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레헨따(La Regenta)-돈키호테 이후 최고의 스페인 소설 첫 문단은 역설과 상징을 통한 세밀 묘사로 시작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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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헨따(La Regenta)-돈키호테 이후 최고의 스페인 소설 첫 문단은 역설과 상징을 통한 세밀 묘사로 시작한다.

지성인간 2024. 9. 2. 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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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레헨따'는 19세기 여성억압 시대의 스페인 사회가 배경이다.19~20세기 초 스페인 여성의 각박한 삶을 그린 스페인 리얼리즘 화가 호세 구티에레스 솔라나(Jose Gutierez Solana,1886~1945)의 '삶 속의 여성들'. 스페인 빌바오 미술관 소장.https://masdearte.com

1장 "영웅적인 도시가 오수(午垂)에 빠져 있다. 북쪽을 향해 질주하느라 너덜너덜해진 희뿌연한 구름을 후덥한 남풍이 굼뜨게 밀어내고 있다. 거리에는 먼지와 넝마 조각, 지푸라기, 종이 들이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며 몰려다니는 요란한 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골목에서 저 골목으로, 이 거리에서 저 거리로, 이 길모퉁이에서 저 길 모퉁이로 뒤엉켜다니는 모습은 마치 보이지 않게 접힌 공기에 에워싸여 서로를 좇아 날아다니는 나비와도 같았다. 쓰레기 부스러기와 온갖 잡동사니들이 패거리를 지어다니는 동네 꼬마들처럼 잔뜩 뒤엉켜 몰려다녔다. 그것들은 한순간 잠든듯 잠잠해졌다가도 순식간에 위로 솟구쳐올라 흩어지기도 하고, 흔들리는 가로등까지 기둥을 타고 올라가기도 하고, 길모퉁이에 삐딱하게 붙어있는 포스터에 들러붙기도 했다. 깃털이 건물 3층 높이까지 날아오르고, 모래 먼지가 납으로 고정된 쇼윈도 틈새에 며칠이고, 몇년이고 들러붙어 있었다. 옛 왕도의 귀족적이고 고풍스러운 면모를 간직한 도시 베뚜스따가---."(레오뽈도 알라스 ‘끌라린’ 저, 레헨따(전 2권), 권미선 역, 창비, 2017)

소설 '레헨따' 시대 '슬픈 불행의 여왕(la de los Tristes Destinos)'의 도망. 1868년 쿠데타로 왕정이 붕괴하면서 프랑스로 망명하는 스페인 여왕 이사벨라(sabel II, 1830~1904)의 초라한 행색을 묘사한 만화가 프란시스코 오르테고 이 베레다(Francisco Ortego, 1833~1881)의 풍자화 '프랑스로'이다.그해 10월 4일 스페인 잡지 '질 블라스(Gil Blas, 1864-1872)'에 게재됐다.https://en.wikipedia.org

1.과감하고 섬세한 묘사의 도입부가 눈길을 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는 듯이 상세하게 전개하는 설명적 글쓰기가 돋보인다.  이처럼 첫 문단부터 영웅과 낮잠, 질주와 굼뜨게, 요란한 소리와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 등 상징과 역설이 지배하고 있다. '영웅적인 도시가 낮잠을 잔다는' 역설의 문장을 통해 도시의 정체성도 내비친다. 을씨년스런 옛 도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쓴 것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 관습 타파와 관련이 있다. 3인칭 전지적 서술을 적용한 것은 복잡한 줄거리와 복잡한 캐릭터를 예고하는 것이다. 어둡고 억압적인 날씨는 주인공의 심리적 상태를 상징하는 것이다. 첫줄의 오수(午垂)를 제외하면 단어, 문장 하나하나는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썼다. 본문에 나오는 *오수(午垂)는 낮잠, 시에스타(Siesta)이다. *베뚜스따(vetusto)는 가상의 도시로 '고풍스러운', '매우 오래된'이라는 뜻이다. 스페인 북서쪽에 위치한 도시 오비에도를 상징한다. 

