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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대위의 딸-푸시킨의 마지막 소설 첫 문단은 자필 수기(手記)처럼 쓰여졌다. 본문
“우리 아버지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그리뇨프는 젊어서 미니흐 백작 휘하에서 복무하셨고, 17**년에 중령으로 퇴역하셨다. 그 이후로 줄곧 아버지는 당신 소유의 영지에 있는 심비르스크에 사시면서 그곳의 가난한 토박이 시골 지주의 딸 아브도티야 바실리예브나 lu와 결혼도 하셨다. 부모님은 슬하에 아홉 명의 자녀를 두셨지만 형제 자매들은 모두 어렸을 적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어머니 복중에 있을 때 가까운 친척이신 근위대 소령 B공작 덕분으로 이미 세묘놉스키 연대에 중사로 등록되어 있었다. 만약 어머니가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고 딸을 낳으셨더라면 아버지는 세상에 나와보지도 못한 한 중사의 사망신고를 하셔야만 했을 것이며, 일은 그렇게 끝났을 것이다. 나는 학업을 마칠 때까지 휴가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심지은 역,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1.허구의 이야기를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꾸미기 위해 수기(手記) 형식을 빌려 쓴 도입부다. 이를 통해 화자(話者)인 나의 가족이야기를 황당하지만 실제처럼 서술하고 있다. 첫 문단만 읽다 보면 소설은 이렇다 할 서사(敍事)없이 사소설(私小說)로 끝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ᆢ. 시인으로 더 유명한 작가의 소설이지만 운문체가 아니라 완연한 만연체 문장이다. 번역이 깔끔하지 못해 전체적으로 문장들이 난삽하다는 느낌이다. 중간에 나오는 복중은 腹中으로 한문을 써주거나 뱃속이라고 써도 괜찮은데 굳이 복중이라고 써서 아쉽다. 본문에 나오는 지명 심비르스크(Симбирск)는 러시아 남부도시로 1924년에 현재 이름인 울리야놉스크(Ульяновск)로 바꿨다.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Ilyich Lenin,1870~1924)의 고향으로 레닌의 본성인 울리야노프(Улья́нов
)에서 따왔다.
2.푸쉬킨의 ‘대위의 딸(Капитанская дочка,1836)’은 러시아 근대 장편 소설의 효시이자 러시아 역사소설의 수원지 같은 작품이다.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적 작품으로 작가 생전에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사후(死後) 호평받았다. 역사성과 사상성, 문학성을 갖췄지만 출간 당시 독자와 비평가들이 이를 선뜻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183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행한 잡지 ‘현대인’에 실렸다가 출판됐다. 운문(시)으로 유명한 푸시킨의 대표적인 산문 작품이다.
소설은 1773년 무렵 실제로 있었던 예멜리얀 이바노비치 푸가초프(Емелья́н Ива́нович Пугачёв, 약칭 푸가초프, 1742~1775)의 반란 사건(1773~1775)을 다뤘다. 영어로는 ‘The Captain's Daughter’로 번역된다.
3.18세기 말의 러시아 시대상을 담은 역사 소설로 반란과 남녀의 애절한 사랑, 농노들의 짓밟힌 삶 등이 간결하고 수려한 문장 속에서 빛난다.
소설은 1773년 일어난 푸가초프 반란을 배경으로 귀족 장교부터 노비, 반란군 괴수, 여제(女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간 군상을 등장시켜 18세기 후반의 러시아 사회를 기록했다. 푸가초프 반란 사건은 1773년에 발생, 1775년에 진압됐다.
4.등장 인물은 러시아 군대의 젊은 장교 표트르 안드레이치 그리뇨프(Pyotr Andreyich Grinyov), 표트르 아버지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그리뇨프(Andrey Petrovitch Grinyov), 어머니 아브도티야 바실리예브나(Avdotya Vassilyevna), 표트르의 충실한 하인 사벨리치(Arhip Savelyitch), 표트르의 연인 마리야 이바노바(Marya Ivanovna,약칭 Masha), 마리야의 아버지 이반 쿠즈미치 미로노프, 어머니 바실리사 예고로브나, 장교이자 개인적인 적(敵) 알렉세이 이바니치 시바브린 등이다.
또 푸카초프(Yemyan Pugatchev), 성직자 제라심(Gerasim)과 그의 아내 아쿨리나 팜필로브나 (Akulina Pamfilovna), 하녀(세탁부) 팔라시카(Palashka), 아쿨리카(Akulka) 등도 나온다.
