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용비어천가-우리말로 처음 쓴 악장 서사시는 압도적인 송축과 예찬으로 서두를 이어간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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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비어천가-우리말로 처음 쓴 악장 서사시는 압도적인 송축과 예찬으로 서두를 이어간다

지성인간 2023. 12. 18.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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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 신이 삼가 살피건대 천지의 도(道)는 드넓고 두터우며 높고 밝기에 만물을 실어 주고 덮어 줌이 유구하여 끝이 없으며, 조종(祖宗)의 덕은 오래 쌓여 깊고 장구하기에 왕업의 터전 또한 원대하여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한갓 바다와 산악이 널리 펼쳐 있는 것과 새와 물고기, 동물과 식물이 커나가는 것과 바람·비·우레·번개의 변화하는 것과 해와 달, 추위와 더위의 운행만을 볼 뿐 땅의 박후(博厚)함과 하늘의 고명(高明)함으로 끊임없는 공화(功化)가 이루어졌음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한낱 종묘·궁실의 아름다움과 고을 백성들의 만물의 풍부하고 성대함과 예절·음악·형벌·정사의 문명과 인정(仁政)·은택·교화가 넘치는 것만 볼 뿐, 조종의 덕이 오래 쌓여 왔고 깊고 장구하여 흔들리지 않는 왕업의 터전이 세워졌음을 알지 못합니다.
(본문-서사)해동육룡(海東六龍)이 나르샤/일 마다 천복(天福)이시니/고성(古聖)이 동부(同符)하시니/불휘 기픈 남ᄀᆞᆫ ᄇᆞᄅᆞ매 아니 뮐ᄊᆡ/곶 됴코 여름 하ᄂᆞ니/ᄉᆡ미 기픈 므른 ᄀᆞᄆᆞ래 아니 그츨ᄊᆡ/내히 이러 바ᄅᆞ래 가ᄂᆞ니”(출처=역주 용비어천가, 박창희 역,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2015)

훈민정음 반포 이전 우리말로 '용비어천가'를 짓게 한 조선 4대임금 세종대왕 표준 영정. 1973년 화가 김기창이 그린 상상의 초상화다. 실제 어진은 병자호란 당시 소실된 것으로 추정.photo by ko.wikipedia.org

1.신하가 왕에게 올리는 전형적인 문장과 문체를 갖추고 있다. 특히 본문(서사-본사-결사) 보다 늦게 지어진 머리말은 다음에 이어질 본문 서사를 위해 천지의 도와 왕업의 도를 정확히 밝히고 있다. 본문의 취지를 밝히기 위한 글인 만큼 특별한 상징이나 은유보다는 쉽고 편한 어휘들을 사용하고 있다. 또 송축과 예찬의 글임을 은연중 드러내 악장 서사시(敍事詩)임을 알 수 있다.다만 문장 하나하나가 너무 긴 한문 문체와 서식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본문-서사는 문자그대로 ‘서사-본사-결사’ 3단으로 구성돼 강력한 상징과 비유로 시작하고 있다.특히 한글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드러난 ‘압권의 문장’이다. 대단히 의미 있는 본문-서사라 할 수 있다. 전형적인 대구법을 사용, 글에 힘을 싣는 한편 읽는이가 원인과 결과를 쉽게 알수 있도록 했다.

