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대지(大地)-중국어로 구상하고 영어로 쓴 노벨 문학상의 소설은 우울한 잔칫날 묘사로 시작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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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大地)-중국어로 구상하고 영어로 쓴 노벨 문학상의 소설은 우울한 잔칫날 묘사로 시작한다.

지성인간 2023. 9. 29.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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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룽(王龍)이 결혼하는 날이었다. 침상을 둘러싼 휘장의 어둠 속에서 눈을 뜬 그는 오늘 새벽이 어째서 여느 다른 날 하고 다르게 여겨져야 하는지를 처음에는 생각해낼 수 없었다. 중간 방을 가운데 두고 그의 방과 마주 보는 방에서 늙은 아버지가 숨이 차서 나직이 기침을 하는 소리 이외에는 집 안이 아직도 고요했다. 아침마다 제일 먼저 들려오는 것이 노인의 기침 소리였다. 왕룽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가만히 누워 있기가 보통이었고 그 소리가 더 가까워지는 것을 들은 다음에야, 그리고 아버지의 방문에 달린 나무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은 다음에야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는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침대의 휘장을 밀어젖혔다.”(펄 S. 벅 저, 안정효 역, 문예출판사, 2003)

문예출판사가 2003년에 낸 '대지' 표지 부분.드넓은 대지를 갈아엎는 쟁기꾼과 소를 형상화했다.

1.결혼이라는 단어가 없으면 전형적인 소작 농가의 아침 풍경이다. 그런데 첫 문장에 잔칫날과 가난이 묻어나는 삶을 대비시켰다. 그리고 여느날처럼 느리작 거리지않고 벌떡 일어나는 것을 묘사했다. 여기에 결혼,기침,경첩,열어 젖힌 휘장(오두막집에서 휘장은 과장된 표현) 등 상징과  은유의 단어도 교묘하게 결합했다. 이는 주인공들의 이중적이고 파란만장한 인생사, 어둠을 뚫고 동이 트는 중국사를 전개하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쉬운 낱말들로  문장을 전개하고 문체적으로도 난삽하지 않고 매우  담백하다.  내레이터인 3인칭 화자가 1인칭  처럼 주인공의 행동을 드러내는  방식이 눈길을 끈다.
*.본문에 나오는 경첩은 여닫이 문의 철제 붙임새의 하나다. 침대는 엄밀히 말하면 침상(寢床)이고, 휘장(揮帳)은 가림막(커튼)이다.

1931년 미국 존데이 출판사에서 나온 '대지(大地 , The Good Earth)초판본.

2.펄 S. 벅의 ‘대지(大地, The Good Earth, 1931, 미국 뉴욕, 존데이 출판사)’는 1930년대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였다. 소설이 미국에서 나오자마자 세계 주요 국가에서 동시에 번역 출판될 정도였다.
작가에게 소설가로서 확고한 위치, 돈과 명성을 안겨준  3부작의 대하소설이다. 동양 최대 제국의 붕괴와 혁명, 독재, 내전, 외침 등 격동의 중국 근현대사가 유려한 필체로 녹아 있어 서양 독자들에게 인기를 끈 것으로 보인다.
작가가 위기의 30대 중반에 난징(南京)에서 중국어로 구상하고 영어로 집필한 작품이다. 소설을 쓰게 된 동기(작가 자서전 언급)는 정신지체아로  태어난 외동딸 캐롤의 치료비, 가족이 몰살 위기에 처했던 난징사건(1927년 군인들의 난징 거주 외국인 겨냥 폭동 ) 등이었다고 한다.
한편 1966년 ‘대지’ 타이핑 원고와 펄 벅의 다른 여러 논문이 뉴욕의 미국 예술 문학 아카데미 박물관에 전시됐는데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런데 2007년 상속인의 공식 도난 신고 후 2010년경 필라델피아 ‘Freeman's Auctioneers & Appraisers’에 나왔다고 한다.

