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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혁명론-악(죄)의 평범성을 설파한 수능 논술 단골 작가의 철학 산문은 ‘주의’의 낡음과 혁명으로 시작한다. 본문
“서론-전쟁과 혁명. 마치 사건들이 레닌의 초기 예측을 실현시키려고 서두르기나 한 듯, 전쟁과 지금까지 혁명은 20세기의 흐름을 결정해 왔다. 그리고 전쟁과 혁명은 여전히 우리 세계의 핵심적인 정치적 쟁점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19세기의 이데올로기들과 구분된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주의 주장으로 규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 세계의 주요 실재들과의 접점을 상실한 민족주의와 국제주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같은 것들은 19세기의 이데올로기다. 혁명과 전쟁은 자신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는 어떠한 교의보다도 오래 살아남았다. 각 민족들은 혁명을 계기로 세계 여러 나라 사이에서 자연법과 자연신의 법이 자신들에게 부여한 독립과 평등의 지위를 유지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한나 아렌트 저, 홍원표 옮김, 한길사, 2004)
1.20세기의 화두인 혁명과 전쟁을 내세운 논문의 서론 치고는 무난히 읽힌다. 하지만 원문을 가감없이 번역해서인지 주어가 애매하는 등 깔끔하지 않다.어려운 주제를 최대한 쉽게 쓸려는 고심이 배어있지만 배경 지식이 필요한 도입부다. 첫 문장에 혁명의 대명사 ‘레닌’을 내세운 것은 독자들의 주목을 끌기 위한 구성이다. 또 혁명과 전쟁의 근본 원인인 ‘주의’의 낡음을 내세워 책의 전개 방향을 예시하고 있다. 다만 레닌의 초기 예측에 대한 설명이 없어 궁금한 상태에서 읽어야하는 첫문단이다. *.레닌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혁명가로 불리는 러시아 10월 혁명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Lenin, Vladimir Ilich Ulyanov, 1870~1924, 소련 첫 국가 원수)이다. *.교의(敎義)는 주된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2.한나 아렌트의 ‘혁명론(On Revolution, 1963)’은 20세기에 나온 유명한 철학 에세이다. 특히 철학도가 아닌 정치 학도들이 읽어야 할 교과서 같은 저서다.
저자의 정치 사상을 정리해 독자에게 혜안(慧眼)을 주는 책이다. 전공자 아나 일반 독자도 큰 부담없이 접근할수있는 책이다. 하지만 출판 초기에는 큰 평가를 받지 못했다. 또 책이 많은 사례를 구체적으로 분석한 경험론적, 실제적인 결과물이 아니어서 비판도 뒤따랐다. 특히 암시적인 내적 성찰의 결과물이라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럼에도 20세기를 지배한 혁명과 전쟁에 대해 탁견(卓見)과 혜안(慧眼)을 주는 책은 없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것은 1956년 일어난 헝가리 혁명(Hungarian Revolution, 1956년 10월23일~11월10일)이었다. 소련의 개입으로 좌절됐지만 공산 정권을 대중이 전복시킬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준 사건이 준 충격이 계기였다. 저자는 이 책을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자신을 지도해 준 실존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Theodor Jaspers,1883~1969) 부부에게 헌정했다. 1963년 미국 펭귄북스(Penguin Books)에서 출판됐다.
3.이 책은 근대의 여명기인 18세기에 세계를 뒤흔든 두 개의 혁명인 미국 혁명(American Revolution, 독립 전쟁 포함, 1775~1783)과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 1789년 7월14~1794년 7월28일)을 비교, 분석한다.
프랑스혁명은 실패했지만 미국 혁명은 성공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는 공산주의 이론가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를 추종하는 수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반대되는 탁견(卓見)이다. 프랑스혁명의 실패는 혁명 지도자들이 ‘자유 쟁취’라는 본래 목적을 잃고, 대중을 연민(자유보다 빈곤 해결)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자코뱅(Jacobins)파 혁명지도자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Franç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1758~1794, 프랑스 혁명기 제26·45대 국민공회 의장, 단두대 사형)가 빈곤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제2의 전제정(專制政)을 구축, 자유를 파괴했다고 비판한다. 자코뱅은 파리1구 생토노레 거리(rue Saint-Honoré)에 있는 수도원 이름이다.
