟈코프가 끼어든다.
시간은 흐르지만 수전노 아버지의 재산 분배는 갈수록 멀어진다. 재산을 주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지수가 올라간 큰 아들 드미트리는 공공연하게 아버지를 죽여 버리겠다고 한다. 둘째아들 이반 역시 아버지를 향한 증오와 혐오가 깊어만 간다.
그런 어느날 밤 아버지 표도르가 시체로 발견된다. 누군가의 탐욕과 분노가 아버지를 살해한 것이다. 그런데 진범은 오리무중이다. 표도르의 사생아로 여겨지는 하인 스메르자코프가 둘째 아들 이반과 짜고 아버지를 의하에 표도르를 살해했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증거는 없다. 오히려 정황은 큰 아들 드미트리에게 집중되고 결국 진범으로 유죄 판결(시베리아 20년 중노동)을 받는다. 그러나 진범은 스메르자코프이며, 묵매 자살한다.
6.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나오자 마자 호평을 받았고, 유럽에 알려지면서 격찬이 이어졌다. 독일계 스위스인으로 '데미안'의 저자 헤르만 헤세(Hermann Karl Hesse, 1877~1962)는 "한 인간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창조해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이제 이토록 그 일은 일어났고, 여기에는 그 어떤 설명조차 필요치 않다"고 격찬했다.
미국 소설가 조이스 캐럴 오츠(Joyce Carol Oates,1938~현재)는 "창작자의 내면에 있는 온갖 모순과 동요를 도스토옙스키보다 탁월하게 입증해낸 작가도 없다"며 "소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만큼 이를 경이롭게 구현해낸 작품 또한 없다"고 역설했다. 1949년 노벨상 수상자인 미국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William Cuthbert Faulkner,1897~1962)는 "이 책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정기적으로 다시 읽었고,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성경 다음으로 가장 큰 문학적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벨기에 시인이자 상징주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에밀 베르하렌(Emile Verhaeren,1855~1916)은 "도스토옙스키의 모든 소설 중에서 자신이 '카라마조프 가 형제들'에 가장 매료되었다"고 말했다. 2006년 노벨상 수상자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Ferit Orhan Pamuk, 1952~현재)은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처음 읽은 후 인생이 바뀌었다"고 칭송했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Murakami Haruki, 1949~현재) "소설가로서 궁극적으로 쓰고 싶은 건 '종합 소설'이다. 이를 정의 내리기란 어렵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바로 그 예다"고 강조했다.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1951)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대해 "너무 자주 읽어서 그 책의 모든 구절을 암기했다"고 고백했다. 비트겐슈타인은 1차 세계대전 징집 때 책을 가져가기도 했다.
오스트리아의 세계적인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지금까지 쓰인 가장 위대한 소설"이라고 호평했다.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 도스토옙스키와 아버지 살해 "(독일어: Dostojewski und die Vatertötung) 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는데, 이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대한 학술 모음집이다.
역사가 보리스 일리자로프에 따르면 스탈린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여러 번 읽었다고 한다 .
7.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대해 수많은 문호와 지성인의 격찬에도 불구 반감을 이야기하는 이들도 많았다. 낭만주의 시대의 러시아 작곡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893)는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은 후 "도스토옙스키는 천재 작가이지만, 반감(反感)적인 작가"라고 말했다.
이밖에 미국 출신으로 말년에 영국으로 귀화한 '여인의 향기', '나사의 회전'의 작가 헨리 제임스(Henry James OM, 1843~1916), 러시아 출신 망명 작가로 영어로 소설을 쓴 '롤리타'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1899~1977) , 영국 소설가이자 비평가로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쓴 DH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 1885~1930) 등도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문학성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미국 유명 문학 평론가로 20세기 최고의 비평가로 평가받는 해럴드 블룸(Harold Bloom, 1930~2019, 전 예일대 교수)은 "도스토옙스키의 천재성은 종교적 색채를 드러낼 때 그 빛을 잃고 만다. 이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결점이기도 하다"며 소설 속에 나오는 신앙(러시아 정교회 색채) 문제를 지적했다. 블룸은 이어 "도스토옙스키 신앙은 민족주의적인 해독이자 지성인으로서 질병"이라며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신앙과 반 계몽주의)이 뒤틀렸다"고 비판했다. 다만 블름은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자체는 흥미롭다"고 말했다.
