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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나는 고발한다-세계 언론 사상 가장 유명한 글은 예의 바른 서간체로 통렬한 비판의 문을 연다 본문
“대통령 각하!
일전에 제게 베풀어 주신 따뜻한 환대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 감사의 마음과 더불어 당신의 영광에 흠집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하는 제 마음, 지금까지 그토록 찬란했던 당신의 명성이 가장 부끄러운 오점,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더럽혀지지 않을까 염려하는 제 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온갖 비열한 중상모략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당신은 프랑스와 러시아 동맹 체결 이후 애국 축제의 물결이 최고조에 달한 지금 진정 눈부시게 빛나고 있고, 노동 , 진리, 자유를 지향하는 우리의 위대한 세기를 장식할 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의 장엄한 성공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증스러운 드레퓌스 사건이라니, 당신 이름에 대해, 게다가 당신 통치에 대해 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먹칠인지요! 군사 법정은 에스테라지라고 불리는 자, 모름지기 진실과 정의에 대한 최대 모욕인 이 자에게 이제 막 감히, 명령에 따라,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끝났습니다. 프랑스의 얼굴에는 지울 수 없는 오점이 생겼고, ‘역사’는 당신이 대통령일 때 그런 사회적 범죄가 저질러졌다고 기록할 겁니다.”(에밀 졸라 저, 유기환 옮김, 책세상, 2005)
1.저널리즘 문학의 전형을 보여주는 도입부다. 시제와 글쓴이, 주제 의식을 뚜렷하게 밝히면서 글을 풀어나간다. 친숙한 편지체 형식을 빌려 예의 바르게 쓰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다. 약간의 흥분과 비약이 있지만 논리 정연한 글쓰기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적절한 쉼표 사용을 통해 중요 어휘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독자의 감정 개입을 유도하는 문장도 이어가고 있다.여론 환기를 위한 의도적 서술이라고 할수 있다. 화두(話頭)를 내세워 글의 목적 달성을 추구하는 쉽지 않은 화법(話法)이다.완벽한 논리와 설득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간에 나오는 프랑스-러시아동맹(Franco-Russian Alliance)은 1891∼1894년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에 체결된 정치 및 군사협정 등의 총칭이다. 만국박람회는 1889년 5월5~10월31일 파리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를 말한다.
2.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J'accuse)-공화국 대통령 펠릭스 포르 씨에게 보내는 편지, 1898’는 세계 언론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공개 서한이다.
파리에서 나오는 신문 ‘로로르(L’Aurore)’ 1898년 1월 13일자 1면 톱 기사로 모종의 사건을 은폐하려는 보수층과 군부에 직격탄이 됐다. 이 글의 계기는 1894년에 발생해 프랑스를 좌우 이념 대결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육군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1859~1935)에 대한 간첩 조작 사건이다.
이른바 ‘드레퓌스 사건(Dreyfus Affair)’이다. 이 사건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년 7월19~1871년 5월10일, 일명 보불(普佛)전쟁) 이후 프랑스를 휩쓸었던 군국주의, 반유대주의, 강박적인 애국주의 영향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포병대위 드레퓌스의 간첩 혐의를 놓고 프랑스 사회가 양분됐던 정치 스캔들이다.
작가는 신문 톱 기사의 공개 서한을 통해 대통령과 군부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원제는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그런데 로로르 편집장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Benjamin Clemenceau, 1841~1929, 전 프랑스 수상)가 ‘나는 고발한다’를 첨언할 것을 권유해 결정됐다.
당시 로로르는 파리를 중심으로 하루 3만 부 이하로 팔렸으나 ‘나는 고발한다’가 실린 날에는 10배가 넘는 30만 부가 삽시간에 동났다고 한다.
이후 책으로 엮어져 나온 것은 1901년이다. ‘멈추지 않는 진실(La Vérité en marche)’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에밀 졸라가 1897년12월~1900년 12월 동안 쓴 13편의 시론을 묶은 것이다.
3.드레퓌스 사건이라는 희대의 조작 사건이 터진 계기는 프랑스가 보불(普佛)전쟁(1870~1871)에서 프로이센에 참패하면서 불어닥친 애국주의와 반유대주의 영향이 컸다.
드레퓌스 사건이 터지자 프랑스 사회는 보수와 진보세력으로 갈라서 최악의 대결로 치달았다.수많은 지식인들이 군부와 보수세력에 맞서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고 나섰다.
하지만 사건은 유죄로 끝났다. 프랑스 육군군법회의가 1894년 12월 22일 드레퓌스 대위에게 종신형을 선고한 것이다. 죄목은 반역죄였다.
이에 지식층과 진보세력은 거세게 반발했다. 특히 에밀 졸라는 자신의 문학적 성과와 명예, 목숨을 걸고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글을 싣기 시작했다.
