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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마지막 수업-프랑스 국수주의가 짙게 배인 소설의 첫 문단은 우울한 지각으로 연다. 본문
“그날 아침, 나는 학교에 가기에 매우 늦었다. 게다가 아멜 선생님께서 동사에 대해 질문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아 야단맞지나 않을까 몹시 두려웠다. 문득 수업을 빼먹고 들판을 놀러나 다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은 티없이 맑고 날씨는 따뜻했다. 산기슭에는 티티새가 지저귀고 제재소 뒤의 리페르 들판에서는 훈련을 받고 있는 프로이센 병사들의 군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쪽이든 문법을 공부하는 것보다는 훨씬 재미있을 것 같았지만 그런 유혹을 꾹 참아 내고 숨차게 학교로 달리기 시작했다. 면사무소 앞을 지나면서 철망을 씌운 게시판 앞에 사람들이 새까맣게 모여있는 모습을 보았다. 요즘 2년 동안 패전이든가 징용, 또는 사령부 명령 따위의 온갖 나쁜 소식만 전해 준 게시판이었다. 나는 발을 멈출 새도 없이 생각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리고 광장을 가로질러 가려는데 견습공들과 함께 사람들 틈에서 게시물을 읽고 있던 대장장이 와슈테르 영감이 나를 향해 소리쳤다. ‘얘야, 서두를 것 없다. 학교에 천천히 가도 늦지 않을테니!’ 나는 대장장이 영감이 놀려대는 줄로만 생각하고 숨을 헐떡이며 아멜 선생님의 작은 정원인 학교로 뛰어들어갔다.”(알퐁스 도데 저, 팡세미니, 2021)
1.간결한 문체의 쉬운 문장이 1인칭 시점에서 펼쳐지는 도입부다. 맑은 날씨와 새들이 지저귐에도 침울한 분위기가 곳곳에서 배어난다. 지각해서 뛰어가는 것, 병사의 군화 소리, 게시판 앞의 사람들 등이 먹구름 낀 미래를 예고하고 있다. 주인공과 대장장이에 대한 섬세한 심리묘사, 서정성이 곁들여진 문장들이 애잔하게 다가온다. 단순한 설정이지만 서사적 이야기를 쉬운 문장으로 써서 편안하게 읽히는 첫문단이다. 본문에 나오는 *티티새(Turdus naumanni eunomus)는 참새목 지빠귀(Thrush)과에 속한 새를 통틀어 이르는 말 *리페르는 지명이다.
2.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La Dernière Classe, 1871)’은 모든 프랑스 학생들의 필독서로 꼽히는 고전(古典)이다. 모국어를 빼앗기는 슬픔을 그려내 프랑스인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킨 단편 소설이다.
1871년 발표될 당시 교육의 가치와 언어와 정체성, 분쟁이 민간인에게 미치는 영향과 지역 문화의 소멸 위험 등으로 문단과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1873년 저자의 제2단편집 ‘월요이야기(Contes du Lundi, 영어 Tales of Monday)에 수록돼 알퐁스-피에르 르메르(Alphonse-Pierre Lemerre,1838~1912, 출판인이자 출판사 이름)에서 간행됐다. 영어로는 ‘The Last Class’로 번역된다.
3.소설의 무대는 기구한 역사를 간직한 현 프랑스의 알자스-로렌(Alsace-Lorraine)이다. 애초 독일어를 쓰는 이들이 거주한 게르만 족속의 땅이었다. 프랑크 왕국, 동프랑크 왕국, 공국을 거쳐 신성로마제국(Sacrum Imperium Romanum, 독일 전신)의 영토였던 것이다. 그런데 중부 유럽 패권 다툼인 30년 전쟁(Thirty Years' War,1618~1648)에서 신성로마제국이 패전하면서 기구한 운명의 땅이 됐다. 전쟁 결과로 독일 북서부 지역인 베스트팔렌의 뮌스터와 오스나뵈르크라는 두 두시에서 동시에 체결된 베스트팔렌조약(1648, 30년 전쟁 종식 평화 조약)으로 알자스-로렌의 중부이하 지역 통치권 일부가 프랑스로 넘어간 것이다. 그런데 로렌의 독일쪽 도시인 스트라스부르도 프랑스가 점령한 사건이 발생한다. 1683년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오스트리아를 침공, 제2차 빈(비엔나) 공방전이 일어났을때 프랑스 루이14세(Louis XIV,1638~1715)가 신성로마제국의 뒤통수를 친 것이다.결국 1697년 9월 네덜란드에서 열린 레이스베이크 조약으로 프랑스는 알자스-로렌 지역중 로렌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후 로렌 일부를 통치한 신성로마제국 로트링겐 공국도 1766년 프랑스에 병합됐다. 이런 연유로 알자스-로렌은 보불(普佛) 전쟁(1870년 발발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Franco-Prussian War)당시에도 주민 대다수가 독일어를 사용했다.