5.줄거리는 러시아 시대상과 반란속에서 피어나는 애절한 사랑이야기다.
변방 요새에 파견된 청년 장교 표트르 안드레이치는 사령관의 딸 마리야를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러시아 전국을 공포 속에 몰아넣은 푸가초프의 반란이 일어나 표트르는 포로가 되고 마리야는 고아가 된다.
우연히 만난 반란군 수괴 푸가초프는 전에 표트르의 은혜를 입은 일이 있어 친근한 사이가 된다. 반란군과 진압군의 팽팽한 접전 중에 표트르는 푸가초프의 도움으로 연인 마리야의 목숨도 구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곧 동료의 밀고로 반역자라는 모함을 받아 끌려가게 된다. 그런데 위기의 순간, 예카테리나 여제가 성은(聖恩)을 베풀어 풀려난다.
5.푸시킨은 소설을 쓰기 전 10여 년 동안 ‘푸가초프 반란’을 연구, 1934~1835년 무렵 ‘푸가초프 반란사’를 출판했다. 출판까지는 1833년부터 1836년까지 약 4년이 걸린다.
이 소설은 간결한 문체이지만 다양한 인간 군상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전제 군주정 시절에 권력자 예카테리나 여제와 농노제 등을 교묘하게 비판하고 있는 사실주의 작품이다.
6.러시아 문호 니콜라이 고골(Nikolai Gogol,1809~1851)은 ‘대위의 딸’에 대해 “가장 뛰어난 러시아 산문 문학이자 사실보다 더 사실적이고, 진실보다 더 진실한 명작”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대위의 딸은 독자의 예상을 뛰어넘지 못하는 결말(해피 엔딩)이 아쉬운 대목으로 남아 있다. 푸가초프와 주인공의 만남과 환대, 예카테리나 여제가 베프는 성은(聖恩)은 개연성이 떨어진다. ‘소설 속에서 역사의 화해’로 치부하기에는 우연성이 지나치다. 이는 구전문학의 결말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7.대위의 딸은 각국에서 영화와 오패라, 가극 등 다양한 장르로 만들어졌다. 작곡가 세사르 안토노비치 퀴(César Antonovich Cui, 1835~1918)는 1907년부터 1909 년 사이에 ‘대위의 딸’을 4막 오페라로 만들었다. 이 오페라는 1911년 2월14일 상트 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에서 초연됐다.
1934년 빅토르 트라얀스키(Viktor Tourjansky, 1891~1976) 감독이 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의 공동 제작 영화 ‘Volga in Flames(불타는 볼가)’로 만들었다.
1947년에는 이탈리아 마리오 카메리니(Mario Camerini,1895~1981) 감독이 ‘La figlia del capitano(The Captain's Daughter)’로 영화화했다.
또 1958년에 이탈리아 알베르토 라투아다(Mario Alberto Lattuada, 1914~2005) 감독이 ‘Tempest’로, 그해에 블라디미르 카플루노프스키 감독이 소비에트연방에서 ‘ Kapitanskaya Dochka’로 만들었다.,1998년에는 일본 가극단 다카라즈카 리뷰의 샤 타마(Sha Tamae)가 가극 ‘Dark Brown Eyes’로 제작, 공연했다.
2000년에는 러시아에서 알렉상드르 프로슈킨(Aleksandr Proshkin,1940~현재)감독이 ‘Russkiy Bunt(The Captain's Daughter)’로 영화화했다. 이밖에 2005년에는 8분짜리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영화로 나와 러시아 오픈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4위를 차지했다.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 1799~1837)=러시아의 위대한 시인이자 소설가. 러시아 국민 문학의 첫 번째이자 러시아 문학어의 창시자이다.
영어로는 ‘Alexander Sergeyevich Pushkin’으로 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詩)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있다.
1.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귀족 가문의 아버지 세르게이 로보비치 푸시킨(Sergei Lvovich Pushkin,1767~1848)과 어머니 나데스다 한니발(Nadezhda Gannibal)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18세기 표트르 대제(Пётр I, 1672~1725, Pyotr Alekseyevich)의 총애를 받은 흑인 아브람 페드로비치 한니발(Абрам Петрович Ганнибал, Abram Petrovich Gannibal, 1696~1781) 장군의 손녀다. 나중에 푸시킨은 자신의 외증조부에 대해 역사소설 ‘표트르 대제의 흑인(Peter the Great's Negro, 미완성)’을 쓰기도 했다.
