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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지봉유설-조선 성리학에 실학의 방아쇠를 당긴 첫 백과사전은 自序의 첫 문단을 한탄으로 시작한다. 본문
자서(自序) "우리나라는 예의(禮義)의 나라로서 중국에 알려지고, 박학(博學)하고 아존(雅尊)한 선비가 거의 뒤를 이어 나왔건만 전기(傳記)가 없음이 많고, 문헌에 찾을 만한 것이 적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은가. 대체로 역대(歷代)의 소설(小說)이나 여러 가지 서적이 있는 것은 고실(故實)을 듣고 고증함이 많게 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자 하기 때문이니, 또한 그 효용이 적다고 할 수 없다. 전조(前朝)의 보한집(補閑集), 역옹패설(櫟翁稗說), 아조(我朝)의 필워잡기(筆苑雜記), 용재총화(慵齋叢話) 등 열 두어 사람의 것이 있음에 지나지 않으며, 그 동안에 세상에 전하여야 할 사적(事蹟)들은 거의 다 사라져버렸다. 보잘것없는 지식으로 어찌 감히 망령되이 책을 저술하는 축에 들기를 흉내낼 수 있겠는가. 오직 한두 가지씩을 대강 기록하여 잊지 않도록 대비(對備)하려는 것이 진실로 나의 뜻이다. 일의 신비하고 괴이한 것에 이르러서는 일체 기록하지 않았으되, 옛 사람의 시문(詩文)에 대하여는 간혹 나의 좁은 소견을 적어 두었으니 본래부터 매우 외람되고 지나친 일임을 안다. 그러나 감히 나의 의견이 옳다고 하지는 않는다. 오직 안식(眼識)이 높은 이가 가려주기를 바랄 뿐이다." (한국고전종합 DB+신병주 역)
1.학자로서 종합적인 반성의 글로 도입부를 연다. 고려 때에 이어 조선에 들어와서도 전기(인물 기록)나 좋은 글을 찾을 수 있는 문헌이 없음을 한탄하고 있다. 스스로 쓰는 서문인 만큼 쉬운 한문을 써 번역문도 쉽게 읽힌다. 이런 좋은 수필이 한문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한글로 써서 널리 보급했으면 이만한 민중 계몽서가 없었을 것이다. 공리공론의 성리학 지배 사회의 한계라 할수 있다. 이 글에 나오는 *.전조(前朝)는 이전 대의 왕조,즉 고려를 말한다. *보한집(補閑集,1254)은 고려 문신 최자(崔滋,1188~1260)의 시화집이다. *역옹패설(櫟翁稗說)은 고려후기 문신 이제현(李齊賢, 1288~1367)의 시화집, *.아조(我朝)는 우리 왕조, 즉 조선이다. *필원잡기(筆苑雜記)는 조선 초 문신 서거정(徐居正,1420~1488)이 엮은 한문 수필집, *용재총화(慵齋叢話)는 조선 중종 때 문신 성현(成俔, 1439~1504)이 쓴 잡록집으로 사망한 후 1525년 간행됐다.
지봉유설에서 지봉 (芝峰)은 이수광의 호, ‘유설(類說)’은 나누어 이야기 한다는 뜻이다. 지봉유설은 자서 이후 본문이 시작되지만 저자의 자서가 책의 내용을 종합한다. 본문은 권1 천문부 천의 첫 문단은 ’설부(說郛,명나라 진종의가 편찬한 책)에 말하였다’. "맑은 기운이 아직 상승(上昇)하지 아니하고, 탁한 기운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으며, 유신(游神,우주의 신령한 기운)은 아직 신령하지 아니하고, 오색(五色)은 아직 나눠지지 않았을 때에, 가운데에 그것(物)이 있었으니, 드러나지도 않고 은미(隱微)하나 성(性,본질)이 존재하였다. 이것을 혼돈(混沌)이라고 말한다."로 시작한다.
2.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 1614년 찬술,1634년 목판 간행)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평가받는 문집이다. 다양한 잡학 지식과 풍부한 내용, 세차례의 명나라 방문 경험 등이 뛰어난 작가적 역량과 어우러진 기사일문집(奇事逸聞集)이다. 그래서 조선 대표 수필집이자 백과사전, 지식층 계몽서라 할수 있다. 기사일문집이란 세상의 기이한 일이나 알려지지 않은 소문,이야기를 모은 문집이다. 즉 옛과 지금의 서적에서 천문학, 문장, 인물, 기예(技藝), 경서(經書), 어언(語言,좋은 말), 궁중 등의 내용을 뽑고,자신이 얻은 지식 등을 편집한 책을 말한다.