졸라는 당시 “진실이 전진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늪지대를 지나가야 하는 것일까”라고 말했다.
졸라는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하는 보수주의자들의 살해 위협, 명예 훼손 소송, 각종 벌금 등에 시달렸다. 나중에는 영국으로 망명까지 했다.
당시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한 학자, 작가, 예술가 등을 ‘엥텔렉튀엘(intellectuel, 책임없는 선동가, 이상주의자)’이라고 불렀다. 이 말이 ‘지식인(intellectuel) 이 됐다.
4.나는 고발한다가 프랑스 사회를 들끓게 하면서 드레퓌스 사건은 다시 주목받게 됐다. 하지만 글을 쓴 졸라는 반(反)드레퓌스파, 민족주의자, 독재주의자들에 시달렸고, 결국 재판을 받게됐다. 졸라 재판은 1898년 2월 7일 열렸고, 논란 끝에 결국 명예훼손죄로 1년간의 징역형과 벌금 3000프랑이 선고됐다.
드레퓌스 사건은 나중에 진범이 나타났다. 군사 기밀을 적국에 넘겨준 것은 군부 요직에 있던 에스테라지 소령이었다. 하지만 군부는 여전히 승복하지 않았다.
이에 다시 지리한 재판 끝에 프랑스 최고재판소는 1906년 드레퓌스의 무죄를 확정 선고했다. 드레퓌스는 소령으로 복귀했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졸라도 같은 해 복권됐지만 이미 사망(1902년)한 뒤였다.
5.프랑스 사회를 뒤집어 놓았던 드레퓌스 사건의 최대 수혜자는 엉뚱하게도 나라없는 민족 유대인이었다. 드레퓌스 사건에서 이스라엘 건국의 뿌리를 발견했기때문이다.
드레퓌스 재판을 취재했던 오스트리아 신문의 유대인 출신 기자 테어도어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이 반유대주의를 통감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는 시오니즘(Zionism) 운동을 주창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이 뭉치면서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수립의 계기가 마련됐다.
#.에밀 졸라(Émile Zola,1840~1902)=프랑스 저널리스트이자 비평가. 전 세계에서 출판과 번역, 해석이 가장 많이 이뤄진 프랑스 소설가.
노벨문학상 첫 번째에 이어 2회째 후보로 올랐으나 수상은 못했다. 본명은 에밀 에두아르 샤를 앙투안 졸라(Émile Édouard Charles Antoine Zola)이다.
1.파리 생-조제프 가 10번지에서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의 아버지 프랑수아 졸라(François Zola)와 프랑스인 어머니 에밀리 오베르(Émilie Aubert)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토목기사로 이탈리아 군 하급 장교로 복무했다. 3살 때인 1842년 토목사업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 남부의 엑상프로방스로 이주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1847년 사망하면서 극심한 생활고를 겪다가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의 명문 부르봉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생계가 어려워지면서 1858년에 파리로 다시 이주, 리세 생루이(Lycée Saint-Louis)에서 학업을 마쳤다. 중학 시절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과 장-바티스탱 바유(건축가) 등을 만나 지속적으로 우정을 나눴다.
세잔과는 소설 ‘작품(L'Œuvre)’ 으로 금이 가기도 했다. 세잔이 작품 속 실패한 화가 클로드 랑티에가 자기를 희화화한 것이라며 1866년 홧김에 절교를 선언하기도 했다.하지만 화해해서 지속적인 우정을 나눴다.
2.1859년에 프랑스 국공립 대학 입학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Baccalauréat) 이과 시험에 두번이나 떨어진 것이 문학에 몰두하는 계기가 됐다.
1862년에 아셰트 출판사(Hachette Livre) 영업부에서 근무하면서 1864년 첫 단편집 ‘니농에게 주는 이야기(Contes à Ninon)’를 냈다.
1867년 ‘테레즈 라캥(Thérèse Raquin)’으로 자연주의 작가로 인정받았다. 이때부터 클로드 베르나르(BERNARD, Claude,1823~1878)의 실험 의학을 문학에 적용했다. 이 소설은 한국에서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의 모티브가 됐다.
이후 1871년부터 20권 분량의 ‘루공 마카르 총서(Les Rougon-Macquart)’를 출판했고, 1877년 ‘목로주점(L'Assommoir)’으로 대성공을 거뒀다. 루공 마카르 총서는 유전학을 토대로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사회사를 다뤘다.
이에 졸라는 당대 최고 원고료를 자랑하던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보다 더 많은 고료를 받아 경제적으로 풍족해졌다고 한다.
