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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이탈리아 기행-유럽의 셀럽 괴테가 쓴 기행 수필의 첫 문단, 모든 여행기의 교본(敎本)이 되다 본문
“새벽 3시에 칼스바트를 몰래 빠져나왔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이 나를 떠나게 내버려두지 않았을 테니까. 8월28일 내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려고 했던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아마 나를 붙잡아 둘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이상 이 곳에서만 지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박영구 옮김, 푸른숲, 1998)
1.갑자기 쑥 들어온 것같은 도입부가 파격적이다. 독자의 기대와 열망을 외면한 첫 문단이다. 고대 로마 영웅 율리우스 카이사르(줄리어스 시저)의 역저 '갈리아 전쟁기'를 보는듯하다.여행기의 기본인 시제와 이유, 떠나는 날의 단상 등을 첫 문단에 그대로 드러냈다. 여행에 대한 기대로 과도한 흥분이 없고, 화려한 미사여구도 쓰지 않는 깔끔한 문체다. 훗날 모든 여행자의 지침서, 여행기의 교본(敎本)이 된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은 뜬금 없는 발상과 쉬운 글쓰기로 시작된 것이다. 여행기나 특정지역에 대한 단상를 쓸때 필수적으로 참고할만한 문장 구성이라 하겠다.
2.괴테의 '이탈리아 기행(Italienische Reise,1816~1829)'은 현대 모든 여행기의 교본이 된 걸작이다. 당대 유럽 최고의 셀럽이자 세계적인 대 문호가 전성기에 쓴 것으로 여행 문학의 태두로 꼽힌다.
당시 유럽인들의 버킷리스트인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명료하게 쓴 것이 특징이다.
괴테는 1786년 9월부터 1788년 6월까지 약 20개월 동안 이탈리아를 여행했다.꿈에 그리던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감동한 그대로를 기록했다.
애초에 3부로 구성해 1816년에 제1부, 이듬해 10월에 제2부가 출간됐다. 1829년, 괴테 나이 80세에 제3부 ‘두 번째 로마 체류기’를 탈고, 이탈리아 여행기가 완성됐다.
3.괴테는 1786년 10월29일 로마에 도착한 날을 ‘제2의 탄생일’이자 ‘진정한 삶이 다시 시작된 날’이라고까지 썼다. 흥분과 감동을 최대한 절제한 찬사다. 본인은 로마를 보고 흥분했지만 책에는 그런 내색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그래서 '괴테가 본 이탈리아', 괴테의 글솜씨로 읽는 이탈리아를 기대했던 당대 독자들은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당대 유럽의 최고 셀럽으로 신분이 드러나기 쉬웠던 괴테(가명 사용)가 신분상의 이점(利點)과 향락(접대 등)을 멀리한 채 여행을 통해 탐구하고 수양하는 모습이 은연중에 드러나 그의 위대함을 다시 새기게 한다.
4.줄거리는 서른일곱의 나이에 성공의 반열에 오른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 이야기다. 당시 괴테는 작가로서 명성도 얻고 바이마르 공국의 고문관이 된다. 공직에 오른 지 십 년의 세월 동안, 부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것이다. 그럼에도 괴테는 점점 경직된 공무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서른일곱이 되던 1786년 훌쩍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다.
처음에는 로마와 나폴리만을 둘러볼 계획이었다가 시칠리아까지 경유한다. 로마로 다시 돌아와 고전주의 예술 작품을 탐구하며 일 년을 체류한다.
괴테는 익명의 여행자로 이탈리아에서 가명을 사용하며 자유를 만끽했다. 귀중한 예술품을 감상하거나 고성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신분을 노출하고 고위 귀족과 어울려야 할 때도 있었지만, 홀로 경치를 즐기거나 사색, 그림 공부에 몰두하는 편을 선호했다. 진정한 여행을 한 것이다.