'용비어천가' 판본. 서울대 규장각 소장.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2.권제·정인지·안지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1445)’는 조선 4대 왕 세종(世宗,1397~1450,재위 1418~1450)이 우리말(훈민정음,訓民正音 -국보 제70호, 한글) 반포 이전에 지은 유일한 한글 작품이다. 총 10권으로 구성된 우리말 최초 문헌이자 악장(樂章) 서사시다.
조선 왕조 창업 정당성을 기리는 첫 우리말 노래(악장)인 용비어천가는 1445년(세종 27) 4월 세종 이전 여섯 대 선조(先祖)들의 행적을 125장의 노래로 읊었다. 이에 세종이 ‘용비어천가’라는 이름을 내렸다.
구성은 취지를 밝히는 머리말(글을 쓰는 목적을 밝히는 도입부)인 ‘진용비어천가전(進龍飛御天歌箋)’, 본문(서사-본사-결사)인 용비어천가, 맺음말  부분인 ‘용비어천가발(龍飛御天歌跋)’로 돼 있다.
최종본 악장 용비어천가는 1447년(세종29) 2월 ‘용비어천가발(龍飛御天歌跋)’을 완성한 이후 세종조의 현신들인 박팽년(朴彭年)·강희안(姜希顔)·신숙주(申叔舟)·이현로(李賢老)·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신영손(辛永孫) 등이 한문 주해(註解)를 붙였다.
이런 최종본을 세종이 신하들에게 550질을 내린 것이 1447년(세종 29) 10월이다. 이에 국문학사에서는 용비어천가를 세종 27년(1445) 편찬, 세종 29년(1447)에 발간된 악장·서사시로 본다
판본은 현재 모두 목판본(木版本)로 전하고 있지만 초간은 활자본(活字本)으로 추정한다. 초쇄 완전본은 없다. 현재까지 권1, 2의 1책만 남아 있는데다 모든 판본이 부분상실, 누락, 오자, 탈자 등 흠이 있다.
제1차 중간본은 1612년(광해군 4)에 초간본을 판하(判下, 신하가 올린 안건을 임금이 허가하는 일) 복각(復刻)한 것이다. 제2차 중간본은 1659년(효종 10)에 새로운 판하(判下) 중간한 것이며, 제3차 중간본은 1765년(영조 41)에 제2차 중간본 중에서 훼손된 것만을 보각(補角), 간행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영인본은 광해군 때의 재간본(再刊本, 오대산본,五臺山本)을 바탕으로 해 1938년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에서 수정 보완해 찍어낸 것이다. 역사학자 김성칠(金聖七,1913~1951)이 1948년 경성제국대 본을 다시 발췌·영인한 것도 있다.
또 1956년 한글학자 허웅(許雄)의 주해본과 1968년 김형규(金亨奎)의 ‘고가요주해(古歌謠註解)’ 등도 있다. 영어로는 ‘Yongbieocheonga’, ‘Songs of the Dragons Flying to Heaven’로 번역된다.

용비어천가 판본. 계명대 소장.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3.용비어천가는 세종(世宗)이 조상인 목조(穆祖)~태종(太宗)까지 6대(해동 육룡, 海東六龍)의 행적을 이야기하는 서사시다. 육룡은 목조(穆祖, 이안사,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 익조(翼祖, 이행리, 태조 이성계의 증조부), 도조(度祖, 이춘, 태조 이성계의 조부), 환조(桓祖, 이자춘, 태조 이성계의 부), 태조(太祖, 이성계), 태종(太宗, 이방원)이다.
이들 6명의 조상 이야기를 노래로 부를 수 있도록 쓴 것(악장)이다. 2대 왕 정종(定宗,1357~1319, 재위 1398~1400)은 세종의 직계 조상이 아니라 큰아버지여서 빠졌다.
용비어천가의 목적은 단연코 ‘왕실 안녕과 번영, 왕권 강화’다. 그래서 세종의 직계 조상 여섯 모두 하늘의 명을 받들었으며, 이는 중국 제왕의 그것과 같다고 설파하고 있다. 특히 오랜 세월 피나는 노력과 덕을 쌓아 하늘의 명을 받은 만큼 후대 임금은 공덕을 헛되이 말 것을 경계하려는 데 있다. 그런데 1장과 2장에서 원인과 결론을 내버리는 독특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현대의 신문기사 쓰기 방식인 역피라미드 구조로 리드문을 작성한 것이다.

용비어천가의 주인공들인 육룡을 소재로 한 2015년 SBS사극 '육룡이 나르샤' 홍보 포스터.photo by daum.net

4.내용은 해동육룡에 대한 송축과 예찬이다. 그래서 주제 의식이 뚜렷한 내용을 갖고 있다. 물론 형식도 정교하게 짜였다. 특히 본문 제1, 제2장은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 차 있는 데다 옛 고사를 인용, 왕조창업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다. 1장은 본문 도입부이지만 이유 원인을 묻고, 2장은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결론이다. 3장~109장은 조상의 행적과 인격, 부인들의 내조 등을 기린다. 그중 제3∼제8장은 조선 왕조의 시조인 목조에서 환조에 이르는 할아버지들의 행적, 제9∼제14장은 태조의 위화도 회군에서 한양 천도에 이른 경위와 등극을 노래하고 있다.
제15∼제26장은 왕조의 시작을 알리는 조짐, 제27∼제46장은 태조의 비범한 모습과 재주와 하늘의 도움을 받은 신기한 기적, 제47∼제62장은 태조의 무공을 다루고 있다. 제63∼제85장은 태조의 재주, 학문, 인격을 기린다. 제86∼제89장은 태조의 신력(神力)과 신무(神武), 신공(神功)을 기리고, 제90∼제109장은 태종의 용모·인품, 하늘의 도움을 받은 일, 부인(세종대왕의 어머니)의 내조의 공까지 기린다. 제110∼제125장은 뒷 임금들을 경계하는 이야기다.

