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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몽테 크리스토 백작-현대 복수극 장르의 기원이자 바이블인 소설의 첫문단은 풍경화처럼 그려졌다. 본문
“1815년 2월24일, 노트르담드라가르드 망루에서는 스미르나, 트리에스테를 거쳐 나폴리에서 오는 돛대 셋을 가진 파라옹 호가 보인다는 신호를 올렸다. 그러자 어느 때처럼 뱃길 안내인이 곧바로 항구를 빠져나가. 이프 성을 지나 모르지옹 곶(串)과 리옹 섬 사이에 있는 배에 다가갔다. 그리고 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생장 요새의 전망대는 이내 구경꾼들로 가득찼다. 배가 항구에 들어오는 일은 마르세유에서는 언제나 큰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배가 파라옹 호처럼 고대 소아시아 포카이아 시가 식민도시로 세운 마르세유의 조선소(造船所)에서 만들어지고 짐이 실린 데다가, 또한 그 소유주가 이 도시 사람인 경우라면 더욱 커다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전 5권 중 1권, 오증자 역, 민음사, 2013)
1.아름다운 항구를 그린 풍경화 보는 것처럼 묘사된 도입부다. 배와 뱃길, 큰 배를 맞는 주민들의 표정을 실감나게 설명하듯이 써서 마치 현장에 있는듯한 느낌이다. 주 독자층인 대중을 위해 쉽게 내레이션 하듯이 쓴 것이다. 문단 전체적으로도 짜임새 있는 구조, 탄탄한 구성을 느끼게 한다.내용중 배가 항구로 들어오는 일은 대하 소설의 전개를 위한 거대한 메타포라고 볼수 있다. 1815년은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면서 프랑스가 추락한 해다.
2.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Le Comte de Monte-Cristo, 1844∼1845)’ 은 현대 복수극 장르의 기원이자 바이블이다.근현대에 들어와서 정의와 복수를 쓴 거의 모든 작품이 이 소설을 바탕으로 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정도다.
파리에서 발행되는 ‘Journal des débats’에 1844년 8월~1846년 1월까지 18부로 연재됐다. 소설은 연재 때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별책부록 형식으로 일부가 발행됐다.
책 형태의 초판은 1846년이다. 당시 9권으로 출간한 장대한 서사(敍事) 소설임에도 즉시 매진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주변 나라에서 무단 번역과 표절이 많았고, 해적판이 다시 파리로 들어오기도 했다.
뒤마는 이 소설을 내기 전인 1843년 ‘조르쥬(Georges)’라는 짧은 소설을 냈는데 많은 아이디어와 음모 장치를 재사용했다. 또 1838년 파리 경찰에서 기록한 사건록에 실린 일화(Le Diamant et la Vengeance)도 소설 전개에 영향을 줬다고 뒤마가 나중에 밝히기도 했다.
이 소설은 대필 작가의 도움을 받은 협업(?) 작품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당시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대필작가 오귀스트 마케(Auguste Maquet)가 제안한 음모 개요에서 확장했다고 한다. 영어로는 ‘The Count of Monte Cristo’로 번역됐다.
3.영어로 된 몬테 크리스토 백작의 첫 등장은 1845년 ‘Ainsworth's Magazine’ 이다. 그런데 소설 처음 부분의 요약본이었다. 제목은 ‘만약의 죄수(The Prisoner of If)’로 나왔다. 1846~1847년 사이에 런던 저널(London Journal)에도 영어로 요약돼 연재됐다.
영어로 된 최초의 단행본은 1846년 10월 지오 피어스(Geo Pierce)가 일부를 출판한 것이다. ‘만약의 죄수(The Prisoner of If)’ 와 ‘몬테 크리스토의 복수(The Revenge of Monte Christo)’로 나왔다. 1846년 말에는 삽화를 곁들인 익명의 영어 번역본도 등장했다.
한편 몬테크리스토(Montecristo Island)는 실제 이탈리아 서해인 티레니아 해에 있는 토스카노 군도를 이루는 섬이름이기도 하다.프랑스령 엘바 섬 남쪽에 있다.
