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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허클베리 핀의 모험-미국 문학의 아버지가 쓴 스핀오프 소설은 전작을 압도하는 호기심 유발 문장으로 서두를 연다 본문
“여러분이 ‘톰 소여의 모험’이라는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나를 잘 모르겠지만, 뭐 그건 상관없다. 그 책은 마크 트웨인이 썼고, 그 사람은 주로 사실을 말했다. 좀 부풀린 것이 있긴 하나 대체로 사실을 말했다. 그 정도야 뭐 별거 아니다. 나는 폴리 이모나, 과부나, 어쩌면 메리 정도를 빼면, 거짓말 한 두 번 안 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폴리 이모와-그러니까 톰의 이모 말이다. 메리와 과부 더글러스는 그 책에서 다 얘기됐고, 그 책은 아까도 말했듯이 좀 부풀려진 부분이 있는, 거의 실화다. 자, 그 책은 이런 식으로 끝난다. 톰과 나는 강도들이 동굴에 감춰뒀던 돈을 발견했고, 그건 우릴 부자로 만들었다. 우린 각각 6천 달러씩을 모두 금화로 갖게 되었다. 돈이 한 무더기로 쌓여 있으니 어마 무시해 보였다. 어쨌든 대처 판사가 그 돈을 가져가 이자를 불려서, 1년 내내 우리 각자한테 매일 1달러씩 주었다. 그걸로 뭘 하겠다 말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돈이었다. 과부 더글러스 아줌마는 나를 아들 삼아 데려가 문명인으로 만들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온통 자기만의 방식으로 끔찍하게 규칙과 예의를 따지는 그 과부의 집에서 산다는 건 나한텐 몹시 고됐다. 그래서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지자 훌쩍 나와 버렸다.”(허클베리 핀의 모험, 마크 트웨인 저, 여지희 역, 새움, 2019)

1.강연장에서 청중과 대화하는 듯한 말로 첫 문장을 시작하고 있다. 요즘 말로 하면 북콘서트에서 이야기하는 느낌이다. 전작(前作)과 작가를 내세워 연결고리를 맺는 한편 전혀 다른 새로운 이야기가 허구 아닌 실화로 나온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래서 전작의 끝을 이야기해주고 독자의 호기심을 최대한 유발하기 위해 가출(家出)로 마무리 하고 있다. 작가 스스로가 내레이터가 돼 호기심을 끌어올리는 의도적 개입이다. 도입부 전체적으로 어지러운 이야기 전개와 문체 같지만 쉬운 낱말과 어휘들로 독자들이 쉽게 읽도록 했다. 본문에 나오는 *톰 소여의 모험은 1876년에 발표한 저자의 소설이다. *마크 트웨인은 글쓴이 자신이다.

2.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1884)’은 현대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사실상 유일한 책이자 세계 문학사의 고전(古典)으로 자리매김한 소설이다. 평단에서 미국 현대문학의 효시이자 핵심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걸작(傑作)이다.
당시 미국 잡지 ‘센추리 매거진’에 일부 연재됐다가 미국과 영국에서 동시 출판 예정이었지만 1884년 12월10일 영국 런던 샤토앤윈더스(Chatto & Windus)출판사에서 먼저 나왔다. 미국에서는 두달 늦은 1885년 2월 찰스 L. 웹스터 앤 컴퍼니(Charles L. Webster and Company)에서 나왔다. 책에 나오는 원본 삽화는 당시 유명잡지 ‘Life’에서 일하던 젊은 아티스트 에드워드 윈저 켐블(E. W. Kemble, Edward Winsor Kemble, 1861~1933)이 그렸다. 한편 허클베리는 북아메리카에 자생하는 블루베리와 비슷한 열매 나무다.
3.미국 대부분의 고등학교 교과과정 책에 실렸을 정도로 유명한 소설이다. 노벨 연구소 선정 최고의 책에도 포함됐다.하지만 이 소설은 처음 출간되자 곧 금서(禁書) 판정을 받았다. 매사추세츠주 콩코드도서관위원회는 이 책을 ‘쓰레기’로 판정했고, 도서관 장서 목록에서 삭제했다. 주인공 핀의 거짓말과 욕설, 상스러운 말이 기독교 도덕을 거스르고, 제도 교육을 거부하고 조롱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당대 유명 여류 작가 루이자 메이 올콧(Louisa May Alcott, 1832~1888. 저서 ‘작은 아씨들’)도 이 책의 출간을 비판하면서 트웨인이 "우리의 순수한 마음을 가진 젊은이들에게 더 나은 것을 말할 수 없다면 그들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 최선"이라고 절필을 권할 정도였다.