20권 10책으로 구성됐고, 총 3435조목을 25부문 182항목으로 나누고 있다. 글에 등장한 인물은 2265명이나 된다. 저자 사후 아들 성구(聖求,1584~1644, 영의정 역임)와 민구(敏求, 1589~1670, 홍문관부제학 역임)가 1634년(인조 12)에 지봉집(芝峰集,이수광의 여러 글을 모은 문집)과 함께 간행했다.이를 숭정본(崇禎本)이라 한다. 숭정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숭정제, 재위 1628~1644, 청나라에 멸망직후 16세에 자살)의 연호다. 구성은 권1 천문·시령(時令)·재이(災異), 권2 지리·제국(諸國), 권3 군도(君道)·병정, 권4 관직, 권5∼7 유도(儒道)·경서·문자, 권8∼14 문장, 권15 인물·성행(性行)·신형(身形), 권16 어언(語言), 권17 인사·잡사, 권18 기예(技藝)·외도(外道), 권19 궁실(宮室)·복용(服用)·식물, 권20 훼목(卉木)·금충(禽蟲)의 25부문이다.
권두에 양주 목사와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종2품)를 역임한 서화가 김현성(金玄成, 1542~1621)의 제문(題文,책의 처음에 쓰는 추천사 형식의 글)이 있다. 돈녕부는 종친이 아닌 왕과 왕비의 친척을 관리하는 곳이다. 또 책의 끝에는 인조(1595~1649) 때 대사헌(종2품)과 예조판서(정2품) 등을 역임한 문장가 택당 이식(李植,1584~1647)의 발문(跋文,저작물의 끝에 쓰는 글)이 있다.
3.지봉유설 집필은 광해군(光海君, 1575~1641, 재위1608~1623년 인조반정 하야) 5년(1613) 일어난 계축옥사(癸丑獄事)가 계기였다. 계축옥사는 광해군이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1606~1614)을 죽이고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仁穆大妃,1584~1632)를 유폐한 옥사다. 집권 당파 남인이 몰락하고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했다. 남인에 속했던 이수광은 조정을 떠나 동대문(흥인지문) 바깥(현 서울시 종로구 창신동 부근)에 은거(隱居, 조용히 숨어지내는 것)했다. 이 때 거처가 비우당(庇雨堂)이었다. 비우당은 ‘겨우 비바람을 가린다(근비풍우,僅庇風雨)’에서 유래, '비를 피할만한 집'으로 해석한다. 비우당에서 그동안 단편적으로 기록하고, 구상한 글들이 지봉유설로 탄생했다. 나중에 아들들이 간행할 때는 1620년 전후 수원에서 은거(隱居)할 때 쓴 글들도 보태졌다.
지봉유설의 핵심 내용은 3차례의 명나라 수도 연경(燕京, 현 베이징) 사행(使行)이 기반이다. 28세 때인 선조30년(1590)에 성절사(聖節使, 황제 황후 생일 축하 사절) 서장관으로 ,35세 때인 선조 37년(1597)년에는 연경(燕京) 황극전에 화재가 발생해 진위사(陳慰使, 궁궐 화재 등 변고 발생 때 위로하는 사절)로 방문했다. 또 광해군때인 1611년 49세 때는 주청사(奏請使, 정치외교상 주청을 하는 사절) 부사 자격으로 연경( 燕京)을 다녀왔다. 특히 두 번째 사행 때 연경의 옥하관에서 베트남(안남국) 사신 풍극관(馮克寬,1528∼1613)을 만나 필담을 나눴고, 이를 '안남국사신창화문답록'으로 집필했다.이때 써준 한시가 베트남 선비들에 큰 화제가 됐다.
4.지봉유설은 선조에서 인조에 이르는 전쟁(임진왜란,1592~1598)과 붕당정치의 시기에 간행된 역작이다. 당시는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고 여진족(청나라)의 발호로 국제적 교류가 불가피하던 때였다. 책에는 세 차례에 걸친 명나라 연경 사행(使行)에서 얻은 다양한 경험과 지식이 녹아 있다.