펄 벅이 소설 '대지'를 쓰게 된 계기가 됐던 1927년 난징사건 포격에 참가한 미국 구축함 USS 노아. 이 군함 등 서양함대의 폭동군인에 대한 포격으로 펄벅 가족은 생명을 건진다.photo by wikipedia

3.총 3부작으로 구성된 ‘대지’는 빈농에서 입신해 대지주가 되는 주인공 왕룽과 아내, 세명의 아들과 손자 이야기를 그린 역사 사실주의 소설이다.
중국에 살면서 격동기 중국과 중국인의 변화와 혁신, 민중의 문화와 희노애락 등이 펄벅의 담담하고 섬세한 묘사로 그려진다.
소설은 왕룽과 아내 오란 일대기인 ‘대지’, 왕룽이 죽은 후 이야기, 후손들의 삶 개척사 등을 다룬 ‘아들들(1933)’, 왕룽의 셋째 아들 왕호의 아들인 왕위안의 이야기인 ‘분열된 집(1933)’ 등으로 이어진다.

4.등장인물은 빈농에서 부농이 되는 주인공 왕룽(王龍), 대지주 황부자 집 종(노비)으로 살다가 왕룽에게 시집 온 오란(阿藍), 가난을 견디지 못해 비적단 두목이 되는 왕룽의 숙부 등이다.
또 왕룽의 둘째 부인이 되는  노래하는 기생인 가기(歌妓) 렌화(蓮華), 렌화의 여자 몸종 뚜챈(杜鵑), 부자가 된 왕룽이 흉년 때 사들인 예쁜 계집종 리화(梨華), 이웃집 농부 칭(陳) 등도 주요 인물로 나온다.

5.줄거리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고생 끝에 부자가 된 왕룽(王龍)과 그 일가의 생애를 통해 요동치는 중국 근현대 역사와 농민의 삶이다.
소작농인 왕룽은 부자집 종 오란을 아내로 맞아 아이들을 낳고, 땅을 사는 등 부자로 가는 길을 닦는다. 격변의 시대 비적같은 유민들에게 털리지만 얼떨결에 보석을 손에 쥐면서 인생이 바뀐다.  많은 땅을사서 대지주로 살면서 첩까지 들인다. 고생 끝에 겨우  마님이 된 오란은 남편과 첩 때문에 울분의 삶을 살지만 딸에게는 전족(발을 작게 하는 것)을 차게 하고,혹시라도 자신처럼 종이 되지 않게 한다.
왕룽 부부가 죽고 세 아들은 재산을 물려받는데 큰 아들 왕이는 난봉꾼, 둘째 왕얼은 상인으로 큰 돈을 벌지만 냉혈한이 된다. 셋째 왕싼은 군인으로 출세한다.
왕룽의 손주들은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선진제국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다. 그런데 손주들은 미국이라는 나라도 허울좋은 껍데기로, 빈민과 죄악, 위선과 폭력이 난무하는 곳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다시 땅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영화 대지(The Good Earth) 포스터.1937년 미국 MGM에서 드라마 영화로 제작했다.photo by wikipedia

6.소설이 히트하자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도 무대에 올랐다. 작품은 1932년 길드극장(Theatre Guild, 1918년 뉴욕시에 설립된 연극단체)에서 제작해 올렸지만 비평가들의 반응은 좋치 않았다. 결국 두달도 공연 못하고 56회 공연만에 중단됐다.
그런데 1937년 시드니 프랭클린(Sidney Arnold Franklin,1893~1972) 감독 영화 ‘The Good Earth’로 나와 성공했다. 이 영화는 주인공 배우도 중국인이 아니었다.세트장도 캘리포니아 계곡에 중국 농촌을 재현해 놓고 1500여 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해 찍었다. 제작비만 300만 달러가 들었다. 그런데도 영화는 크게 히트했다.아내 오란 역을 맡은 독일계 미국 배우 루이스 라이너(Luise Rainer, 1910~2014)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또 독일 출신 미국 촬영감독 칼 W. 프로인트(Karl W. Freund, 1890~1969)는 최우수 촬영상을 받았다.

사학자 김성칠(6.25전쟁 때 사망)은 일제말인 1940년 금융조합에 근무할때 소설 대지를 번역 출판했다. 사진은 교양사가 1959년 다시 발행한 판본이다. 출처=행운서점(hwbook.com).