4.산문 서사 형태의 피카레스크(Picaresque, 악당 이야기 형식) 구성으로 에피소드들을 엮은 옴니버스형 소설이다. 전작인 ‘톰 소여의 모험(The Adventures of Tom Sawyer,1876)’의 ‘스핀오프(Spin-Off, 파생작 또는 번외작,후속작) 작품이지만 전작을 월등하게 뛰어넘는 위대한 소설이다. 세계 각국에서 전작보다 훨씬 유명하고, 더 많이 연구되는 소설이다.
소설에서 허클베리 핀과 짐이 뗏목을 타고 이동한 거리는 880km나 된다. 현재 미주리주 세인트피터즈버그 마을에서 아칸소주 파이크스빌 마을까지다. 한국으로 따지만 부산~신의주(총 840km) 종단 거리보다 길다.

5.등장인물은 주인공으로 전작의 주인공 톰의 절친한 친구 허클베리 핀(Huckleberry(Huck) Finn, 허크), 흑인 노예 짐(Jim), 전작 톰 소여의 모험의 주인공 톰 소여(Thomas (Tom) Sawyer), 허크를 양자로 들여 교육시키려는 과부 더글러스 부인(Widow Douglas), 더글러스 부인의 여동생 왓슨 부인(Miss Watson) 등이 나온다.
또 마을 유력자이자 전작에서 히로인으로 나온 베키의 아버지 대처 판사(Judge Thatcher), 허크의 막장 아버지, 자신이 프랑스의 왕 '루이 17세'라고 주장하는 노인 왕(The Dauphin), 왕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브리지워터'라는 공작 가문의 상속자라 주장하는 공작(The Duke, 다른 이름 빌지워터, Bilgewater) 등이 등장한다.
부유한 후견인 피터 윌크스(Peter Wilks)의 세 어린 조카 메리 제인(Mary Jane), 조안나(Joanna), 수잔 윌크스(Susan Wilks)도 나온다.

6.줄거리는 1851년 늦여름 미시시피강에서 소년 허클베리 핀과 흑인 노예 짐의 뗏목을 타고 내려가면서 벌어지는 모험 이야기다. 곳곳에서 만나는 마을에서 기상천외한 사건들을 겪는다.
1851년 늦여름 미시시피강. 증기선을 보며 남미를 여행할 꿈을 꾸는 남루한 차림의 소년 허클베리 핀과 흑인 노예 짐의 모험이 시작된다. 인종과 문화의 차이로 갈라져 있는 두 친구지만 자유분방한 헉 핀과 짐이 뗏목을 타고 미시시피 강을 표류하며 생애 최고의 이상한 여행을 떠난다.
온갖 에피소드 끝에 그들이 모험을 끝나고 짐은 허크에게 당시 사람들의 믿음과는 달리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평등하며 존중되어야 함을 깨닫게 해준다. 이후 허크는 톰과 헤어진 후 미개척지인 미국 서부 지역으로 모험을 떠난다.

7.이 소설은 출간 초기 금서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높은 평가를 받았다. 미국인 누구나 한 번쯤 읽어본 국민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1899~1961)는 “현대의 미국 문학은 모두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는 한 권의 책에서 비롯됐다. 그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이후에도 그만큼 훌륭한 것은 없었다”라고 격찬했다.
미국 소설가로 ‘벌거벗은 자와 죽은 자(The Naked and the Dead)’의 저자인 노먼 메일러(Norman Mailer, 1923~2007)는 “내 생각에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경이로운 작품이라고 말하는 독자는 내가 아마 천만 번째가 아닐까 싶다”고 높이 평가했다. 미국 소설가 랄프 앨리슨(Ralph Ellison, 1914~1994)은 “허클베리 핀과 짐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미국 소설도 없었으리라”고 말했다.