내용은 여러나라 자료를 활용하고, 자신의 경험을 녹여 내 전문가다운 면모를 부여 준다. 천문, 지리, 역사, 는 물론 타국의 언어,기예, 외도, 궁실, 생물, 인문학, 생활사까지 소개한다. 실제 두 번째 권 제국부(諸國部)에는 베트남-안남국(安南國), 라오스-노과국(老撾國), 류큐-유구국(琉球國, 오키나와), 스리비자야-삼불제(三佛齊,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참파-점성국(占城國,베트삼 남부), 태국-섬라국(暹羅國, 섬은 시암), 일본(日本), 첸라-진랍국(眞臘國,캄보디아서부), 자바 섬-조와(爪哇), 말라카-만랄가(滿剌加,말레이시아), 방글라데시-방갈라(榜葛剌), 사마르칸트-살마이한(撒馬爾罕,우즈베키스탄), 호르무즈-홀로모사(忽魯謨斯), 포르투갈-불랑기국(佛浪機國), 네덜란드-남번국(南番國), 영국-영결리국(永結利國) 등도 나온다.
5.지봉유설이 획기적인 백과사전 역할을 하고, 당시 유학자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외국 문문에 대한 과감한 소개였다. 특히 가톨릭(천주교) 소개는 파장도 컸다. 중국에 들어온 이탈리아 가톨릭 선교사 마테오리치(Matteo Ricci, 1552~1610 한문명 이마두,利瑪竇)의 천주실의(天主實義) 소개가 그것이다. 천주실의는 첫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로 이수광이 들여와 조선에 천주교와 서양문물을 소개했다.
또 고추(고초, 苦椒)가 일본, 토마토(남만시,南蠻柿)가 남만에서 들여왔다고 소개했고, 난설헌 허초희(許楚姬, 1563~1589)의 시들 중 일부가 표절이라고 주장했다. 저자는 허난설헌과 동갑이다. 난설헌은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한 허엽( 許曄,1517~1580)의 딸이자 조선 중기 문장가인 서당(西堂) 김성립(金誠立, 1562 ~ 1592)의 아내이다. 이조판서를 역임한 허성(許筬, 1548 ~ 1612)의 이복 여동생, 창원부사를 역임하고 요절한 문장가 허봉(許篈, 1551 ~ 1588)의 동복 여동생,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 許筠, 1569 ~ 1618)의 동복 누나이다.
이와함께 현재 지린성 지안시(集安市) 태왕진(太王鎭)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 호태왕비, 好太王碑)를 여진족 온얀 아쿠타(完顔 阿骨打,1068~1123, 금 태조, 金太祖)가 세운 금나라(1115∼1234) 비석으로 오인한 조선 초 문신 심언광(沈彦光,1487~1540,중종때 이조판서 역임)의 시가 실려있다. 고려라는 국호에 대해 '산고수려(山高水麗)'의 준말이라는 오해도 하고 있다. 지봉유설에는 특히 1590년대말 영국(잉글랜드) 해적선이 조선에 침입해서 조선 수군과 하루종일 해전을 벌이다가 달아났다는 내용도 있다. 이 해적선은 전라도 흥양(興陽, 전남 고흥군)에 나타났다.
이밖에 우리나라 대표적인 과일로 거창(경남)의 감, 보은(충북)의 대추, 밀양(경남)의 밤, 충주(충북)의 수박, 회양(淮陽, 강원도,현재 북한)의 해송자(海松子, 잣), 안변(함경도)의 배를 들기도 한다. 한편 술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다. "술을 함부로 마시는 사람 치고 일찍 안 죽은 사람 없다. 술이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이 여색(女色)보다도 더 심하다."고 지적했다.
6.지봉유설은 후대 학자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세차례의 명나라 방문 경험을 계기로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입장에서 세계 정세와 문물을 소개한 것은 '실학의 태동'을 가져왔다.많은 학자들의 실용적이고 수용적인 입장에서 학문 탐구에 나섰다. 실학이 성장하는 발판을 깐 것이다. 지봉유설을 본받은 저서 중 대표적인 것이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이 쓴 '성호사설'이다. 또 홍만종(洪萬宗,1643~1725)의 '순오지(旬五志)', 이의풍(李義風,1733~1801)의 '고금석림(古今釋林)' 정동유(鄭東愈,1744~1808)의 '주영편(晝永編)', 유희(柳僖,1773~1837)의 '물명고(物名考)' ,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등이 모두 지봉유설의 영향을 받았다.