7.2004년 소설 ‘대지’가 역주행하는 일이 있었다. 텔레비전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Oprah Gail Winfrey, 1954~현재)가 ‘오프라의 북 클럽’으로 선택하자 베스트셀러 목록에 다시 오른 것이다.
한국에서는 일제 말기인 1940년 김성칠(金聖七, 1913~1951, 서울대 사학과 조교수 역임)이 금융조합에 재직하면서 ‘대지(출판사 미상)’를 번역, 출간했다. 이후 김성칠 역 그대로 1959년에 교양사에서 다시 출판됐다.

소설가 펄벅의 1972년 모습을 찍은 사진.네덜란드 헤이그국립기록보관소 소장.작가와 장소 미상. photo by wikipedia

#.펄 시덴스트리커 벅(Pearl Sydenstricker Buck, 약칭 펄 벅, 1892~1973)=중국에서 성장한 미국 소설가이자 사회 인권 운동가.
1931년 퓰리처상, 1938년 노벨상문학상 수상자. 한국어 이름은 박진주(朴眞珠). 중국 이름은 사이전주(賽珍珠)이다. 사이(賽)는 아버지의 중국 성(姓)이다.

1.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힐스보로에서 개신교 장로회 선교사인 아버지 압살롬 앤드루  시덴스트라이커(Absalom Andrew Sydenstricker, 중국명 사이 자오시앙,Sai Zhaoxiang, 賽兆祥, 1852~1931)와 어머니 캐롤라인 모드 스튤팅(Caroline Maude Stulting,1857∼1921)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선교사 부모를 따라 생후 4개월 만에 중국으로 가는 배를 탔다. 이후 대학 진학 때까지 중국에서 유청소년 시절을 보냈다.이때문에 본인이 중국 사람으로 생각했었을 정도였다. 오빠 에드거 시덴스트라이커(Edgar Sydenstricker,1881~1936)는 10대 때  미국으로 갔고, 미국 공중보건국과 밀뱅크 기념 기금에서 일한  경제학자다.
여동생 그레이스 시덴스트라이커 요키(Grace Sydenstricker Yaukey, 1899~1994)는 코넬리아 스펜서(Cornelia Spencer)라는 이름으로 아시아 관련 성인 서적 출판과 책을 쓴 작가로 활동했다.

펄벅(왼쪽 끝)이 중국 난징에 살때 아버지, 어머니, 동생, 중국인 도우미(뒷줄)와 찍은 사진. 11년 연상인 오빠는 미국으로 건너가 학교를 다니고 있어 빠졌다.photo by wikipedia

2.장쑤성(江蘇省) 화이안(淮安市, Huai'an)에서 처음 살았고, 1896년 장쑤성 성도(省都) 난징(Nanjing) 근처 쩐장(镇江市, Zhenjiang)으로 이사갔다. 이후 아버지의 별장이 있는 장시성(江西省) 지장시(九江市) 쿨링(牯岭镇, Kuling)에서도 살았다.
부청멸양(청을 도와 서양을 멸망시키자)을 기치로  내건 의화단(義化團)운동(영어명 The Boxer Uprising,1899~1901)으로 중국인 친구들이 펄벅 가족을 멀리하는 등 위협이 다가오자 아버지는 좀 더 안전한 상하이로 갔는데 펄벅은 따라가지 않았다. 펄 벅은 그곳 미스 즈웰학교(Miss Jewell's School)에 적을 뒀다.
펄벅은 18살 때인 1910년 대학을 가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가 이듬해 버지니아 주 린치버그에 있는 랜돌프-매콘 여자대학(Randolph-Macon Woman 's College)에 입학, 1914년 졸업(학사 학위)했다.  아버지의 권유에도  선교사가 되기는 커녕 중국으로 돌아갈 생각도 없었지만, 1915년 무렵 아버지의 ‘어머니가 중병에 걸렸다’ 고 하는 편지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실제 어머니는 병치레를 하다가 1921년 사망했다.