8.영화로는 처음으로 1915년 러시아에서 무성영화 '카라마조프 형제들'로 나왔다. 키예프 출신 러시아 영화감독 빅토르 투르잔스키(Vyacheslav Konstantinovich Turzhansky,1891~1976)가 제작했으나 필름은 전하지 않는다. 독일에서 1920년과 1930년에 두번 제작됐고, 프랑스에서는 1931년 나왔다. 이어 이탈리아에서 1947년, 미국에서 1958년, 영국에서 1965년 나왔다.
2009년에는러시아에서 12부작으로 제작돼 반영됐다. 2013년 일본에서는 TV 드라마 '카라마조프의 흉가'가 나왔다. 현대 일본을 배경으로 소설을 각색한 것이다. 가장 최근 나온 예술 작품은 러시아에서 나온 발레 영화 '카라마조프 형제들'이다. 보리스 야코블레비치(얀켈레비치) 에이프만(Boris Yakovlevich (Yankelevich) Eifman, 1946~현재)이 감독했다.
미국 유명 섹스 심벌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1926~1962)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며 그루센카(아버지 표도르와 아들 드미트리가 동시에 사랑한 여인)역에 자신이 잘 어울릴 것 이라고 말한바 있다. 미국 배우 니콜라스 케이지(Nicolas Cage, 1964~현재)는 "(큰 아들)드미트리 카라마조프가 자신이 문학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라고 말했다.
한편 2018년에는 소설의 대부분이 집필된 러시아 노브고로드(Novgorod) 지역 도시 스타라야 루사(Staraya Russa)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를 기념하는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이도시는 도스토옙스키 별장이 있었던 곳으로 저자의 한(1개) 작품을 테마로 전시하는 러시아 최초의 박물관이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1821~1881)=러시아의 소설가이자 철학자, 저널리스트. 톨스토이와 더불어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세계 문학의 거장.러시아 문학사에서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작가이다. 시대정신에 충실했던 나머지 정치범으로 사형대에 오른 인물이나 반계몽주의자로 전제정치와 러시아 정교회의 제정일치를 지지했던 인물이다.
1.모스크바아버지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도스토옙스키(Mikhail Dostoevsky, 1739~1839)와 마리아 네차예바(Maria Nechayeva, 1800~1837, 결혼 후 마리아 표도로브나 도스토옙스카야)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직자 가문이었으나 모스크바의 제국 의학-외과 아카데미(Imperial Medical-Surgical Academ)를 수료, 모스크바 마린스키 빈민 병원 의사로 일했다. 아버지는 모스크바에서 약 150km 떨어진 다로보예(Darovoye)에 영지를 두고 오고 갔다.
3세 때부터 유모인 알레나 프로로브나가 쓴 영웅 사가, 동화, 전설을 들었는데 유년시절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4살때부터 성경으로 읽고 쓰기를 배웠고, 니콜라이 고골 등의 작품을 많이 접해서 큰 영향을 받았다. 1833년 프랑스 기숙학교를 다녔으나 1837년 어머니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돌아와 이듬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 육군 공병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의사를 그만두고 딸들과 함께 영지인 다로보예로 내려가 살던 아버지가 1839년 6월 농노들에게 살해당한 것(혹은 뇌졸중)으로 얼려져 있다. 23세 때 공병국 제도실에서 근무하면서도 극심한 낭비벽으로 빚을 많이 지고 살았다. 이 때문에 도스토옙스는 자신의 소설을 쓰기도 했지만 돈벌이로 프랑스 유명작가 오노레 발자크( Honoré de Balzac, 1799~1850)의 소설 '유제니 그랑데(Eugenie Grandet ,1833)' 등을 번역하기도 했다.
2.도스토옙스키는 아버지 사망이후 재정 상태 악화로 다로보예의 토지와 농노에 대한 유산 상속권을 일시금을 받고 팔아 버렸다. 그러나 이후부터도 항상 돈에 쪼드려 사는 삶이 시작됐다. 재정적 어려움이 심해지자 소설을 쓰기 시작, 1845년 5월 마침내 '가난한 사람들(Бедные люди, Bednye lyudi, 영어 Poor Folk) '를 발표했다.
러시아 문학계에 신성(新星)의 등장을 알린 이 소설은 러시아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빈곤층의 사회적 불평등 및 제반 문제가 아니라 가난이 인간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그려내 격찬을 받은 것이다. 소설을 읽은 시인이자 비평가였던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네크라소프(Nikolay Alexeyevich Nekrasov, 1821~1878)가 감동해 당대 유망한 사상가였던 비사리온 그리고리예비치 벨린스키(V. Belinsky, 1811~1848)에게 소개했다.