4.괴테의 여행 출발지 칼스바트는 현재 체코의 ‘카를로비 바리’다. 황제 욕장(스파)이 있는 등 지금까지도 온천으로 유명한 휴양촌이다. 당시 괴테는 귀족 등 고위층과 휴양을 즐기고 있었다.
칼스바트에는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 괴테와 음악계의 거장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이 함께 산책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세계적인 문호.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이자 정치가. 바이마르 공화국 재상. 영국의 셰익스피어, 스페인의 세르반테스와 유럽 3대 문호로 추앙된다.
1.1749년 8월 28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의 부유한 집에서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Johann Caspar Goethe)와 어머니 카타리나 엘리자베스 텍토르(Catharina Elisabeth Textor)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개인 교사들에게서 언어(라틴어, 그리스어, 성서 히브리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와 춤, 승마, 펜싱 수업을 받았다.1765~1768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법학(학사)을 배운 뒤1770년 4월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했다.
2.1774년 스물다섯살에 발표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히트하면서 세계적 작가 반열에 올랐다.이 책을 읽고, 프랑스의 정복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괴테의 열렬한 팬이 됐다.
당시 혁신적 문학 활동인 '스트롬 운드 드랑(Sturm und Drang, 질풍노도 운동(疾風怒濤運動)’에 관여했다.
3.괴테의 연인은 많았다.보름스 무역업자의 딸이자 누이의 친구 카리타스 멕스너(Caritas Meixner ,1750–1773)를 사랑했고, 여관 주인의 딸 안나 카타리나 쇤코프(Anna Katharina Schönkopf )와도 열애했다. 1770~1771년에는 프리드리히 브리온(Friederike Brion)과 연인 관계였다.
1776년 연상의 유부녀 샬롯 폰 스타인(Charlotte von Stein)과 만나 10년 동안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
정식 배우자는 1806년 바이마르에서 결혼한 가난한 여인 크스티안 불피우스(Christiane Vulpius,1765~1816)였다. 둘은 5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장남 아우구스트 폰 괴테만이 살아남았다.
1820년 전후에는 카스파르 마리아 폰 슈테른베르크(Kaspar Maria von Sternberg)와 친밀했다. 또 1821년에는 72세에 17세였던 울리케 폰 레브초프(Ulrike von Levetzow)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이밖에 폴란드 피아니스트 마리아 시마노프스카와도 깊은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했다.
4.괴테는 대작 '파우스트'를 탈고한 다음해 83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아들 율리우스 아우구스트 발터 폰 괴테 (1789~1830)는 괴테보다 2년 전 사망했다. 말년의 괴테를 돌본 이는 며느리 오틸리 폰 포그위시(1796~1872)였다. 그녀는 괴테가1832년 사망할 때까지 돌보았다.
괴테의 유언은 "좀 더 빛을… 조금 더 빛을…"이었다고 한다. 바이마르 역사 묘지의 두칼 볼트(Ducal Vault)에 묻혔다. 이 묘지에는 앞서 사망한 절친이었던 시인이자 극작가 프리드리히 폰 실러(1759~1805)도 있다.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식물관련 책인 식물의 변태(1790), 마인츠 공성전(1793, 논픽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소설), 녹색 뱀과 아름다운 백합(1795, 동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1796,소설), 노벨라, 노벨라(1828), 희곡으로 ‘파우스트’, ‘스텔라’, ‘오누이’, ‘에그몬트’,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 ‘토르콰토 타소’, ‘자연의 딸’ 등이 있다.
5.괴테가 살았던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집은 괴테박물관(Goethe-National museum, 괴테하우스)으로 꾸며져 있다.
괴테의 위대함은 독일 문학을 세계화시켰다는 점이다. 사실 괴테 이전 독일 문학은 유럽의 변방 문학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현대에 와서 독일은 세계 각국에 있는 독일문화원을 괴테인스티튜드(Goethe Institut, www.goethe.de)로 칭했다. (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