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허생전-조선 최고의 물류 전문가 통해 '폐쇄 조선'를 비꼬는 소설의 첫 문단은 가난한 소리로 시작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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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전-조선 최고의 물류 전문가 통해 '폐쇄 조선'를 비꼬는 소설의 첫 문단은 가난한 소리로 시작한다

지성인간 2023. 9. 1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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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서울 한양, 남산 밑 묵적골에 별난 선비가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허생이었다. 남산 기슭으로 곧장 올라가면 우물가에 해묵은 은행나무가 푸른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허생의 집은 그 은행나무와 마주 보고 있었고, 그 집 사립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집이라야 고작 두어 칸 되는 초가집으로 거의 다 쓰러 가는 오막살이였다. 허생은 집에 빗물이 새는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글 읽기만 좋아해 가난하기 짝이 없었다. 그날도 허생은 배고픈 줄 모른 채, 온종일 방안에 틀어박혀 글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허생은 평소에 그 소리가 가장 듣기 싫었다. 하지만 아무리 듣기 싫어도 자주 들을 수밖에 없는 소리였다.”(박지원 원작, 이상현 글,이남구 그림, 꿈소담이,2009)

허생전의 저자 연암 박지원 초상화. 손자인 박규수의 동생 박주수 작품이라고 하지만 논란이 많다. photo by wikipedia

2.박지원의 ‘허생전(許生傳, 1780년 전후)’은 조선을 대표하는 한문 소설 중 하나다. 중, 고교 국어 교과서에 현대 한국어로 번역돼 ‘허생전’ 이름으로 실려 있다.
연암(燕巖, 박지원 호)이 당시 부패와 무능, 당쟁으로 얼룩진 ‘폐쇄 조선’의 현실을 풍자, 비판하기 위해 쓴 소설이다. 당대 지식계층의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연암이 청나라를 다녀온(1780년 정조 4년) 후 쓴 ‘열하일기(熱河日記)’ 속 ‘옥갑야화(玉匣夜話)에 제목없이 실려 있다. 옥갑은 중국 열하와 燕京(현 베이징,北京)사이의 마을 이름으로,연암 일행이 묵은 곳이다.
열하일기는 당대 국왕 정조(正祖,1752~1880, 즉위 1776년)도 읽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퍼져 나간 베스트셀러였다. 정조의 시각에서 열하일기는 민간의 잡다한 이야기를 기록한 패관잡기(稗官雜記)였다. 이에 정조는 잡글에서 벗어나  문체(고문,古文)를 부흥하자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을 단행했다. 정조는 연암에게는 반성문을 쓰라고 했고, 외국 책을 불태우도록 했다.이른바 중흥군주 정조의 어이없는 시대역행 정책이었다.
*열하는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북부 러허(熱河) 강을 말한다. 황제가 피서를 하는 피서산장(避暑山莊)이 붙어 있다. 러허강 연안 온천도시 청더(承德, 영어 Jehol)가 중심지다. 그래서 열하일기는 ‘The Jehol Diary’로 번역되기도 한다.

소설 '허생전'이 들어있는 박지원의 '열하일기'. 서울대학교 소장.photo by wikipedia

3.허생전은 실존 인물 허유(許愈 1833~1904)의 ‘와룡정유사(臥龍亭遺事)’에 나오는 허호(許鎬) 의 이야기와 비슷하다는 주장도 있다. 허호(허생원)의 이야기는 17세기 역관의 무역 일 등을 그리고 있다.
당시 일본과 교역했던 왜역(倭譯, 일본상대 역관) 중에도 어마어마한 부자가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담배를 수입, 후금(나중에 청나라)으로 파는 밀무역 형태로 부를 축적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4.조선의 취약한 경제구조, 명분론에 집착한 유학자 지배계층, 허례허식과 무능, 수탈의 양반사회, 가난한 백성 등을 통해 조선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조선 사회의 병폐를 통찰하고 대안을 제시한 소설이다. 연암이 북한산 봉원사에서 지인들과 윤영(尹映)에게서 들은 변승업(卞承業,1623∼1709)의 ‘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펼쳐진다.
변승업은 실존 인물로 조선 19대 국왕 숙종(肅宗,1661~1720)의 후궁 희빈 장씨(1659~1701, 20대 왕 경종(景宗,1688~1724)의 어머니)의 먼 친척이다. 외외재당숙(외할머니 초계 변씨의 당조카다.)이자 사돈 사이라고 한다.
중국을 오가면서 개인(私) 무역으로 치부(致富)를 한 사람이다. 정3품 당상 무관직인 절충장군, 정2품 가선대부를 지냈다. 사망시 회계 장부를 보니 50만 냥(약 1500억 원)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허생전에서는 변씨의 윗대 조상으로 나온다.