벨린스키는 소설을 읽자마자 '새로운 고골(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Nikolai Vasilevich Gogol, 1809~1852)'이 등장했다는 찬사를 했다. 특히 벨린스키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러시아 최초의 사회 소설"이라고 격찬했다. 하지만 벨린스키와는 사상 차이로 적대관계가 됐다. 무신론, 공리주의 , 과학적 유물론자인 벨린스키와 러시아 정교회 신앙과 종교적 감성을 강하게 가진 보수주의자 도스토옙스키와 안맞은 것이다.
러시아 사회주의 의 선구자 알렉산더 이바노비치 헤르첸(Aleksándr Ivánovich Gértsen , 1812~1870)은 "(가난한 사람들)은 러시아의 혁명적 사상의 진보에 관하여 큰 역할을 해 사회주의적 경향과 활력 불어넣었다"고 평가했다. 비평가 파벨 바실리예비치 안넨코프(Павел Васильевич Анненков, 18131887)는 도스토옙스키의 말을 빌려 "러시아 전체가 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고 소개했다. 이후 '분신', '여주인',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 등을 잇달아 집필했다. 한편 소설 '가난한 사람들'은 1894년 영국의 번역가, 비평가, 건축 역사가 레나 밀먼(Angelena Frances Milman , Lena Milman,1862-1914)에 의해 영어로 번역됐다.
3.유명세를 탄 도스토옙스키는 1848년 무렵부터 사회주의에 심취한다. 러시아 외무성 공무원으로 사회주의자인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Mikhail V. Petrashevsky, 1821~1866) 집에서 프랑스 철학자이자 사회주의자 F. M. 푸리에(François Marie Charles Fourier, 1772~1837)의 강연을 들은 데이어 정기적으로 열리는 문학 모임( 전제정치와 농노제 비판 토론회)에도 참석했다. 이는 제정러시아 당국에 알려지면서 1849년 4월 '불온분자'로 체포된다. 이른바 '페트라솁스키 사건'으로 이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 피터와 폴 요새(Peter and Paul Fortress)에 수감된 후 재판에서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다만 도스토옙스키는 1849년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세묘노프 광장에서 진행된 총살형 집행 직전 황제의 특별사면으로 감형, 시베리아 옴스크로 유배(Siberian exile)된다. 시베리아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가장 위험한 죄수 중 한 명'으로 분류돼 쇠사슬에 묶인 채 4년동안 강제 노역, 4년은 몽골 국경선 근처 시베리아 초소에서 사병 복무했다.
4.도스토예프스키의 여인들은 예상보다 많았다. 첫 뮤즈는 1840년대 초 러시아의 작가, 문학 평론가, 저널리스트, 잡지 발행인 이반 이바노비치 파나예프(Ива́н Ива́нович Пана́ев, 1812~1862)의 서클에서 만난 파나예프의 부인 아브도티아 브라얀 스카야 파나예바(Avdotya Bryanskaya, Avdotya Yakovlevna Panaeva,1820~1893,러시아의 소설가, 단편 소설가, 회고록 작가)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녀와 불륜을 한 뒤 "문학에 관심이 많은 팜므파탈( femme fatale.)"이라고 말했다.
첫 결혼은 1854년 2월 시베리아에서 석방된 이후에 했다. 감옥에서 나와 아들 둘이 있는 미망인 마리아 드미트리예브나 이사예바(1955년 사망한 정치범 알렉산더 이바노비치 이사예프 부인 )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1857년 2월 쿠즈네츠크에서 결혼했다. 하지만 가난한 결혼 생활은 불행했고, 이를 극복하기위한 소설 출간은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여기에 아내에 대한 가벼운 의심증도 있었다.
1858년 도스토옙스키는 친구이자 주치의인 스테판 야노프스키(Степа́н Дми́триевич Яно́вский; 1815~1897)와 이혼한 희극 배우 알렉산드라 이바노브나 슈베르트(Alexandra Yanovskaya Kulikova chubert,1827~1909)와 달콤 한 관계에 빠졌다.다만 함께 살지는 않았다.