4.대하 소설답게 등장인물이 다양하게 나온다. 나오는 인물을 가문별로 분류해야 할 정도로 많다. 당테스 가는 주인공인 에드몽 당테스(Edmond Dantès)와 약혼녀 메르세데스(Mercédès), 에드몽의 아버지 루이 당테스(Louis Dantès), 에드몽의 스승 파리아 신부(Abbé Faria)가 나온다.
백작 가는 부자 자코네 몬테크리스토(Zaccone Monte-Cristo) 백작, 수양딸 에데(Haydée,하이데), 백작의 노예 알리(Ali), 집사 조반니 베르투치오(Giovanni Bertuccio), 하인 바티스텡(Baptistin), 요트선장 자코포(Jacopo), 이탈리아 신부 자코모 부소니(Abbé Busoni), 백작의 라이벌인 영국 귀족 윌모어 경(Lord Wilmore) 등이 나온다.
모렐가는 모렐 상사 주인 피레르 모렐(Pierre Morrel), 아들 말시밀리앙(Maximilien, 기병 대위), 딸 쥘리(Julie)와 남편 엠마뉘엘 레이몽(에르보), 정원사 페늘롱(옛 파라옹 호 선장). 모렐상사 회계원이자 하인 코클레스 등이다.
5.이와함께 당테스 가의 원수 가문으로 페르낭 드 모르세르( Fernand de Morcerf) 백작(페르낭 몽데고, Fernand Mondego)과 부인 메르세데스(Mercédès), 아들 알베르(Albert), 하인 존(제르맹) 등이다.
당글라르 가는 당글라르(Danglars)와 아내 에르민(Hermine) 남작부인, 외동딸 외제니(Eugénie) 드 당글라르, 요리사 드니조가 나온다.
빌포르 가는 누아르티에 드 빌포르의 아들 제라드(Gérard)와 첫 번째 아내 르네 드 상메랑(Renée de Saint-Méran), 후처 엘로이즈(Héloïse)와 아들 에두아르(Édouard), 제라드의 불륜 아들 베네데토(Benedetto, 안드레아 카발칸티), 제라드와 르네사이의 딸 발랑틴(Valentine), 누아르티에의 몸종 바루아(Barrois), 르네의 부모 상메랑 후작 부부(The Marquis and Marquise de Saint-Méran) 등이다.
카드루스 가는 가스파르 카드루스(Gaspard Caderousse)와 아내로 여관 주인 카르콩트(Carconte)가 나온다. 이밖에 이탈리아 산적단 두목 루이지 밤파와 아내 테레사, 양치기로 루이지 밤파 일당 페피노(Peppino), 루이지 밤파의 부하로 여장한 베포(Beppo) 등이 나온다.
6.소설은 희망, 정의, 복수, 자비, 용서가 얽히고 설키는 대하 모험 소설이다. 특히 역사적 사실과 허구가 교차해 읽는 재미를 준다.
1815~1839년 프랑스 루이 필리프(Louis-Philippe, 1773~1850, 재위 1830~1848)의 통치를 통한 부르봉 왕가(House of Bourbon, 1589~1792, 1814~1848 프랑스 통치왕가) 복원 시대 프랑스, 이탈리아 및 지중해의 섬이 배경이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1769~1821)의 몰락과 권력을 되찾는 시기 등의 기간에 주인공의 인생 역전이 유려하게 펼쳐진다.
나폴레옹 편지 때문에 음모에 엮여 정부에 의해 성채에 갖힌 젊은 항해사 에드몽 당테스가 감옥 안에서 굴을 파서 탈출을 하려던 파리아 신부를 만난다. 대단한 식견을 갖춘 신부에게서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 추기경이 보물을 숨겨둔 장소를 알게 된다.
당테스는 10년이 넘는 동안 파리아 신부에게서 각종 학문과 귀족 소양을 배운다. 그리고 끝내 파리아 신부가 죽을 때 그의 시체 주머니에 들어가 탈출한다.