8.미국 최고의 소설인 만큼 영화도 1918년 무성영화로 나왔다. 또 1939년 미키 루니가 허클베리 핀 역을 맡아 나온 영화도 있다. 냉전 시절 소련에서도 영화가 나왔다.1985년 드루 배리모어가 출연, ABC의 TV 영화로 선보였다. 1993년에는 스티븐 소머즈 감독이 디즈니에서 제작했다.1979년과 1985년에 미국에서 드라마화가 됐다.

9.일본에서 1976년 타크 사와 헤럴드 엔터프라이즈 합작해 6부작 TV 장편 애니메이션 ‘허클베리 핀의 모험(ハックルベリィの冒険)’으로 나왔다. 후지TV에서 1976년 1월2~6월25일 방영했다. 한국은 1977년 12월5~1978년 4월17일 동양방송에서 더빙 방영했다. KBS1에서는 1983년 6월9~12월 22일 재방영 했다.
일본에서는 또 1994년 에노키 필름에서 ‘허클베리 핀의 이야기(ハックルベリー・フィン物語)’로 26부작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나왔다. 한국에서 1995년 초에 비디오(노래)로 발매했고, KBS1에서 ‘허클베리 핀의 모험’으로 더빙 방영했다.
10.한국에서는 어린이용 축약본을 제외하고도 완역본만 10종 넘게 출판됐다. 그런데도 ‘톰소여의 모험’의 후속편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대다수다.1980년 초에는 만화가 한희작이 소년경향에 만화로 연재했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1835~1910)=미국 풍자 문학의 대가이자 발명가. 미국 문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인물. 타자기만을 사용해서 원고를 집필한 최초의 작가. 본명은 새뮤얼 랭혼 클레먼스(Samuel Langhorne Clemens)이다.
인쇄업자, 탐사 보도 기자, 유람선 선장, 공무원, 베스트셀러 소설가,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정치 에세이스트, 성공한 극작가이다.
마크 트웨인은 필명이다. ‘Mark twain’은 2패덤(약 3.66m)이라는 뜻으로 배가 강을 지날 때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깊이다. Mark twain을 처음 사용한 이는 '아이제이어 셀러'라는 이름의 미시시피강 수로 안내인이었다고 한다. 또다른 필명 ‘토머스 제퍼슨 스노디글라스’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다.

1.미국 미주리 주 먼로 카운티의 플로리다(Florida)라는 작은 마을에서 1835년 태어났다. 버지니아 출신의 아버지 존 마셜 클레멘스(John Marshall Clemens, 1798~1847)와 켄터키 출신의 어머니 제인 램프턴(Jane Lampton, 1803~1890)과 사이에서 일곱 자녀 중 여섯째였다.
4~5살 무렵 가족이 미시시피 강변의 소도시 한니발(Hannibal)]로 이사가사 그곳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변호사이자 판사였지만 11살 때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초등 5학년 과정을 마치고 인쇄소 수습공으로 일하다가 16세 무렵인 1851년 신문사의 인쇄 조판의 글자를 맞추는 식자공(植字工)이 됐다. 18세때 한나발을 떠나 뉴욕시, 필라델피아, 세인트루이스, 신시내티로 가서 인쇄업을 했다. 이때 공공도서관을 찾아 독학하면서 증기선 조종사의 꿈을 키웠다.

2.스무살 무렵 증기선 조종사 호레이스 E. 빅스비(Horace E. Bixby, 1826~1912)에게 픽업돼 조수로 일하며 뉴올리언스와 세인트루이스 사이를 다녔다. 직후 증기선 A. B. 챔버스에서 그랜트 마쉬(Grant Prince Marsh, 1834~1916)와 복무했다.
1858년 6월 13일 펜실베이니아 증기선의 보일러가 폭발해 동생 헨리가 부상을 입었다. 이후 1861년 미국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수로 안내인 직업을 잃고 남부동맹 군인으로 2주 정도 복무하다가 민병대 해산으로 탈영했다. 그해 1861년 네바다 준주 주지사 제임스 W. 나이의 비서로 있는 형 오리온한테 의탁했다.