조선태조어진(朝鮮太祖御眞)은 이성계의 초상화로 국보 제317호이다. 전북 전주 경기전(慶基殿)의 어진박물관 수장고에 보관. 태조 재위 당시에 제작된 어진을 1409년(태종 10)에 모사해 이듬해봉안했으며, 1763년(영조 39)에 수리를 거치고 나서 1872년(고종 9)에 어진도사(御眞圖寫)의 화사(畵師) 조중묵이 다시 모사한 것이다. photo by ko.wikipedia.org

5.용비어천가는 순 우리말 장이 3곳이나 있다. 2장과 67장, 68장이다. 67장은 몽골(원나라) 칸의 남송 정벌 당시 일화와 이성계(태조)의 위화도(威化島, 압록강 가운데 있는 작은 섬) 회군을 다룬 장이다.
이들 장은 문체(文體)가 유려하고 활기차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처음 만들어진 글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토박이 말을 과감하게 많이 썼고, 낱말 하나하나가 신선하고 부드럽다.
한글 창제로 가능한 우리말 악장이자 서사시인 셈이다. 학계에서는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의 전통을 이어받은 새로운 악장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다만 구전 가요 영향으로 기존에 써 오던 이두(吏讀)가 섞이고, 앞절(중국 사례)과 뒷절(조선 사례) 구조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도 안고 있다. 한편 용비어천가에는 중세 몽골어, 여진어, 한자 가차, 당대 발음으로 쓰고 주석을 단 경우도 있어 중세 동북아 언어 연구에도 많은 자료를 제공 하고 있다.

용비어천가 1장 펼침본.서울대 규장각 소장.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6.20세기에 들어와서 용비어천가 연구는 1924년 일본학자 마에마 쿄사쿠(前間恭作,1868∼1942, 한국어 연구가)에 의해 최초로 이뤄졌다. 마에마 쿄사쿠는 일본 나가사키 출신으로 게이오(慶應)대학을 졸업한 후 조선총독부 통역관을 거친 한국어 학자였다.
국내 학자 효시(嚆矢)는 사실상 국어학자 허웅(許雄, 1918~2004) 전 서울대 교수이다. 1955년 ‘용비어천가, 정음사, 1986년 중판)’를 펴냈다. 허 전 교수는 한글학회 회장과 이사장을 역임한 한글학의 권위자였다.
가장 최근에 용비어천가에 대한 자세한 풀이를 한 이는 박창희(朴菖熙) 전 한국외국어대학 한국학과 교수다. 박 교수는 ‘역주 용비어천가(상·하, 박창희, 한국학중앙연구원, 2015)’를 펴냈다.

용비어천가 서사가 새겨진 만원권 지폐 부분.photo by ko.wikipedia.org

7.용비어천가 판본은 여러 개 있다. *.보물 제1463-1호=계명대학교 소장. 전10권 중 권8~권10의 3권. 조선 초 유행한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로 판각한 것이다.
*.보물 제1463-2호=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용비어천가의 초간본 10권 중 권 3~4. 권3의 첫 부분과 권4의 말미(末尾, 끝 부분)에 결락(缺落)이 있다.
*.보물 제1463-3호=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1책은 용비어천가 전 10권 가운데 권1·2로 인쇄 상태가 양호하고 권수에 ‘선사지기(宣賜之記, 임금의 하사품을 표시하는 것)’라는 인장이 찍혀 있다. 1447년에 간행된 초간본의 초쇄본으로 추정한다. 본문 머리〔卷首〕의 진전문(進箋文) 3장 전면과 본문 권1의 1장 후면, 그리고 권2의 끝부분 44, 45, 46장이 떨어져 나갔으며, 권2의 41, 42장은 일부 훼손됐다.
*.보물 제1463-4호=고려대 중앙도서관 만송문고(晩松文庫) 소장. 용비어천가 권1~2, 7~8.각 1책은 1447년 초간본으로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본,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 계명대 소장본과 같은 판본이다. 다만 권7은 유일본이고 권8은 계명대본보다 보존상태가 좋다. 권1 권수의 서문 1~3장은 떨어져 나갔고 권2의 44~46장은 일부 훼손됐다. 45장은 3행만 있고 4~9행은 떨어져 나갔다. 권 7·8 은 표지에 제첨(題簽) 형식의 ‘용비어천가’가 있다. 제첨은 서화의 제목을 써서 표지에 붙인 길고 가느다란 종이 조각, 혹은 자투리를 뜻한다.

