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홍길동전-권력과 부패의 세상을 바꾸려는 소설의 첫 문단은 음양조화와 상서로운 기운으로 시작한다. 본문

카테고리 없음

홍길동전-권력과 부패의 세상을 바꾸려는 소설의 첫 문단은 음양조화와 상서로운 기운으로 시작한다.

지성인간 2023. 9. 1. 12:06
728x90
반응형

"조선국 세종대왕께서 즉위하신 지 십 오년 되는 해 홍화문(弘化門) 밖에 한 재상이 있었다. 성은 홍이요 이름은 문이다, 사람됨이 청렴강직하여 덕망이 높은 당대의 영웅이었다. 일찍 벼슬길에 올라 직위가 한림(翰林)에 이르러 그 명망이 조정에서 으뜸이었다. 임금께서 그 덕망을 높이 여기셔서 벼슬을 올려 이조판서와 좌의정에 봉하셨다. 이에 승상이 감동하여 충성을 다하야 나라의 은혜를 갚으니, 사방에 일이 없고 도적이 없으며 연이어 풍년이 들어 나라가 태평하였다. 하루는 승상이 난간에 기대어 잠깐 졸았다. 서늘한 바람이 길을 인도하여 한곳에 다다르니, 푸른 산은 높이 솟고, 파란 물은 넘칠 듯 가득 차고 가는 버들 천만 가지에 녹음이 춤추듯 나부끼고 황금 같은 꾀꼬리는 봄의 흥취를 희롱하여 버드나무 사이를 오락가락하였다."(허균 저, 김탁환 풀어옮김, 민음사, 2009)

민음사가 2009년에 낸 '홍길동전' 표지 부분.

1.입으로 전해오는 판소리계 소설이 흔히 취하는 서술 방식을 취했다. 때와 장소, 등장인물, 명망 등을 주례사 하듯이 서술하는 것이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꿈과 현실을 오가면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도입부만 보면 현실 비판 등을 찾아볼 수 없는 전형적인 길몽소설이다. 산과 물, 버들, 꾀꼬리 등은 음양조화와 상서로운 일이 일어날 징조를 미리 암시하는 키워드라 할수 있다. 구어체와 대화체가 아닌 문어체 특징을  보이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한문의 잔영이 남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 문단에 나오는 *홍화문은 서울 창덕궁의 정문, *한림은 조선 시대 예문관 검열의 별칭이다.

2.허균의 '홍길동전(洪吉童傳, 조선 중기, 광해군 연간)은 한민족 소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원본이 사라지고 발견되지 않은 것이 대단히 아쉬울 뿐이다.
지은이와 쓰여진 연대가 확실한 소설이어서 문학사적으로 뛰어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저자를 알수 있는 것은 조선 중기 문신 이식(李植, 1584~1647)의 ‘택당집(澤堂集)’ 별집(別集) 권15 ‘산록(散錄)’에 전한다.
최초의 한글 소설 논란은 있지만 혁명 소설의 시초, 체제 모순을 비판한 첫 사회 소설이다. 전기(傳奇)류 이야기에서 벗어나 소설적 구조와 형태를 완벽하게 갖춘 첫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첫 한글 소설에 대해서는 논란이 여전하다.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 때 채수((蔡壽, 1449~1515)가 지은 한문 소설 ‘설공찬전’을 번역한 한글본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문학계가 최초의 한글 소설과 최초의 한글 번역소설과 차이에 대해 아직도 가르마를 타지 못하고 있다.

한글로 된 '홍길동전' 판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photo by terms.naver.com

3.홍길동전은 판각본·필사본·활자본 등 다양한 이본(異本)이 전한다. 한남본(翰南本), 야동교본(冶洞橋本), 어청교본(漁靑橋本), 송동교본(宋洞橋本), 안성(安城) 23장본, 안성 19장본, 완판본(完板本) 등이다.
이들 판본도 다시 경판(京板, 한양서 찍은 판)본과 완판(完板,  현 전주의 옛이름 완산에서 찍은 판)본, 안성(현 경기 안성)판본으로 나뉜다. 한문 필사본으로는 ‘위도왕전(韋島王傳)’이 있다. 활자본으로는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사이에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회동서관·덕흥서림 본 등이 있다.