허생전이 나오는 '열하일기'의 '옥갑야화' 부분.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photo by encykorea.aks.ac.kr

5.연암은 ‘허생전’이라고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후학과 연구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허생원전를 줄여 허생전이라고 했다.
생원(生員)은 조선 시대 생원시(生員進士試, 성균관 입학 자격을 주는 시험, 조선 후기에는 지위를 얻기 위한 시험으로 전락)에 합격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가난한 양반 출신이나 장사에 나서서 나중에 큰 돈을 번 허생, 허생의 부인, 한양 제일 큰 부자 변씨, 조정 대신 이완 대장 등이다.

6.허생전은 굳이 나누자면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전반부는 비범한 선비 허생의 찌든 가난, 후반부는 당대의 사회와 정치 현실 풍자와 비판이다.
삼시세끼가 어려운 가난한 선비 허생은 글 공부만 하다가 아내의 절절한 하소연을 듣고 돈을 벌기 위해 장사를 하기로 마음 먹는다. 이에 한양 갑부 변씨에게 거금 1만 냥을 빌린다.
허생은 안성시장의 과일과 제주도의 말총을 싹쓸이해 큰 돈을 번다. 백성 필수품을 매점매석해 돈을 번 셈이다. 과일은 허례허식의 조선 사회에서 잔치와 제사에 꼭 필요하고, 말총은 망건과 갓을 만드는 데 필수 재료였기 때문이다.
거액을 번 허생은 나라 안의 도적들을 무인도로 데려가 새 삶을 살게 하는 한편 일본 나가사키(長崎)의 굶주림 문제를 해결하고, 은 100만 냥을 번다.
그런데 돌아올 때눈 50만 냥을 바다에 버리고, 10만냥은 돈을 빌렸던 변씨에게 10배로 돌려준다. 나머지 돈 40만냥 중 일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열하일기 '옥갑야화' 부분. 반남 박지원 저로 쓰여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photo by encykorea.aks.ac.kr

7.허생은 탁상공론만 일삼은 딸깍발이(가난한 선비)가 아니었다. 실용 지식인으로서 아내의 구박에 집을 나와 도고(都賈,공남품 조달 예치 창고, 나중에 도매상 뜻)들의 상술을 이용해 떼돈을 벌었다. 매점매석을 시장에서 활용한 것이다.
허생전의 결말이 ‘허생이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었다’로 끝나는 것은 당대로서는 파격적인 소설 구조다. 미완성으로 여운을 남게 한 것이다.
물론 조선 사회의 모순을 혁파하는 길로 소설을 이어가지 못한 것은 유학자의 한계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런 것은 허생이 상인을 ‘장사치’라고 폄하하는 등 조선의 사농공상(士農工商) 계급, 신분 사회를 벗어나지 못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명백한 실학자의 ‘당대를 보는 관념’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간행된 연암 저서 허생전(오른쪽, 1924년 시문사 발행)과 양반전(왼쪽, 1947년 조선금융조합연합회 발행). 출처=독립기념관(https://search.i815.or.kr)

8.유명한 ‘북학의(北學議,1778~1798년 연간 저서)’를 쓴 실학파 거두 박제가(朴齊家, 1750~1805)가 ‘압록강 동쪽에서 손에 꼽을 만한 문자’라고 극찬했다.
미국 학자 로버트 그린(Robert Greene, 1959~현재)이 저서 ‘권력의 법칙(The 48 Laws of Power)’에도 활용했다. 이 책은 미국에서만 120만 부 이상 팔렸다.
구한말 학자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이 박지원을 추종해 최초로 ‘열하일기’를 간행(1901)했다. 일제 강점기 동아일보에 1927년 1월 1일부터 4월 25일까지 약 4개월 동안 연재됐다.제목은 ‘허생뎐’이다.