1884년 바르셀로나에서 나온 소설 레헨따 초판본 표지. photo by wikipedia

2.레오뽈도 알라스 ‘끌라린’(클라린-레오폴도 알라스)의 '레헨따(라 레젠타, La Regenta,1884~1885)‘는 스페인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이다. 세계적인 문호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Miguel de Cervantes Saavedra, 1547~1616)의 '라만차의 돈키호테(l Ingenioso hidalgo don Quijote de La Mancha,1605)‘이후 스페인 문학 최고의 소설 중 하나다.
스페인 왕정복고(이사벨 2세 여왕이 1868년 쿠데타로 파리로 망명할때 데려간 알폰소 12세가 등극)의 해인 1884년에 첫 출판됐다. 1885년 4월 2권이 완간됐는데  바르셀로나 코르테조(Cortezo) 출판사에서만 간행됐다. 소설은 나오자마자 귀족 사회와 성직자 사회를 향한 강도 높은 비판으로 보수 가톨릭의 반발을 샀다. 상징도시이자 소설 배경인 스페인 북부 오비에도 4교구(가톨릭)의 주교는 목회서한을 통해 저자를 힐난까지 했다. 당시 보수 가톨릭의 영향을 받은 스페인  주요 신문, 엘 임파르시알(El Imparcial) 과 엘 리버럴(El Liberal )도 계산적인 무관심으로 보였다.가톨릭  등 종교겨 공세와  평단의  무관심 속에 책이 많이 팔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잊혀졌다.특히 20세기 프랑코 독재 정권에서 금서가 됐고, 1962년까지 출판이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인물의 내면을 파고드는 밀도 높은 서술 등이 평단과 독자의 호평을 받으며, 20세기 말에 스페인 문학의 고전으로 우뚝섰다. 1984년과 1985년 출판 100주년을 맞아 스페인과 미국 학계에서 열광적인 호으 을 보냈다. 1960년대에는 이탈리아어, 1970년대 독일어, 1980년대 영어와 프랑스어로 번역됐다.  2002년 체코 번역가 에두아르드 호두섹 (Eduard Hodoušek,1921~2004)에 의해 체코어로도 나왔다. 영어로는 'The Regent's Wife'로 번역된다.

1885년 2권으로 완간될 당시 초판본 표지. photo by google

3.소설 '레헨따'는 19세기 스페인의 경건한 귀족 사회와 종교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문단과 비평가, 종교계는 처음부터 '음란하고 비종교적'이라고 비판했다. 또  "불면증에 대한 최선의 치료법"이라며 소설도 아니라며 조롱했다. 소설 배경 도시인 오비에도의 반발은 특히 심했다.사제이자 오비에도의 주교 라몬 마르티네즈 비질(Ramón Martínez Vigil,1840~1904)은 "(소설은)에로티시즘으로 가득 차 있다"며 "가톨릭관습을 조롱하고 모욕적인 암시를 하고 있다" 등 비판에 적극적이었다. 평론가들은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21~1880)의 '마담 보바리( Madame Bovary, 1857)'를 표절했다고 힐난했다. 

마담 보바리 표절?-프랑스 석판화가(1866-1936) 유진 데시시(1866~1936)와 찰스 루시앙 레안드레(1862~1934)가 구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21~1880)가 쓴 소설 '보바리 부인(1857)'의 1931년 판에 그린 엠마 보바리 캐릭터. https://en.wikipedia.org

실제 소설에는 욕망의 에로티시즘(간통)이 리얼하게 묘사돼 있다. 주인공 유부녀는 성(聖)과 속(俗)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다 간음하면서 파멸의 길을 간다.하지만 이 여인을 통해 가톨릭으로 대표되는 종교 타락, 여성 정조 억압, 여성 인권 무시 관습, 사회의 위선 등을 맹비판한다. 한편 소설 속 가상도시 베투스타는 스페인 아스투리아스의 주도인 오비에도를 가리킨다. 
등장인물은 의무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젊은 여성(주인공) 아나 오조레스(Ana Ozores)와 남편이자 은퇴한 섭정 판사 돈 빅토르 퀸타나르(Don Víctor Quintanar), 대성당의 수장이자 베투스타 교구의 야심찬 성직자 돈 페르민 드 파스(Don Fermín de Pas), 잘생긴 청년 돈 알바로 메시아(Don Álvaro Mesía), 아나 오조레스의 하인 페트라, 잔인한 간호사 도냐 카밀라(Doña Camila) 등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은 500명이 넘는다