4.홍길동전은 조선 연산군~광해군 시대의 여러 사건에서 영감을 받았다. 연산군 시대(1494~1506)의 ‘홍길동(洪吉同) 사건’이나 명종 시대(1545~1567)의 ‘임꺽정 사건’, 허균 당대(광해군 시대)의 ‘칠서(七庶)의 옥’ 등이다.
특히 홍길동은 1500년(연산군 6년)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나온 이래 실록에 총 열 번이나 언급된다. 소설은 이들 실제 사건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아 탐관오리 징치(懲治,징계하고 처벌), 부정부패와 적서차별 비판, 이상향 건설 등이 실감나게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홍길동전이 단순한 ‘영웅 전기’나 ‘영웅전’을 넘어서는 이유다.

소설 '홍길동전' 등장인물도. 출처=천재학습백과

5.주요 등장 인물은 주인공 홍길동, 아버지 홍문과 부인, 홍문의 하녀(나중에 첩) 춘섬, 홍길동의 배다른 형 길섭, 곡산의 기생으로 홍문의 총애를 받는 초낭 등이다.
줄거리는 서자(庶子)로 태어나 온갖 천대를 받으며 자란 길동이 공부 대신 무술을 익혀 가출해 활약하는 것이다. 탁월한 실력으로 활빈당을 조직해 도술과 기지로 탐관오리의 재물을 탈취해 빈민을 구제한다.더불어 탐관오리도 징치(懲治)한다. 나중에 병조판서를 받고 고국을 떠나 율도국을 건설한다. 율도국은 적서 차별 등이 없는 이상향으로 만든다.

홍길동전 글씨체 비교.오른쪽은 1~18장을 이루는 반듯한 해서체, 왼쪽은 19~36장을 이루는 초서와 해서체 중간 형태다.photo by terms.naver.com

6.홍길동전은 서포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의 '구운몽(九雲夢)'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논란은 있지만 구운몽도 한글본이 존재한다.  또 조선 후기에 나온 많은 영웅전들 대부분이 소설 구조와 형식 등을 답습했다.
영화 등 다양한 문화장르의 텍스트 역할을 하고 있다. 첫 영화는 윤백남(尹白南,1888~1954) 각본, 김소봉(金蘇峰, 일본인 야마자키 도키히고(Tokihiko Yamasaki) 감독의 영화 '홍길동전(The Story of Hong Gil-dong)'이다.
이 영화는 1934년 경성촬영소(京城撮影所)에서 제작, 조선극장에서 개봉했다. 1936년에 이명우(李明雨) 감독이 후편도 만들어 그해 6월 단성사(團成社)에서 개봉했다.

1967년 나온 홍길동전 포스터. 우리나라 최초 만화극 영화로 나왔다. photo by www daum.net

1967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만화극 영화 작품으로 나왔다. 신동헌(申東憲) 감독이 세기상사(世紀商事)에서 제작, 그 해 1월 대한극장에서 개봉했다. 이외에도 수많은 만화, 애니메이션 등으로 제작됐다.
뮤지컬 ‘홍길동’은 전남 장성군과 서울심포니오케스트라가 민관 합작으로 제작, 2009년 초연됐다. 이후 2010년 2월~4월 서울 올림픽공원 우리금융아트홀에서 공연됐고, 6월에는 극장 용에서 국립중앙박물관 용산 개관 5주년을 기념 공연됐다.
SBS 드라마 ‘홍길동(1998)’, KBS 드라마 ‘쾌도 홍길동(2008)’ 등이 방영됐다. MBC 드라마로는 2017년 ‘역적-백성을 훔친 도적’으로 방영했다.