신부가 말한 몽테크리스토 섬의 보물을 찾아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에서 백작 작위를 사서 백작이 되고, 프랑스로 돌아가 원수를 갚는다.
7.벨기에 태생의 미국 작가 루시 산테(Lucy Sante, 1954~현재)는 “몽테 크리스토 백작은 서구 문명 문학의 고정물”이라고 말했다.아무도 넘볼수 없는 랜드마크적인 소설이라는 뜻이다.
영국 문학평론가 조지 세인트버리(George Saintsbury,1893~1933)는 “처음 등장한 이후 유럽에서 가장 인기있는 책”이라며 “어떤 소설도 그렇게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렇게 많은 다른 나라로 침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러시아 작가이자 언어학자인 바딤 니콜라예프(Vadim Nikolayev)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거대 다중음 소설"이라고 격찬했다.
8.몽테 크리스토 백작은 수많은 예술작품의 텍스트 역할을 했다. 영화로만 30여편이 세계 각국에서 제작됐다. 첫 영화는 미국 작가이자 감독인 호바트 반 잔트 보스워스(Hobart Van Zandt Bosworth, 1867~1943)가 1908년 ‘The Count of Monte Cristo’라는 제목의 무성 영화로 내놓았다.
가장 최근에는 2002년에 영화로 나왔다. 미국 케빈 레이놀즈(Kevin Reynolds, 1952~현재) 감독의 ‘The Count of Monte Cristo’이다. 한국 개봉 시에는 ‘몬테 크리스토’로 번역됐다.
TV 드라마도 영국에서 1956년 동명의 제목으로 나온 이래 30여 편이 각국에서 시리즈물로 나왔다. 한국에서도 2021년 플롯과 형식을 취한 ‘미스 몬테크리스토(Miss Monte-Cristo, 연출 박기호)’ 가 KBS2 TV에서 100부작으로 나왔다.
9. 한국에서는 일제 강점기 때 김래성 번안 소설이 나왔다고 한다. 김래성 번안소설이 다시 나온 것은 해방 후인 1947년이다. 백호사에서 ‘진주탑(眞珠塔)’으로 내놓았다.
첫 완역판은 1970년대에 나왔다. 정음사에서 오증자 전 서울여대 교수 번역으로 ‘몽떼 끄리스또 백작(3권)’로 출판됐다. 오 교수 번역본은 1995년 6권으로 재발간됐고, 2002년 민음사에서 5권으로 다시 나왔다.
또 금성출판사에서 1980년대 세계문학대 전집 시리즈로 번역문학가 방곤(1931~사망) 전 경희대 불문과 교수 완역의 ‘몬테 크리스토 백작(3권)’으로 발간했다.
일본에서는 1905년에 ‘암굴왕(暗窟王)’ 등으로 번역 출판됐고, 중국은 1907년에 나왔다. 중국 공산주의 정권에서는 문화대혁명이 끝난 2년후인 1978년에 나왔다.
9.뒤마의 아들 알렉상드르 뒤마 필스,Alexandre Dumas fils, 1824~1895)도 작가다. 그래서 편의상 아버지 뒤마(대 뒤마)와 아들 뒤마(소 뒤마)로 분류한다. 아들 뒤마 필스는 ‘춘희(La Dame aux camelias,1848)’로 유명하다. 뒤마 필스는 ‘사생아(Le Fils naturel,1858)’, ‘방탕한 아버지(Un Pere Prodigue, 1859)’등을 남겼다.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 1802~1870)=19세기 프랑스의 극작가 및 소설가, 로망파 극의 선구자.
1.북프랑스 엔 데파르트망의 빌레 코트레(Villers-Cotterêts)에서 나폴레옹 군의 장군이었던 아버지 도마 알렉상드르 뒤마( Thomas-Alexandre Dumas)의 아들로 태어났다.
