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군주론-바티칸의 금서, 정치학의 원전도 첫 줄은 빈약하게 시작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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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바티칸의 금서, 정치학의 원전도 첫 줄은 빈약하게 시작된다.

지성인간 2023. 4. 20.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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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에 대한 지배 권력을 행사해온 국가나 통치체제는 과거는 물론 지금까지 모두 공화국이거나 군주국이었습니다. 군주국은 군주의 가문에 의해 몇 대에 걸쳐 통치돼 온 세습군주국이거나 신생군주국입니다. 신생군주국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통치하는 밀라노처럼….”(권혁 옮김, 돋을새김,2005)
 

출판사 돋을새김이 2005년 낸 군주론 표지 부분.

1.누구나 읽기 쉬운 설명문 형식을 취했다. 군주에게 올리는 보고서 형태로 썼기 때문으로 보인다. 첫 문단이 사실상 두 개의 문장으로 끝나지만 향후 전개될 글의 전개를 예고하고 있다. 설득형 문장으로 활용하기에 좋은 첫 문단이다.

2.마키아벨리의 ‘군주론(II Principe,1532)’은 1513년에 집필에 들어갔다고 기록돼 있다. 그해에 당시 피렌체  지배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헌정하려고 했다고 한다.
다만 실제 원고가 완성돼 헌정됐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어떤 사서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용은 편지나 보고서 형식으로 헌정됐을 가능성도 있다.
이 권력학 개론이 지인들에 의해 공개 출판된 것은 1532년이다. 마키아벨리가 사망한 후 5년이 지났을 때다.
군주론은 당시에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18세기들어 정치 사상서로 각광받으면서 근대 정치학의 기초이자 원전(原典)이 됐다. 영어명칭은 ‘The Prince’이다.

3.군주론의 모델은 집단 처형 등으로 잔인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  했을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1475~1507, 르네상스 시기 정치가, 성직자,장군)라고 한다.
체사레 보르자는 뛰어난 군사 전략과 외교술로 영웅으로 떠올랐으나 일찍 사망했다.

이탈리아 북부 지역 루카(Lucca) 공작 카스트루치오 카스트라카니 델리 안텔미넬리(1281~1328)의 생애와 군주론을 함께 담은 1550년판 표지. photo by wikipedia

4.군주론은 현실에 기반한 정치 철학을 설파해 권력 욕구가 있는 모든 이들의 필독서가 됐다.
심지어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이탈리아 파시니스트 무솔리니도 애독했다고 한다.
‘목적만 정당하다면 수단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명언은 특히 후대의 수많은 권력자가 이를 활용했다.
이 말과 함께 ‘군주는 어떤 상황에서 비도덕적 행위를 해도 용납된다’는 말은 독재자의 행위에  면죄부를 줘 두고두고 논란을 불렀다.

5.전체적인 책  내용은 권모술수의 권력학 개론으로 볼 수없다.
후대의 학자와 철학자들은 군주론에 대해 다양하게 평가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1712~1778)는 “군주론은 공화주의자의 책이다”고 재해석했다.
이탈리아의 정치학자이자 공산주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는 “군주론은 사회주의 혁명에 필요한 계급적 각성을 촉구하는 정치적 선언서”라고 해석했다.
독일의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1770~1831)은 “대단히 위대하고 고결한 심정을 갖춘 참으로 정치적인 두뇌의 더할 나위 없이 위대하고 진실로 가득 찬 착상”이라고 평했다.
 

중세 유명화가 산티 디 티토(Santi di Tito,1536~1603)가 그린 마키아벨리 초상화. 현대기술로 고해상도 작업을 한 것이다. photo by wikipedia

#.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1469~1527)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 정치가이자 철학자. 현대 정치 철학과 정치 과학의 아버지. 피렌체 외교관. 본명은 니콜로 디 베르나르도 데이 마키아벨리(Niccolò di Bernardo dei Machiavelli)이다.

1.피렌체의 명망가 집안의 아버지 베르나르도( Bernardo di Niccolò Machiavelli)와 어머니 바르톨로메아(Bartolomea di Stefano Nelli)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법률가인 아버지가 파산,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다.
12살에 스승 파올로 다 론시글리오네에게 수사학,라티어를 배웠고, 20대에 피렌체 대학 과정인 스투디오(Studio)에서 공부했다.

2.공직에 들어가서 29살에 피렌체 제2서기관, 외교와 국방비서를 역임했다. 하지만 1513년 초 반역 음모 공모 혐의로 기소됐다.
결백을 주장해 풀려났으나 공직에 다시 들어갈 수 없어서 교외의 사유지로 은둔했다.
이 곳에서 ‘군주론’과 ‘티투스 리비우스의 첫번째 10권에 관한 논문(Discorsi sopra la prima deca di Tito Livio)’ 등 많은 글을 썼다.

3. 1520년 경 줄리오 데 메디치(클레멘스 7세)가 피렌체를 다스리게 되자 사료 편찬관에 임명됐다.
하지만 별다른 공직을 맡지 못하다가 1526년 요새 방비 목적의 '5인 위원회'가 설립되자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공직자로서는 한직만 전전한 셈이다.
마키아벨리는 말년에 쓴  희극 ‘만드라골라’가 히트하면서 일약 유명세를 탔다. 

피렌체 산타크로체 교회(Santa Croce Church)에 있는 마키아벨리 무덤(Machiavelli's tomb). photo by wikipedia

4.마키아벨리는 1501년 후반 마리에타 코르시니(Marietta Corsini)와 결혼했고, 5명의 자녀를 두었다.
1527년을 전후해 피렌체 제2서기관 선거에 도전했으나 실패한 후 병을 앓다가 그해 6월 사망, 피렌체 인근 가족묘지에 묻혔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명성이 해를 거듭할수록 높아지자 18세기들어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1475~1564) 등이 묻혀 있는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의 공동묘원으로 이장됐다.
사망 200년이 지나서야 화려한 귀환을 한 셈이다. 묘비에는 “그 어떤 찬사로도 부족할 만큼 위대한 이름”이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5.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자다. 군주론으로 수백년동안 교활한자의 아이콘이 됐지만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말 “나는 내 공동체(피렌체)를 내 영혼보다 더 사랑한다.”에 마키아벨리의 진실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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