8.용비어천가는 악장인 만큼 1·2·3·4·125장 등 5개 장은 음악(곡)이 곁들여진 춤(안무)으로 궁중(조정)의 연례악(宴體樂)으로 공연됐다. ‘치화평(致和平)’, ‘취풍형(醉豊亨)’, ‘봉래의(鳳來儀)’, ‘여민락(與民樂)’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용비어천가 관련 그림책도 있다. 조선 세조 때 양성지(梁誠之, 1415~1482, '세조의 제갈량'으로 불린 인물)가 지은 ‘용비어천도(龍飛御天圖)가 있다. 용비어천가 내용을 그림으로 풀이한 책이다.

용비어천가를 소재로 드라마로 만든 2011년 SBS 사극 '뿌리깊은 나무' 홍보 포스터. photo by .naver.com

9.드라마와 영화 등으로 많이 나왔다. 2011년 SBS 사극 '뿌리깊은 나무' 로 방영됐다. 그해 48회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대상, 방송통신위원회가 선정한 '올해의 좋은 프로그램상'을 받았다.
육룡이 나르샤는 ‘뿌리깊은 나무 프리퀄(이전 시대) 사극으로 SBS에서 2015년 10월 5일 ~ 2016년 3월 22일 50부작으로 방영됐다. 유아인, 김명민, 신세경이 주연을 맡았다. 제43회 한국방송대상 장편 드라마부문 작품상, 제11회 서울드라마어워즈 장편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용비어천가를 지은 이 중 한사람인 권제의 묘(두번째). 위는 아버지 양촌 권근(태종 때 대제학), 아래는 아들로 세조때 좌의정을 지낸 권람의 묘이다.출처=음성군청. www.eumseong.go.kr

#.권제(權踶, 1387~1445)=고려 말 조선 초 문신 겸 학자. 본관은 안동, 호는 지재(止齋), 시호 문경(文景)이다. 조선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양촌 권근(權近, 1352~1409, 태종 때 대제학)의 아들이자 권람((權擥, 1416~1465, 계유정난의 주역, 세조 때 좌의정)의 아버지다.
개국공신의 아들인 만큼 음서(蔭敍, 조상의 덕으로 관리가 되는 것)로 관직에 나가 경승부 주부(敬承府 主簿,종6품~종8품의 관직) 재직 중 파면됐다가 1414년(태종 14) 알성문과(임금이 성균관 문묘에 참배한 뒤 시행한 문과 시험)에 급제했다.
권제는 세종 초에 이르러 집현전 부제학·대사헌·한성부윤을 지내고, 1429년 진헌사(進獻使,사은의 뜻을 전하는 사절)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1435년 이조판서, 2년 후 예조판서, 1439년 중추원지사(中樞院知事), 1445년 우찬성이 됐다.
1443년부터 병을 앓아 병석에 있다가 1445년 말 사망했다. 불천지위(不遷之位, 나라에 공이 있어 왕의 허락으로 신주를 옮기지 않는 지위)의 부조묘(不祧廟, 불천위 제사의 대상 신주를 모신 사당)가 충북 음성군 소이면에 있다.
문집으로 ‘지재집(止齋集)’, 주요 저서에 ‘역대세년가(歷代世年歌)’가 있다. 용비어천가를 상찬할 때 직함은 ‘숭정대부 의정부 우찬성 집현전 대제학 지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이었다.