2.유년기에 프랑스인 가정교사 교육을 받는 한편 유모 아리나 로지오노브나(Arina Rodionovna)에게서 러시아어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 10세 때 프랑스어로 시를 쓸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드러났다.
12살(1811)때 상트 페테르부르크 근처에 있는 차르스코예 셀로(Tsarskoye Selo, 황실 귀족학교) 리체이(Lyceum)에 입학, 18세에 졸업했다. 15세 때 모스크바에서 출판되던 잡지 ‘유럽 통보’에 첫 시 ‘시인인 벗에게’를 최초로 발표했는데 좋은 평가를 받았다.
푸시킨은 이후 사교계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도 농노 제도 및 전제정치를 공격하는 시(詩) ‘자유, 1817’, ‘마을, 1819’ 등을 발표했다.
3.1820년 전제군주제 등을 비판한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Ruslan and Ludmila)’를 발표해 ‘러시아 시문학의 새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 시는 당시 러시아 체제 비판(전제군주, 농노제, 귀족제도)이 주목받으면서 푸시킨은 1820년 남러시아로 유배(사실상 추방)당했다.
그가 간 곳은 예카체리노슬라프(현 우크라이나 중남부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주, 드네프르강 연안도시 드니프로페트로프스크,Dnepropetrovsk) 였다. 2년 후에는 오데사(현 우크라이나 제2도시)로 옮겨진다.
1824년 오데사에서 ‘유배 같지 않은 유배 생활’을 한 푸시킨은 유부녀와 염문이 난 데다 그곳 총독과도 충돌했다. 이 때문에 부모의 영지인 미하일로프스코예로 쫓겨가 2년여 동안 칩거했다. 그곳에서 탄생한 시 중의 하나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정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이다.
4.푸시킨은 칩거 중에도 그리스 독립을 지지해 오스만투르크 제국 전복 목적의 비밀 조직인 필리키 이터리아(Filiki Eteria)에 가입하기도 했다.
1825년 12월14일 데카브리스트 반란(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자 청년 장교들이 농노제 폐지와 입헌군주제를 주창하며 일으킨 난)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거주는 허용됐다. 하지만 여전히 ‘검열받는 시인’이었다.
5.1828년 무렵 푸시킨은 모스크바에서 소문난 미녀로 당시 16세였던 나탈리야 곤차로바(Наталия Николаевна Гончарова, 1812~1863)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나탈리야는 다른 사람과 결혼한 적이 있는 여인이었다. 푸시킨은 어머니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 적극적인 구애를 펼쳤다. 결국 1831년 나탈리아와 결혼했다. 그녀의 혼인 후 이름은 나탈리야 니콜라예브나 푸시키나(Nataliya Nikolaevna Pushkina)이다.
두 사람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집을 마련해 살았고, 아들 둘과 딸 둘 등 4명의 자녀를 뒀다. 마리아(Maria, 1832~1919), 알렉상드르(Alexander, 1833~1914) 그리고리(Grigory, 1835~1905), 나탈리야(Natalia Alexandrovna Pushkinaa, 1836~1913) 등이다.
이중 나탈리야는 17세에 군인 미하일 레온티예비치 뒤벨과 결혼해 3명의 아이를 낳지만 결국 이혼한다. 이후 니콜라이 빌헬름 왕자(Prince Nikolaus Wilhelm of Nassau, 1832~1905)와 결혼, 메렌베르그(Merenberg) 백작 부인이 됐다.
나중에 나탈리야의 손녀 나데이다(Nadejda)는 영국 에딘버러 공작 필립 왕자의 삼촌과 결혼, 밀리포드 하벤(Milford Haven) 후작의 할머니가 됐다.
6.1831~1832년 사이에는 후배 소설가 니콜라이 고골(Nikolai Gogol,1809~1851)을 지원했다. 또 1836년 창간한 잡지 ‘Sovremennik(영어로 The Contemporary)’에 고골의 단편 소설을 소개하기도 했다. 고골은 사실상 푸시킨의 문학적 후계자였다. 그의 소설에 묘사한 당시의 러시아의 현실, 지주 사회의 도덕적 퇴폐, 농노제의 결함 등은 푸시킨에게서 영감을 받았다는 평가가 많다.
푸시킨은 1834년 차르(황제) 니콜라이 1세(Николай I Павлович, 1796~1855)의 시종보로 임명됐다. 황제가 ‘표트르 대제’ 의 역사를 쓰도록 위촉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설도 있다. 니콜라이 1세가 푸시킨 아내 나탈리야의 미모에 반해서 궁정 행사 참석을 유도하기 위해 임명했다는 설이다. 실제 사치와 허영심, 바람기가 많았던 나탈리야와 차르가 불륜관계라는 소문도 돌았다고 한다.