#.이수광(李睟光, 1563~1628)=조선 중기 실학의 선구자(일제시대인 1930년대 국학자들이 명명). 사후 영의정 추증.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실학자, 외교관, 저술가이다. ‘세계’를 인식한 조선 최초의 학자다. 왕실 종친의 후손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 시호는 문간(文簡).
1,태종의 후궁 효빈 김씨(孝嬪金氏) 아들(서자) 경녕군 이비(敬寧君 李裶)의 5대손이다. 병조판서를 지내고 사후 영의정에 추증된 이희검(李希儉)과 문화유씨(文化柳氏)의 1남 4녀 중 아들로 1563년 아버지의 부임지였던 경기도 장단에서 출생했다. 이희검은 강호덕의 딸과 첫 결혼했으나 아이없이 죽자 다시 유씨부인과 결혼했다. 더구나 유씨부인은 딸만 낳다가 이희검의 나이 48세 때 늦둥이로 얻었다.
고조부 모양군 이직(牟陽君 李稙), 증조부 선사군 이승손(仙槎君 李承孫), 조부 하동군(河東君 李裕)은 대대로 왕실의 종친으로 살았다. 아버지 이희검은 숙부 신당군(神堂君 李禎)에게 양자로 입적됐고, 부인 문화 유씨의 고조부인 유관(柳寬, 1346~1433, 세종 때 청백리 재상)의 집을 물려받아 살았다. 이 집은 동대문 밖에 있는데 비가 오면 줄줄 샐 정도로 허름했다. 이희검은 1546년(명종 즉위)에 31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 장단부사, 호조판서, 예조판서(정2품) 등을 지냈다. 하지만 이수광 나이 17세 때인 1579년(선조12년) 급서(急逝)했다.
2.이수광은 5세 때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다. 주변에서 일일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말뜻이 매우 정교하여 사람들이 신동(神童)이라고 불렀다. 어렸을 때 지은 시 ‘눈(雪)’을 보고는 당대의 유학자들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앞에 달은 있으나 소나무는 그림자가 없고, 난간 너머에는 바람이 없어도 대나무는 소리가 나네."
실력으로 입신양명(立身揚名)한 케이스다. 16세에 초시(初試), 20세에 진사시, 23세 때인 1585년(선조 18년) 문과에 급제했다.이후 승문원,예문관, 성균관, 사헌부,사간원 등을 거쳐 28세 병조좌랑 겸 지제교(知製敎,교서를 짓는 일, 정6품 이상)를 겸직했다.
1590년(선조 23) 8월 명나라 13대 황제 신종 만력제(神宗 萬曆帝, 1563~1620)의 탄신일 성절사로 정사인 이산보(李山甫, 1539~1594, 선조때 이조판서 역임)의 서장관(사신 중 기록을 맡는 관직, 사헌부의 4~6품 관원 중 임명)으로 연경(베이징)을 다녀왔다. 이어 황해도 도사, 예조좌랑, 홍문관 부수찬 등 내외직을 골고루 역임했고, 마침내 조정 인사권의 핵심인 이조좌랑(吏曹佐郞, 정6품으로 단 2명 보임)에 올랐다. 당시 이조좌랑은 문벌과 파벌간 자파를 앉히기 위해 경쟁이 극심했다. 이에 이항복(李恒福) 은 "선비 중에 영예로운 진출에 마음을 끊었는데도 전랑(銓郞)이 된 것은 이수광이 유일할 것"이라고 탄복했다고 한다. 전랑은 관원을 천거 또는 전형할 때 가장 많은 권한을 가졌던 이조(吏曹)의 정5품직인 정랑과 정6품직인 좌랑을 말한다.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남을 칭찬하는 데에 인색했던 이이(李珥, 1536~1584, 조선 중기 유학자)가 이수광의 시문을 보고 으뜸이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이수광은 붕당에 거리를 뒀으나 남인계로 분류됐고,제자들과 아들 이민구(李敏求, 1589 ~ 1670,부제학, 대사성, 도승지 등을 역임한 조선 중기 문신 )의 제자들도 대체로 남인과 북인에 속했다.
