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로빈슨 크루소-무인도 생존 콘텐츠 원조 소설은 크루소의 가문 자랑으로 서두를 연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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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무인도 생존 콘텐츠 원조 소설은 크루소의 가문 자랑으로 서두를 연다.

지성인간 2023. 8. 31.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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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632년 요크시에서 태어났다. 우리 집안은 지역사회에서 명문은 아니었지만 좋은 가문이었다. 아버지가 독일 브레멘 출신의 외국인이고, 처음 정착한 곳이 헐 시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장사로 큰 재산을 모은 후 장사를 그만두고 요크로 와서 살았는데, 그곳에서 로빈슨 가문의 딸인 우리 어머니와 결혼했다. 로빈슨 가문은 지역사회에서 매우 훌륭한 가문이라 나도 어머니 집안 이름을 따서 로빈슨 크로이츠나에르로 불렸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흔히 까다로운 발음은 뭉개버리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냥 크루소라고 불렀고, 우리도 이제 크루소라고 부르며 그렇게 표기한다. 친구들도 나를 늘 그렇게 불렀다.”(대니얼 디포 저, 이덕형 역, 문예출판사, 2011)

피어스 브르스넌 (Pierce Brosnan) 주연 모험 생존 드라마 영화 '로빈슨 크루소(1997)' 포스터 부분. photo by tv.naver.com

1.자기소개서를 쓰듯이 부드럽게 1인칭 작가시점에서 글을 시작하고 있다. 18세기 초만 해도 모험소설이 흔했는 데 정색하고 1인칭 시점으로 쓴 소설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1인칭 시점은 나와 독자의 일체감을 통한 몰입이 중요한데 시제와 고향, 가문의 내력을 소개하면서 편안한 읽기를 유도하고 있다. 가문 자랑을 길게 하는 것은 주인공 크루소의 파란만장한 삶을 보여주기 위한 예비 장치로 보인다. 명문가 출신임에도 모험심 하나로 세상을 떠돌며 다양한 경험을 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인 셈이다.

2.대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 1719)’는 지난 300년 이래 가장 유명한 모험소설로 ‘고전 중의 고전’이다. 거의 모든 무인도 생존물이 패러디하는  원조(元祖)중의 원조다.
누가 뭐라해도 리얼리즘 소설의 문을 열었으며, 근현대 소설의 맹아(萌芽,싹)라고 할 수 있다. 학자들의 연구 고전 중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함께 1, 2위를 다툴 정도로 글쓰기 소재가 풍부하다. 출판계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은 언어로 번역됐다고 말하는 소설이다.
책이 나온 1719년 4월25일 런던의 문단과 시민들은 어리둥절했다. 작가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무명의 인물 로빈슨 크루소가 자신의 모험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평균 나이가 50세도 안되는 시대에 60세의 노인이  쓴 소설임에도 화려하고 자세한 모험담과 주인공의 모험과 패기 등이 독자들을 매혹시켰다. 이에따라 이 소설은 시간이 지날수록 디포의 확실한 출세작이 됐다.
원래 어린이용 소설이 아니었지만 20세기 들어 축약본 등으로 나오면서 어린이가 가장 많이 읽는 소설 중 하나가 됐다. 이 책은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고전이지만 ‘백인 우월주의’ 와 ‘식민지’화에 대한 문제에서는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1719년 런던에서 나온 로빈스 크루소 초판본 첫 페이지와 삽화.

3.원래 제목은 매우 길다. 당시는 책이 귀한 시대여서 제목만 보고 살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17~19세기 책들의 제목은 예상외로 길다. '로빈슨 크루소'라는 제목은 극도로 축약된 셈이다.
책 제목은 ‘요크 출신 뱃사람 로빈슨 크루소가 들려주는 자신의 생애와 기이하고도 놀라운 모험 이야기-조난을 당해 모든 선원이 사망하고 자신은 아메리카 대륙 오리노코 강 하구 근처 무인도 해변에 표류해 스물하고도 여덟 해 동안 홀로 살다가 마침내 기적적으로 해적선에 구출된 사람(The Life and Strange Surprizing Adventures of Robinson Crusoe, Of York, Mariner-Who lived Eight and Twenty Years, all alone in an un-inhabited Island on the Coast of America, near the Mouth of the Great River of Oroonoque; Having been cast on Shore by Shipwreck, wherein all the Men perished but himself. With An Account how he was at last as strangely deliver'd by Pyrates)’ 이다.

