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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미겔 스트리트-제3세계의 폭력과 좌절, 광기를 그린 노벨상 작가 소설은 실사영화처럼 첫 문단을 연다. 본문
“보가트. 매일 아침 자리에서 일어난 해트는 자기 집 뒤쪽 베란다 난간에 기대앉아 건너편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그쪽에 무슨 일 없나 보가트?’/보가트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도 듣지 못할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쪽은 무슨 일 없나 해트?’/그가 왜 보가트라 불리는 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그런 이름을 붙여준 사람이 해트가 아닌가 싶다. ‘카사블랑카’라는 영화가 제작된 연도를 사람들이 기억하는 지 모르겠다. 그 영화의 주인공을 맡았던 보가트의 명성이 포트 오브 스페인에 불길처럼 번진 결과 수많은 젊은이들이 보가트 풍의 비정한 태도를 흉내 내게 된 것도 바로 그해였다./사람들이 그를 보가트라고 부르기 전에 그는 ‘페이션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가 아침부터 밤까지 ‘페이션스’라는 카드패 떼기를 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카드놀이를 좋아한 적은 없었다.”(V.S.나이폴 저, 이상옥 역, 민음사, 2003)
1.일상의 아침을 실사(實事)영화처럼 찍은 영상과 음성이 들리는 듯한 도입부다. 지문과 대화를 적절히 배합해 독자가 영상 속 등장인물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는 듯 할정도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듯, 혹은 없는 듯한 화자(話者) ‘나’가 등장 인물을 비평하면서 시대 상황과 성격 등을 드러내고 있다. 주인공 이름이 왜 보가트인지, 등장인물이 무엇을 하는지를 물 흐르듯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연작소설의 도입부로서 깔끔하게 읽히도록 처리한 문단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에 나오는 *카사블랑카는 모로코의 도시 카사블랑카(Casablanca)이자 1942년 나온 마이클 커티즈(Michael Curtiz, 1886~1962) 감독 영화 ‘카사블랑카(험프리 보가트,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를 말한다.
*포트오브스페인은 트리니다드토바고의 수도 *페이션스(patience)는 ‘참을성, 인내, 끈기’라는 뜻으로 주인공의 실생활에 대한 상징과 은유로 쓰였다.
2.V.S.나이폴의 ‘미겔 스트리트(Miguel Street,1959)은 영어로 쓴 제3세계 작가의 걸작으로 꼽힌다. 도덕적 퇴폐와 무기력의 식민도시 거리 미겔 스트리트에서 벌어진 좌절과 광기를 기록한 자전적 소설이다.
저자가 이 연작소설을 쓸 때는 트리니다드(Trinidad) 정부 장학생으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으로 유학 와서 졸업후 정착을 도모하던 때다. 당시 BBC에서 비정규직으로 일주일에 한 번 프로그램을 발표하고 짧은 리뷰를 작성하기 위해 런던 랑햄 호텔에서 다른 무명작가들 일하면서 틈틈이 포트오브스페인 거리에서 어린 시절(1930년대와 1940년대) 알았던 이웃들의 삶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그때가 1955년 여름이었다.
처음에는 단편으로 몇 편 썼지만 즉시 출판되지 않았다. 다만 런던 안드레 도이치(André Deutsch) 출판사의 편집자 다이애나 아틸의 주목을 끌면서 작가로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던 중 1959년 안드레 도이치 출판사에서 단편을 모아 연작소설로 출간을 결정, 17편의 단편소설을 묶은 소설집으로 나왔다. 소설은 출간 1년여가 지나면서 주목받기 시작, 저자의 초기 대표작으로 불리며 명성을 안겨줬다.
#.트리니다드는 16세기부터 스페인, 프랑스, 네델란드 등 여러 나라의 식민지를 거쳐 영국이 1797년 점령했다. 이후 2차세계대전까지 영국 식민지였으나 미군도 진주, 기지촌이 있었다. 주민은 아프리카계와 인도계가 80%가량을 차지한다. 현재는 트리니다드토바고 공화국(Republic of Trinidad and Tobago)으로 영연방 회원국이다.
3.이 소설집의 제목 ‘미겔 스트리트(Miguel Street)’는 대서양 트리니다드토바고라는 나라의 포트오브스페인(Port of Spain)의 우드브룩 지구 루이스(Louis) 스트리트다. 저자는 루이스 스트리트를 소설에서 미겔 스트리트로 바꿨다.