3.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이수광은 파직된 상태였다. 직후 경상남도 방어사 조경(趙儆,1541~1609, 1596년(선조 29) 훈련대장)의 종사관으로 출전했으나 용인에서 패하자 경상우도 방어사 조준(趙俊)의 종사관이 됐다. 이후 의주로 파천한 선조를 따라 가서 북도선유어사(北道宣諭御史), 1593년 홍문관 교리, 사헌부 지평 등 삼사의 언관직을 거쳤다.
1597년(선조 30년) 성균관 대사성으로 정유재란(1597년 발발) 종결에 앞장섰고, 그해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 연경(燕京, 현 베이징)에 갔다. 이 때 베트남의 후 레(後黎朝) 왕조(전기 1428~1527, 후기 1533~1789) 시대 선비로 연경에 사신으로 온 풍극관(馮克寬, Phùng Khắc Khoan)과 만나 교유했다. 베이징 연하관에 50일동안 머무를때 두 사람은 한자 필담을 했다.
이같은 사실은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왜에 포로로 잡혀간 경상도 진주 선비 조완벽(趙完璧, 생몰 미상, 정유재란 때 일본에 끌려갔다가 귀환한 학자)이 탈출해 조선에 소개해 전해졌다. 포로 조완벽은 한문 실력을 인정받아 일본 상인의 안남(베트남 일대) 교역을 도와주면서 안남 관료들을 만났는데 조완벽이 조선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수광의 시를 보여주며 환대했다고 한다. 이는 이수광이 '조완벽전'을 저술한 계기가 됐다.
4.1605년 외직인 안변부사, 1607년 홍주목사, 1609년(광해군 1)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됐다. 이후 승정원 도승지, 대사헌, 예조참판을 거쳐 1610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가 동지중추부사로 전임됐다. 1611년(광해군 3년) 5월 명나라에 파견되는 주청사(奏請使)의 부사로 연경에 갔다. 광해군이 세자를 책봉하면서 명에 세자의 면복(冕服, 국왕, 세자가 제례 때 착용한 관복)을 주청하기 위한 사절이었다.
연경에 간 이수광은 유구(琉球, 오키나와) 사신과 교유하는 한편 이탈리아 신부 마테오 리치의 저서 ' 천주실의(天主實義, 天主實錄,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의를 설명한 책) '도 구입, 국내에 들여왔다.
4.광해군은 1613년 이수광을 두 번이나 대사헌(사헌부의 수장으로 종2품)에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로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仁穆大妃,1584~1632)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 1562~1613, 선조의 장인)이 사사되고, 인목대비의 아들 영창대군(永昌大君,1606~1614)이 강화도로 유배되자, 관직을 버리고 동대문 밖의 자택 비우당(庇雨堂,비를 겨울 피할만한 집)으로 퇴거했다. 이 때 지봉유설을 지었다.
1616년에는 순천부사에 나아가 '승평지(昇平誌, 승평은 순천의 옛 지명)'를 편찬했고, 1618년 인목대비 폐비 후 서궁 유폐 사태가 나자 관직을 사양하고 수원에 은거했다.다만 1623년 인조반정으로 도승지·대사간으로 재등용됐다. 이듬 해 함경북도병마절도사 이괄(1587~1624, 인조반정 가담자)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공주로 모시는데 일조했고, 진압 후인 1625년(인조 3년) 사헌부 대사헌에 올랐다. 인조 3년1625년에 국가 중흥을 위한 방책으로 제시한 상소문 12조목의 '조진무실차자(條陳懋實箚子)'는 상소문 중 가장 뛰어난 소장(疏章)이라는 평을 들었다.
5.정묘호란이 일어난 1627년 늙은 몸을 이끌고 인조를 강화도로 모신 이수광은 이조판서에 올랐으나 1628년(인조 6) 12월 끝내 영면했다.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됐고, 순천 금곡동의 청수서원(淸水書院,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때 훼손)에 모셔졌다. 묘는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에 있으며, 1978년 10월10일 경기도 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됐다. 저서로 '채신잡록'·'병촉잡기'·'찬록군서' 등이 있다.
이수광은 조선 시대 최고의 국제인이었다. 중국어와 만주어, 일본어와 베트남어를 할 줄 알았다. 베트남 사신(명나라 연경에 사신으로 온 풍극관, 馮克寬)과 교류가 알려지면서 베트남 문인들 사이에 유명인사였다. 한편 베트남 수도 하노이 근교에 풍씨 집성촌이 있는데 마을 수호신으로 '풍극관(馮克寬)'을 모신다고 한다. (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