이에 반해 미국 혁명은 지도자들이 모든 시민의 정치적 자유(공동체, 공공이익, publics)라는 목적을 지켰기 때문이라고 설파한다. 이에따라 미국 혁명은 영구 혁명의 늪(위험)에서 허우적거리는 러시아, 중국의 혁명과 구분되는 혁명이었다고 분석한다.
4.저자는 혁명을 ‘새로운 시작과 자유에 대한 열망’으로 해석하면서 혁명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여기서 자유란 ‘방임형 자유(liberty)’가 아니라 ‘정치적 자유(freedom)’를 의미한다고 적시한다.
번역자 홍원표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전 한국 한나아렌트학회장)는 이 책에 대해 “‘새로운 시작’과 자유를 기리는 혁명송(革命頌)”이라고 표현했다. 정치적 비극 속에서 희망의 빛을 찾고자 한 혁명의 노래(Song)라는 것이다.
5.혁명론에 대해 비판도 만만치 않다. 이집트 출신 영국 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1917~2012)은 “(한나 아렌트의 혁명론이) 사건들과 그로부터의 증거들을 선택적으로 이끌어 냈다”고 주장했다. 특히 작가가 1911년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중화민국을 성립시킨 중국 신해혁명(辛亥革命, Chinese Revolution, Xinhai Revolution)과 같은 서구에서 사례를 찾을 수 없는 혁명을 부정확하게 배제했다고 지적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20세기 세계적인 정치 이론 철학가. 독일 출신의 미국의 정치 철학자. 본명은 요한나 콘 아렌트(Johanna Cohn Arendt)이다. 한국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정치철학자이자 사상가다.
1.독일 북부 하노버 근교 린덴(Linden)에서 엔지니어였던 유대계 아버지 파울 아렌트(Paul Arendt, 1873~1913)와 어머니 마리타 콘(Martha Cohn, 1874–1948) 사이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가족 중 유명인에는 작가이자 첫 여성 경찰관인 고모 앙리에트 아렌트(Henriette Arendt, 1874~1922)가 있다.한나는 4살 때인1910년부터 유치원에 다녔는데 아버지 파울이 한나가 일곱 살 때 사망,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이마뉴엘 칸트의 고향인 북부도시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현재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서 보냈다. 그곳은 당시 유대 계몽주의의 중심도시였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 유대인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
특히 랍비(Rabbi, 유대교의 율법학자 또는 종교 교사로 자원봉사하는 상담 선생)인 헤르만 보겔슈타인( Hermann Vogelstein) 으로부터 종교 교육을 받았다.
2.중등교육 과정을 쾨니히스베르크에 있는 여자사립학교(대학진학 예비학교)인 쾨니긴-루이즈-슐레 (Königin-Luise-Schule, 또는 루이젠슐레,Luisenschule)를 다녔다. 16세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이해할 정도로 명석했던 한나는 이 학교에서 교사에게 반항하다가 퇴학당했다. 그때부터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당시 독일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은 폴란드 출신 사회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1871~1919, 독일 우파에 붙잡혀 감옥 이송 도중 호송병이 살해해 베를린 운하에 던져짐)를 우상으로 여기고 공부한다.
3.1차 세계대전 이후 한나의 어머니는 사회민주주의 토론 그룹에서 활동했다. 어머니는 1920년 철물상이자 홀아비였던 마틴 비어월드(Martin Beerwald, 1869∼1941)와 재혼했다. 한나에게는 클라라(Clara, 1901∼1932)와 에바(Eva, 1902∼1988)라는 두 명의 언니가 생겼다.
한나는 1922년 고등 교육기관 진학을 위해 베를린으로 갔다. 베를린 대학교(University of Berlin) 청강을 거쳐 1924년 독일 중부 헤센주에 있는 마르부르크 시의 공립대학 마르부르크 대학교( University of Marburg)에 진학했다.
18세의 학생이었던 한나는 이곳에서 유부남이었던 독일 유명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1889~1976)를 스승(당시 철학 교수)으로 만나 연인(불륜) 사이가 된다. 한나는 하이데거가 아내와 이혼하기를 바랐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고, 둘은 헤어졌다.