4.펄 벅은 1917년 나중에 중국 농업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가 된 존 로싱 벅(John Lossing Buck, 1890~1975)과 결혼, 성이 ‘Buck’으로 바뀌었다. 부부는 안후이성(安徽省) 쑤저우(宿州市)로 이주했다. 둘은 딸을 낳았다. 그런데 딸 캐롤(1920~1992, 72세로 사망)은 지적 장애인으로 태어났다. 펄 벅은 이때  출산 후유증과  열악한 의료환경 등으로 합병증에 걸려 자궁 적출 수술을 받았다. 이는 나중에 많은 아이를 입양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큰 딸이 자신을 작가로 만든 동기 중 하나’라고 밝혔다. 소설 ‘대지’에서 왕룽의 딸로 그려져 있다
1924년 남편 존 벅의 안식년 때 미국으로 돌아온 펄 벅은 코넬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25년 재니스( Janice, 나중 이름 월시, Walsh)를 입양했다.
존 벅과는 1930년대 초 금이 간다. 소설 대지 3부작을 모두 출판한 이후인 1934년 딸 캐롤과 입양한 딸 재니스를 데리고 중국을 떠나 미국행 배에 오른다. 남편 로싱 벅과는 1935년 6월 1일 네바다 주 리노에서 이혼했다.

펄 벅의 두 번째 남편으로 대지를 출판한 회사 사장인 리차드 월시(Richard J. Walsh).첫 남편 존 벅과 이혼한 날 곧바로 결혼했다. photo by wikipedia

펄 벅은 그날 곧바로 ‘대지’를 출판했던 J.데이 출판사 사장 리차드 월시(Richard J. Walsh)와 재혼, 펜실베이니아 주 벅스 카운티 그린 힐스 팜(Green Hills Farm)에 정착했다.

5. 중국에서 생명의 위기를 여러번 겪었다.  그 중 특히 국민당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장제스(蔣介石,1887~1975)의 북벌(北伐, 1926~1928년 군벌 토벌전)이 본격화한 1927년 펄 벅 가족은 몰살 위기에 처한다.
국민혁명군이 난징(南京)의 외국인 지대 등을 무차별 공격한 이른바 ‘난징사건(南京事件, 민족주의자와 공산당 군인들이 폭동을 통해 난징의 외국인 소유 재산 약탈 사건, 영어명 The Nanking Incident) 때다.
다행히 미국 군함 등이 외국인 보호를 위해 국민혁명군 폭도들을 무차별 폭격, 살아난다. 제2조국이라고 생각했던 중국에서 가족 전체가 몰살당할 뻔한 사건이었다.
남경사건은 정서적 중국인이었던 펄벅에게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자각, 창작의 계기로 작용했다.
1930년 쓴 첫 소설 ‘동풍:서풍(East Wind:West Wind)’은 이 사건 영향으로 동서양 문명 갈등을 다뤘다.이 소설은 1년에 3판을 찍을 정도로 베스트 셀러가 됐다. 이듬해 장편 ‘대지’를 출판, 작가로서 명성을 확고히 했다.

1938년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 홀에서 구스타프 5세(King Gustav V of Sweden, 1858~1950)로부터 노벨 문학상을 받는 펄 벅.photo by wikipedia

6.미국 여성 작가 처음으로 1938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당시 노벨상 발표가 있자 미국 문단과 본인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펄벅의 소설 대부분이 당시 전 세계를 휩쓴 모더니즘 문학에서 벗어난 역사 사실주의 문학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 지나치게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당대 문단은 여성과 대중문학 폄하 현상이 심했다.

7.제2차 세계 대전 발발(1939)을 계기로 사회사업에 큰 관심을 보였다. 1942년 민족 간 편견 극복을 위한 동서협회(The East and West Association) 세웠다.
1949년에는 세계 각국의 전쟁과 가난 속에서 부모를 잃은 어린이들을 미국으로 입양시키는 웰컴하우스(Welcome House.Inc)를 설립했다. 이곳을 통해 피부색이 각기 다른 7명을 입양하기도 했다.
또 각국에 주둔한 미군으로 생긴 미국계 사생아를 돕기 위해 1964년 펄 벅 재단(Pearl S. Buck International)을 세웠다. 펄 벅 재단은 한국를 비롯, 11개 나라에서 운영됐다.