KBS에서 2008년 방영된 '쾌도 홍길동' 포스터

7.1880년대에 외국에 소개됐다. 고종 외교 고문이었던 묄렌도르프(V. Moellendorff) 집사(부하직원) 아르누스(H. G. Arnous)는 ‘한국 전래 동화와 민담(Korea-Märchen und Legenden,1883, 독일 라이프치히)’으로 번역, 소개했다.
의료인으로 대한제국 황실 주치의 알렌(H. N. Allen,1858~1932) 박사를 통해 미국에 알려졌다. 알렌은 1889년 뉴욕에서 출간한 ‘Korean Tales(한국 소설)’에 홍길동전을 ‘Hong Kil Tong’으로 번역했다.
알렌은 우린나라 $최초의 병원인 광혜원을 서울에 세운 인물이다, 이 병원은 제중원이 됐고, 세브란스 병원의 모태가 됐다. 다만 고종과  친했던 알렌은 이권에도 많이 개입했다. 일설에는 조선 최대 금광인 운산금광 채광권을 획득, 노다지(NO TOUCH)의 주인공이라는 얘기도 있다.경인철도 부설권을  따내 일본에 팔기도  했다.

교산 허균 영정.출처=허균허난설헌기념관

#.허균(許筠,Heo Gyun, 1569~1628)=조선 중기 광해군 때의 정치가이자 학자. 한글소설 ‘홍길동 전’ 저자로 유명하다. 호는교산(교산).

1.조선 중기 강원도 강릉의 작은 어촌 마을 사천진리의 애일당(愛日堂)에서 태어났다. 애일당은 예조판서와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강릉김씨 김광철(金光轍, 1493~1550)의 집이다.
아버지는 동인의 영수(領袖) 허엽(許曄, 1517~1580)이고, 어머니는 김광철의 딸 강릉김씨다.허엽은 첫 부인 사별 후 두 번째 결혼이었다. 애일당 옆 초당(草堂)이 아내가 사는 곳이어서 허엽의 호(號) 중의 하나가 초당이다. 이곳에서는 강릉의 맑은 물로 두부를 만들었고, 판매도 했다. 이른바 초당두부다. 현대에 와서 전래 비법으로 만든 초당두부로 유명한 집이다.

2.허균의 가문은 당대의 명문가였다. 동인의 영수 아버지는 물론 이복형인 허성(許筬,1548~1612)은 이조와 병조판서를 역임한 문신이었다.
친형인 허봉(許篈,1551~1588, 창원부사 역임)은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 대사간 역임)의 문인으로 허균을 가르칠 정도로 학문이 수준급이었으나 38세로 요절했다. 누님으로 유명한 여류 문인 허난설헌(許蘭雪軒, 이름 허초희,1563~1589)이 있다.

3.허균은 천재였다. 다섯 살 때부터 글을 읽고, 9살 때 시를 지었다. 서울로 올라와서는 서애 류성룡(柳成龍, 1542~1607)에게서 문장을 배웠으며, 손곡 이달(李達, 1539~1612)에게서 당시(唐詩) 등을 배웠다. 또 18살 때는 형 허봉의 친구인 승려 사명당(惟政,1544~1610, 속명은 임응규, 任應奎)에게서 불교와 문학을 배웠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운 공로로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녹훈됐다.선조 27년(1594) 과거 급제, 세자시강원 설서(說書, 정7품) 등을 지냈다.
1597년(선조 30)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 공주 목사를 거쳤으나 탄핵받아 파면되기도 했다. 특히 1598년 형 허봉, 1599년 누나 난설헌이 사망해 충격을 받았다.

1999년 한국조폐공사에서 나온 홍길동전을 바탕으로 한 우표첩.photo by terms.naver.com

4.허균이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것은 1606년 원접사(遠接使, 중국에서 오는 사신 접대 관직)의 종사관(從事官) 때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 ?~1624)을 영접해 시를 주고 받았는 데, 주지번이 탄복해 명문장으로 이름이 났다.
1610년(광해군 2)에는 진주사(陳奏使, 중국에 임시파견 관직, 해명이나 잘못된 기록 고치는 사절) 부사(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한국 최초로 천주교를 접했다. 이때 천주교 관련 책을 들여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양명학(陽明學, 명나라 유학자 왕수인(王守仁, 호 양명,1472~1529)이 주창한 학문)과 이탁오(본명 이지,李贄,1527~1602) 관련 책을 대거 반입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돌아와 시관(試官, 각종 과거에서 책임을 맡은 관원)이 됐으나 탄핵으로 파직, 전라도 태인(泰仁, 현 정읍시)에 머물기도 했다.

