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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국화와 칼-한번도 안 가본 일본의 속살을 벗긴 보고서는 첫 문단에 글의 목적을 곧바로 드러낸다. 본문
“일본인은 이제껏 미국이 전면전을 벌여온 상대 가운데 가장 낯선 민족이었다. 미국이 치렀던 다른 나라들과 전쟁에서는 이처럼 이질적인 행동과 사고 특성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앞선 1905년에 러일 전쟁을 치른 제정러시아가 그러했듯 미국 역시 철저히 무장되고 훈련된 데다 서양의 문화적 전통에 들지 않는 민족을 상대했다. 하지만 일본인은 서구 국가들이 인간의 본성에 비춰 기정사실화한 전투 관례를 따르지 않았다. 따라서 태평양 전쟁은 섬에서 섬으로 연이은 상륙작전을 펼치며 일본을 향해 진격하는 동시에 탁월한 병참 작전을 펼치는 차원만으론 역부족이었다. 적의 기질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했고 그러자면 일본인의 행동 양식을 이해해야 했다.”(루스 베네딕트 저, 정미나 역, 느낌이있는책, 2020)
1.글의 목적이 직선적으로 드러나 있는 첫 문단이다. 보고서 글의 특성으로 의뢰자의 시선을 처음부터 몰입시키기 위해 틀(형식)에 맞춘 전개 방식이다. 이른바 역삼각형 첫 문단이다.전형적인 역피라미드 문단 구성으로 주제를 확실하게 드러내고 설명하는 구조를 취했다. 문장 하나하나도 정책 입안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로 써야 했던 만큼 특별한 상징이나 비유없이 쉬운 문체로 썼다. 논문형 보고서나 르포르타지 등에 적극 활용해 볼만한 문체와 구성이다. *러일 전쟁은 1905년 일어난 러시아와 일본간 동북아 패권전쟁, *태평양 전쟁은 2차세계대전(1939~1945) 중 미국과 일본이 벌인 전쟁이다.
2.루스 베네딕트의 ‘국화(菊花)와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 1946)’은 서구에 일본의 속성을 본격 알린 개념서로 일본 이해를 위한 필독 고전(古典)으로 꼽힌다.
미국 국방부가 1944년 초 저자에게 의뢰해 나온 일본에 대한 첫 논문형 보고서다. 책으로 엮어져 공식 발간된 것은 1946년. 나오자마자 초판은 매진됐고, 미국과 유럽,일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본인들의 행동과 풍속, 기본 사고방식, 생활 예절, 역사, 패전 직후 일본인 모습 등이 심층적으로 분석돼 있기 때문이었다.
원제는 ‘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Patterns of Japanese Culture’이다. 일본에서는 언어학자이자 번역가 하세가와 마쓰지(長谷川松治, 1911~1998) 역 ‘菊と刀-日本文化の型(사회사상연구회)’로 1948년 출판됐다. 미국에서 1999년까지 35만 부 이상, 일본에서는 200만 부 넘게 팔렸다.일본을 방문한적 없는 이가 쓴 일본론이 일본에 베스트셀러가 된것이다.
3.미국 국방부가 국책 용역사업으로 일본 연구를 저자에게 의뢰한 배경은 간단하다. 태평양 전장 곳곳에서 끝까지 악에 받쳐 싸우던 일본군이 포로가 된 순간 너무 착해진 것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미국인들이 가미카제(神風, 일본군 자살공격대)공격과 포로의 이중성에 두번 놀란 것이다.
이에 미국 수뇌부는 파시즘의 독일군, 이탈리아군과는 달리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본인과 일본군의 정신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분석서를 써줄 것을 저자에게 의뢰했다고 한다.
이에 저자는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분석을 인류학 방식으로 써내려갔다. 일본 관련 방대한 자료를 분석하고, 미국 거주 일본인 인터뷰 등으로 일본 문화와 행동 등를 연구한 후 ‘일본인의 행동 패턴(Japanese Behavior Patterns)’이라는 보고서를 작성, 1945년 말~1946년 초 국방부에 제출했다.
4.책 제목이 ‘꽃(花, 평화)’과 ‘칼(刀, 싸움)’이라는 이중 상징으로 된 것은 일본인의 양면성을 가장 잘 나타낸 것에서 연유했다. 국화(菊花)는 일본 왕실(황실)의 문장(紋章)인 데다 일본인들도 선호하는 꽃이다. 칼은 서구에서 사무라이 일본의 상징으로 본다.