1983년 미국 우정청은 5센트 우표 모델로 소설가 펄 벅을 채택, 발행했다. photo by wikipedia photo by wikipedia

8.매카시즘(McCarthyism) 광풍 시대, 펄 벅의 맹렬한 사회 인권운동은 에드거 후버(John Edgar Hoover, 1895~1972) FBI 국장(1924년 취임,1972년 사망으로 종료) 등 많은 반공주의자들의 표적이 됐다.
매카시즘은 1950년 2월 공화당 상원의원 J.R.매카시(Joseph Raymond McCarth, 1908~1957)의 ‘국무성에 공산주의자 205명 있다’ 발언 이후 불어닥친 반공산주의 바람을 말한다.
그래서 펄 벅 스스로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는 입장까지 밝혔다. 이에 중국 및 공산권은 펄 벅에 대해 ‘문화 제국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이는 37대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 Richard Milhous Nixon, 1913~1994)의 중국 방문 때인 1972년 펄 벅의 강한 방문 요청에도 중국 측의 비자 거부로까지 이어졌다. 후진 중국의  보복이었다.

9.펄벅은 말년에 남자 관계에서 큰 오점을 남긴다. 1960년 두번째 남편 리처드 월시(Richard J. Walsh)를 사별한 후 40살 연하의 댄스 강사 시어도어 해리스(Theodore Harris)와 사실상 동거했다. 해리스는 재단
웰컴하우스(Welcome House)와 펄벅파운데이션(Pearl S. Buck Foundation)을 장악, 70대의 펄 벅을 쥐고 흔들며 사리사욕을 채웠다.
펄 벅 재단에 들어갈 돈의 일부도 횡령했고, 재단 이사장으로서 종신 급여를 받았다. 할머니 펄 벅은 젊은 애인에 눈이 멀어 부정(不正)을 알면서도 옹호하기도 했다. 해리스는 펄 벅이 죽기 직전 유산 일부와 개인 소유물도 자신의 재단(Creativity Inc)로 이전하도록 서명하게 했다. 그리고 유족들과 소송까지 한다.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주 힐즈보로에 있는 펄 벅 탄생지의 집.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1998년 10월 펄 S. 벅 하우스를 방문했다. photo by wikipedia

10.펄벅은 1973년 3월6일 버몬트(Vermont) 주(주도 몽펠리에,Montpelier) 러틀랜드 카운티의 댄비(Danby)에서 폐암으로 영면했다. 펜실베이니아 주 벅스 카운티 페카시에(Perkasie)에 있는 그린 힐스 팜(Green Hills Farm)에 묻혔다.
묘비는 생전에 직접 디자인했고, 중국식 이름 ‘賽珍珠(Sai Zhenzu)’로 새겼다. 사이(賽)는 아버지의 중국 성(姓)이다. 1980년 그린힐스 팜의 펄 벅 하우스(Pearl S. Buck House)는 국립 유적지로 등록된다.

7.펄 벅은 3개의 상반된 유언장을 남겼다.그래서 사후 수년동안 소송이 이어졌다. 젊은 애인 해리스와 펄벅재단, 입양아 7명 등이 재산을 두고 3자 법적 분쟁을 벌였다. 6년 간의 지리한 소송 끝에 해리스와 펄 벅 재단이 주장을 철회(펄 벅의 자녀들로부터 재정적인 해결을 받는 대가로)하면서 끝났다.

2023년 3월 펄 벅 여사 서거 50주기 추모행사가 진행된 부천펄벅기념관 앞에 현수막이 걸려 있다. 출처=부천시박물관 홈페이지

8.한국과 인연이 깊다. 1910년대 난징 금릉대학(현 난징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칠 때 제자로 여운형(呂運亨, 1886~1947,독립 운동가, 1945년 건국준비위원장), 엄항섭(嚴恒燮, 1898~ 1962, 독립운동가, 김구 주석 측근) 등이 있었다고 한다.
한국을 몇 차례 방문했고, 소설도 집필했다. 1951년 ‘한국에서 온 두 처녀’를 썼다. 또 한국 농촌 지주 집안을 다룬 소설로 1963년 경향신문에 연재했던 ‘살아있는 갈대(The Living Reed)’, 한국의 혼혈아를 소재로 한 ‘새해(The New Year, 1968) 등을 썼다.
한국과의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미국 육군 전략처(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에서 중국 담당을 맡으면서 시작됐다. 당시 OSS 한국 담당 고문이었던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柳一韓, 1895~1971)을 만난 것이 계기였다.
유일한의 아내는 중국계 미국인 여성이자 소아과 의사 후메이리(胡美利, 한국 명 호미리,1948면 한국적 취득)였고, 유일한도 숙주나물 통조림 제조회사인 라초이 식품회사를 운영, 중국인과 거래한 경력이 많아 교류가 빈번했다.
펄 벅은 나중에 자신의 소설 중 하나에 주인공의 이름을 유일한의  성만 바꿔 사용(김일한) 했다.1968년 3월 서울시의 명예 시민증을 받았다.