5.허균의 삶은 광해군 5년(1613)에 일어난 이른바 ‘칠서지옥(七庶之獄, 계축년에 일어난 옥사, 癸丑禍獄)’에 연루되면서 전환점을 맞는다. 칠서지옥이란 7명의 서자가 주도한 변란을 처리한 옥사(獄事)를 말한다.
영의정 박순(朴淳, 1523~1589)의 서자 박응서(朴應犀, ?~1623), 전 의주목사 서익(徐益, 1542∼1587)의 서자 서양갑(徐羊甲,?~1613), 심전(沈銓, 1520∼1589)의 서자 심우영(沈友英, ?~1613), 병사 이제신(李濟臣,1536~1583)의 서자 이경준(李耕俊, ?~1613), 상산군(商山君) 박충간(朴忠侃, ?~1601)의 서자인 박치의(朴致毅)·박치인(朴致仁, ?∼1613), 허홍인(許弘仁, ? ~ 1613] ) 등이다.
이들과 친했던 허균은 연루 의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광해군 당시 대북파의 핵심으로 실력자인 이이첨(李爾瞻,1560~1623)과 친해졌다. 글방 동문이기도 한 실력자 이이첨에게 의탁하면서 출세 가도를 달린다. 칠서지옥에서 피했을 뿐만 아니라 호조참의(정3품)와 형조판서까지 올랐다.

6.이이첨과 친한 것은 결국 호사다마(好事多魔, 좋은일에 나쁜일이 낀다))로 돌아왔고, 허균을 재승박덕(才勝薄德, 재주가 많으면 덕이 부족하다)의 인물로 몰아가는 계기가 됐다.
이이첨의 의도에 따라 선조의 계비(繼妃) 인목대비(仁穆大妃, 1584~1632)의 폐비를 주장하면서 강경파로 활약한 것이 덕을 잃은 결정적 계기였다.
결국 인목대비는 폐비를 거쳐 서궁(西宮)에 유폐됐고, 그녀의 아들 영창대군(永昌大君,1606~1614)도 타살됐다. 충효의 조선사회에서 폐모살제(廢母殺第인목대비를 폐하고영창대군을 죽인 일)로 몰아간 것은 큰 부담이었다. 이때부터 헌균에게는 정치적 적군이 대거 생기면서 정계에서 제거 대상으로 몰린 것으로 보인다.

7.허균은 두 번 결혼했다. 1585년 안동김씨 김대섭(金大涉, 1549~1594)의 차녀와 결혼했다. 그런데 부인 김씨는 임진왜란 피난 중 함경도 단천(端川)에서 첫 아들을 낳고, 세상을 떠났다. 이어 아들도 병사했다.
동인의 초대 당수 성암 김효원(金孝元)의 딸 선산김씨와 재혼했다. 아들과 딸을 몇 명 낳았으나 아들은 연좌제로 사형당했고, 아들 한명(허굉)이 도망가서 살아남았다.
전라도 부안의 명기 이매창(본명은 향금, 香今, 1573~1610)과도 친했다. 매창은 촌은(村隱) 유희경( 劉希慶,1545~1636)의 연인이기도 했다.

8.1598년 정유재란대 조선에 온 명나라 문신 오명제(吳明齊, 1597년 임진왜란 참전)에게 누나의 시 200여편을 주었다. 이 시들은 ‘조선 시선’으로 간행됐고, 이후 명나라에서 간행한 ‘열조시선’의 바탕이 됐다.
조선 시선이 명나라 문인들에게 알려지면서 중국 문인들 사이에서 ‘난설헌 열풍’이 불었다고 한다. 허균은 1608년 누나의 시을 모아서 ‘난설헌집’을 출간했다.
9.폐모살제(廢母殺第인목대비를 폐하고영창대군을 죽인 일)에 앞장섰던 허균은 끝내 역적으로 몰렸다. 광해군10년(1618) 8월 24일,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문 앞에서 명확한 근거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거열형을 묘사한 KBS2 텔레비젼의 2011년7월20~10월6일 방영 드라마 '공주의 남자' 스틸 컷.