양반사회에 대한 비판과 해학으로 인기를 끌었던 마당극 '허생전' 시연회 스틸컷.2013년12월10일 연합뉴스. photo by daum.net 재인용.

9.허생전은 수많은 예술작품의 텍스트 역할을 하면서 다양하게 나타났다. 소설가 채만식(蔡萬植, 1902~1950)은 1946년 허생전과 이광수(李光洙,1892~1950)의 ‘허생전’, 설화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토대로 허생전을 출판했다.
오영진(吳泳鎭, 1916~1974)은 박지원의 허생전을 기반으로 희곡으로 써 공연했고, 이남희(李男熙, 1958~현재)는 '허생의 처'을 집필했다.
최시한(崔時漢,1952,전 숙명여대 교수)은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이라는 소설을 냈다. 사회상을 비꼬면서 허생전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제와 전개가 뚜렷해 수많은 패러디 작품이 나오고 있다. 이른바 ‘허생전 패러디’가 유행했다. 공생전 (공대생+허생전), 사생전(사법고시생+허생전), 교생전(교생+허생전), 벤처 허생전(스타트업+허생전), 밀생전(밀리터리+허생전), 허충성전(북한+허생전), 순실전(최순실+허생전) 등이다.

박지원이 그린 묵죽도(墨竹圖).출처 '연암, 평생 소원인 중국을 가다'.www. dreamwas.com 재인용.

#.박지원(朴趾源,1737~1805)=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자이자 조선 최고의 문장가중 한명이다. 반남(潘南, 현 전남 나주시 반남면) 박씨다.
북학파(상업 중심의 개혁론을 외치던 실학자 집단)의 핵심이다.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황해도 금천 첩첩산골에 있는 연암협(燕巖峽, 제비 바위 골짜기)에서 따왔다.

1.정통 노론 가문의 양반계급 출신이다.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를 지낸 박필균(朴弼均, 1685~1760)으로 예조, 공조, 호조, 병조참판, 대사간 등을 지냈다.
아버지 박사유(朴師愈,1703~1767)는 음서로 관직에 나갔으나 큰 직책은 맡지 못하고, 사망했다. 연암은 박사유(사후 이조판서 추증)의 둘째 아들이다.
16살(1752)에 처사 이보천(李輔天)의 딸 전주이씨((1737~1787)와 결혼했다. 아들로 연암의 행장 ‘과정록(過庭錄, 1826년 탈고)’을 지은 박종채(朴宗采, 1780~1835)가 있고, 손자는 연암 사망 2년 후에 태어난 박규수(朴珪壽, 1807~1877)다.

2.연암은 문인 가문인 처가 사람들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 장인 이보천과 처삼촌(장인 동생)인 이양천(?~1755, 호 영목당)의 문하에서 맹자의 사상을 기록한 ‘맹자’, 사마천의 ‘사기’ 등을 교육받았다.
또 이들에게서 시 짓는 법, 글과 문장 쓰는 법을 배우고, 습작했다. 처삼촌이 40세로 요절하자 '제영목당이공문(祭榮木堂李公文)'을 지어 애도했다. 처남 이재성(李在誠)은 평생의 친구이자 학문에 충실한 조언자였다.

초서로 쓴 1781년의 박지원 편지 근묵.서울에 있던 박지원이 새해를 맞아 친형인 박희원(朴喜源)에게 보낸 편지로 새해인사와 선물, 주변인 근황을 전하고 있다.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소장. photo by terms.naver.com

3.연암은 1761년 집안의 기대 때문에 과거시험 응시해 초시에 합격했으나 성균관 사마시에서는 고목이나 노송 등만 그려놓고 나왔다고 한다. 1765년에는 과거시험 1차에 장원했으나 2차 시험에는 백지를 제출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과거를 피했으며 학문 연구와 저술, 제자 양성에 몰두했다.
관직에 나간 것은 정조와 반남박씨 가문의 적극적인 권고로 1766년에야 음서(蔭敍, 중신 및 양반의 신분을 우대하여 친족 및 처족을 과거와 같은 선발 기준이 아닌 출신을 고려해 임명)로 선공감(繕工監,공조 소속으로 토목(土木)과 영선(營繕)에 관한 일을 맡았던 기관) 감역(종9품)이 됐다.
이후 1789년 평시서(平市署, 도량형(度量衡)과 시장, 유통, 물가를 관장하는 관청) 주부(主簿, 종6품)·사복시(司僕寺, 말, 수레 및 마구와 목축에 관한 일을 맡던 관청) 주부(主簿), 1791년 한성부 판관(종5품), 1792년 안의현감(安義縣監, 종6품),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 1800년 양양부사를 역임했다.

