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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택리지-조선 최고의 베스트셀러 첫 문단은 한반도의 시작을 중국 곤륜산으로 궁색하게 설명한다 본문
팔도총론 "곤륜산의 한 가지가 대사막 남쪽으로 뻗어 동쪽에 이르자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되고 여기서 맥이 끊어져 요동평야가 되었다. 이 평야를 지나면서 다시 솟아 백두산이 되었으니 '산해경(山海經)'에서 말한 불함산이 바로 이것이다. 산의 정기가 북쪽으로 1000리를 달려가며 두 강 사이에 끼었고, 남쪽을 향해 영고탑(寧古塔)이 되었으며, 뒤쪽으로 한가지 뻗어 조선 산맥의 머리가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팔도가 있는데, 평안도는 심양(沈諹)과 이웃했고, 함경도는 여진(女眞)과 이웃했으며, 강원도는 함경도와 이어졌다. 황해도는 평안도와 이어졌고, 경기도는 강원도와 환해도의 남쪽에 있다. 경기도 남쪽은 충청도와 전라도이며, 전라도의 동쪽은 경상도다. 경상도는 옛날 변한과 진한땅이고,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는 바로 엣날 마한과 백제 땅이다.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는 고조선과 고구려 땅이었으며, 강원도는 예맥의 땅이었다. (이중환 택리지, 허경진 역, 서해문집, 2007)
1.나라 지리의 시작인 팔도총론을 쓰면서 중국 전설 상의 산(곤륜산)과 중국 책(산해경)으로 시작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도입부다. 주류 권력에서 벗어나 몰락한 사대부로 30여년을 방황한 저자임에도 조선 유학자의 중화중심주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중화가 아닌 조선이 중심이었다면 한양 도성을 시작으로 나라 위치를 비교해 한반도 중심 서술을 했거나 혹은 광활한 몽골 초원, 시베리아, 태평양에서 올라오는 서술을 취했을 수도 있다. 중화에 물든 성리학자(중화주의 유교사학)의 편협한 틀을 깨지 못한 첫 문단이어서 아쉬울 뿐이다. 한문 원전을 우리말로 옮긴 것인만큼 문장 하나하나에 쉼표가 많은 특징을 보여준다.
본문에 나오는 *곤륜산은 중국 서쪽에 있는 전설상의 산, 쿤륜산(崑崙山)를 말한다. *의무려산은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베이전시(北鎮市) 서쪽에 있는 동북권 3대 명산이다. 중국어로 이우뤼산(醫巫閭山)이다. *산해경은 중국 하나라의 우왕(禹王, 중국 문헌 최초 세습왕조 첫 왕) 또는 백익(伯益, 우왕의 신하로 왕위 계승자)이 지었다는 책으로 산천, 초목,조수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를 담았다. 중국어로 샨하이징(山海經)이다.*불함산은 백두산으로 원래 부르칸로 말했는데 굳이 한자로 적으면서 불함산(不咸山 )이 됐다. *영고탑은 중국 헤이룽장성(黒龍江省) 무단강(牡丹江) 닝안시(寧安市)에 있는 탑으로 청나라 황실 발상지다. 중국어로 닝구타(寧古塔)라 한다. *심양은 오늘날의 센양(沈諹)으로 랴오닝성(遼寧省)의 성도이며, 중국 동북3성 최대 도시다. *여진(女眞)은 여진족으로 만주 동북부에 살던 퉁구스계의 민족-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을 말한다. *변한(弁韓)은 우리나라 삼한시대 전라도 동부권~경상도 낙동강 서쪽 일대 나라 *진한(辰韓)은 낙동강 동쪽 일대 나라 *마한(馬韓)은 우리나라 삼한시대 경기 충청 전라도 일대 나라 *백제(百濟)는 한반도 서남부에 있었던 고대 왕국으로 기원전 18~660년 존속했다. *예맥(濊貊)은 남만주·한반도 중북부에 살던 민족이다. 한민족의 조상 중 한 족속이다.