4.트웨인은 1867년 샌프란시스코 지역 신문인 알타 캘리포니아(The Alta California, 창간 1847년 1월 9일~종간 1891년 6월 2일)와 뉴욕 트리뷴(New-York Tribune,1841 창간, 1966 종간)에서 프리랜서 일을 했는데 유럽과 지중해, 중동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이 때 동료 승객 찰스 랭던(Charles Langdon)을 만났는데 장차 부인이 될 여인의 오빠였다. 당시 랭던은 여동생 올리비아 아이오나 루이스 랭던(Olivia Iona Louise Langdon, 1845~1904)의 사진을 보여줬고, 귀국 후 집으로 초대했다.
트웨인은 랭던의 집에서 올리비아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fallen in love at first sight)’에 빠졌다. 하지만 트웨인의 청혼은 올리비아 부모의 반대로 거절됐다. 그러자 트웨인은 그 집에 더 머무르기 위해 마차에서 스스로 굴러떨어진다.
그리고 다친 상처를 치료한다는 핑계로 그 집에 머물며 끈질기게 부모를 설득, 결국 1869년 2월 약혼했다. 그리고 다음해 2월 뉴욕 엘마이라에서 목사이자 친구인 조셉 트위첼(Joseph Twichell, 1838~1918)과 토마스 K. 비처의 주례로 결혼했다. 둘은 약혼 이후 1869년부터 1871년까지 뉴욕주 버팔로에서 살았다.

5.트웨인은 19세기 남자로서는 매우 보기 드문 사랑꾼이었다. 자상하고 착실했고, 부부 금슬(琴瑟)도 너무 좋았다. 아내 올리비아가 아프면 글을 써서 나무에 걸어두며 완쾌를 기원할 정도였다. “새들아, 너희들이 우는 것은 본능이니 울지 말라곤 하지 않겠지만 되도록이면 좀 멀리서 울면 안 되겠니? 지금 우리 아내가 잠을 자고 있단다.”
아내와 사이에 4명의 자녀를 뒀다. 하지만 3명은 병으로 일찍 잃었다. 장남 랭던은 생후 19개월 만에 디프테리아로, 큰 딸 수지(Olivia Susan Clemens, 1872~1896)는 뇌수막염으로 24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막내딸 진(Jane Lampton Jean Clemens,1880~1909)마저 서른 아홉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나마 둘째 딸 클라라(Clara Langhorne Clemens Samossoud,1874~1962)는 88세까지 장수했다.

6.트웨인은 1868년 예일 대학의 비밀 결사 학생단체인 '스크롤 앤 키(Scroll and Key)'의 명예 회원으로 추대됐다. 친구인 조셉 홉킨스 트위첼(Joseph Twichell,나중에 목사가 됨)의 추천이었다.
1873년부터 트웨인은 가족과 코네티컷주 하트포드로 이사했다. 그리고 아내와 친한 ‘톰 아저씨의 오두막’의 작가 해리엇 엘리자베스 비처 스토(Harriet Beecher Stowe, 스토부인,1811~1896)의 옆집에 집을 짓고, 살았다.
다만 여름에는 아내 올리비아의 여동생이자 처제 수잔 크레인(Susan Crane)의 집인 뉴욕 엘미라의 채석장 농장에서 보내곤 했다. 농장 한켠에 수잔이 트웨인의 집필실을 지어준 영향도 컸다.
트웨인은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 1847~1931),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 1856~1943)와 교류도 깊었다. 1909년에는 토마스 에디슨이 코네티컷 주 레딩에 있는 트웨인의 집 스톰필드를 방문, 영상을 촬영하기도 했다. 이 영상은 단편 영화인 The Prince and the Pauper(1909)에 사용됐다.
니콜라 테슬라와 매우 친한 친구 관계였다. 니콜라 테슬라는 평생 가까이 지낸 사람이 5명 가량이었는데 연구소에 트웨인이 찾아오면 기꺼이 자기 발명품을 보여주곤 했다고 한다.
트웨인 자신도 여성 브래지어의 후크를 만든 발명가였다. 아내가 당시 끈으로 묶게 되어 있는 브래지어 때문에 힘들어하자 후크를 발명, 특허까지 받았다. 풀 없이 스크랩하는 신문 스크랩북이나 보드게임도 발명했다.

7.트웨인은 제국주의에 결사 반대했다. 1901년 1월에는 뉴욕 반제국주의 연맹(1895년 미국이 필리핀을 합병하는 것을 반대하기 위해 세워진 조직) 부의장으로 취임할 정도였다.
1901년 예일 대학교에서 명예 문학 박사, 1902년 미주리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1907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06년에는 자신의 팬인 소녀들과 함께 엔젤 피시 앤 아쿠아리움 클럽(Angel Fish and Aquarium Club)을 결성했다. 이들 소녀들은 10~16세로 12명 가량으로 구성됐는데 편지를 주고받으며 콘서트와 극장에 초대하기도 했다.