스페인 화가 후안 리모나(Joan Llimona i Bruguera, 1860~1926)가 그리고 엔리케 고메스 폴로(Enrique Gomez Polo)가 판화로 조각한 주인공 아나 오조레스와 사제의 은밀한 만남. 바르셀로나에서 1884년 나온 초판본에 실린 삽화다. https://es.wikipedia.org

4.줄거리는 위선의 탈을 쓴 보수적 도시의 종교와 귀족이 벼랑으로 내몬 여성의 삶을 통해 19세기 스페인 사회를 이야기한다. 여주인공으로 늙은 남편을 둔 미모의 유부녀 아나 오조레스(Ana Ozores)는 도시의 카사노바와 보수적이고 야심찬 사제(신부)의 욕망 대상이 된다. 유년시절 아버지를 찾아나섰다가 밤사이 집에 돌아오지 못한 사건 이후 여주인공은 무고를 당한다. 가출해 성적으로 타락한 계집아이로 낙인찍히는 것이다. 신부에게서 죄의식을 주입받고, 친척들의 이해타산에 따라 늙은 전직 판사에게 시집간다. 
여주인공은 결혼 생활에서 기대할 수 없는 영혼의 구원을 고해신부 페르민에게 구하지만 고해성사는 신부의 성욕을 자극시켜줄 뿐이다. 바람둥이 독신자 돈 알바로 역시 유부녀 여주인공을 정복하고 싶을뿐 사랑까지 줄 생각이 없다. 그런 과정속에 간음을 한 여주인공은 부도적한 여인으로 낙인찍히고,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스페인 북부 아스투리아스의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이삭 델 리베로(Isaac del Rivero Sr)가 제작한 소설 '레헨따' 그래픽 소설 부분. https://en.wikipedia.org

5.소설 '레헨따'에는 현실주의와 자연주의의 실증주의적 경향이 강하게 배어 있다. 소설이 나오자 저자의 친구와 지인들은 가끔 건설적인 비판 뿐만 아니라 조롱도 했다.스페인 소설가 베니토 페레스 갈도스(Benito Perez Galdos,1843~1920)는 끌라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낙서로 가득 찬 종이를 받고 점술의 순수한 기쁨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더 아름답습니까. 칼데아 문자의 신비한 왕국을 음절로 정복하세요"라고 조롱했다. 칼데아(Chaldea)는 바빌로니아를 뜻한다.소설도 아리라는 조롱인 셈이다.
여류 소설가 에밀리아 파르도 바잔(Emilia Pardo Bazán, 1851~1921)은 "나는 이미 당신의 맛있는 낙서를 보고 싶었어요."라고 힐난했다. 하지만 이 책을 번역한 권미선 경희대 스페인어과 교수는 "시간이 흘러도 새로운 해석과 색채를 가미할 수 있는 명작으로 거듭나는 소설"이라고 말했다. 또 줄리안 반스는 라 레헨타 를 '늦게 발견된 외국 고전'이라고 불렀다.

2023년 10월 24일 마드리드 페르난도 아라발 왕립극장에서 공연한 '레헨따'오페라 버전. 바르셀로나 출신 스페인 소프라노 마리아 미로(Maria Miro)가 아나 오조레스(Ana Ozores) 역을 맡아 열연했다.www.codalario.com