7.푸시킨은 37세에 어이없는 죽음을 맞는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초르나야 레치카역 인근 소공원에서 권총 결투를 한 후유증으로 사망한 것이다.
아내와 염문을 퍼뜨린 프랑스인 귀족 조르주 당테스(Georges-Charles de Heeckeren d'Anthès, 1812~1895)와 1837년 1월27일(서양력 2월 8일) 결투를 하다가 상처를 입고, 집으로 옮겨졌으나 과도한 출혈 등으로 이틀 후 사망했다.
장례식은 상트페테르부크 시내 피의 구원사원(구세주 교회,Konyushennaya church, 영어 Church of Our Savior on Spilled Blood)에서 치러졌다. 산문 작가인 오도예프스키는 조사(弔詞)에서 ‘러시아 시의 태양은 졌다’고 애도했다.
전 국민 애도 속에 민중 소요(푸시킨 집 앞에 5만여명이 운집했다고 한다)를 우려한 황실과 경찰은 빠른 장례 후 부모의 영지인 프스코프 주 미하일롭스코예 스비아토고르스키 수도원(Svyatogorsky monastery) 묘지에 안장했다.
푸쉬킨의 죽음은 2006년 나탈리야 본다르쿠크(Natalya Bondarchuk) 감독이 만든 전기 영화 ‘푸쉬킨-마지막 결투’에 잘 묘사됐다.
8.아내 나탈리야는 푸시킨 사후 1844년 군인 표트르 페트로비치 란스코이(Petr Petrovich Lanskoy)와 재혼했다. 이에따라 나탈리야의 이름은 나탈리야 니콜라예브나 푸쉬키나-란스카야가 된다. 둘 사이에서는 두 딸이 태어났다.
그래서 푸시킨은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 나탈리야 곤차로바와 죽어서도 함께 하지 못했다. 나탈리야의 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 18세기 묘지 6번에 ‘란스카야(N. Lanskaya, 1812~1863)로 명명돼 있다.
8.푸시킨은 요절하면서 러시아 문학의 전설로 남았다. 구어체를 문학에 본격 도입한 최초의 작가였고, 러시아의 옛 전설과 가요 등을 토대로 단순하고 평이한 문체를 구사했다. 이런 구어체 작품과 풍부한 어휘 등이 들어 있는 시와 소설들이 현대 러시아 문학의 토대가 됐다.
푸시킨의 작품은 고골, 톨스토이 등 러시아 작가는 물론 미국 소설가 헨리 제임스(Henry James, 1843~1616) 등 서양 작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9. 18세기 러시아 3대 소설가 중 한사람인 이반 투르게네프(Ivan Turgenev,1818~1883)는 “푸시킨 이후의 작가들은 그가 개척한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평가했다.
막심 고리키(Maxim Gorki, 1863~1936)는 “푸시킨은 ‘시작(詩作)의 시작’이라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라고 말했다. 도스토옙스키(F. M. Dostoevsky, 1821~1881)는 “푸시킨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보편성’을 갖추고 있다”고 격찬했다.
10.러시아 작가 중 푸시킨만큼 사후 영광을 누린 이는 없다. 이름을 딴 도시가 있고 문학상이 헌정됐다. 미술관, 소행성 등에도 ‘푸시킨’이 명명됐다.
1881년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는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이름을 딴 ‘푸시킨 문학상’을 제정했다.그 해에 최고의 문학 우수성을 선보인 러시아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모스크바에 푸시킨 국립 미술관(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музей изобразительных искусств имени А. С. Пушкина)도 설립됐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을 기념해 1937년 명명한 푸시킨 시가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교외에 위치한 도시로 인구는 8만4600명가량 된다. 프스코프 중 부모 영지인 미하일롭스코예 마을에는 푸시킨 기념관이 있다.
1937년 소련(소비에트 연방)은 푸시킨 사망 100주년에 ‘가장 중요한 소비에트 시대 문학 100주년’으로 기념했다. 1977년 소련의 천문학자 니콜라이 체르니크가 발견한 소행성은 ‘2208 푸시킨’으로 명명됐다. 구글은 2009년 6월6일 푸시킨 생일을 기념일 로고로 축하했다.
한편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에 있는 푸시킨 관련 기념물들이 철거됐다고 한다. (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