8.트웨인은 자식들이 잇따라 요절하면서 말년에 우울증에 시달렸다. 당시 뉴욕 맨해튼의 웨스트 10번가 14번지와 코네티컷 주 레딩에 지어진 저택 스톰필드(Stormfield)을 오가며 살았는데 1904년 아내가 죽고, 1909년 12월 딸 진 마저 죽자 병세가 심각해졌다.
그는 1909년 “나는 1835년에 핼리 혜성을 가지고 왔다. 내년에도 다시 올 예정인데 함께 갈 것이다”고 했다. 그런데 이듬해 코네티컷 주 레딩 자택에서 4월21일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헬리혜성이 지구를 통과하기 한 달 전이었다
장례는 유일하게 살아 남은 둘째 딸 클라라와 그의 절친한 친구인 편집인 하월스가 뉴욕 5번가에 있는 브릭 장로교회에서 거행됐다. 장례식에는 지인과 팬들 3000여명이 운집, 애도했다.
트웨인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1857~1930) 대통령(재위 1909~1913)은 “마크 트웨인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즐거움, 진정한 지적 즐거움을 주었고, 그의 작품은 앞으로도 수백만 명에게 그러한 즐거움을 계속 줄 것입니다. 그의 유머는 미국적이었지만, 영국인들과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그의 동포들만큼이나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그는 미국 문학의 영원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고 애도했다.

9.미국 유명작가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 1897~1962)는 생전 “마크 트웨인은 미국 문학의 아버지다”고 선언했다. 20세기 최고의 작가라 불리는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등 많은 작가도 “마크 트웨인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을 정도다
주요작품으로는 도금시대(1873), 톰 소여의 모험(1876), 왕자와 거지(1881), 허클베리 핀의 모험(1884), 아서 왕 궁정의 코네티컷 양키(1889), 등이 있다.

10.문명 발전이 선구자적 인물로 강력한 노예폐지론자(Abolitionist)였고, 여성참정권을 주장했다. 제국주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도 강하게 비판했다.
미군이 필리핀을 침략, 현지 주민들을 학살하는 행태에 분노를 느끼고, ‘전쟁을 위한 기도’라는 글을 써서 미국을 학살자라며, 호된 비난을 쏟아냈다. 이 책은 미국에서 24년간이나 출판이 금지됐고, 죽고 나서 13년이 지난 1923년에서야 출판됐다.
영국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의 문학적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열등한 필리핀을 백인이 지배해야 한다”는 논리에 대해 극도로 혐오했고, 그를 제국주의자, 백인우월주의자라고 비판했다.

11.트웨인은 유명한 일화가 많은 작가였다. 한 신문 칼럼에 "어떤 미국 정치가들은 개자식이다!"라고 공개 비판했다. 이에 정치인의 항의와 고소에 직면하자 사과문으로 "어떤 미국 정치가들은 개자식이 아니다"고 고쳐냈다.
트웨인은 장로교인이었지만 기독교 근본주의자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했다. 미국 YMCA 간사이자 목사이던 앤서니 콤스톡(Anthony Comstock. 1844~1915)에 대해 "진화가 안 된 원숭이"라고 직격했다.

12.미국 18대 대통령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Ulysses Simpson Grant,1822~1885, 남북전쟁 때 북군 총사령관, 50달러 지폐 모델)와 친해서 자서전을 완성해 출판해 주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Affaire Dreyfus)에 대해서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한 에밀 졸라(Émile Édouard Charles Antoine Zola, 1840~1902)를 전적으로 지지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19세기 말 프랑스 제3공화국이 유대인 혈통의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1859~1935)에게 부당하게 독일 스파이 혐의를 씌운 것을 말한다. 에밀졸라가 파리에서 나오는 신문 ‘로로르(L'Aurore)’1898년 1월 13일자에 ‘나는 고발한다’를 써서 사건이 확대됐다.
트웨인은 “나는 에밀 졸라를 향한 깊은 존경과 끝없는 찬사를 보낸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들은 한 해에도 백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 다르크나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고 말했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