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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리바이어던-정치철학의 원전,서양 철학사 최고 걸작은 수필형 논문체로 서두를 연다 본문
제1장 감각에 대하여 “인간의 사고(thoughts)에 대해 우선 하나씩 살펴보고, 그런 다음 연속된 사고, 즉 그 사고들의 상호관계를 살펴보겠다. 하나씩 볼 때 사고는 보통 ‘대상(object)’이라 불리는 우리 바깥에 있는 물체의 어떤 성질 혹은 우유성(偶有性, accidents)의 표상(表象,representation) 또는 현상(現像,appearance)이다. 그 대상이 우리의 눈이나 귀와 같은 인체 기관에 작용하는데, 이 작용의 다양성이 현상의 다양성을 낳는다. 모든 사고의 근원은 우리가 감각(sense)이라고 부르는 것에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모든 개념은 최초에는 전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감각기관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감각기관이 얻은 것을 근원으로 하여 나머지 개념들이 생겨난다.”(토마스 홉스 저, 진석용 역, 나남, 2008)
1.정색하고 쓴 철학 논문이 아니라 수필형 논문처럼 편안하게 읽도록 쓴 도입부다. 어려운 논문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진 독자를 멋쩍게 할 정도로 쉬운 문장으로 구성됐다. 첫 문장 주제어인 ‘감각’을 제시해 독자의 이해를 유도하고 있다, 다만 번역과정에서 한자어로 번역한 것들이 매우 어색한 느낌이다. 본문에 나오는 우유성, 표상이 그것이다.*우유성(偶有性)은 사물이 일시적으로 가지게 된 성질, *표상(表象)은 지각에 의하여 의식에 나타나는 외계 대상의 상(像)을 뜻하다. 그런데 해석을 붙여도 어려운 이런 용어를 왜 번역본에 썼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2.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Leviathan,1651)’은 최초의 국가론으로 세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서 중의 하나이다. 문명의 발전과 국가의 성립이후 인류에게 남겨진 불후의 걸작이다. 르네상스를 넘어 근대의 태동과 방향을 제시한 위대한 계몽서이자 ‘근현대인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영어로 쓴 인문학 서적 중 가장 뛰어난 저서라 해도 손색이 없다는 게 지난 수백년동안의 학자들의 인식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리바이어던에 대해 영어로 쓰인 책 중 '철학의 지존들'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헤겔, 마르크스의 저작과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저서로 평가하고 있다.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1599~1658)의 청교도 혁명(1649년 찰스1세를 처형하고 공화국 수립)이 성공한 시기, 망명지 프랑스에서 1650년 말기에서 1651년 초기에 쓴 저서다.영어 원본은 1651년 5월 영국에서 출간됐다. 이 저서는 출간과 함께 어떤 사상가의 글보다 더 많은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으며, 주목을 끌었다. 하지만 이 원본은 1668년 암스테르담에서 발간된 라틴어 판 '리바이어던'과 내용상 큰 차이를 보인다. 원제는 ‘리바이어던, 혹은 교회 및 세속적 공동체의 질료와 형상 및 권력(Leviathan, or The Matter, Forme and Power of a Common-Wealth Ecclesiastical and Civil)’이다.
3.리바이어던은 국민의 생명을 지상의 모든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국가 통치권자로서 정부를 지칭하는 것이다. 자연보다 강한 인공적 실체로서 국가다.한마디로 국가라는 거대한 창조물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리바이어던은 구약성서 41장에 나오는 바다의 거대 괴물인 ‘레비아탄(Leviathan)’이 어원이다. 레비아탄은 야훼(Yahweh)가 물리친 바다의 괴물이다.
철학 명저 리바이어던의 탄생 배경에는 영국의 복잡한 정치사와 내전, 저자의 망명 등이 얽혀 있다. 영국 내전(1642~1651, 왕당파와 의회 간 전쟁, 올리버 크롬웰의 의회파 승리) 중 프랑스로 망명해 있을 때 쓰여졌다. 이 때문에 절대 주권자에 의한 사회 계약과 통치를 주장한다. 또 내전을 피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국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다만 왕당파 입장에서 '절대군주'를 옹호했지만 백성의 합의에 의한 군주제를 주장, 왕권신수설를 신봉하는 골수 왕당파의 배척을 받았다. 한편 당시 왕정복고 후 의회(하원)는 1666년 런던 대화재의 혼란 속에서 리바이어던을 금지 도서 목록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4.리바이어던의 표지는 거대한 인간형의 존재가 산 너머에서 솟아올라 도시를 굽어보는 모습이다. 저자가 국가를 ‘거대한 인조인간’으로 표현한 것으로 형상화 한 것이다. 총 4부인 리바이어던은 제1부는 ‘인간에 관해서’, 제2부는 ‘국가 즉 정치공동체에 관해서’, 제3부는 ‘기독교 국가에 관해서’, 제4부는 ‘어둠의 왕국에 관해서’라는 주제어를 달고 있다. 1~2부는 '인간의 본성과 국가통치권자(정부)의 본질'을, 3~4부는 '통치자(군주)와 국민이 기독교도인 국가의 정부'를 다루고 있다.