7.영화는 1974년 스페인에서 나왔다. 작가이자 배우인 곤잘로 수아레스 모릴라(Gonzalo Suárez Morilla,1934~현재)가 감독하고, 스페인 유명 여배우 엠마 페넬라(Emma Penella,1931~2007)가 주연을 맡았다. 1995년에는 영화 평론가이자 프로듀서 페르난도 멘데스-레이테 세라노(Fernando Méndez-Leite,1944~현재) 가 각본과 감독을 맡아 제작, 텔레비전으로 방영됐다.
또 마리나 볼라인(Marina Bollaín)이 감독한 라 리젠타(La Regenta) 의 업데이트 버전은 2012년에 극장에 상영됐다.텔레비전 각색은 1995년 1월 17일 TVE 의 첫 번째 채널 에서 첫 상연됐다. 연극은 2012년 3월 23일 아빌레스에서 초연된 후 스페인 전역의 여러 극장을 순회 공연됐다. 뮤지컬도 나왔다. 뮤직 아티스트 시그프리도 체키니(Sigfrido Cecchini)가 제작, 2012년 7월 소설 속 고향인 오비에도의 캄포아모르(Campoamor)국장에서 초연됐다.

필명 끌라린으로 더 잘 알려진 레오폴도 알라스. photo by wikipedia

#.끌라린(Clarín)-레오폴도 알라스(Leopoldo Alas,1852~1901)=스페인의 사실주의 소설가이자 비평가. 19세기 스페인의 대표 작가. 현대 스페인 단편 소설 의 아버지로 법학자(사라고사 대학 교수)이기도 했다. 정기 간행물에서 문학 평론가로서 동시대 작가들을 신랄한 기사로 공격한 인물. 스페인 왕정복고기의 혼란한 사회에 필요한 중요한 목소리를 낸 당대의 대표 논객. 끌라린(클라린)은 '나팔수'이라는 뜻의 필명이다.본명은 레오폴드 엔리케 가르시와 이 우레나(Leopoldo Enrique García-Alas y Ureña)이다.

끌라린이 살고 사랑했던 스페인 북부 아스투리아스 오비에도 대성당의 탑.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파르세리사(1803-1875)의 작품. photo by google

1.이베리아 반도의 중심과 북서쪽 사이 지방 자치 단체 사모라의 아스투리아스 출신 아버지를 둔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앞서 가족은 스페인의 북부도시 이자 아스투리아스 공국의 주도 오비에도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주지사 제나로 가르시아-알라스(Genaro García-Alas)였고, 어머니는 레오카디아(Leocadia)였다. 끌라린은 이들 부부의 셋째였다. 8살 연상의 형은 헤나로 가르시아-알라스 이 우레냐(Genaro García-Alas y Ureña,1844-1918)로 스페인 군인, 엔지니어 및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끌라린은 일곱살 때 레온(León)시의 산 마르코스 건물(현 관광 호스텔)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서 공부했다.그런데 가족은 1863년 다시 오비에도로 이사했다. 끌라린은 그곳 도서관에서 세르반테스와 프레이 루이스 데 레온의 작품을 읽으면서 문학의 꿈을 키웠다. 중등교육을 마친 후 오비에도 대학교에 예비입학생으로 들어가, 라틴어 , 산술 및 기독교 교리 과목을 배웠다.이후 법학을 전공 졸업했다. 이후 마드리드 대학교와 대학원에 다녔다.

스페인 만화가 프란시스코 산차 렝고(Francisco Sancha Lengo,1874~1936)가 잡지 '마드리드 코미코'1899년 10월 28일자에 그린 끌라린 레오폴드 알라스의 캐리커쳐. photo by wikipedia

2.끌라린은 1871년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로 이사, 언론 경력을 시작했다. 1875년부터 필명 'Clarín'을 사용했고, 그해 3월 창간된 신문에 들어가 저널리스트 활동을 했다.1876년 여름 첫 번째 이야기를 썼다. 1878년 7월 1일 민법 및 교회법 박사라는 칭호를 얻었다.
1882년은 클라린에게 행운의 해로 사라고사 대학의 정치 경제 및 통계학 학과장직에 임명됐다.이듬해에는 오비에도로 돌아와 로마법 교수가 됐다.