2.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 1751년 초고 완성)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문 지리서이다. 특히 조선 후기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사찬(私纂, 개인이 낸 책) 최고의 걸작이다. 우리나라 각 지역을 인문학적 차원에서 접근, 구체적으로 다룬 지리지(地理誌)의 효시(嚆矢)이기도 하다. 현대로 따지면 국토학 개론의 원형이자 관광(여행) 가이드북이며, 어디에 살 것인가를 안내하는 지리경제학의 원전이다.
책 이름은 중국 유교 4서의 하나로 공자와 제자들의 어록을 엮은 경전인 '논어(論語, BC 5세기 전후)'에 나오는 '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마을이 어진 것이 아름다우니, 가려서 어진 마을에 처하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로울 수 있겠는가)'에서 '택(擇)'과 '리(里)'를 따왔다. '지(志)'는 '지(誌)'로 쓰는 것, 기록하다를 뜻한다. 택리지는 어느 마을(里)에 살면 좋을지를 고르는(澤) 일을 돕는 기록(志)이라는 뜻이다.
택리지는 영조27년(1751) 4월 초순 이전에 초고가 완성됐다. 그래서 세상에 처음 알려진 해를 1751년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후 주변 학자들의 글과 말을 듣고 사망(1756)전까지 초고를 끊임없이 수정하는 작업을 거쳤다. 원래 이름은 '사대부가거처(士大夫可居處, 사대부가 거처할 만한 곳)이다. 다만 저자가 직접 쓴 택리지 원본과 수정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저자본이 없다는 뜻이다. 이에 많은 가필(加筆)과 수정이 이뤄진 필사본으로 팔역지(八域誌), 팔역가거지(八域可居地), 동국산수록(東國山水錄), 동국총화록(東國總貨錄), 형가승람(形家勝覽), 팔도비밀지지(八道秘密地誌) 등 이본(異本)만 200여 종이 전한다. 대부분 필사본이다. 지식욕에 목마른 이들이 앞다퉈 베껴서 가문의 책으로 전했기 때문이다.
현대에서 많이 쓴는 활자인쇄본은 변절한 독립운동가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시인, 역사학자)이 1912년 다듬어 내놓은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본이다. 현재 주로 인용하는 이 신활자 인쇄본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외사국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민제호(閔濟鎬,1890~1832) 소장본이다. 택리지의 많은 필사 이본(異本, 다른 판본)은 서울대 규장각과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돼 있다.
3.택리지는 많은 한계에도 불구, 당파와 차별 없는 나라, 실존을 다룬 명저다. 저자가 30여 년간 전국을 유람하며 고을의 인심과 풍속, 역사와 문화, 물자를 기록했다. 하지만 중화주의 유교사학, 유교적 세계관의 한계를 지닌 조선 중기 문신(숙종때 정1품 우의정 역임)인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의 '동사(東事,1667)' 의 지승(地乘)편을 계승한데다 저자도 성리학자의 한계을 벗지 못해 곳곳에 '편협한 사고'에 따른 글이 눈에 거슬린다.
택리지는 다양한 학자들의 서문과 발문이 있다. 첫 서문은 초고가 세상에 알려진 2년후인 1753년에 정언유(鄭彦儒, 생몰미상, 영조때 종2품 호조참판)가 썼고, 2면에 걸쳐 실려 있다. 또 조선 후기 대표 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영조때 대표적인 남인(南人)으로 한양 경기 중심의 근기남인(近畿南人)에 속한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 조선 중기 학자 이봉환(李鳳煥,생몰 미상) 조선 영조때 문신 목성관(睦聖觀,1691~1772), 목회경(睦會敬,1698~1782)도 서문과 발문을 썼다. 한편 택리지는 지역 소개에서 조선 당쟁의 주요 세력인 남인의 지지기반(지역)에 대해서 후한 평가를 했다.
