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마담 보바리-삶의 나른한 권태와 속물 남성들이 부른 파멸의 소설은 전학생 소개 글로 시작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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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삶의 나른한 권태와 속물 남성들이 부른 파멸의 소설은 전학생 소개 글로 시작한다.

지성인간 2023. 6. 29.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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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습실에서 공부하고 있으려니까 교장 선생님이 어떤 평복 차림의 신입생과 큰 책상을 든 사환을 데리고 들어왔다. 졸고 있던 아이들이 깨어났고, 각자 정신없이 공부하다가 깜 짝 놀랐기라도 하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장 선생님은 우리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자습교사 쪽으로 돌아서서 '로제씨'라고 나직이 말했다. ‘여기 이 학생을 부탁해요. 중등반 2학년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학업과 품행을 봐서 양호하면 제 나이에 맞는 상급반으로 올려주지요.’  출입문 뒤 모퉁이에 서 있어서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그 신입생은 열다섯살가량 되어 보이는 시골뜨기로, 키는….”(김화영 역, 민음사,2012)

민음사의 '마담 보바리(2012)' 표지 그림 부분.

1.어느 시골학교에 전학 온 학생을 소개하는 듯한 정밀한 사실 묘사다.평범한 대화체를 쓰면서도 스케치한  듯한 문장 구성이다. 작가의 개입을 최대한 배제하면서 편안하게 써내려간 것으로 보인다. 도입부에서는 격정과 파멸의 소설 전개를  전혀 예측하지 못할정도로 절제된 전개다.

2.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Madame Bovary-Mœurs de province,1857)는 사실주의 문학의 경전으로 꼽힌다. 실증주의 정신에 따라 쓴 최초의 소설이기도 하다.
당시 작가 고향의 미디어(1848년 루앙 지역 한 신문)에 나온 실제 사건(들라마르 부인 사건-유부녀가 불륜 중 파산해 자살)을 소설화 했다.
이 소설은 1856년10월 초부터 1856년12월15일까지 파리에서 나오는 ‘파리평론(Revue de Paris)’에 첫 연재됐다. 그런데  연재  중간에 ‘외설과 풍기 문란(음란물)’ 혐의로 재판까지 받았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성애 묘사, 간통과 불륜의 미화 등을 막장 드라마 수준으로 본 검찰이 기소한 것이다.
하지만 1857년 2월 무죄로 판명났고, 의도치 않은 노이즈 마케팅으로  4월 출판과 동시에 베스트 셀러가 됐다. 작가는 초판본 머리말에 변호사에 대한 헌사(獻詞)도 써놓았다. 영어명도 'Madame Bovary'이다.

소설 마담 보바리 (Madame Bovary)초판본 표지.photo by wikipedia

3.5년에 걸쳐 쓴 ‘보바리 부인’은 진부(陳腐)한 3류 불륜 소설같지만 사랑에 대한 환멸과 운명의 허망함을 철저한 리얼리즘에 입각해 쓴 소설이다.
실제 사건을 가치 중립적인 입장에서 소설화 한 것으로 사실주의(현실을 있는 그대로 관찰 묘사하는 것) 소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환상의 사랑을 쫓는 권태의 여인, 부르주아 속물적 남성들 등에 대한 정밀한 관찰과 적확(的確)한 묘사, 냉철하리만치 중립적인 자세가 압권이다.

4.주요 등장 인물은 많지 않다. 부잣집 딸이자 주인공인 엠마(Emma Bovary)와 엠마의 남편 샤를 보바리(Charles Bovary), 옆집에 사는 약사 오메(Monsieur Homais), 젊고 얌전한 법학도 레옹(Léon Dupuis), 불륜 미남 로돌프(Rodolphe Boulanger), 유태인 상인 뢰뢰(Monsieur Lheureux), 오메 약국의 견습생이자 사촌 쥐스탱(Justin) 등이다.
이밖에 동네 알부자 기요맹, 세무관리원 비네, 쫓겨난 유모 롤레, 하녀 아르테미즈, 유명 외과의사 라리비에르, 사제 부르느지앵, 성당지기 레스티부두아, 여관하인 이폴리트 등이 나온다.

5.줄거리는 간단하다. 사랑에 대한 거대한 환상과 열정을 안고 권태로운 삶을 살다가 불륜으로 자멸한 여인의 이야기다.
의사가 된 샤를 보바리는 어머니의 뜻대로 돈 많은 미망인과 결혼하지만 환멸을 느낀다. 그러다가 환자였던 엠마에 이끌려 아내가 죽은 후 결혼한다. 하지만 낭만적 사랑을 꿈꾸는 엠마는 둔감한 샤를에 질려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한다.
어느날 무도회에 다녀온 이후 엠마는 권태로운 생활을 이기는 방편으로 사교계 생활에 젖는다. 그러면서 시골 의사 아내가 아니라 소설 속 여주인공을 꿈꾼다. 결국 여러 남자들과 사랑을 나누고(불륜), 많은 빚을 져 재산 압류 통보을 받자 독약(비소)를 먹고 자살한다.
엠마가 죽은 후 그리움 속에 살던 샤를은 집 정리를 하다가 불륜 편지(잔인할 정도의 간통 흔적)를 보고 애증의 홧병이 생겨 죽는다. 고아가 된 딸 베르트는 친척집을 전전하다 방직공장에 보내진다.