미겔(Miguel)은 ‘대천사 미카엘(Saint Michel, 축일은 9월29일)’에서 나온 단어다. 영어로는 마이클(Michael)과 미셀(Michelle), 프랑스어는 미첼(Michel), 러시아어로는 미하일(Михаи́л)로 쓴다.
소설은 타락한 식민지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인물들의 ‘웃픈(웃기지만 슬픈)’ 이야기다. 비극이 만연한 거리, 말도 안되는 가정폭력이 빈번하고, 죽지 않을 정도로 굶기도 하는 절망적 현실이 있지만 희극적이다.
연작 소설 한편 한편의 주인공 모두 좌절과 권태, 복종과 체념, 약자에 대한 폭력, 불안, 도덕적 퇴폐, 무기력 속에서 가슴을 아리며 사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아이러니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4.등장인물은 단편 소설별로 다양하게 나오지만 화자(話者)인 ‘나‘가 소설들을 연결하는 구조다. 마치 몇 개의 독립된 이야기가 하나로 연결되는 옴니버스(omnibus) 영화처럼 전개된다.
양복점을 하는 보가트(영화 ‘카사블랑카’의 주인공 험프리 보가트의 이름을 따서 명명), 이름없는 물건을 만드는 목수 포포, 가정 폭력범 조지. 의사가 꿈인 조지의 아들 엘리아스 등이 나온다.
또 개똥으로 복수하는 사람 맨맨, 늙은 시인 워즈워스, 꽃불 전문가로 희극배우인 모건, 미겔 스트리트의 선생 타이터스 호이트, 쓰레기 차를 모는 에도스, 자동차만 보면 분해하는 바쿠, 이발사이지만 운수업을 하는 볼로 등도 있다.
이밖에 오지랖 해트, 해트의 동생 에드워드, 사랑만을 믿었던 에레이라 부인, 알고보면 겁쟁이 빅풋, 딸의 죽음을 보고도 슬퍼하지 못하는 로라 등도 나온다.
5.줄거리는 작고 멀고 보잘것없는 섬나라 주민들의 식민지 시대 절망과 방황, 좌절에 대한 부조리가 가감없이 드러나는 이야기다. 17편 중 열여섯 편이 미겔 스트리트 주민들의 개별 성격을 중점 묘사한다. 마지막 한편은 그런 절망의 도시를 떠나오는 화자 ‘나’ 의 이야기다.
재단사라면서도 양복을 안만들고, 카드 패 떼기에만 열중하는 연작소설 첫편 ‘보가트’의 주인공 보가트, 목공을 자처하면서 쓸모없는 물건만을 만드는 ‘이름 없는 물건’의 주인공 포포, 각급 의원 선거 때마다 출마해 세 표씩 얻곤 하는 표제 인물 ‘맨맨’의 맨맨 등이다. 마지막 17편은 화자(話者)가 미겔 스트리트를 떠나 유학을 가면서 끝난다.
6.미겔 스트리트는 나온 지 이듬해부터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 그 이듬해인 1961년에 영국 유명 작가 이름을 딴 ‘서머싯 몸 상(The Somerset Maugham Awards)’을 받았다.
이 상은 1930년대 이후 인세 수입이 가장 많은 작가 중 한 명인 윌리엄 서머싯 몸(William Somerset Maugham, 1874~1965)이 1947년 제정한 ‘젊은 문학인(만 30세 이하)들을 위한 상’이다. 몸은 1919년 발표한 ‘달과 6펜스(The Moon and Sixpence,1919)가 호평을 받으면서 일찌감치 유명작가가 됐다.
영국의 옵저버는 미겔 스트리트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통찰력과 재치가 있는 작품이다. 재미있고 날카로운 관찰로 가득 차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 뉴욕 타임스는 1960년 5월5일자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뛰어난 감각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놀랍다”며 “ 비극은 절제되고 희극은 과장되지만 진실의 울림은 크다”고 평가했다.
7.한국에 소개는 늦게 됐다. 저자가 ‘책이 안팔리는’ 제3세계 작가로 치부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첫 번역 출간은 1978년 민음사에서 초판이 나왔다. 이후 작가가 노벨 문학상(2001)을 받은 이후 2003년 재출간됐다.
#.비디아다르 수라즈파라드 나이폴(Vidiadhar Surajprasad Naipaul,1932~2018)=제3세계 문학의 기수이자 대표 작가. 인도계 트리니다드토바고 태생의 영국 소설 및 논픽션 작가이지만 중남미 카리브해 문학계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꼽힌다. 노벨문학상(2001) 수상자.