4.한나와 하이데거의 인연은 질겼다. 하이데거는 나중에 나치 부역자(나치 집권 직후인 1933년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총장 취임)가 됐고,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나치 부역자 심사를 받는다. 세계 철학계의 구명운동 속에서 미국에 있던 한나도 독일로 가서 스승을 변호하는 증언을 했다.
그런데 1975년 초 하이데거는 노환으로 앓아눕자 부인 엘프리드 페트리(Elfriede Petri)에게 한나의 초청을 부탁한다. 이에 부인이 미국에 있는 한나에게 편지를 보내고, 다시 독일로 가서 하이데거를 만난다. 그런 후 한나는 미국으로 돌아와서 그해 세상을 떠났다. 하이데거는 이듬해 사망했다.
하이데거는 한나 사망 직후, 한나가 없었다면 (유명 저서) ‘존재와 시간’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5.하이데거와 관계를 청산한 한나는 철학도인 귄터 앤더스(Günther Anders, 귄터 슈테른 Günther Siegmund Stern,1902~1992)와 1929년 23세 때 결혼했다. 그해에 아렌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의 개념’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남편이 프랑크푸르트사회연구소에서 논문 승인을 받지 못하자 부부는 베를린에서 살았지만고, 1932년 나치가 집권하면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체포해 일주일 간 감금하고 독일 국적을 박탈하자 1933년 탄압을 피해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삶은 더 혼란해지고 결국 1941년 남편과 이혼한다. 둘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6.한나는 파리 망명시절인 1936년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1892~1940)의 동료인 마르크스주의자이지만 전향한 공산주의자 하인리히 블뤼허(Heinrich Blücher, 1899~1970, 시인이자 철학자, 미국 바드칼리지 철학교수)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
둘 다 배우자가 있었던 시기였다. 둘은 1941년 비슷한 시기에 배우자들과 헤어졌고, 그해 말 결혼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건너간다. 미국에서 무국적자로 10년을 지낸 한나는 1951년 미국 국적을 얻었다. 1953년부터는 프린스턴대, 케임브리지대, 버클리대, 시카고대 등의 강사를 거쳐 1959년에 프린스턴 대학 전임 교수직에 지명받는다. 프린스턴 대학 최초의 여성 전임 교수가 된 것이다. 그해 독일 함부르크 시에서 주는 레싱 상을 받는다.
7.한나가 유명세를 탄 것은 나치 전범(나치 독일 친위대 중령)인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1906~1962, 이스라엘에서 교수형)’ 에 대한 취재와 탐구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전범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에서 잡혀서 이스라엘 예루살렘으로 이송(실제는 납치)돼 재판을 받았는데 한나는 뉴욕에서 나오는 유명 주간잡지 ‘뉴요커(The New Yorker,1925년 창간)’의 특별 취재원 자격으로 재판 과정을 취재했다.
한나는 아이히만을 집중 탐구,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정립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이라는 책을 내 세계적인 호평을 받았다. 이 책 출판이후 유럽 문명에 기여한 공로로 덴마크에서 주는 ‘소닝 상(Danish Sonning Prize,1975)’ 등 많은 상을 받았다.
8.다만 한나는 아이히만을 불법(납치)으로 잡아들여 재판한 ‘예루살렘 법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유대인을 넘어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지른 자를 이스라엘이 납치(?)해 이스라엘 법에 따라 심판하는 일이 과연 타당할까?라고 물은 것이다. 모든 정의는 보편타당해야 하는데 예루살렘 법정은 그것에 어긋났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많은 법학자들은 동조했지만 이스라엘과 미국 유대인 관련 협회, 유대 커뮤니티 등에서는 격렬하게 비판했다. 유대인이면서 2차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한 유대인 학살인 ‘홀로코스트(Holocaust, 희생물을 통째로 태워버리는 특수한 제사라는 뜻)를 비판한 형국이라며 미국 유대 관련 단체 출입이 거부됐고, 이스라엘에서 오랫동안 저서가 판매 금지됐다.