프랑스 화가 샤를 레앙드레(Charles Leaandre,1862~1934)가 무도회장에서 남성 복장을 한 보바리 부인을 묘사한 일러스트(소설 후 반부분 게재). photo by wikipedia

6.소설 보바리 부인이 날개 돋힌듯 팔린이후 나온 ‘보바리즘(Bovarysme)’이 보통명사화 됐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수필가인 쥘 드 코티에(1858~1942)가 1892년 쓴 에세이에서 ‘끝없는 병적 욕망’을 뜻하는 ‘보바리즘’으로 표현하고, 플로베르의 심리학 용어라고 쓰면서다.
또 소설 속에서 표현된 엠마 보바리와 레옹의 달리는 마차에서 정사는 ‘보바리 마차’라는 이름의 환타지가 됐다. 당대 파리의 연인들을 들끓게 만들었고, 부르죠아들 사이에서 ‘보바리 마차’가 유행했다고 한다.

7.유명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Yves Henri Donat Mathieu-Saint-Laurent, 1936~2008)은 1951년 열다섯 살 무렵에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마담 보바리’ 드로잉 시리즈를 제작했다.  이 드로잉을 보면 일찌감치 패션의 황제 재능이 드러나 있다.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이 청소년기에 마담 보바리를 읽고 그린 스케치.국내 출판사 북레시피가 '마담 보바리(2022)'의 표지 띠로 썼다 .

영국출신 저명한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David Lean, 1908~1992)은  소설 마담 보바리를 아일랜드(영국 치하) 상황으로 치환(置換)해 ‘라이언의 딸(1970)’로 제작, 개봉했으나 흥행에 참패했다. 그런데 평론가들이 ‘예술적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한 통속물’이라고 비판한 것에 충격을 받아 영화 감독 일을 중단하고 약 14년간 칩거 생활을 했다고 한다. 데이비드 린은 말년에 복귀해 ‘인도로 가는 길(1984)’을 제작했다.

8.소설이 나온 이후 10차례 이상 영화화됐고, 드라마, 오페라 등으로도 만들어졌다. 1932년 영화감독 앨버트 레이(Albert Ray, 1897~1944)가 ‘Unholy Love(성스럽지 못한 사랑)’라는 이름으로 첫 영화로 만들었다.
 영화 중에서는 1949년 영화감독 빈센트 미넬리(Vincente Minnelli, 1903~1986), 1991년 클라운드 샤브롤(Claude Chabrol,1930~2010) 이 만든 작품이 호평을 받았다. 각각 제니퍼 존스(Jennifer Jones, 1919~2009)와 이자벨 위페르(Isabelle Huppert, 1953~현재)가 마담 보바리 역을 맡았다.
1951년에는 에마누엘 봉데빌(Emmanuel Bondeville's,1898~1987)이 오페라 ‘마담 보바리’로 만들기도 했다.

이자벨 위페르가 주연한 영화 '마담 보바리(1991)' 스틸 컷.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21~1880)=19세기 위대한 프랑스 소설가. 현대 예술사조(낭만주의와 사실주의, 자연주의와 구조주의)의 토대를 구축한 인물. 사실주의 문예사조를 처음 실현한 선구자, 현대 문학를 연 문체의 거장으로 불린다.

1.노르망디의 중심 도시 루앙(Rouen)에서 루앙시립병원의 외과부장인 아버지 아킬레 클레오파스 플로베르(Achille-Cléophas Flaubert, 1784~1846)와 내과의사의 딸인 어머니 앤 저스틴 캐롤라인(Anne Justine Caroline, 1793~1872)사이에서 태어났다.
루앙의 피에르-코르닐(Lycée Pierre-Corneille)학교를 다녔다. 1840년에 바칼로레아(Baccalauréat, 프랑스의 대학입학자격시험)에 합격해 파리의 법과대학에 다니다 신경병 발작으로 그만둔다.