4.연암집은 1901년 구한말 천재 중의 한 명인 김택영(1850~1927)에 의해 한문 그대로 처음 간행됐다. 최초의 한글 번역은 역사학자 김성칠(1913~1951, 전 서울대 사학과 교수, 6.25전쟁 중 피살)이 1948~1950년 내놓았으나 미완성(사망하면서 중단)이었다.
북한에서 한문학자 리상호가 첫 완역(1955~1957)해 발간했다. 주요 역본으로 이가원(1917~2000,전 단국대 중문과 교수)이 번역한 ‘국역 열하일기(1966~1973)’ 등이 있다. 기존 번역의 문제점을 지적한 김혈조(1954~현재, 전 영남대 한문교육학과 교수)의 완역본(2009)도 나왔다.

5.조선 최고의 문장가 중 한 사람인 연암은 언문(諺文,속된 말, 한글)을 아예 쓰지 않았다. 실사구시를 지향한 대 문장가 연암의 ‘한글 문맹’은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연암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실학파(다만 홍대용(1731~1738)은 한글 편지가 남아 있음)도 언문 서책이나 편지를 남기지 않았다.
이는 실학파보다 100년이나 앞서 살았던 서포(西浦) 김만중 (金萬重. 1637~1692, 숙종시대)이 한글로 많은 글을 남겼다는 점에서 비교된다.

6.연암은 부인과 사별했는데 재혼도 안 하고 첩도 안 들이고 살았다. 1800년 양양부사가 되었고 1801년 봄에 사직했다가 이후 건강이 악화됐다.
1805년 10월 20일 한성부 가회방(嘉會坊)의 재동(齋洞)에서 영면했는데 ‘깨끗하게 목욕시켜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향년 68세였다.
아들 박종채(朴宗采,1780~1830)가 ‘과정록(過庭錄,1826)’을 써 아버지를 기록했고, 후손들이 ‘나의 아버지 박지원(박희병 옮김,1 998, 돌베개)’으로 출판했다.
박종채는 구한말 개화파의 시조로 1866년 9월 평양 대동강에서 미국의 무장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침몰시킨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朴珪壽,1807~1877,고종 때 우의정)의 아버지다.

연암의 손자이자 1866년 7월 평양 대동강에서 일어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 침몰 사전의 주인공 박규수.photo by wikipedia

연암의 유명한 제자로는 박제가(朴齊家, 1750~1805), 유득공(柳得恭, 류득공, 1748~1807, 저서 발해고),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아들이 ‘청장관전서’를 편찬했다) 등이 있다.

7.연암 사망 때의 제문(처남 이재성 씀)에 나오는 말이 ‘조선의 문장가 박지원’을 웅변한다. “보검이나 큰 구슬은 시장에서 살 수 없는 법이고 하늘이 내린 글이나 신비한 비결은 보통의 책 상자 속에 있을 턱이 없다”
묘는 당시 경기 장단군 송서면(松西面) 대세현(大世峴)에 썼다. 현재 북한 주소로는 개성시 판문구역 은덕동이다. 일제강점기 때 무덤이 소실되고 1959년에 재발견됐다고 한다. 1999년 북한 당국이 황진이(黃眞伊) 무덤과 함께 묘역 개보수을 했다고 한다.

미국 하와이대 출판부에서 2010년 나온 열하일기 표지. 러허(熱河) 강 연안 온천도시 청더(承德)의 영어 표기 Jehol을 따서 The Jehol Diary라는 이름으로 간행됐다.photo by 예스24.

주요 작품으로는 ‘광문자전(廣文者傳,1755년 전후)’, ‘민옹전(閔翁傳,1757)’,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1767), ‘과농소초(課農小抄,1799)’, ‘열하일기’, ‘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 등이 있다. (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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