도스토옙스키는 서유럽을 여행하던 1862년~1863년 겨울 아폴리나리아 프로코피예브나 수슬로바(Аполлина́рия Проко́фьевна Су́слова, 1839~1918)를 만나 짧지만 강력한 관계를 가졌다. 또 1864년에는 마르타 브라운(Martha Brown, Marfa Petrovna Panina, 엘리자베타 안드레예브나 클레브니코바,Elizaveta Andreyevna Chlebnikov, 생몰미상)과도 불륜 관계였고, 1865년에는 안나 코르빈-크루코프스카야(Anna Vasilyevna Korvin-Krukovskaya,1843~1887,러시아 최초의 여성 우표 수집가)를 속기사로 고용했고, 1867년 결혼했다.
5. 결혼 후에 시베리아 몽골 국경선 근처 초병으로 노역 근무를 하던 도스토옙스키는 1857년 12월 간질 증세로 복무가 어렵다는 진단을 받고, 1859년에 제대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서 형 미하일과 함께 문예 잡지 '러시아 세계(Russky Mir)'를 1960년 9월 창간하고, 시베리아 유형 생활을 바탕으로 한 '죽음의 집의 편지'를 연재했다. 또 상트페테르부르크 상류 사회의 이중적 삶과 하층민의 고통스런 삶을 그린 '학대받은 사람들'도 발표했다.
1861년 3월3일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Александр II Николаевич Романов,1818~1881)는 전격적으로 '농노 해방령'을 시행했다. 이 때 도스토옙스키는 유럽 여해 준비를 한 후 6월 서유럽 여행길에 올랐다. 그는 베를린, 드레스덴, 프랑크푸르트, 쾰른, 파리, 런던, 피렌체 등지를 여행했으나별 소득없이 돌아왔다. 아내는 지병인 결핵이 악화됐고, 1865년 사망했다.
속기사 안나와 재혼해 성실한 작품 활동을 했으나 빚은 줄지 않았고, 빚쟁이들의 시달림을 피해 독일 등으로 도피했다. 1868년 2월 22일 안나와 사이에 첫 딸 소피아가 태어났지만, 3개월만에 사망했다. 1869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살 때 두 번째 딸 류 보프 도스토옙스카야(1869~1926)가 태어났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살 때인 1871년 첫 아들 표도르(1871~1922)와 알렉세이(1875~1878)도 태어났다. 첫 아들을 낳은 1871년 도스토옙스키는 도박을 끊었다.
6.식구가 늘자 부인 안나가 발벗고 나섰다. 안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저작물로 출판 사업을 하면서 저작권 협상도 진행, 남편을 빚에서 구원했다. 이에 도스토옙스키는 그동안의 고생을 뒤로 하고 풍파없이 작품 활동을 했다. 안나는 한마디로 '도스토옙스키를 도박과 빚에서 구한 현모양처'였다.
그러나 건강은 악화 상태였다. 1876년 여름, 도스토옙스키는 다시 호흡곤란을 느끼기 시작했고, 1877년 3월에 그는 네 번의 간질 발작을 일으켰다. 그런데 1879년 아들 알료샤가 심각한 간질 발작을 겪고 5월 16일에 사망,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해에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의 명예 회원으로 임명됐고, 1880년 2월 슬라브자선협회의 부회장으로 선출돼 활동했다. 6월에 모스크바 푸쉬킨 기념관 제막식에서 후대에 남는 뛰어난 연설을 했다. 또 몸이 쇠약해져 갔음에도 안정된 집필생활을 하게 된 도스토옙스키는 1880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발표, 당대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로 '별의 순간'을 맞았다.
7.도스토옙스키는 1881년 1월 말부터 몇 차례 각혈을 하다가 2월6일 폐출혈이 시작됐다. 부인 안나는 의사를 불렀지만 나쁜 진단이 나왔다. 출혈이 이어지자 도스토옙스키는 자녀들에게 '탕자의 우화'를 읽어 달라고 한 후 마태복음(3:14-15)으로 유언을 대신했다. "그러나 요한이 말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 오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로 마무리했다.
1881년2월9일(러시아 구력 1월 28일) 숨을 거두면서 아내 안나에게 말했다."기억해 안나, 나는 항상 당신을 열렬히 사랑했고, 생각 속에서도 당신에게 불륜을 저지른 적이 없어!"라고 고마움을 전했다. 장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에서 치러졌고, 6만명이상의 시민들이 참석해 애도했다. 시신은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 묘지에 안장됐다. 가장 좋아하는 시인 니콜라이 카람진과 바실리 주콥스키 옆 자리였다.