1.서인도 제도의 영국령 트리니다드(영어 트리니티, 삼위일체 뜻)토바고 차구아나스 설탕 재배지 마을에서 태어났다. 현재의 영연방 회원국인 트리니다드토바고 공화국(Republic of Trinidad and Tobago)이다.
수도 포트오브스페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아버지 세페르사드(Seepersad,1906~1953)와 어머니 드로우파티 카필데오(Droapatie Capildeo) 사이에서 두 번째 자녀이자 첫 아들로 태어났다.
가문은 인도계 이민자다. 할아버지는 서인도에서 트리니다드로 이주, 설탕 농장에서 계약직 노동자로 일했다. 동생 시바 나이폴(Shiva Naipaul, 1945~1985)은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였는데, 시바는 1985년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유년기 집에서 영어만 말하도록 권장 받아 자라면서 인도어는 잊었다. 일곱살 때 수도인 포트오브스페인으로 이주, 1942~1950년까지 퀸즈 로열 칼리지(QRC)의 고교와 2년제 대학 과정을 졸업했다. 이후 18세 때 트리니다드 정부 장학금을 받아 영국 런던으로 이주해 1950년 옥스퍼드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1953년 옥스포드 졸업 논문이 ‘호빗’과 ‘반지의 제왕‘ 저자인 J. R. R. 톨긴(John Ronald Reuel Tolkien , 1892~1973) 교수의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 23세 때부터 창작 활동을 했고, 영국 방송 BBC 등에서 일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1957년 첫 소설 ‘신비한 안수자’를 발표했다.
3.나이폴의 첫 뮤즈는 1952년 초 대학 연극반에서 만난 영국인 여성 역사학도 패트리샤 앤 헤일(Patricia Ann Hale,? 1996)이었다. 헤일과 친밀한 우정은 결국 남녀관계로 발전했고, 헤일의 지원을 받으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헤일의 집안에서는 둘의 교제를 반대했으나 결국 1955년 결혼했다.
나이폴은 1972년 아르헨티나로 첫 여행을 하는 동안 영국계 아르헨티아 자녀를 3명을 둔 마가렛 머레이 구딩(Margaret Murray Gooding)과 바람을 피웠다. 마가렛은 사실상의 정부(情婦)로 이들의 관계는 24년 동안 지속됐다. 마가렛은 나중에 나이폴의 ‘여성 혐오와 성적인 신체 학대’를 견디지 못해 고소했고, 나이폴은 기소됐다.
나이폴은 1996년 아내가 사망하자 인도 라호르에 있는 미국 총영사의 집에서 만난 케냐 몸바사 출신 파키스탄계 저널리스트이자 이혼녀 나디라 알비(Nadira Khannum Alvi 1953~현재)와 그해에 재혼했다. 그리고 2003년 당시 25세였던 나디라의 딸 말레하(Maleeha)를 입양했다.
4.나이폴 인생에서 세 명의 중요 여인 중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는 첫 부인 패트리샤이다. 패트리샤는 나이폴의 불륜에도 불구, 죽을 때까지 남편으로 섬겼다.
전기 작가 패트릭 프렌치는 “나이폴의 창작에서 그녀의 역할은 소니아 톨스토이, 제인 칼라일, 레너드 울프와 같은 위대하고 비극적인 문학적 배우자들과 동등할 정도”라고 높이 평가했다.
소니아 톨스토이(Sophia Andreyevna Tolstaya,1844~1919)는 러시아 작가이자 대문호 레흐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1828~1910)의 부인, 제인 칼라일(Jane Welsh Carlyle, 1801~1866)은 스코틀랜드 역사가이자 철학자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의 아내다. 레너드 울프(Leonard Sidney Woolf, 1880, 1969)는 영국 유명 여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Adeline Virginia Stephen Woolf,1882~1942)의 남편이다.
5.나이폴은 아버지가 사망한 1953년 이후 조국과의 연결고리를 끊기 시작했다. 아버지 세페르사드 나이폴 (Seepersad,1906~1953)은 관상 동맥 혈전증을 앓고 있다가 1953년 10월 사망했다.