'용비어천가' 지은이 중 한사람인 문성공(文成公) 정인지(鄭麟趾) 영정.photo by namu.wiki

#.정인지(鄭麟趾, 1396~1478)=조선 초기의 문신·성리학자, 역사가. 본관은 하동, 호는 학역재(學易齋)이다. 시호는 문성(文成). 세종~세조 때의 최고의 테크노크라트이다. 석성현감을 지낸 정흥인(鄭興仁, 나중에 영의정부사 하성부원군 추증)의 아들이다.
1411년(태종 11) 16세 때 생원시에 장원(壯元) 합격한 뒤 1414년(태종 14년) 왕이 직접 주관한 식년문과(式年文科, 60갑자 가운데 자(子)•묘(卯)•오(午)•유(酉)가 드는 해(식년)에 정기적으로 치른 과거 시험)에 장원급제했다. 이때 태종 이방원이 친히 어사화(御賜花)를 내렸다고 한다.
1414년에 예빈시 주부(禮賓寺 注簿), 1415년 예문관 부교리, 1418년(세종 즉위년) 8월 병조 좌랑(佐郞, 정6품)이 됐다. 1424년 집현전관(集賢殿官)에 선발되고 집현전 응교(應敎,5품)에 제수됐다. 1428년 집현전 부제학에 이어 집현전 대제학으로 훈민정음 연구에 깊이 참여했고, 1448년 이조판서가 됐다.
세종 사후 수양대군(首陽大君,나중에 세조)이 주도한 계유정난(癸酉靖難)에 협력한 공로로 특진, 좌의정에 발탁됐다. 계유정난은 1453년(단종 1) 11월 10일(음력 10월 10일)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반대파들을 숙청,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특히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이 됐다.
장남 정현조(鄭顯祖, 1440~1504)는 세조의 딸 의숙공주((懿淑公主, 1441~1478)의 남편이 되고, 현조의 동생 정숭조(鄭崇祖, 1442~1503)의 아들 정승충(1467~1549)은 세조의 서자 덕원군(德源君 李曙, 1449~1498)의 사위가 됐다.
정인지 아들 상조(尙祖)의 아들 세호(世虎, 1486~1563)의 딸(정인지 증손녀)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鄭氏, 1530 ~1567)은 선조의 생모다. 1568년 선조 즉위 직전 해에 사망했다.
영의정을 지낸 절재(節齋) 김종서(金宗瑞,1383~1453)와는 악연이 있다. 계유정난((癸酉靖難,1453년 11월 수양대군의 정권 장악 사건) 후 세조가 집권하면서 김종서의 큰 며느리(장남 김승규의 처) ‘내은비’와 딸 ‘숙희’, 딸 ‘내은금’은 정인지의 종이 된다.
정인지는 ‘훈민정음’의 공식 설명서인 해례본의 서문도 썼다. 정인지는 고리대금으로 부를 축적,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윤사로, 사윤(세조의 처남 2명), 박종우 등과 조선 초기 4대 부호였다. 1478년는 83세에 사망했다. 용비어천가를 상찬할 때 직함은 ‘자헌대부 의정부 우참찬 집현전 대제학 지춘추관사 세자우빈객’이었다.

용비어천가를 지은 이 중 한명인 세종 때 문신 안지를 모신 경북 경산 조곡서원. 출처=경산시청.

#.안지(安止, 1377 혹은 1384~1464)=조선의 문신. 호는 고은(皐隱), 본관은 탐진(耽津, 전남 강진)이다. 아버지는 찬성 벼슬을 지낸 안사종(安士宗)이다.
1414년(태종 14) 문과에 급제, 성균관 박사가 됐다. 세종 때 수찬·예문관 제학 등을 지냈으며 ,1446년 호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1447년(세종 30) 공조판서(工曹判書), 이듬해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1455년(단종 3)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1461년(세조 7)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거쳐 1463년(세조 9) 검교영중추원사(檢校領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이후 봉조하(奉朝賀, 전직 고위괸리 예우를 위해 녹봉을 주는 명예직)를 역임하는 등 태종~ 단종 네 임금을 섬긴 중신이다. 시에 능했으며 해서(楷書, 바르게 쓰는 서체)를 잘 써 세종의 명으로 태종을 위해 ‘금자 법화경(金字法華經)’을 썼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아우 안일(安逸)이 살던 강진에 은거했다가 1455년 소환을 받고 관직에 복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1품)를 지냈다. 말년에 형 안기(安起)가 살던 김제군 용지면 평고리 안촌(安村)마을로 옮겨 살았다. 1464년 사망했다. 향년 81세. 경북 경산의 조곡서원(早谷書院)에 제향됐다. 용비어천가를 지어 바칠 때 직함은 ‘가선대부 공조참판 집현전 제학 동지춘추관사 세자우부빈객’이다.(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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