도스토옙스키 묘비에는 신약성서(요한복음 12:24)에서 발췌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주요 작품으로는 '가난나한 사람들(1847)', '도박꾼(1866)', '죄와벌(1866)', '백치 (1869)', '악마(악령, 1872)', '사춘기 (1875)', '카라마조프가 형제들(1880)' 등이다. 단편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1864)'는 실존주의 문학 의 최초 작품 중 하나다.
8.도스토옙스키는 문학 라이벌이었던 레흐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 1828~1910)가 소설 '안나 카레니나(1875~77)'를 발표하자 이를 구해 읽고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길거리를 뛰어다니며 "톨스토이는 예술의 신!"이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톨스토이도 죽기 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읽었고,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문체에 대해 불평했다고 한다.
당대의 또 다른 문호로 '아버지와 아들(1862)'의 저자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Ива́н Серге́евич Турге́нев, 1818~1883)와 관계도 나빴다. 그럼에도 투르게네프에게 돈을 빌리곤 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 1799~1837, 대표작 '예브게니 오네긴', '대위의 딸') 관련 모임에서 투르게네프를 만나 화해했다. 도스토옙스키 장례식에 투르게네프가 참가했고, 2년 뒤 그가 사망하자 도스토옙스키 유족들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 Ioseb Besarionis dze Jughashvili, 1879~1953)은 젊은 시절부터 도스토옙스키 저작물(특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그를 '위대한 심리학자로 평가했다. 현대 러시아의 지도자 블라디르 푸틴(Vladimir Vladimirovich Putin, 1952~현재)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로 꼽았다. 러시아 사상가이자 신학자 니콜라이 베르댜예프(Nikolai Aleksandrovich Berdyaev, 1874~1948)는 "도스토옙스키를 낳았다는 것만으로도 러시아 민족의 존재는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는 도스토옙스키를 일컬어 자신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준 '단 한 사람의 심리학자'라고 칭했다. 미국 소설가로 '북회귀선'의 저자 헨리 밀러(Henry Valentine Miller, 1891~1980)는 "(도스토옙스키)는 사실상 신을 창조했다."라고 말했다. 독일의 실존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99~1976)는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을 좋아했고, 사무실 벽에 걸어둔 두 개의 초상화 중 하나는 도스토옙스키였다.
9.소련에서 1956년 도스토옙스키에게 헌정된 올리브색 우표가 나왔다. 1971년에도 탄생 150주년을 맞아 우표가 100개 한정 발행됐다. 그해 11월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이 그의 마지막 살던 주택에 개관했다. 1979년 수성의 분화구에 그의 이름이 명명됐고, 1981년 러시아 천문학자 류드밀라 게오르기예브나 카라치키나(1948~현재)가 발견한 소행성은 '3453 도스토옙스키'로 붙였다.
러시아 음악 평론가이자 방송인인 아르테미 트로이츠키(Артемий Троицкий, 영어명 Artemy Kivovich Troitsky, 1955~현재)는 1997년부터 라디오 쇼 "FM Достоевский"(FM 도스토옙스키)를 진행하고 있다. TV 쇼 ' 러시아의 이름' 의 시청자들은 도스토옙스키를 역대 최고의 러시아인 9위로 선정했다. 도스토옙스카야 지하철역이 상트페테르부르크(1991)와 모스크바(2010)에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 문학계의 우상으로 모스크바 ,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보시비르스크 , 옴스크, 세미팔라틴스크, 쿠스네츠크, 다로보예, 스타라야루사, 류블리노 등에 기념관과 동상이 들어서 있다. 에스토니아 탈린, 독일 드레스덴과 바덴 바덴, 비스바덴 등에도 기념관이 있다.
도스토옙스키 글은 세계 17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됐다. 첫 번역은 독일어로 번역가 빌헬름 볼프존이 1846-1847년 잡지에 '가난한 사람들(Poor Folk)'이다. 최초의 영어 번역본은 1881년 작가 마리 폰 틸로(Marie Von Thilo, 생몰 미상)가 냈지만 높은 평가를 받은 번역본은 1912년과 1920년 사이에 콘스턴스 클라라 가넷(Constance Clara Garnett, 본명은 Black , 1861년 12월 19일 ~ 1946)이 번역한 책이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