뒤마의 아버지는 혼혈(어머니가 뮬라토)이었다.그래서 굳이 뒤마의 성분을 따지자면 50프로의 절반, 25프로의 혼혈아다. 그래도 뒤마는 성장기이후 인종차별 등에 흔들리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포병으로 중남미 아이티에서 근무하던 시기에 아프리카계 캐러비언 혼혈인(뮬라토)이었던 마리 케세테 뒤마(Marie-Cessette Dumas)와 결혼해 아버지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뒤마가 4세이던 1806년 사망했다.
2.오를레앙 공(나중에 왕이 되는 루이 필리프)의 필경직(筆耕職, 초대장 등을 직접 손으로 쓰는 직업)을 하는 동안인 1828년 사극 ‘앙리 3세와 그 궁정Henri Ⅲ et sa cour)’를 냈는데 대성공을 거뒀다.
이 극은 시간, 장소, 행위 라는 고전주의 3원칙을 무시하고, 산문체의 낭만주의 작품이었는데 이듬해 공연 첫날부터 대성황을 이뤘다.
뒤마는 로맨틱한 작극법으로, ‘앙토니(Antony,1831)’, ‘킹(King,1836)’ 등을 상연해 파리 극단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이후 ‘삼총사(The Three Musketeers,1844)’와 대중 모험 소설 ‘몬테 크리스토 백작’으로 세계에서 유명한 작가 반열에 올랐다. 또 문학적 공적을 인정받아 1837년 3월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를 받았다.
3.뒤마는 화려한 사생활과 복잡한 여성 편력 등 방탕했다. 그래서 자주 파산했다.
채권자들에개 돈을 갚기 위해 글을 쓸 정도였다. 첫 결혼은 1840년 여배우 아이다 페리에(Ida Ferrier, 본명은 마거리트-조제핀 페랑,Marguerite-Joséphine Ferrand,1811~1859)와 했으나 자식은 없었다.
뒤마는 다른 여성들과 수많은 관계를 가졌고, 적어도 4 명의 아이을 낳았다. 그중 제일 유명한 이가 오페라 ‘춘희’의 원작자인 뒤마 필스(Alexandre Dumas, fils,1824~1895)다. 10년 연상의 양장디자이너 카뜨린느 래베이(Marie-Laure-Catherine Labay(1794~1868) 사이의 아들이다. 또 벨 크렐사머(Belle Krelsamer,1803〜1875)와의 사이에 마리(Marie-Alexandrine Dumas,1831〜1878)을 뒀다. 뒤마가 정식 자식으로 인정한 건 뒤마 필스와 딸 ‘마리 뒤마’ 뿐이었다.
또 유대인 신앙의 독일인 칼 안톤 바우어의 아내 안나 바우어(Anna Bauër) 사이에 배우 헨리바우어((1851〜1915)가 있다. 이밖에 여배우 에밀 코디에(Emélie Cordier)와 사이에 딸까지 두었다.
1866년에는 33년 연하의 미국 여배우 아다이 이삭 멘켄( Adah Isaacs Menken, 1835~1868)과 사랑에 빠졌다. 유부녀인 멘켄은 파리에서 ‘해적들의 전쟁(Les pirates de la savane)’을 공연하면서 뒤마를 만나 바람을 피웠다.
멘켄은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Charles John Huffam Dickens, 1812~1870)가 ‘세계의 기쁨’이라고 부를 정도로 매력 있는 배우였다. 하지만 멘켄은 런던과 파리 공연에서 성공해 정점에 있었지만 2년 후 파리에서 요절했다.
4.뒤마는 7월 혁명 때 ‘시민왕’이라 불린 인물로 프랑스의 마지막 왕에 오르는 루이 필리프(Louis Philippe)를 지지했다. 하지만 루이 필리프는 ‘늙은 독재자’로 전락, 2월 혁명 때는 타도의 대상이 됐다.
루이 필리프의 축출로 뒤마도 1851년 벨기에 브뤼셀로 추방당했다. 이때 뒤마는 러시아로 탈출했다. 뒤마는 러시아에서는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하다가 이탈리아로 이주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이탈리아 왕국의 독립을 선언한 1861년 3월 이후였다. 뒤마는 이탈리아에서 ‘인디펜덴테’의 발간에 관여했다. 그러다가 추방령이 풀리면서 1864년 파리로 돌아왔다.