4.택리지는 조선 대표적인 지리서로 성종(成宗,제9대 왕,1457~1494)의 어명으로 노사신(盧思愼, 1427∼1498,연산군때 영의정 역임) 등이 간행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 군현별, 백과사전식으로 묶여진 곳에 반해 주제별 인문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쓴 책이다. 그래서 음양론과 오행설 중심의 풍수(風水, 풍수지리)를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이는 번역본에 수많은 주석(註釋, 낱말을 쉽게 풀이한 것)이 붙어 있음에도 일반인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책이 된 이유다.
택리지는 크게 사민총론(四民總論), 팔도총론(八道總論), 복거총론(卜居總論), 3가지로 나뉜다. 이중 사민총론은 인간사(사농공상, 士農工商의 계급사회)에 대한 이야기다. 사민총론은 사, 농, 공, 상이 하나라는 평등사상을 설파했고, 지배층의 특권도 인정하지 않은 저술태도를 보였다.
택리지의 실질적인 본문은 '팔도총론'이다. 팔도총론에서는 팔도(八道)의 위치와 역사적 배경을 요약 설명한다, 그리고 각 도의 내력, 자연 환경, 풍속, 물자, 인물 등 팔도의 인문지리를 개괄적으로 보여 준다. 여기에는 30여년을 전국을 떠돈 저자의 체험이 들어 있다. 한편 택리지에는 조선시대에 잘 알려진 대관령의 동쪽, 관동팔경(關東八景-총석정, 청간정, 낙산사, 삼일포, 경포대, 죽서루, 망양정, 월송정)의 경우 기존의 낙산사와 월송정을 빼고 청초호(靑草湖)와 시중대(侍中臺,북한 통천군 흡곡 시중호-侍中湖에 있는 누대)를 넣었다.
5.택리지는 주거를 정하는 기준으로 지리(地利),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 4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지리는 풍수학의 땅의 이로움 地利다.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이 왜 사람살기 좋은지 등을 과학적으로 설명한다.둘째 생리는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 생업에 종사하기에 좋은 곳이다. 셋째 인심은 주변 사람들 인성이다. 넷째 산수는 사람을 즐겁게 하고 풍류를 즐길만한 곳이다.
택리지는 조선 팔도의 큰 산은 모두 명산으로 분류, 장점 등을 설명하고 있다. 또 산 중에서 명승을 꼽고 있다. 명승은 대단히 높지 않은 산으로 누구나 올라갈수 있는 산이다. 현대 남한 기준으로 전남 영암 월출산, 장흥 천관산, 흥양 팔영산, 광양 백운산, 대구 비파산, 경북 청도 운문산, 포항 내연산, 청송 주왕산 등이다. 특히 함경도의 칠보산을 높게 평가했다. 이중환은 “명천에 있는 칠보산이 동해 가에 위치하여 골짜기에 들면 바위의 형세가 깎아지른 듯하며 기묘하게 조각된 형상이 거의 귀신 솜씨인 듯하다”고 묘사했다.
우리나라 사찰 가운데 으뜸으로 평가한 곳도 적시했다. 현대 남한 기준으로 경북 영주 부석사, 경남 양산 통도사, 대구 동화사(桐華寺), 전남 영암 도갑사(道岬寺), 경남 남해 천주사, 충남 논산 대둔사, 전북 김제 금산사, 전남 순천 송광사, 전남 고흥 팔영산(八影山, 609m) 능가사(楞伽寺) 등이다. 택리지가 뽑은 명당으로는 경남 합천, 전남 구례, 전북 전주, 대전 유성, 경북 안동 하회, 평양 주변, 재령평야 등이다.
6.택리지는 대단한 책으로 많은 장점에도 불구, 비판도 받는다.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 못하고 편협한 시각에서 서술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각 총론 등에서 중화주의 중심 서술 등은 물론 조선 팔도에 대한 평가에서도 지역 차별성 서술도 여러곳 눈에 띈다. 이를 근거로 아직도 지역차별에 이용하는 이들도 있다.