4.알자스-로렌이 독일로 확실하게 넘어간 것은 1870년 발발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Franco-Prussian War)이다. 이른바 보불(普佛)전쟁’으로 1870년 7월 프랑스(佛蘭西,불란서)가 프로이센(영어 Preussen, 라틴어 보루시아,Borussia, 普魯斯, 보로사)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발발했다.
프로이센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 독일 제국의 건설자이자 초대 총리)가 조작한 ‘엠스 전보(Ems telegram, 신성로마제국 황제 빌헬름 1세의 프랑스 대사 접견 관련 전보)에 분노한 프랑스가 개전(開戰)을 선언한 것이다.
이에따라 보불(普佛)전쟁이 시작됐고, 전쟁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의 계획과 육군 원수 헬무트 카를 베른하르트 그라프 폰 몰트케 백작(Helmuth Karl Bernhard Graf von Moltke, 1800~1891) 지휘 속에 프로이센군이 프랑스군을 속전속결 격파했다. 개전 6개월만에 알자스-로렌은 물론 파리까지 점령됐고, 이듬해 1월 끝났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에 막대한 배상금(프랑스 GNP의 25%에 해당하는 50억 프랑)을 물리는 프랑크푸르트 조약을 작성했고, 프랑스는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프랑스는 이를 1년8개월 만에 갚아 비스마르크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철혈재상이 프랑스의 생산력을 오판했던 것이다. 이 전쟁과 일방적 조약으로 프랑스와 독일은 서로를 주적(主敵)으로 인식, 1차, 2차세계대전을 치른다
5. 소설 마지막 수업의 배경인 보불 전쟁 결과, 전승국 프로이센의 군주인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폰 프로이센, 빌헬름 1세(Wilhelm I, 1797~1888)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황제로 즉위하는 대관식을 열고 독일 제국을 선포했다. 이는 현대 독일의 탄생을 선언한 것이었다.
패전국 프랑스는 알자스-로렌의 회복이 국가적 숙원이고 핵심이익 문제였다. 그래서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프랑스는 1919년 알자스-로렌을 다시 획득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0년 독일은 다시 알자스-로렌을 점령, 할양받았지만 패전하면서 1945년 다시 프랑스 땅이 됐다.
한편 알자스 로렌에서 태어난 이 중 유명인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1952)인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 1875~1965) 박사다. 슈바이처는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의 랑바레네(Lambaréné, 현 가봉 무아얭오고웨주 랑바레네)에서 봉사활동 중 1914년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프랑스에서 포로 생활을 했다. 종전 후 알자스 로렌이 프랑스 땅이 되자 국적이 프랑스로 바뀌지만 여전히 독일에서 유명인사로 남아 있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1894)의 주인공 알프레트 드레퓌스(1859~1935) 대위도 알자스 출신이다. 드레퓌스 대위가 범인으로 지목된 데에는 유대계라는 점 외에 알자스 출신의 아버지가 독일 국적으로 알자스에 살았기 때문이다.드레퓌스는 1906년 무죄가 확정됐고, 1차세계대전에도 참전한 후 중령으로 예편했다.
6.소설에는 상징과 알레고리 등이 다양하게 쓰였다. 게시판은 마지막 수업을 알리는 전령이자, 전조(前兆)역할 뿐만 아니라 프로이센의 지배를 상징한다. 학교이자 정원은 아멜 교사의 지난 시절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으로 변하는 식물 속에서 변하지 않은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프랑스어 수업은 언어의 지속성과 문화적 힘, 억압에 대한 저항 요소 등을 드러낸다. 말의 중요성,문자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아멜 선생님의 ‘한 민족이 남의 식민지가 된다고 해도 자기 언어를 잘 지키면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등장인물은 화자이자 주인공 프란츠(Franz, 프랑스식 프랑수아), 교사 아멜, 프란츠와 같은 마을에 사는 노인 하우저(Hauser), 마을의 대장장이 와슈테르(Wachter, 독일식 바흐터) 등이 나온다.