5.뒤마는 당대의 예술인들과 교류도 활발했다. 동갑인 작가 빅토르 마리 위고(Victor-Marie Hugogo, 1802~1885)의 절친이었다. 또 시인이자 비평가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 시인 제라르 드 네르발(Gérard de Nerval,1808~1855),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1799~1850) 등 예술인과 친한 교류를 이어갔다.
뒤마와 이들 유명 작가들은 파리의 한 호텔에서 매달 만나 대마초의 일종인 해시시(Hashish)를 흡입하기위해 ‘Hashischins’ 이라는 클럽도 만들어 ‘예술인의 삶’을 만끽했다.
6.뒤마는 말년에 건강이 나빠져서 아들 뒤마 필스의 별장에서 지냈다. 뒤마는 죽기 직전 아들이 가져다 준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읽으며 “진짜 명작이구나. 하지만 내가 결말을 읽을 때까지 살아 있을 것 같진 않구나”했다고 한다.
1870년 12월 5일 영면에 들어갔다. 향년 68 세였다. 당시는 자연사로 받아들였지만 뇌졸중 혹은 심장마비로 추정하고 있다. 장례는 고향인 빌레르 코트레에 조용히 진행됐다. 당시는 프랑스와 프로이센 간의 전쟁(1870년7월~1871년1월28일)이 한창이어서 대문호의 사망과 장례 자체가 묻혔다고 한다.
빅토르 위고는 뒤마의 영면 소식을 듣고 “뒤마는 영혼과 두뇌, 지성 모두를 풍요롭게 한 위대한 영혼이었다”고 애도했다.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Jules Michelet,1798~1874)는 “뒤마는 다른 역사가들을 모두 합해 놓은 것보다 대중들에게 더 많은 역사를 가르쳤다고 할 수 있다”며 “대부분의 프랑스인은 전문적인 역사가가 아니라 오히려 뒤마의 소설을 통해 프랑스 역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8.뒤마의 소설은 세계에서 100개 가까운 언어로 번역됐다. 또 영화와 연극, 뮤지컬, 오페라 등 200개 이상의 예술작품으 토대가 됐다.
뒤마는 근현대에서 가장 뛰어난 역사 모험소설을 쓴 작가로 기록되고 있다. 19세기 중반에 창작된 대중 소설이 현대에도 스테디셀러의 반열에 올라 있는 작가가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뒤마 사망 100주년이 되던 1970년 파리 지하철의 한 역(지하철2호선) 이름을 뒤마의 이름을 붙였다. 파리 외곽에 있는 집(샤토 드 몬테크리스토)을 박물관으로 개조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뒤마 마니아였던 뉴질랜드 약사 프랭크 와일드 리드(1874~1953)는 프랑스 밖에서 뒤마 관련된 책과 원고를 가장 많이 수집한 인물이었다. 뒤마 필체의 원고 약 2000 장과 프랑스어, 벨기에어, 영어 초판본 수십 권 등 3350권을 수집했다, 리드는 사후 이 자료들을 뉴질랜드 오클랜드 도서관에 기증했다.
9.현대에 와서 고향에 있던 뒤마의 유해는 2002년 12월 파리 팡테온으로 이장됐다. 혼혈 유색인종 작가로는 최초였다.
뒤마의 탄생 200주년을 맞아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프랑스의 유명 인사들이 팡테온 이장을 추진, 성사시킨 것이다. 고향인 빌러스-코테레츠의 마을 사람들은 반대했으나 결국 정부의 이장 결정에 승복했다고 한다.
이장 행사는 문화 쇼로 진행됐다. 유해는 파리 근교의 ‘몽테 크리스토 성’을 거쳐 파리 상원 의사당으로 옮겨졌고, 상원에서 팡테온까지 퍼레이드와 노상 공연을 했다.
관을 장식한 짙푸른 덮개에는 1845년 작 ‘삼총사’에서 나왔던 “하나를 위한 전체, 전체를 위한 하나(All for one, one for all)” 구호가 장식됐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