또 중부지방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택리지는 조선 팔도에서 도읍이 될 수 있는 곳으로 한양(서울)과 송도(개성)뿐이라고 적시했다. 이는 광활한 만주벌판을 지배했던 선조(고구려 등)를 무시한 기술이라 하겠다. 또 다소 황당한 주장도 있다. 송악(개성) 출신의 호족으로 고려를 건축한 태조 왕건(王建, 877~943)이 당나라 선종(810~859)의 후손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고려 18대 왕 의종(毅宗,1127~1146) 시기 문신 김관의(金寬毅, 생몰미상)의 '편년통록(編年通錄)', 고려 27대 왕 충숙왕(忠肅王,1294~1336) 때 문신 민지(閔漬,1248~1326)의 '편년강목(編年綱目)'을 비판없이 수용했기 때문이다.
다만 한민족을 한탄(?)하는 글에는 기개가 웅장하다. 조선은 “천리가 되는 물이 없고, 백 리가 되는 들판이 없어 거인이 태어나지 못한다. 서융(西戎,서쪽 변방의 이민족), 북적(北狄, 북쪽에 사는 족속), 동호(東胡,몽골고원 동부 수렵 목축민족 선비족, 거란족 등), 여진(女眞,만주 동북부에 살던 퉁구스계의 민족-청나라)은 중국에 들어가 한 번씩 황제 노릇을 했지만, 유독 우리 민족만이 그런 일이 없다.” 이는 한민족의 후손이 새롭게 되새겨볼만한 지적이다.
7.8촌사이인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은 1751년 완성된 조카 이중환의 원고를 읽고 내용을 교열, 수정해주기도 했다. 조선 후기 대표 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전라도 강진 유배 시절 가르친 제자인 아전(衙前,중인계층 하급관리) 신분의 황상(黃裳, 1788~1870)은 택리지를 재편집하고 증보해 필사하기도 했다.
육당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택리지'를 “우리나라 지리서 중에서 가장 정요(精要)한 인문지리학의 시초”라고 평가했다. 일제강점기의 한학자, 역사학자 독립운동가 위당 정인보(鄭寅普, 1893~1950)는 1931년 4월6일자 동아일보에 쓴 칼럼에서 "조선에서 이만한 지리서는 없다"며 "대동여지도와 비교하면 김정호는 수학적, 이중환은 철학적"이라고 말했다. 한편 일제 식민지 시기 ‘조선팔도비밀지지(1923)’라는 이름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8.택리지는 19세기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쓴 산수(山水)에 대해 고증한 지리서 '대동수경(大東水經)'과 다산의 외손자 윤정기(尹廷琦, 1814~1879)의 사전(事典)식 지리책 '동환록(東寰錄,1859)', 1811년 연행록인 이정수(李鼎受,1783∼1834)의 청나라 연경 사행 참여 기록인 '유연록(游燕錄)', 1841년 저자 미상의 관북(關北,함경도) 지방 귀양살이(1807~1809) 일기인 '北征日記' 등에도 수록 혹은 언급됐다.
택리지는 너무 많은 이본(異本)과 지역차별적 서술 등으로 현대에 들어와서도 지속적인 토론 등이 이어지지 못했다. 학술대회도 거의 열리지 않는다. 1990년대에 진단학회에서 학술 심포지엄을 한번 열었고, 2015년 11월 성균관대에서 사상 두 번째로 택리지를 소재로 한 학술 발표회를 열었을 뿐이다. 대단한 베스트셀러임에도 학술대회가 이어지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고 하겠다.
#이중환(李重煥, 1691,음력 1690년12월25~1756)=조선 중기 영조 때 실학자로 ‘근대 인문지리학의 아버지(순수 지리학의 아버지는 고산자 김정호)'다. 조선 중기 당파에서 밀려난 남인 중 근기남인(近畿南人, 서울 경기지역 남인, 성호학파)이다.본관은 여주(驪州)이고, 자는 휘조(輝祖), 호는 청담(淸潭)·청화산인(靑華山人)이다.