4.소설은 작가 자신의 경험도 많이 썼지만 스코틀랜드의 사략(私掠, Privateer, corsair, 노략질이 가능한)선원 알렉산더 셀커크(1704~1709)의 5년간의 무인도 표류기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 사략선원은 사략선(私掠船, Privateer Ship)에 승선한 뱃사람으로 국가가 공인한 해적이다.
소설은 모험과 자기 계발, 의지력, 용기, 인내 등이 지배한다. 이는 개인주의의 발전 과정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서막을 연 소설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탐험에 이은 정복, 지배, 팽창, 금의환향 등을 상징하기도 한다. 무자비한 식민,제국주의를 우회 표현한 것이다. 또 이런 과정은 제국주의가 흔히 써먹은 식민주의 공식이 됐다. 소설 전체적으로 영국 제국주의 팽창과 자본주의 탄생을 상징하는 셈이다.

식인종으로부터 구한 원주민 앞에 서 있는 로빈슨 크루소. 이 원주민은 나중에 프라이데이로 불린다. 칼 오파딩거(Carl Offterdinger, 1829~1889)의 삽화다.

5.소설은 3부작으로 구성돼 있다. 일반 독자들, 특히 어린이들이 알고 있는 것은 1부이다. 다만 1부가 2부로 연결되고, 3부에서 이야기가 종결되는 구조는 아니다.
2부는 연관성이 많지만 3부는 사실상 명상록과 잡문(雜文) 모음집이라고 할 정도로 난삽하다. 평론가에 따라서는 3부는 ‘로빈슨 크루소의 명상록’이라고 해도 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여기저기 나오는 종교 얘기를 모아놓았기 때문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관능의 사랑’이나 ‘지고지순한 로맨스’,  가족의 영광 등은 어디에도 없는 게 특징이다. 그래서 근면 성실하게 재물을 축적하는 이유가 뭔지를 모를 정도다. 그럼에도 무인도에서조차 이익을 생각하는 뼛속 깊이 자본주의 속성의 인간을 보여주고 있다.

6.소설 시대와 배경은 1651~1687년, 약 35년간 영국 선원의 무인도 생활이다. 요크 태생의 선원 로빈슨 크루소는 돈을 벌기 위해 항해에 나섰다가 무어인들에게 잡혀서 노예가 된다. 이후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끝없는 모험심 때문에 다시 바다로 나가지만 파도에 휩쓸려 조난당한다. 그리고 난파된 배가 도착한 곳은 무인도다. 무인도에서의 삶은 서바이벌(생존기)이자 자본주의적 삶 그대로다. 살 집의 위치 선정, 목장 경영, 포로(프라이데이)를 구출해 하인 삼기, 섬 탈출 배 만들기 등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28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오고, 과거 운영을 맡겼던 식민지 농장이 잘돼 풍족한 삶을 산다.
소설 끝 문장이 재미있다. 몇가지 버전이 있는데 두가지를 소개한다. 1버전 “그 후로 나는 10년 동안 여행을 계속했는데,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2버전 “그 후로도 나는 프라이데이와 10년 동안 여행을 계속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그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해야겠다.”
이런 결론 때문이지는 몰라도 대니엘 디포는 말년에 속편을 쓴다. 내용은 로빈슨 크루소가 옛 무인도 섬을 방문하고, 바다를 통해서 중국에 이어 시베리아를 횡단해 러시아를 거쳐 영국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1993년 문학과 지성사에서 최인자 역으로 소개됐다.

7.로빈슨 크루소는 수많은 문예 작품의 텍스트 역할을 해왔다. 영화로는 3번이나 나왔다. 1954년 스페인-멕시코계 영화업자이자 감독 루이스 부뉴엘 포르톨레스(Luis Buñuel Portolés,1900~1983)이 내놓았다.
1997년에는 피어스 브르스넌(Pierce Brosnan)이 주연한 미국 모험 생존 드라마 영화로 나왔다. 감독은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로드 하디(Rod Hardy)와 조지 밀러(George T. Miller,1943~2013)가 맡았다.

3D컴퓨터 애니메이션 모험코미디 영화 '로빈스 크루소(2016)'스틸 컷.벨기와 프랑스 합작으로 제작됐다. photo by tv.naver.com

2016년에는 벨기에-프랑스 3D 컴퓨터 애니메이션 모험 코미디 영화로 나왔다. 빈센트 케스틀롯(vincent Kesteloot)과 벨기에 출신 벤 스태센(Ben Stassen, 1959~현재)이 감독을 맡았다.
2000년 만든 톰 행크스(Tom Hanks, Thomas Jeffrey Hanks, 1956~현재) 주연 영화 '캐스트 어웨이(2001년 2월 개봉)'의 모티브가 됐다. 미국 로버트 저메키스(Robert Zemeckis,1951)가 감독했다.