7.줄거리는 1870~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당시 독일이 합병한 영토인 알자스-로렌에서 벌어진 수업 이야기다. 주인공 프란츠는 매일 학교를 지각하던 어린이다. 그날도 학교에 늦게 가면서 게시판 앞 주민들의 웅성거림을 보고, 등교했는데 교실에 마을 어른들이 와 있는 것으로 발견한다.
알고 보니 프랑스어로 배우는 마지막 시간이었다. 지역이 독일 영토가 되었기 때문에 독일어 이외의 언어를 가르칠 수 없다는 명령이 하달됐기 때문이다. 프란츠는 다른 학생,마을사람들과 함께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을 받는다. 수업이 끝남과 함께 선생님이 ‘VIVE LA FRANCE!(프랑스 만세!)’ 라는 구절을 칠판에 쓰고 차마 말을 잇지 못한다.
8.마지막 수업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프랑스 평단에서는 대단한 애국적인 작품으로 불린다. 보불 전쟁에 패배한 프랑스인의 상처를 보듬고, 위로하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나라에서는 ‘국수주의적 작품’으로 평가절하하는 경우가 많다. 국수주의자인 저자가 자문화(프랑스) 우월주의 입장에서 썼다는 것이다.
한편 한국의 소설가로 팡세미니에서 2021년 나온 책 ‘마지막 수업’ 추천사를 쓴 천선란은 “책을 덮고 나면 우리는 왕자로 태어나도, 황금 두뇌를 가지고 태어나도,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고 썼다.
9.한국에는 의외로 빨리 소개됐다. 춘원 이광수( 李光洙, 1892~1950), 벽초 홍명희(洪命憙,1888~1968)와 함께 일제 시대 조선의 마지막 3대 천재(흔히 동경 3재)로 불린 육당 최남선(崔南善,1890~1957)이 1923년 4월 ‘만세(萬歲-마지막 과정(課程)’로 번역, 소개했다. 또 그로부터 3년 후인 1926년 8월 수필가 피천득(皮千得,1910~2007)이 동아일보에 ‘마지막 시간’으로 번역 소개했다.
1970~90년대에는 초등학교,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 일제 강점기 한국어를 가르칠 수 없었던 슬픈 역사 영향으로 한국에서 유명해져서 청소년 필독서가 됐다. 한국에서는 해방 공간에서 전재경이 평양을 배경으로 이 소설을 패러디해 ‘최후의 교실’을 내기도 했다.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1840~1897)=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시인, 극작가. 소설 ‘별’과 ‘마지막 수업’으로 유명.
1.프랑스 남부 옥시타니 지역 님스(Nîmes)의 부르주아지 왕당파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자크 뱅상 도데(Vincent Daudet, 1806~1875)는 방직공장을 운영하는 비단 제조업자, 어머니는 존경받는 프로방스 가문의 후손 마리 아델레인 레이노(Adeleine Reynaud, 1805~1882)였다. 8살 연상 형 앙리도데(1832~1856)와 3살 위 형 에르네스트 도데(Ernest Daudet, 1837~1921), 여동생 아나 도데(1848~1936)가 있다.
도데는 고향 인근 카니베 사립학교를 다니다가 가족이 1849년 리옹으로 이사하면서 앙페르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런데 1855년 46살 무렵 아버지가 파산하면서 역경이 시작된다. 대학 입학의 꿈(바칼로레아, 프랑스 대입자격 시험)을 포기한다.
2.프랑스 남부 가르드 주 알레스(Ales)에서 교사로 일한다. 하지만 제멋대로인 학생들이 많아 공포에 질리면서 1857년 교사를 그만두고 공부를 해서 콜레주 달레스(Collège d'Alès)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해 파리로 가서 형과 재회해 기자 생활을 한다. 파리에서는 신문사 파리주르날, 뤼니베르셀, 르 피가로 등에서 기자로 일한다.
1858년 자작시를 엮은 작은 책 ‘연인들(Les Amoureuses)’을 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신문사 르 피가로(Le Figaro)에 취직했고, 편집장 카르티에 드 빌메상(Cartier de Villemessant,1810~1879) 밑에서 두세 편의 희곡을 써서 문학적 탁월함과 가능성을 인정받는다.
1860년 프랑스 초대 대통령이자 프랑스 제2제국의 유일한 황제 나폴레옹 3세(Charles Louis Napoléon Bonaparte, 1808~1873) 아래서 전능한 장관이었던 샤를 오귀스트 루이 조제프(Charles-Auguste-Louis-Joseph,1811~1865,별칭 드 모르니) 공작의 비서가 됐고,.1865년 모르니가 죽을 때까지 함께 한다.1868년 첫 소설 ‘소소한 이야기’를 낸다.