1.한성부 서부 황화방 군기사계 소정동(현 서울시 중구 정동)에서 남인(南人)의 명문세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예조 참판 이진휴(李震休,1657~1710), 어머니는 함양 오씨(오상주, 吳相胄의 딸)다. 아버지는 도승지(왕 비서실장)와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고조부가 광해군·인조 때 서예로 명성을 떨친 이지정(李志定, 1588∼1650) 이다.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과 8촌 사이다.
처음에 음서(蔭敍)로 관직에 나아가 통덕랑(通德郞, 정5품)까지 올랐다. 음서제(蔭敍制)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중신 및 양반의 신분을 우대해 친족 및 처족을 과거 시험없이 임명하는 제도다. 음보(蔭補), 문음(門蔭), 음사(蔭仕), 음직(蔭職), 음덕(蔭德)이라고도 한다. 통덕랑 재직 때 1710년 부친상을 당한 후 괸직을 그만두고 과거시험에 몰두, 23세 때인 숙종39년(1713) 부정기적으로 치러지는 증광문과(증광시, 增廣試)에 급제, 본격적인 벼슬길에 나섰다.
2.이중환은 이후 김천도 찰방(察訪, 1717), 승정원 주서(注書, 1719), 성균관 전적(典籍,1720), 병조정랑(兵曹正郞, 정5품,1723)을 등을 역임하는 등 큰 대과없이 관직을 이어갔다. 그런데 30대 초반이던 722년 3월 27일 경종(景宗,1688~1724,조선 20대 국왕) 때 일어난 서얼 출신 지관(地官) 목호룡(睦虎龍, 1684~1724)의 고변(告變)에 연루됐다.
고변은 결국 사화(士禍)로 이어지면서 이중환은 불똥을 맞았다. 조선 중기 권력 이양의 격변기인 숙종(肅宗, 1661~1720)~경종(景宗, 1688~1724)~영조(英祖1694~1776) 시기에 일어난 신임사화(辛壬士禍, 또는 獄事, 1721~1722)에 결국 연루된 것이다. 신임(辛壬)은 신축년(1721)과 임인년(1722)을 뜻한다.
3.지관(地官) 목호룡(睦虎龍, 1684~1724) 고변(告變) 사건이 터진 것은 1722년(경종 2년) 음력 3월이었다. 목호룡은 세종(世宗,1397~1450,조선 4대 국왕)때 호조참판을 지낸 목진공(睦進恭, ?~1426)의 후손으로 벌족집안 출신이지만 서얼 차별에 대한 불만이 쌓여 있었다.
목호룡의 고변이 먹힌 것은 당시 권력의 중추 노론(老論)의 전횡도 한몫했다. 노론은 조선 후기 붕당(朋黨)의 한 정파로 남인 처벌 문제로 서인에서 갈려 나온 파벌이다. 노론은 숙종(肅宗, 1661~1720)이 붕어(崩御)하고, 세력이 약한 장희빈(玉山府大嬪 張氏, 희빈장씨, 1659~1701)의 아들 경종이 조선 20대 국왕에 오르자 강하게 반대한다.
특히 ‘노론 4대신’인 영의정 안동김씨 김창집(金昌集, 1648∼1722)과 이이명(李頤命, 1658~1722, 숙종 때 영의정), 이건명(李健命, 1663~1722, 숙종때 좌의정), 조태채(趙泰采, 1660~1722, 숙종때 우의정) 등은 1721년 왕제(王弟) 연잉군(延礽君,1694~1776,나중에 영조,英祖)을 왕세제로 책봉할 것을 주청, 달성한다. 더 나아가 ‘노론 4대신’은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요구해 경종의 윤허(允許)까지 받는다. 이에 소론의 조태구(趙泰耉, 1660~1723, 경종 때 영의정)·유봉휘(柳鳳輝, 1659~1727, 경종 때 대사헌, 1725년 영조 때 좌의정) 등이 부당성을 상소함에 따라 대리청정이 취소된다.