국문장에서 죽기 직전에 한 유언은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다!"였으나 무시당했다. 허균은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다. 거열형은 문자그대로 목과 사지를 밧줄에 묶어 소나 말의 힘으로 각각 반대 방향으로 당겨 찢어 죽이는 참혹한 사형법이다.
더 악독한 형벌로 능지형(陵遲刑·凌遲刑), 능지처참형(陵遲處斬刑)이 있다. 능지형은 살아 있는 죄인의 뼈와 살을 발라내 죽이는 형벌이다.

10.허균과 친했던 기자헌(奇自獻, 1562~1624, 대사헌 역임)은 허균 거열형(車裂刑) 소식을 듣고 “예로부터 죄인에게 형장(刑杖)을 가하며 신문하지 않고 사형이 결정된 문서도 받지 않은 채 단지 죄인의 범죄 사실을 진술한 말로만 사형에 처한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역모죄로 고변한 것은 정치적 동지였던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奇俊格, 1594~1624)이었다. 기준격이 허균을 역모 혐의로 고발한 것이다. 이 고발이 결정적으로 작용, 허균은 처형됐다..
당시 허균은 역적질을 할 이유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 세자빈이 후사가 없자 허균의 딸이 세자 후궁으로 간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허균의 딸이 소생을 낳게 되면 허균이 실세로 등장할 우려가 있다는 판단에 당시 실세들이 허균을 모함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11.허균의 가족들은 처형되거나 흩어졌다. 아들 한명은 용케도 피해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아들 허굉(許宏, 1606~?)은 허균이 처형당한 1618년 ‘조령(문경새재)을 넘어 영천의 정씨 집에 있다가 몇년 후에 울산의 고씨 집에서 훈장으로 지내며 살았다’고 한다. 허굉의 자녀들과 후손들은 300년 동안 남의 족보에 올라 있었다.
조선 멸망 후에도 허균은 복권이나 신원이 되지 못했다. 허균이 가문에서나마 복권된 것은 1999년 4월이었다. 역적으로 사형된 지 381년 만이었다. 그날 강릉시 포남동 허균·허난설헌 시비 공원에서 허균의 후손들은 허균의 억울함을 풀고 복권을 선언했다.
2018년 9월3일 교산 허균 400주기 때 ‘교산 허균 400주기 추모 전국대회추진위원회’가 청와대에 ‘조선 왕조에서 역모의 누명을 쓰고 처형당한 허균의 신원을 회복, 현대적 차원에서라도 억울함을 풀어주고 복권을 통해 명예를 회복시켜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내기도 했다.

허균이 금산 군수(錦山郡守)에게 보낸 편지. 성균관대박물관 소장. photo by terms.naver.com

12.허균의 작품이 전해진 것은 교산 스스로가 시절의 수상함을 알고 당시 소년이던 외손자 이필진(李必進)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등이 외손자에 의해 간행됐다.
주요 작품으로는 ‘엄처사전(嚴處士傳)’,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 ‘장산인전(張山人傳)’,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 ‘장생전(蔣生傳)’ , 음식이야기를 쓴 '도문대작(屠門大嚼)' 등이 있다.
‘홍길동전(洪吉童傳)’은 이름없이 발표됐으나 나중에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허균 작품이라고 기록해 알려졌다. 유몽인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역적 허균은 총명하고 재기가 뛰어났다”고 썼다.

전남 장성군이 만든 홍길동 테마파크 공원. 역사속의 실존인물 홍길동의 고향으로 활용하고 있다. photo by www.jangseong.go.kr

13.강원도 강릉시는 허균이 태어나 살던 곳이다. 허균의 생가와 기념관, 허균의 시비 등이 서 있다. 강릉 경포호를 따라 홍길동 캐릭터 로드도 있다.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치실마을에는 홍길동 생가터를 복원한 곳이 있다. 홍길동이 1440년에 장성군에서 태어난 실존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장성군은 홍길동 선양을 통해 관광자원하고 있다. (콘텐츠 프로듀서)

728x90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