4.자유분방한 삶을 산 영향으로 프랑스 문학 ‘매독 세대’ 의 한 명으로 불린다. 나폴레옹 3세의 부인 외제니 드 몽티조(Eugénie de Montijo, 1826~1920)황후 주변의 부인들과 다양한 교류를 하면서 자유연애를 한다. 특히 1858년부터는 방탕한 어린 모델로 알려진 마리 리외(Marie Rieu)와 깊은 관계를 지속한다.
그런데 결혼은 요조죽녀와 했다.아내는 시인 및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줄리아 도데(Julia Allard Daudet,1844~1940,1922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훈)다. 둘은 1867년 결혼, 비뉴 쉬르 센(Vigneux-sur-Seine)에 살림을 차렸다. 쥘리는 남편의 불성실함에도 불구, 성실한 내조로 자녀 셋을 잘 키웠다.
큰 아들 레옹 도데(Léon Daudet, 1867~1942)는 언론인, 작가, 활동적인 군주제 운동가, 아카데미 공쿠르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레옹 도데는1891년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손녀 잔 위고(Jeanne Hugo, 레오폴딘 클레망스 아델)와 결혼, 프랑스 제3공화국의 고등 사회 및 지적 서클에 진입했다. 하지만1895년에 이혼했고, 다시 저널리스트 마르트 알라르(1878~1960, 필명 팡필)과 재혼했다. 둘째아들 뤼시앵 도데Lucien Daudet, 1878~1946)는 소설가이자 화가로 이름을 알렸다. 여동생 에드메 도데(1886~1937)도 있다.
5.도데는 1860년 19세기 프로방스 언어와 문학의 부흥을 이끈 시인 프레데리크 미스트랄(Frédéric Mistra, 1830~1914, 190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을 만나 평생 우정을 나눈다.
도데는 군주제 지지론자이자 공화국 반대자였다. 또 반유태주의 문학가였다.프랑스 반유태주의 연맹(Antisemitic League of France)을 설립하고 반유태주의 신문 라 리브르 파롤(La Libre Parole)을 창간한 언론인이자 정치인 에두아르 드루몽(Edouard Drumont, 1844~1917)과도 친했다.
하지만 유태계 작가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전 7권, 1913~1927)’를 쓴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1871~1922)와 같은 젊은 작가들의 친절한 후원자였다. 또 1872년 에밀 졸라 (Émile Zola,1840~1902) 와 귀스타브 플로베르 등을 만나 토론을 벌인다.
6.도데는 1880년대 초 요양 차 파리 근교 샴프로세이(Champrosay)에 있는 자신의 별장으로 은퇴했다. 1883년 자신의 아카데미 회원 선정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쓴 기자(델핏)와 결투를 벌이기도 했다. 1895년 런던과 베네치아를 방문, 돌아와서 문단 강화 활동에 진력한다. 1896년 딸 대부(代父)인 에드몽 드 공쿠르(Edmond de Goncourt, 1822~1896)의 유언에 따라 '아카데미 공쿠르(Academie Goncourt)' 창립 멤버로 활동했다. 이 재단은 도데 사망 후 설립돼 1903년부터 문학상 공쿠르상(Prix Goncourt)을 시상하고 있다.
7.1897년 12월 16일 파리에서 영면했다. 향년 57세. 파리의 페레라셰즈 묘지(Cimetière du Père-Lachaise)에서 열린 장례식에서는 에밀 졸라(Émile Zola,1840~1902)가 조사를 했다.
주요작품으로는 시집 ‘연인들(Les Amoureuses,1858), 소설 '사포(Sapho,1884), ‘방앗간 편지(Lettres de mon moulin,1869)’,3막짜리 희곡 ‘아를의 여인(L' Arlésienne, 1872)’, 단편 소설집 ‘월요일 이야기(Les Contes du lundi,1873) 등이 있다.
한편 도데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형 에르네스트 도데(Ernest Daudet, 1837~1921, 언론인이자 소설가, 역사가)의 형제들과 나(Mon frère et moi)에 담겨 있다. 프랑스 파리 남부 외곽 교외의 에손 (Essonne) 드라베일(Draveil)에 있던 별장 샹프로세이가 문화센터로 운영되고 있다.(콘덴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