사실 책이 나오기 전까지 제목은 여러 번 바뀌었다. 저자가 처음 생각한 제목은 ‘일본과 우리(We and the Japanese)’였다. 그런데 집필 중에 ‘일본인의 특성(Japanese Character)’으로 변경했다.
하지만 출판사에서 제1장에 붙인 ‘과제(임무)-일본(Assignment-Japan)’이 좋다고 해 저자도 동의했다. 그러다가 저자는 초기 자신의 대표작인 ‘문화의 유형(Patterns of Culture)’과 비슷한 ‘문화의 유형-일본(Patterns of Culture: Japan)’으로 변경을 희망했다고 한다.
그러자 출판사에서 ‘일본 문화의 유형(Patterns of Japanese Culture)’ 으로 수정 제안했다가, 다시 ‘휘어지는 칼날(The Curving Blade)’, ‘연꽃과 칼(The Lotus and the Sword)’ 등으로 좁혀졌다고 작가에게 알렸다.이에 작가는 ‘연꽃과 칼(The Lotus and the Sword)’에서 ‘Lotus’를 ‘Chrysanthemum’으로 바꿀 것을 요구, 최종 결정됐다고 한다.
5.국화와 칼을 읽은 이들은 작가 루스 베네딕트가 일본을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는 것에 깜짝 놀란다. 작가는 책이 출판된 후에도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일본을 방문하지 않았다.
저술가들은 작가가 일본을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선입견없이 책을 쓸 수있었다고 분석한다. 객관적 관찰 대상의 시각에서 일본을 보고 집필해 학문적 연구서로서 수작(秀作)이 됐다는 것이다. 작가가 일본을 몇 번 방문하고, 현지 관찰을 하고 썼다면 자칫 그저그런 견문록이나 기행문이 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6.국화와 칼은 일본 문화에 대한 몇가지 키워드를 제시한다. ‘자리(계층)’, ‘천황(天皇)’, ‘은(恩)’과 ‘의리(義理)’, 의무(義務) 등이다.
자리는 집단지향적인 일본 특유의 수직적 문화에서 나오는 각자의 위치다. 천황은 인간이 아닌 신(神)이다. 이밖에 은(恩)은 윗 계급이 베푸는 은혜이다. 의리(義理)와 의무(義務)는 명예와 충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키워드가 일본 문화 깊숙한 곳에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7.책 속에 나오는 일본군 포로들 심문 후의 글도 의미심장하다. 특히 일제 식민지를 경험한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곱씹어볼 만 한 내용이다.
“천황이 없는 일본은 진정한 일본이 아니다./천황은 일본 국민의 상징이며, 국민 종교생활의 중심이다./ 천황은 초종교적 대상이다./국민은 천황이 전쟁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만일 패전하더라도 책임은 내각과 군 지휘관이 져야 하며, 천황에게는 책임이 없다./
설령 일본이 지더라도 일본인은 열 명이면 열 명 다 천황을 계속 숭배할 것이다.”
이는 태평양 전쟁 말기 ‘1억 옥쇄(玉砕)’를 부르짖던 일본 군부가 쇼와 덴노(昭和天皇,1901~1989, 본명 본명은 히로히토, 裕仁, 1926년 천황 승계)의 무조건 항복 선언(1945년 8월15일)에 아무일 없이 종전에 동참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1억 옥쇄(一億玉砕)는 일본인 1억 명(1945년 기준 일본 인구 7200만 명)이 옥처럼 부서 질때까지 싸운다는 뜻이다.
8.국화와 칼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재건되면서 '일본학'의 토대가 됐다. 작가 폴리 프랫(Polly Pratt)은 저서 ‘프랑스인, 기묘한 사람들’의 일본어판 서문에서 “국화와 칼을 통해 일본 문화의 아름다움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비판도 많다. 미국의 일본 문화 연구가 찰스 더글러스 러미스(Charles Douglas Ramis, 1936~현재)는 저서 ‘내면의 외국’ 에서 “국화와 칼에는 미개 민족을 보는 듯한 시선이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심리학자인 도쿄대 명예교수 다카노 요타로(高野陽太郎, 1950~현재)는 “'일본인은 집단주의다'라는 잘못된 통설이 퍼진 계기”라고 말했다.