플로베르 초상화. photo by wikipedia

2.플로베르의 첫 작품은 1836년 15살 때 쓴 단편소설 ‘피렌체의 페스트(La Peste à Florence)’이다. 나중에 출판됐다.
1851년에 ‘마담 보바리’ 집필에 들어갔고, 잡지에 연재되던 1857년 1월 기소되면서 정신적 고통을 겪었으나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플로베르는 1870년을 전후로 화불단행(禍不單行, 불행이 끊임없이 오는것) 이었다. 특히 주변 사람들이 유명을 달리해 충격을 받는다. 1969년 학교 친구이자 시인 루이 부이예(Louis Hyacinthe Bouilhet, 1821~1869)와 동료 생트뵈브(Charles Augustin Sainte-Beuve, 1804~1869)를 잃었고, 1870년에는 쥘 공쿠르(Jules Alfred Huot de Goncourt,1822~1870)를, 1872년에는 어머니를 잃었다.
여기에 1876년에는 조르주 상드(1804~1876),  시인이자 플로베르의 뮤즈 루이즈 콜레(Louise Révoil de Servannes,1810~1876)가 세상을 떠났다.
또 거주하고 있던 별장(크루아세,Croisset, 센마리팀주 캉틀뢰주에 속함. 루앙시 가까운 작은마을)까지 프로이센군이 점령해서 피난을 가야 했다. 조카의 파산에 관계돼 금전적 어려움도 겪었다.

3.플로베르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공식적으로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아이도 없다. 하지만 많은 여인들과 사랑의 흔적은 발견된다. 심지어 오리엔트(중동,오스만 제국) 여행 중에 매춘을 여러번 해서 매독(syphilis)에 걸렸다는 기록도 있다.
첫 여인은 열다섯 살 여름휴가 때 프랑스 북서부 트루빌(Trouville-Sur-Mer, 바스노르망디 지방 칼바도스 주 해변 휴앙지)에서 만난 젊고 아름다운 엘리자 슐레징거 부인이었다. 10대의 플로베르는 격렬한 사랑을 쏟지만 당연히 실패한다.
플로베르의 ‘뮤즈’는 여류 시인 루이즈 콜레(Louise Colet,1810~1876)였다. 서로 주고받은 편지가 많이 남아 있는데 관능적 연애의 대상이자 애증 관계였다. 콜레는 죽기 전에 플로베르를 공격하는 글까지 썼다.

4.1960년 이후 고향 여자친구(죽마고우)의 아들인 모파상(Guy de Maupassant, 1850~1893)의 대부 겸 스승이 됐다.
플로베르는 1880년 5월 8일 고향인 루앙 인근 거주지에서  뇌출혈(혹은 뇌일혈)로 급사해 인근 가족묘에 묻혔다. 묘지에는 앙리 차푸(Henri Chapu, 1833~1892)가 만든 기념물이 있다.

플로베르가 태어난 노르망디 루앙의 생가는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photo by wikipedia

5.주요 작품으로 ‘광인의 회고록(Memoirs of a Madman,1838)’, ‘마담 보바리(Madame Bovary, 1857)’, ‘Salammbô, 1862)’, ‘감정교육(L'Éducation sentimentale, 1869), ‘후보(Le Candidat. 1874)’, ‘성 앙투안의 유혹(The Temptation of Saint Anthony,1874)’, ‘세가지 이야기(Three Tales,1877)’, ‘(Le Château des cœurs (1880) 등이 있다.
또 사후에  ‘부바르와 페퀴셰(Bouvard et Pécuchet, 1881)’ ‘통상 관념사전(Dictionary of Received Ideas,1911)’, ‘서간집(Correspondance, 1965)’ 등이 나왔다.
198번째 생일(2019년12월12일)에 프랑스 국립과학센터(CNRS, Centre national de la recherche scientifique) 연구자 그룹이 플로베르 이름으로 ‘신경 언어 모델( neural language model)’을 발표했다.

6.플로베르는 문체에 집착하고,문체 중심주의를 실현한 소설가였다. 그래서 프랑스 산문정신의 아버지로 꼽힌다.
그는 “시(운문)처럼 리드미컬하고, 과학의 언어처럼 정확하고, 첼로처럼 부드럽고, 깊은 목소리로, 불꽃으로 기울어 진 스타일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는 부정확하고 추상적이며 어울리지 않는 어휘나 표현을 극히 싫어했다. 그래서 진부한 소재의 소설도 깔끔한 스타일로 전개해 독자들이 전혀 진부하지 않는 느낌을 갖게 했다. 후배 비평가 월터 페이터(Walter Horatio Pater,1839~1894)는 플로베르를 ‘스타일의 순교자(martyr of style)’라고 불렀다.

7.플로베르는 정치적으로도 올바른 길을 가려고 노력했다. 스스로를 권력이나 독재, 독점에 강하게 항의하는 ‘분노한 자유주의자(libéral enragé)’라고 했다.
동시대와 직후의 작가는 물론 현대의 작가, 철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1926~1984),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1915~1980), 피에르 부르디외 (Pierre Bourdieu,1930~2002), 장 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1905~1980) 등이다.(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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