소설 '레헨따'가 완간되던 해 국왕 사망.스페인 화가 후안 안토니오 벤리우레(Juan Antonio Benlliure ,1859-1930)가 1887년 그린 '알폰소 12세의 죽음 또는 마지막 키스'. 1885년 11월 영면한 알폰소 12세의 시신 옆에서 두 딸과 왕비 마리나 크리스티나(Maria Christina of Austria, 1858~1929)가 슬퍼하는 모습을 포착했다. photo by wikipedia

3.끌라린의 소설쓰기를 북돋은 이는 절친으로 시인이자 유명한 형법 전문가인 펠릭스 데 아람부루 이 술로아가 (Félix de Aramburu y Zuloaga, 1848~1913)이었다. 그는 아스투리아스 매거진 (Revista de Asturias)의 이사이자 편집자로 끌라린의 글쓰기를 독려했다.
끌라린은 당대의 유명한 독설가였다. 그는 "진실을 말하는 비평가는 성공하지 못한다"면서도 여러 저자와 작가들을 진실에 기초해 비판했다.그 중에서는 자신에 대한 '끔찍한 풍자'를 잊지 않고 보복한 이도 있었다. 토레노(Toreno) 백작 케이포 드 라노(Queipo de Llano)는 당시 공공 교육부 장관이었는데 끌라린의 교수직을 박탈했다.

끌라린 부인 오노프레 가르시아-아르구엘레스(1862~1909)의 1890년대 모습.https://en.wikipedia.org

4.끌라린은 1882년 아스투리아스의 한 마을에서 오노프레 가르시아-아르구엘레스(Onofre García-Argüelles,1862~1909)와 결혼했다.둘은 이듬해 레오폴도 가르시아 알라스 가르시아 아귈레스(Leopoldo García-Alas,1883~1937)와 딸 엘리사 가르시아-알라스(Elisa García-Alas1890~1973)를 낳았다. 정치적 좌파였던 아들 아귈레스는 1937년 2월 프랑코 군에 붙잡혀 총살당하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1892~1975,총리 재임 1938~1973)가 이끄는 군인세력은1936년 스페인 제2공화국에 반대, 내전을 일으키고 승리해 '프랑코독재 정권(Reino de España ,1947~1975)' 을 출범시켰다.  
끌라린은 1884년부터 연극에도 심취했다.친구인 여배우 마리아 게레로(Maria Guerrero, 1867~1928)와 극작가 호세 에체가라이 이 에이 사귀레(José Echegaray y Eizaguirre , 1832~1916, 1904년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향이 컸다. 1891년 끌라린은 보통선거를 통해 오비에도 시의회 공화당 의원으로 선출됐다.

끌라린을 모델로 한 스페인 화폐.유로화가 나오기 전 1980년대 통용된 200 페세타 지폐다. photo by wikipedia

5.클라린은 1890년대부터 병을 앓고 있었지만 역동적으로 활동했다. 1901년 5월에는 레온대성당 재건 완료를 기념하는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레온을 여행했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많은 사람들과 즐겼다. 그런데 오비에도로 돌아오자 병이 다시 깊어졌다. 진단 결과 장결핵이었다. 며칠이 지난 6월 13일 아침 7시 영면했다.향년 49세였다. 장례식은 오비에도 대학 교수, 친구, 가족, 수많은 작가들이 참석한 대학 회랑에서 거행됐다. 다음날 아스투리아스 오비에도 세멘테리오에 묻혔다.
2010년 3월 끌라린의 증손자들은 가문이 보관하고 있던 가족 도서관과 기록 보관소를 아스투리아스 공국으로 무료 이전했다. 거기에는 레헨따(La Regenta) 원고도 포함됐다. 오비에도 시에 세워진 끌라린 기념비는 동향출신 스페인 시각예술가 빅토르 헤비아 그란다(Víctor Hevia Granda, 1887~1953)와 조각가 마누엘 알바레스 라비아다 (Manuel Álvarez Laviada,1892~1958)이 1931년 제작하 것이다.오비에도 시의회는 레헨따(La Regenta) 출판 130주년을 맞아 끌라린에게 '도시의 입양아'라는 칭호를 부여했다.(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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