3.졸라의 첫 사랑은 베르트라는 가난한 여자였다. 1860년~1861년 그녀에게 빠졌다. 졸라는 그녀를 가난의 늪에서 구하려고 했으나 파리 하류층의 버거운 삶과 맞닥뜨렸을 뿐이었다. 졸라의 첫 소설 ‘클로드의 고백(La Confession de Claude)은 이런 쓰라린 사랑에서 소재를 얻었다.
1865년 여성 재봉사인 알렉상드린 멜리(Éléonore-Alexandrine Meley)를 만났다. 둘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바로 전날이던 1870년 5월31일 결혼했다.
알렉상드린은 졸라를 만나기 전에 아이를 낳았는데 돌볼 수 없어서 친권을 포기했다고 한다. 이에 결혼 후 다시 아이를 찾으러 갔는데 이미 사망했다고 한다. 둘은 아이가 없었지만 알렉상드린은 졸라에게 없어서는 안 될 기둥이었다.
그런데 졸라는 파리 북부 메당에 살때 아내가 고용한 21세의 재봉사 쟌느 로제로(Jeanne Rozerot)와 사랑에 빠졌다.쟌느와 사이에는 1889년 데니스(Denise)와 1891년 자크(Jacques)를 낳았다. 아내 알렉상드린이 이를 안 것은 1891년 말이었다고 한다.
4.졸라는 1902년 사망했다.당시 공식 발표 사인(死因)은 일산화탄소 중독이었다.갑작스런 사망에 많은 의문이 제기됐지만 타살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졸라의 장례식에는 수만 명의 군중이 몰렸고, 광부 대표단이 세 시간 넘게 졸라의 묘혈 앞을 돌면서 졸라의 소설 ‘제르미날(Germinal, 광부들의 노사분쟁, 애환을 그린 소설)!’을 외쳤다.
군중들의 애도속에 졸라의 유해는 파리 몽마르트르 시메티에르에 묘원에 안장됐다. 이후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 재심으로 무죄, 복권이 되면서 유해는 1908년 6월 팡테옹으로 이장됐다.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 1844~1924)는 장례식 조사(弔辭)에서 “우리는 그를 부러워합니다. 방대한 저작과 위대한 참여를 통해 조국을 명예롭게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를 부러워합니다. 걸출한 삶과 뜨거운 가슴이 그에게 가장 위대한 운명을 선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양심의 순간이었습니다”고 찬사를 보냈다.
6.주요 작품으로는 소설, 단편으로 ‘클로드의 고백(La Confession de Claude, 1865)’, ‘테레즈 라캥(Thérèse Raquin, 1867)’, ‘마들렌 페라(Madeleine Férat, 1868)’가 있다.
또 평론집 ‘실험소설론(Le Roman Experimental, 1880)’, ‘목로주점(L'Assommoir, 1877)’ 등이 실린 ‘루공-마카르 총서(Les Rougon-Macquart)’ 등이 있다.
7.1953년 언론인 장 베델(Jean Bedel)은 졸라가 암살당했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신문 리베라시옹(Libération)에 실었다. 졸라의 죽음이 사고라기 보다는 살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제기한 것이다.
이후 암살자가 붙잡히는데 ‘굴뚝 청소부’ 앙리 브롱포세(Henri Buronfosse)였다. 누군가의 지령을 받고 굴뚝을 막았다고 자백했다. 이에 프랑스 문학사학자 알랭 파고스(Alain Pagès)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8.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은 “졸라를 향한 존경과 가없는 찬사에 사무쳐 있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들은 한 해에도 백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 다르크나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고 말했다.
미국 소설가 톰 울프 (Tom Wolfe,1930~2018)는 “(내가)소설을 쓰는 목표는 존 스타인 벡 (John Steinbeck), 찰스 디킨스 (Charles Dickens), 에밀 졸라 (Emile Zola)의 전통에서 현대 사회를 기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9.졸라는 문학텍스트로 활용되고 영화도 몇번 나왔다.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 1961~현재)는 ‘천사들의 제국’에서 주인공 미카엘 팽송(Michael Pinson)의 수호 천사로 에밀 졸라를 등장시킨다.
독일 출신 영화 감독 윌리엄 디터리(William Dieterle, 1893~1972)의 1937년 작 미국 영화 ‘에밀 졸라의 생애(The Life of Émile Zola)’가 내놓았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작품상(1938)을 받았고, 흥행에도 성공했다.
2012 BBC TV 시리즈 ‘The Paradise’는 졸라의 1883년 발표 소설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Au bonheur des dames)’을 기반으로 했다.
2016년 나온 프랑스 영화 ‘세잔과 나(Cézanne et Moi)’는 다니엘르 톰슨(Danièle Thompson, 1942~현재)이 감독한 영화로 졸라와 포스트 인상파 화가 폴 세잔의 우정을 다뤘다. 한국에서는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으로 번역됐다.( 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