리바이어던은 전반적으로 교회야말로 지구상의 모든 불화와 혼란, 분쟁과 내란의 주범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베드로 수임권과 교황무오류설, 교황입법권 등을 맹비난했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지상의 국가에 대해서 총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성경의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이다.
5.리바이어던은 중세 질서의 전반적 와해 속에서 태동, 근대의 문을 확실하게 연 정치철학서다. 새로운 인간 생존 방식을 탐구해 서양 근대 후학들의 연구대상이 됐다. 특히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Bellum omnium contra omnes)’, ‘인간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이기적 본성에 따라 이를 실현할 강력한 힘의 형체를 형성’, ‘사회 사람들의 계약을 통한 통치자의 권위가 성립’ 등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대표적인 학자들이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등이다. 특히 의회파에 속한 존 로크 사상 발전의 큰 토대를 제공해 나중에 프랑스 혁명과 미국이 식민지에서 벗어나 근대 국가 체제로 나아가는 이론적 시발점 역할을 했다.
리바이어던이 현대에 와서 각광 받은 것은 1, 2차의 세계대전이다. 리바이어던의 내용 하나하나가 국가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면서 서양 근대사의 틀을 넘어 정치철학의 명저로서 재등장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7.현대에 들어와서는 비판적 분석도 많다. 영국 작가이자 사상가, 역사학자인 앤서니 고틀리브(Anthony Gottlieb, 1956~현재)는 “홉스의 정치 철학이 유럽의 종교 전쟁과 17세기 영국 내전과 같은 종파 갈등의 시대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며 “평화와 안전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달성해야 할 정부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생각하는 저서”라고 비판했다. 영국의 역사학자로 옥스퍼드 대학 현대사 교수를 지낸 휴 트레버 로퍼(Hugh Trevor-Roper,1914~2023)는 리바이어던에 대해 “방법, 논리, 결론은 독재"라고 지적했다.
#.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1588 ~ 1679)=영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철학자. 최초의 민주적 사회계약론자. 윤리학자이자 형이상학자, 과학자. 현대 정치 철학의 창시자로 17세기 지성사를 대표하는 인물.
1.영국 서남부 윌트셔(Wiltshire) 주 맘스베리(Malmesbury) 외곽 웨스트포트(Westport)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토마스 시니어 홉스는 영국 국교회의 목사였다. 하지만 모범적인 목사가 아니어서 교회당 앞에서 다른 목사와 난투극을 벌인 뒤 도망쳐서 평생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홉스는 칠삭둥이로 태어났다.당시 스페인 무적함대(Grande y Felicísima Armada, Armada Invencible)의 영국 침공설에 놀란 어머니가 임신 7개월 만에 조산(早産)한 것이다.
앞서 영국 해군 지휘관 프랜시스 드레이크( Francis Drake,1540~1596,16세기 잉글랜드 왕국의 해적이자 군인)는 1587년 스페인 카디스항을 기습해 무적함대에 적지않은 타격을 입혔다.이에 스페인이 이듬해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했다.
홉스에게는 두 살 연상의 형 에드먼드(Edmund)와 여동생 앤(Anne)이 있다.아버지 부재로 어려움을 겪던 홉스는 장갑 장사로 돈을 많이 번 삼촌 프란시스 홉스(Thomas Francis Hobbes)의 지원에 따라 4살 때부터 교육을 받았다.마을의 초등학교에서 옥스퍼드 출신의 로버트 라티머(Robert Latimer) 선생에게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웠다. 홉스는 초등학교 시절에 고대 그리스의 비극시인 에우리피데스(Euripides,BC 480~406)의 ‘메데이아(Mēdeia, 불성실한 남편에 대한 복수를 위한 메데이아의 계산된 욕망을 그린 비극)’를 번역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로 총명했다.
2.마을에 있는 사립학교 맘스베리 학교를 거쳐 옥스퍼드대학을 다녔는데 근면한 학생이 아니었다.사냥과 신대륙 발견 등 모험을 좋아했고, 과학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친구가 된 시인 아브라함 카울리(Abraham Cowely)는 홉스에 대해 ‘과학의 콜럼버스’라고 불렀다고 한다.
홉스는 결국 1608년 캠브리지의 세인트 존스 칼리지 캠브리지(University of Cambridge) ) 에서 학사 학위를 마쳤다. 이후 매우 부유한 영국 귀족이자 궁정인으로 제1대 데본셔 백작인 윌리엄 캐번디시(William Cavendish, 1st Earl of Devonshire, 1552~1626) 아들 윌리엄(William Cavendish, 2nd Earl of Devonshire,1590~1628)의 가정교사로 추천받아 일했다.
홉스의 캐번디시 가문과 인연은 생계 수단를 넘어 17세기 정치와 과학과 철학이 서로 만나는 계기가 됐다. 이 인연은 홉스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특히 1대 백작의 남동생인 대지주 찰스 캐번디시(Sir Charles Cavendish, 1553~1617)의 아들인 윌리엄 캐번디시 뉴캐슬 어폰 타인 공작 1 세(William Cavendish, 1st Duke of Newcastle upon Tyne, 1593~1676)의 후원을 많이 받았다. 뉴캐슬 공작의 동생으로 수학자인 찰스(Sir Charles Cavendish, 1591~1653)는 ‘홉스 숭배자’가 되기도 했다.