9.1962년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The 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s), 1964년 미국예술문학아카데미(The American Academy of Arts and Letters) 의 회원으로 선출됐다. 아렌트는 미국 시민이었지만 문화적 뿌리는 유럽인, 언어는 독일어가 모국어(Muttersprache)였다. 1964년 한 TV 인터뷰에서 아렌트는 “독일이 그립진 않으며, 국적은 분명히 미국인”이라면서도 “모국어는 독일어이며 영어를 아무리 잘하고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영어로 소통한다고 해도 독일어를 대체하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10.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문 체인 스모커(담배 골초)였다. 아렌트는 “담배를 피는 것은 인류 전체를 위한 사명과 같다”는 농담을 할 정도로 시가를 사랑했다. 말년에는 담배 때문에 뇌경색과 심장병을 심하게 앓았는데도 끊지 못했다. 1975년 12월 ‘정신의 삶(The Life of the Mind)’이라는 새 책을 거의 마무리한 상태에서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다 별안간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영면했다. 아렌트는 죽기 직전까지 타자기 앞에 앉아서 원고를 썼다고 한다.
먼저 사망한 남편 블뤼허가 오랫동안 강의했던 뉴욕주 허드슨 강 유역 애넌데일(Annandale-on-Hudson, New York)에 있는 바드 대학에 묻혔다.
한나는 유언장에서 자신의 글과 사진의 관리인으로 ‘한나 아렌트 블루처 문학신탁’을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 거주했던 아파트와 책상, 책 4000여권 등은 1976년 버드대학(Bard College)에 기탁됐다. 이들 자료는 버드대학의 ‘인간과 정치을 위한 한나 아렌트 센터(Hannah Arendt Center for Politics and Humanities)’에 ‘한나 아렌트 컬렉션(Hannah Arendt Collection)’으로 보관되고 있다.
10.주요 저서로는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Love and Saint Augustine, 1929)’,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1951)’,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1958)’,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1963)’, ‘공화국의 위기(Crises of the Republic, 1972)’, ‘혁명론(On Revolution, 1963)’ 등이 있다.
사후에 ‘정신의 삶(The Life of the Mind)’, ‘파리아로서의 유대인, 1978)’ ‘이해에 대한 에세이, 1994)’, ‘책임과 판단, 2003)’, ‘정치의 약속, 2005)’, ‘유대적 저술,2007)’, ‘문학과 문화에 대한 성찰, 2007)’ 등이 출간됐다.
11.한나는 스스로가 '철학자'라고 불리는 것을 거절했고, '정치 이론가'로 불리기를 원했다. 또 페미니스트로 불리는 것도 찬성하지 않았다.
나치 독일의 피해자인 유대인이었지만 시오니즘이 포함하고 있는 민족주의를 경계했다. 1940년대 급속도로 진행되던 이스라엘의 건국에도 비판적이었다. 유대인과 아랍인들 사이의 협상과 타협, 합의가 없는 이스라엘 건국은 반유대주의의 새로운 파도를 일으킬 것으로 예측했다.이후 전개된 중동 상황을 보면 대단한 혜안인 셈이다.
미국 뉴욕주에 한나 아렌트 센터가 설립됐으며, 독일 브레멘, 드렌스덴 등에 한나 아렌트 기념 연구소가 있다. 또 이탈리아 베로나대학에는 한나 아렌트 정치학 센터가 운영 중이다.
12.1999년 프랑스의 페미니스트 철학자 카트린 클레망(Catherine Clément,1939~현재)은 ‘마르틴과 한나(Martin and Hannah)’라는 소설을 썼다.하이데거와 한나, 하이데거 부인과의 관계, 불륜, 사랑을 그린 소설이다.
전기 영화도 나왔다. 2012년 프랑스,이스라엘,룩셈부르크,독일 합작으로 독일 여성 감독 마르가레테 폰 트로타(Margarethe von Trotta, 1942~현재)가 ‘한나 아렌트’라는 제목으로 만들었으며, 15회 서울 국제 여성영화제(2013년 5월24~5월30일)에서 상영됐다.
한나 아렌트는 한국 대학 논술 시험에 가장 자주 출제되는 현대 철학자다. 제시문, 혹은 철학 자체가 나오기도 한다. ‘아렌트와 논술하기(리강 저, 한티재)’라는 책도 나와 있을 정도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