일본 평론가이자 프랑스 중세문학자인 가토 교코(加藤恭子, 1929~현재)는 한 저서에서 “전쟁 중에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죄의 문화가 수치의 문화보다 우수하다는 관점에서 쓰여져 있으며, 일본인은 비도덕적인 국민이라는 인상을 주었다”고 말했다.
9.한국에서 처음으로 1974년 을유문화사에서 완역본(김윤식, 오인석 옮김, 이광규 해설)이 나왔다. 이후 저작권이 만료되어 다른 여러 출판사에서도 번역 출간되었다.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박규태 번역본 등도 있다.
만화가이자 작가인 이원복(李元馥, 1946~현재, 덕성여대 석좌교수)이 월간중앙에 연재했던 현대문명진단(고전 만해(漫解) 시리즈)에 다뤄졌다. SBS에서 1995년 광복절 50주년 기념 특집 으로 드라마 ‘국화와 칼’을 방영했다.
최초의 중국어 번역본은 1974년 타이완(臺灣)에서 나왔다. 인류학자 황다오링(Huang Dao-Ling)이 번역했다. 중국에서는 2005년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 해에만 7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루스 베네딕트(Ruth Fulton Benedict, 1887~1948)=미국의 저명 문화인류학자. 최초의 20세기 문화 인류학자 중 1명. 문화적 상대주의 옹호자.
1.미국 뉴욕주에서 외과 의사인 아버지 프레더릭 풀턴(Frederick Fulton)과 교사인 어머니 베아트리스 샤턱(Beatrice Shattuck) 사이에서 태어났다.
풀턴은 의사 생활 중 질병을 얻어 1888년 둘째 딸 마저리(1888~1960) 출생과 함께 뉴욕주 체낭고 카운티 노리치(Norwich)의 장인이 경영하는 샤턱(Shattuck) 농장으로 이주했다.
풀턴은 1년 후 치료법을 찾기 위해 트리니다드(Trinidad, 베네수엘라 북동쪽 서인도의 섬)로 여행을 갔다가 돌아온 지 열흘 만에 사망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에 큰 슬픔에 빠졌고, 딸들을 돌보지 않을 정도였다. 루스는 홍역에 걸려 귀가 약간 안 들렸으나 초등학교 입학 때까지 가족은 몰랐다.
2.루스는 일곱 살 무렵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고, 많은 책을 읽었다. 좋아하는 작가는 영국 여류 시인이자 소설가 쟝 잉겔로(Jean Ingelow, 1820~1897)였다. 고교 3년 때는 ‘루루의 훼딩(Lulu 's Wedding(A True Story)’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뉴욕 포킵시의 여성고등교육기관 바사대학(Vassar College,1969년 남녀공학 전환)에서 영문학을 전공, 1909년 졸업했다. 대학 때는 여성 권리 향상에 힘쓴 영국 작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1759~1797)의 삶과 작품을 집중 공부했다.
이후 1년 동안 유럽을 여행하고 온 루스는 로스엔젤레스의 웨스트레이크 여학교(Westlake School for Girls)와 오톤여학교(Orton School for Girls)에서 교사를 했다.
3.루스는 여름이면 뉴욕 근처 외조부의 샤턱농장에 와 있었는데 1910년 코넬 의과 대학 화학 연구원 스탠리 로시터 베네딕트(Stanley Rossiter Benedict, 1884~1936, 미국 화학자)를 만난다. 둘은 직후 결혼했다. 스탠리는 나중에 특정 당을 검출하는 용액인 ‘베네딕트 시약’을 발견,명성을 얻는다.
하지만 둘은 자식이 없었고, 1918년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는데 1930년 별거에 들어간다. 루스의 작문(문학)에 대한 열정, 여성 동료인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 1901~1978))와의 우정을 넘어선 관계 등이 이유였다.
유능한 화학자였던 스탠리는 정부 프로젝트 진행 중 가스흡입 사고를 당했고, 1936년 12월 뉴욕 엘름포드에서 52세로 사망한다.
4.루스는 경력을 쌓기 위해 뉴욕에 있는 시립연구대학 ‘뉴 스쿨 소셜리서치(New School of Social Research)’를 다닌다. 이곳에서 강의를 들으며 교육 철학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루스는 이어 컬럼비아 대학에서 인류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엘시 클류스 파슨스(Elsie Worthington Clews Parsons,1875~ 1941, 미국인류학협회 초대 회장)가 가르치는 ‘민속학에서 성’을 배웠다.