홉스는 1610년 당시 시작되는 그랜드투어의 하나로 제자 윌리엄을 데리고 이탈리아 등 유럽을 돌았는데 옥스퍼드에서 배운 스콜라 철학과 논리학의 쇠퇴와 새로운 학문의 태동 조짐을 목격하고 1615년 영국에 돌아왔다. 이후 로맨스(운문 소설), 희곡 등을 읽으며, 고대 그리스,로마 역사가들과 시인을 연구했다. 이후 역사학의 선구자 투키디데스(Thucydides, BC 460~400)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History of the Peloponnesian)’를 영역했다.
3.홉스는 1618년과 1622년 사이에 당시 유명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1561~1626)의 비서로도 일했다. 이후 1634년 홉스는 3대 디본셔 백작의 가정교사로 유럽 여행을 갔다. 당시 영국 귀족 사이에서는 ‘그랜드 투어(The Grand Tour,17 세기에서 19 세기 초반까지 이탈리아를 주요 목적지로 삼아 유럽을 여행하는 전통적인 관습)’가 유행이었다.
이 때 프랑스 수학자 마린 메르센느(Marin Mersenne,1588~1648)의 과학 서클에 참여해 당대의 유럽 대학자들과 교류했다. 이 때 프랑스 철자이자 수학,물리학자인 피에르 가상디(Pierre Gassendi,1592~1655)는 가장 친한 친구, 데카르트(René Descartes,1596~1650)는 가장 치열한 적수가 됐다. 1636년 피렌체의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di Vincenzo Bonaiuti de' Galilei,1564~1642)를 방문하고,영국으로 돌아온 것은 1637년 10월이었다.
4.1940년 올리버 크롬웰의 의회(Long Parliament, 1640~1660) 가 시작되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군주정(왕정) 지지자 홉스는 11월 15일 프랑스로 망명한다. 왕당파와 의회군의 내전은 1649년 찰스1세(Charles I,1600~1649,1625년 제임스 1세 사후 스튜어트 왕가의 두 번째 왕)의 처형으로 끝난다. 홉스는 귀국하지 못하고 프랑스 망명 생활 중 역작 ‘리바이어던’을 집필했다. 이후 영국으로 돌아온 1651년 5월 저작물을 출판했다. 그런데 홉스는 망명생활 할 때부터 중풍 증세가 심해지면서 1652년 말부터는 자력 필기가 어려워졌다. 이에 고용한 대필사가 디본셔 백작 집에서 빵 굽는 일을 하던 제임스 웰돈(James Weldon)이었다. 웰돈은 홉스의 말년까지 집사 역할과 유언 집행자를 했다.
5.홉스의 망명생활은 편하지 않았다. 반 종교주의자인 홉스에 대해 영국 국교회 성직자 집단과 로마 가톨릭 신봉자 등이 여전히 적개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부 국교회 왕당파들은 프랑스 망명 중이던 앤토니 아삼(Anthony Ascham)과 이삭 도리스로스(Isaac Dorislaus)를 암살하기도 했다. 홉스의 반가톨릭주의는 프랑스의 성직자 집단도 불편한 관계 에 놓이게 했다. 하지만 정치적 소신인 군주정 체제를 유지한 것은 1660년의 왕정복고 때 복권(復權)을 가져왔다.이후 영국 왕실은 홉스에게 연간 100파운드의 연금을 지급했다.
6.홉스는 당시로서는 장수했다. 1673년 85세 즈음에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영역했고, 2년 후 ‘오디세우스’를 영역했다. 이후 1675년 런던을 떠났고, 죽을 때까지 카벤디시 집안의 영지인 채트워스 하우스(Chatsworth House )와 하드윅 홀(Hardwick Hall,체스터필드와 맨스필드 사이의 언덕 꼭대기에 위치)에서 기거했다. 홉스가 죽은 후 그의 원고 중 상당수가 체스터필드(Chesterfield)에서 서쪽으로 14km 떨어진 데비셔(Derbyshire)의 대일즈( Dales)에 있는 채츠워스 하우스(Chatsworth House)에서 발견됐다.
1679년 10월부터 홉스는 병들어 누웠고, 극심한 ‘배뇨 곤란’ 등을 겪었다. 홉스는 영면 직전 “이 세상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발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라고 말했다.
11월 말 카벤디쉬 집안은 채트워스에서 기후가 좀 더 온화한 하드윅 홀로 옮겨가면서 앓고 있던 홉스를 두고 가려고 했다.하지만 홉스는 함께 떠나기를 원해 결국 두터운 모포로 감싸고 4두 마차에 실려 하드윅으로 갔다.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1679년 12월 4일 영면했다. 향년 91세. 더비셔의 올트 허크널(Ault Hucknall)에 있는 세례 요한 교회(St John the Baptist's Church)에 안장됐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