4.목호룡은 상소문에 성상(聖上, 경종)을 시해하려고 모의하는 역적(逆賊)들로 노론 이이명(1658~1722)의 아들 이기지(李器之,1690~1722), 김창집의 손자 김성행(金省行, 1696-1722), 광성부원군 김만기(金萬基, 1633~1687)의 손자 김진구(金鎭龜, 1651∼1704)의 아들 김민택(金民澤,1678~1722) 등을 적시했다.
이에 경종의 세자시절 스승인 이조참판 김일경(金一鏡, 1662~1724) 등이 주도해 오랜 국문을 거쳐 노론 4대신인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는 물론 노론 30여 명이 장살(杖殺), 10여 명이 교살됐다. 유배 간 자만 100여 명에 달했다. 이른바 소론이 노론을 일망타진한 신임사화(辛壬士禍, 또는 獄事, 1721~1722)이다.
고변자 목호룡은 동중추부사(同中樞府事, 종2품)까지 파격 승진했고, 남임들도 대거 등용됐다. 이에 당시 왕세제 연잉군(延礽君,1694~1776, 나중에 영조,英祖)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면서 노론의 반격이 시작됐다. 그리고 수상쩍로 경종(景宗, 1688~1724)이 급서(急逝)했다. 노론은 정국 반전을 통해 남인 주요 세력을 타도할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였다. 목호룡은 고문끝에 1724년 사망했고, 이중환은 목호룡 고변 관련자들과 함께 체포돼 구금, 국문을 당한 뒤 파면됐다. 이중환은 단지 목씨 가문과 사돈관계에 불과했지만 노론 입장에서는 남인 중 ‘낭중지추(囊中之錐)’인 이중환을 가만두지 않았다.
한편 당시 김일경(金一鏡, 1662~1724)은 경종의 독살 배후에 연잉군 등 노론이 있다고 보고, 진상조사에 나섰으나 실패, 영조 즉위 후 가장 먼저 부대시 처참(不待時處斬, 시와 때를 가리지않고 우선 처형) 당했다. 후손들은 영조 즉위 후 일어난 이인좌(李麟佐,1695~1728)의 난(1728년 이인좌 등 소론 강경파 주도의 난, 무신란, 戊申亂)과 나주 괘서 사건(羅州掛書事件,1755,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일으킨 사건,을해옥사)에 연루, 한명을 제외하고 몰살당했다. 김일경은 노론천하의 조선 말기까지 복권되지 못하다가 대한제국 시절인 1908년(융희 2년) 순종(純宗, 대한제국 제2대 황제이자 조선 마지막 왕)이 즉위하면서 신원됐다.
5.이중환은 남인의 영수로서 숙종(肅宗, 1661~1720) 때 좌의정을 지낸 목내선(睦來善, 1617~1740)의 아들인 목임일(睦林一,1646~1716, 숙종 때 대사헌 역임)의 딸 사천 목씨(? ~1732)와 결혼했다. 둘은 아들 2명과 딸 2명을 두었다. 사천 목 씨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남인 집안이다. 첫 부인이 사망한 이후 문화유씨 유의익(柳義益) 딸과 재혼, 딸 1명을 두었다.
이중환은 1725년(영조 1)까지 국문을 받으면서 무죄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유배당했다가 1727년 10월 석방됐다.이후 관직을 단념하고 고향 공주로 내려와 전국 유랑생활에 들어갔다. 25년여동안 조선 전역을 답사한 이중환은 1751년 택리지 초고를 완성했다.
1753년(영조 30년) 왕의 특명으로 은전((恩典, 나라에서 은혜를 베푸는 것)을 받고 복권됐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 당상관) 품계를 받았다. 하지만 1756년(1960년설도 있음) 사망했다. 묘소는 “천하에 일이 생기면 반드시 서로 다투게 될 요충지”라고 평가하는 황해도 금천군 설라산에 안장됐다. 묘비명은 성호 이익이 지었다. “험한 것은 세상이요, 뜻을 얻지 못한 것은 운명이다. 남긴 글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집안의 상자 속에 보관되어 있으니, 과연 누가 알아줄 것인가” <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