8.로빈슨 크루소는 마르크스주의자 신자유주의 이론가(경제학자, 사회학자 등)들이 적극 활용하는 인물이다. 생산과 잉여, 효용 극대화 등을 쉽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이론 장치자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자본-정치경제학 비판, Das Kapital-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영어 Capital-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1권(1867)에서 생산이 사회적 관계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로빈슨 크루소의 예를 들었다.
영국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 1772~1823)는 비교우위론에서 로빈슨 크루소와 충실한 종 프라이데이 등을 이론 전개에 활용하고 있다.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는 저서 ‘에밀(Émile, ou De l’éducation, 1762)’ 3부에서 소년기(12~15)에 독서 금지를 주장한다. 그런데 ‘로빈슨 크루소’는 허용해야 한다고 썼다.

9.당대와 후대 작가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작가이자 작품이다. 아일랜드계 소설가이자 성직자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 1667~1745)의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1726)’가 가장 먼저 나왔고,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로빈슨 크루소 이후 7년 만에 출판됐다.
스코틀래드 출신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 1850~1894)은 ‘보물섬(Treasure Island,1883)’에서 크루소를 등장인물 벤 건(Ben Gunn)으로 패러디한다.
프랑스의 작가 쥘 베른( Jules Verne, 1828~1905)의 모험 소설 ‘15소년 표류기(원제 2년간의 휴가, Deux ans de vacances, 영어 Two Years' Vacation,1888)’ 는 큰 영향을 받았다.

10.프랑스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1924~2016)는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French Vendredi ou les Limbes du Pacifique,1967)에서 크루소 이야기를 쓰면서 문명 대 자연, 고독의 심리학, 죽음 등의 주제를 탐구했다.
프랑스 소설가 르 클레지오(J. M. G. Le Clézio,1940~현재,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소설 ‘르 프로스 베르발(Le Proces-Verbal, 1963)’에서 주인공 아담 폴로(Adam Pollo)를 크루소와 대비시켰다.

튀르키예 이스탄불 스티클랄 가에 있는 로빈슨 크루소 서점.photo by wikipedia

미국 시인 엘리자베스 비숍(Elizabeth Bishop,1911~1979)은 ‘영국의 십자군(Crusoe in England)’에서 크루소를 상상한다.이 밖에도 윌리엄 골딩(William Golding)의 파리대왕(Lord of the Flies,1954), 제임스 발라드(James Graham Ballard)의 콘체르트 아일랜드(concrete Island,1974), 미국 시인 에드가 앨런 포(Edgar Allan Poe, 1809~1849)의 '뉴욕 42가지 변신'과 미국 소설가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의 '모비 딕( Moby-Dick; or, The Whale,1851)'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한편 튀르키예에는 로빈슨 크루소라  이름붙인 서점도 있다.

11.한국에서는 일제 강점기 때 작가 최남선(1890~1957)이 잡지 ‘소년(1908)’에 ‘로빈손 무인절도포류기(無人絶島漂流記)’로 번역 소개했다.
1953년 동국출판사에서 역자 미상 번역본이 니왔다. 이후 영한 대역본, 어린이 본 등 2023년초가지 50여종 이상의 번역본이 출간됐다.
우리나라에서는 로빈슨을 패러디한 이름 ‘노빈손’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 한국 어린이들에게 많이 읽히는 책 ‘노빈손 시리즈(1999년 7월 처음 선보인 청소년 학습도서, 작가는 여러명이다)’의 주인공 노빈손이 그것이다. 이 시리즈는 나온 지 10년 만에 약 500만 부가 팔렸고, 일본 중국 태국 대만 등에도 번역 수출됐다.

런던 국립해양박물관에 있는 대니엘 디포 초상화.작자와 연대 미상.  photo by wikipedia

#.대니얼 디포(Daniel Defoe, 1660~1731)=영국의 소설가. 언론인이자 정치학자. 진정한 소설의 효시를 썼다는 평가를 받는 작가.
적어도 198개의 펜 이름을 사용했는데 그중 유명한 펜 이름이 트루본 잉글리시맨(True-Born Englishman)이다. 본명은 대니엘 포(Daniel foe).

1.런던 포어 스트리트( Fore Street) 세인트 자일스 크리플게이트(St Giles Cripplegate)에서 벨기에 플랑드르 혈통의 수지(獸脂) 양초 제조업자(tallow chandler)이자 정육점 길드(도축업자)인 아버지 제임스 포(James Foe)와 어머니 앨리스(Alice) 사이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무렵에 ‘런던 대역병(大疫病, Great Plague, 1664~1665년 런던에서 발생한 페스트)’으로 7만 명이 사망하는 사건을 겪는다. 또 어머니가 10살쯤에 사망하는 아픔을 겪는다. 디포가 7살 때인 1667년에는 네덜란드 함대가 템즈 강을 경유해 주변 마을이 습격당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2.디포는 처음에 런던 남부 서리(Surrey) 카운티 도킹(Dorking)에 있는 목사 제임스 피셔 기숙학교(Rev. James Fisher's boarding school)에서 교육받는다.하지만 장로교 반대파였던 아버지는 디포가 14살 무렵에 뉴잉턴(Newington) 그린에 있는 다른 기독학교로 전학한다.
디포는 스무살도 안돼 일반 상인으로서 사업계에 진출했다.양말류, 일반 모직물, 와인 등을 거래했다. 당시 빚을 지지 않은 채 돈을 벌어 사유지와 배를 살 수 있었다.