5.유명한 인류학자로 현대 인류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프란츠 우리 보아스(Franz Uri Boas, 1858~1942, 1899년부터 사망때까지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 아래에서 알렉산더 골든와이저(Alexander Goldenweiser, 1880~1940, 인류학자이자 사회학자)와 함께 인류학 수업을 들으면서 돈독해진다.
이후 1921년 프란츠 보아스의 후원으로 컬럼비아 대학원에 등록, 인류학을 본격 연구한다. 루스는 보아스를 아버지의 뜻인 ‘파파 프란츠’로 부를 정도로 돈독한 우정을 쌓았다.
루스는 1923년 보아스의 지도 아래 ‘북아메리카의 수호 정신의 개념(The Concept of the Guardian Spirit in North America)’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930년 컬럼비아대학교의 조교수가 됐다.
6.1922년부터 바너드 칼리지(Barnard College)에 인류학 강사로 나갔는데, 학생 중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 1901~1978), 루스 란데스(Ruth Landes, 1908~1991, 미국 문화인류학자)와 친해졌다.
특히 마가렛 미드와는 동성애 관계로 추정되기도 했다. 미드는 1975년 미국 과학 진흥 협회(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의 회장을 지낸 유명 인류학자로 성장한다. 미드는 전기 ‘루스 베니딕트(Ruth Benedict)’를 1974년에 출간했다.
미드의 딸이자 문화인류학자인 메리 캐서린 베이트슨(Mary Catherine Bateson, 1939~2021)은 부모 이야기를 쓴 ‘마가렛 미드와 그레고리 베이트슨에 대한 회고록’에서 부분적으로 어머니와 루스의 관계를 성적인 것으로 암시하기도 했다.
7.루스는 1931년 컬럼비아 대학 조교수로 선임됐고, 1933년에는 미국 과학자 전기 인명록에 등재된 최초의 여성 중 한 명이 되는 영예를 안았다.
또 1936년에는 컬럼비아 대학교 인류학과 부교수로 정식 선임됐다. 그녀는 애제자인 마가렛 미드, 루스 란데스를 집중 지도했다. 이들은 나중에 유명 인류학자로 성장한다.
하지만 시련도 있었다. 1937년 스승 보아스 퇴임 후임으로 컬럼비아 대학 인류학과의 학과장으로 선임이 명백했으나 보수적인 대학 당국(당시 총장 니콜라스 머리 버틀러,Nicholas Murray Butler,1862~1947)의 비공식적 거부로 좌절됐다. 학과장에는 1차세계대전 참전용사로 나중에 저서 ‘인간 연구(he Study of Man,1936)’로 유명해지는 랄프 린튼(Ralph Linton, 1893~1953)을 선임했다.
8.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는 컬럼비아 대학 강의와 함께 브린 모어 대학에서 안나 하워드 쇼 기념 강연회 등을 열기도 했다. 그런데 전쟁이 나면서 전쟁 관련 연구 및 협의를 위해 미국 정부(국방부)가 모집한 주요 문화 인류학자로 활동했다.
이때 육군의 요청으로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연구를 의뢰 받아 ‘국화와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을 써서 1945년 말~1946년 초제출했다. 이 책은 1946년 출판, 미국과 일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8.1946년 미국 인류학협회장에 선출됐고, 이듬해에는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펠로우가 됐다. 하지만 건강이 악화돼 1947년부터는 두통과 현기증에 시달렸고, 병원에서 심장질환 진단을 받았다.
1948년 9월 17일 뉴욕 맨해튼에서 심부전 혹은 관상 동맥 혈전증으로 영면했다.향년 61세였다.루스 베네딕트는 생전 "인류학의 목적은 인간의 차이에 대해 연구하고, 세상을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9.미국 인류학 협회 (American Anthropology Association)는 베네딕트 (Benedict)의 이름을 딴 상을 매년 시상하고 있다. 미국 우정청은 1995년 그레이트 아메리칸스(Great Americans) 우표 시리즈 인물로 루스 베네딕트를 선정, 그해 10월20일 발행했다.
미국 스토니 브룩 대학의 베네딕트 대학은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2005년 국립 여성 명예의 전당(National Women's Hall of Fame)에 헌액됐다. (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