미국 35대 대통령 케네디가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에게 백악관에서 만찬을 베풀때 담소하고 있는 케네디와 펄벅. photo by www.Google.com

9.한국과의 좋은 인연은 미국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1917~1963)와의 에피소드에서도 드러난다. 1962년 전후 케네디가 역대 노벨상 수상자을 대상으로 백악관에서 만찬을 베풀었을 때였다. 케네디는 펄 벅 앞에서 다소 황당한(?) 발언을 했다.  ‘주한미군에 너무나도 막대한 세금이 들어가는 만큼 옛날처럼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으면 좋겠다’고 한 것이다. 이에 펄 벅은 ‘그것은 마치 미국이 옛날 영국의 식민지로 돌아가자는 말과 같은 것’이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당시의 정확한 사실은 알길이 없지만 에피소드로 전해오고 있다.

10. 펄벅은 한국에서 사회복지법인 펄벅재단을 1964년 설립됐다.또 1967년에는 경기 부천시 심곡동에 ‘소사희망원(Sosa opportunity Center)’을 건립했다. 소사희망원은 1973년 펄벅이 영면한 이후까지 한국전쟁 고아, 혼혈 어린이를 돌보고 미용과 양장기술을 가르쳤다. 하지만 1975년 문을 닫았고, 그 자리에 2006년 9월30일 부천펄벅기념관(현재 부천문화원 위탁 운영)이 설립됐다.

10.펄 벅의 삶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 영문과 교수이자 펄 벅 재단 위원장을 역임한 피터 콘(Peter Conn)이 쓴 평전 ‘Pearl. Buck-A Cultural Biography(펄 벅-문화일대기, 1996)’이 있다.
영어와 중국어를 동시에 썼던 정체성 문제, 치열한 사회인권운동 속에서 느끼던 불안감, 정신지체아 딸 캐롤에 대한 사랑과 죄책감 등이 잘 담겨 있다. 한국에서는 2004년 ‘펄 벅 평전(이한음 역, 은행나무)’으로 번역 출판됐다.

펄 벅의 중국 남경 거주지 앞 난징 대학에 있는 기념 좌상.펄벅이 즐겨 사용한 중국 이름으로 표기돼 있다.photo by wikipedia

11.중국에는 곳곳에 펄벅 기념물이 존재한다. 펄벅의 사실상 고향인 장쑤성(江蘇省) 난징(南京) 쩐장(镇江市)에는 펄벅문화공원이 있고, 소설 대지를 완성한 곳으로 알려진 장시성(江西省) 류샨(庐山)에 펄벅 기념관이 있다. 난징대학교와 인근 거주한 집에도 기념 좌상과 기념물이 설치돼 보존 되고 있다.
2010년 중국계 미국인 여성 작가 안치 민(Anchee Min, 閔安琪, 1957~현재)은 펄 벅에 관한 허구의 전기 소설 ‘중국의 진주(2010)’를 썼다.
1973년 펄 벅은 미국 국립 여성 명예의 전당(National Women's Hall of Fame)에 헌액됐다. 1983년에는 미국 우정청이 발행한 5센트 미국인 시리즈 우표의 주인공 영예를 안았다.
펄 벅의 논문과 문학 사본은 현재 펄벅 인터내셔널(Pearl S. Buck International)과 웨스트버지니아에 있는 아카이브 컬렉션 ‘웨스트 버지니아 및 지역 역사 센터(West Virginia & Regional History Center)’에 보관돼 있다.(콘덴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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