3.디포는 스물다섯살 무렵인 1684년1월 런던의 부유한 비국교도 상인의 딸 메리 터플리(Mary Tuffley)와 런던 외곽 세인트 보톨프스 알드게이트(St Botolph's Aldgate)에서 결혼했다. 메리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액수인 3700파운드를 지참금을 가져왔다.
메리는 충실하고 수완이 있는데다 헌신적인 아내였다. 8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6명만 장성했다. 디포가 죽을 때(결혼생활 47년)까지 가정을 위해 헌신했다.

4.1685년 2월 디포는 개신교 세력이 주도한 몬머스 반란( Monmouth Rebellion)에 가담, 체포됐다. 몬머스 반란은 찰스 2세의 뒤를 이어 영국, 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의 왕이 된 제임스 2세를 폐위시키려는 난이었다. 찰스 2세의 장남인 1대 몬머스 공작 제임스 스콧이 이끌었다. 디포는 곧 사면받았다.
1689년에 메리2세(Mary II,1662~1694)와 남편 윌리엄3세(William III, 1650~1702)가 공동으로 왕위에 오를 때 윌리엄 편에 선 디포는 이로 인해 사업이 망하는 길로 간다.
결국 1692년 700파운드의 빚 때문에 체포됐다. 또 왕실 재무부와의 소송에 휘말렸다. 이후 빚을 갚지 못하면서 ‘채무자 감옥(debtors' prison)’에 살았다.
1695년 풀려난 디포는 이때부터 공식적으로 ‘디포’라는 이름을 썼고, 포르토, 리스본 등을 다니며 와인무역에 열중했다. 하지만 돈을 벌지 못하자 1년 후 에식스 주 채드웰 세인트 메리 교구에 살면서 틸버리 지역에서 타일과 벽돌 공장을 운영했다.

5.1702년 윌리엄 3세가 죽고, 앤 여왕이 즉위하면서 개신교 박해는 다시 시작됐다. 디포는 1703년 7월 31일에 체포, 명예 훼손 혐의로 기소했다.

디포는 정치활동(죄명 명예 훼손)으로 1703년 7월31일 체포돼 유죄를 받아 기둥에 묶여 칼을 쓰기도 했다. 제임스 찰스 아미티지(James Charles Armytage, 1802~1897)가 1862년 그린 칼을 쓴 디포 판화. 런던 국립 초상화 갤러리 소장.photo by wikipedia

디포는 당대의 악명높은 판사 살라티엘 로벨 경(Sir Salathiel Lovell, 1631~1713)에게서 유죄 판결(투옥 및 벌금 336파운드)을 받고, 3일동안 죄인이 쓰는 기둥 칼에 갇혔다.디포는 로버트 할리(Robert Harley, 1661~1724, 1대 옥스퍼드 백작)장관의 영향으로 1703년 말 석방됐다.

6.디포가 소설을 집중적으로 발표한 시기는 1719~1724년이다. 300쪽 넘는 책만 21편을 냈다. 이후 1731년 사망 시까지 5년여 동안 12권을 더 썼다.
디포는 남해 거품(South Sea Bubble) 사건으로 전 재산을 잃어버리고 비참하게 살았다. 1720년 영국에서 노예무역에 관한 특권을 가졌던 ㈜사우스씨(theSouthSea)로 인해 발생한 거품경제 현상이다. 당대 유명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Sir Isaac Newton, 1643~1727)도 많은 돈(약 1만3000파운드)을 잃었다고 한다.

영국 화가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1697~1764)가 그린 '남해 거품' 사건. 영국 테이트(Tate) 소장.photo by wikipedia

네덜란드의 1630년대 중반 ‘튤립 파동(Tulip mania, 정점은 1637년 2월 구근 하나에 집 한 채가격 폭등)’, 프랑스의 ‘미시시피 거품(Compagnie du Mississippi,1717~1721, 발행가 40배 폭등)’과 더불어 3대 버블로 불린다.

7.남해거품사건때 전 재산을 잃은 디포는 채권자들을 피해 숨어 있다가 1731년 4월24일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혼수상태로 있다가 사망했는데 당대인들은 뇌졸중으로 추정했다.
주요 작품으로 ‘선장 싱글턴의 모험(Captain Singleton, 1720)’, ‘세계 신항해’, ‘흑사병 연도의 일지(A Journal of the Plague Year,1722)’, ‘자크 대령’, ‘행운의 여인 록새너(Roxana: The Fortunate Mistress,1724)’ 등이 있다.(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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