아버지 장례는 힌두교 식으로 치러야 했는데 장남인 나이폴은 참가하지 못했고, 동생 시바 나이폴(Shiva Naipaul)이 장남 역할을 대신했다. 이는 나이폴의 평생 트라우마로 작용했다.나이폴은 1957년 여름, 영국시멘트및 콘크리트협회(C&CA)에서 내는 잡지 ‘Concrete Quarterly’편집 보조원으로 취업했다.
1960~1961년 소설 미겔 스트리트가 호평을 받으면서 유명 작가 반열에 오르면서 초청도 잇따랐다. 1962년 인도의 초청을 받아 봄베이(뭄바이)와 델리에서 한달, 카슈미르에서 다섯달을 보냈다. 이 때 조상 마을을 방문했지만 가난과 고통에 대한 체념적이거나 회피적인 고향마을 사람들의 반응에 충격을 받았다.
인도 방문 중 영어 잡지 ‘Illustrated Weekly of India’의 제안을 받고, 매월 ‘Letter from London’을 쓰기로 계약, 2년 동안 기고했다. 주로 영국의 현대 문화, 즉 크리켓, 비틀즈,여왕 이야기 등을 썼다.
6.나이폴은 등단이후 1960년대에는 트리니다드 토바고 이민 사회의 부유와 혼돈을, 30대~40대에는 영국 거주 유색 지식인으로서의 고뇌와 상처를, 50대 이후에는 인도 중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여행을 바탕으로 제3세계의 아픔과 보편적인 문제를 많이 다뤘다.
1971년에는 대표작 '자유국가에서(In a Free State)'로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부커상을 받았다. 1990년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고, 1990년에는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가장 높은 국가 영예인 트리니티 크로스를 수상했다.
7.나이폴은 2001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스웨덴 한림원은 노벨상 선정 이유에 대해 "우리에게 억압된 역사의 존재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다"면서 "그의 문학은 서인도 제도를 넘어 인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의 이슬람 세계까지 뻗어 나갔다"고 말했다
2008년에는 타임스가 선정한 ‘1945년 이후의 위대한 영국 작가 50명(The 50 greatest British writers since 1945)’에 올랐다.
2018년 8월11일 런던 자신의 집에서 쓰러졌다. 나이폴은 죽기 전에 그는 유명 시인 테니슨(Alfred Tennyson, 1st Baron Tennyson, 1809~1892)의 시 ‘Crossing the Bar(모래톱(고난, 죽음의 강)을 건너며)’를 들으면서 숨졌다. 향년 85세.
부인 나디라 나이폴은 사망 직후 성명에서 "(나이폴이)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숨을 거두었으며 창작을 위한 노력과 열정 속에서 충만한 삶을 살다가 갔다"고 말했다. 장례식은 런던 노스 켄싱턴 켄살 그린 묘지(Kensal Green Cemetery)에서 거행됐다.
8.나이폴은 영국 문단에서 사망 직후 “유럽 대륙에 뿌리내리고 살면서도 제3세계에 입힌 상처를 고발해온 역사의 증언자”라는 평가를 받았다.실제 나이폴의 주요 저서는 고향과 조국에 대한 이야기다.
대표 작품으로는 ‘비스와스 씨의 집’, ‘흉내’, ‘자유 국가에서’, ‘게릴라’, ‘인도-상처 입은 문명’, ‘신자들 사이에서-이슬람 기행’, ‘세계 속의 길’ 등이 있다.
9.나이폴은 독설도 많이 했다. 나이폴은 19세기 영국 문단의 지배자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1870, 저서 ‘위대한 유산’, ‘올리버 트위스트’,‘크리스마스 캐롤’ 등)에 대해 “자기 패러디만 하다가 사망한 작가”라고 비판했다.
또 ‘인도로 가는 길(A Passage to India, 1924)’의 저자 E.M 포스터( Edward Morgan Forster, 1879~1970, 저서 ‘전망좋은 방’, ‘하워드 엔드’ 등)에 대해 “인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폄하했다. 또 이슬람 비하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도정일 고려대 영문과 교수는 “스스로를 뿌리 없는 작가로 말하고 있는 나이폴은 어느 문명과 국가에도 귀속감을 갖지 못하는 독특한 영혼의 소유자”라고 말했다.
10.생전과 사후 비판과 비난을 많이 받았다. 많은 평론가들은 나이폴에 대해 “포트오브스페인(트리니다드의 수도)의 혼란과 무질서를 경멸한 작가로 혼돈에서 탈출해 런던이라는 ‘질서’의 문명에 안착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특히 자신이 태어난 제3세계의 부끄러운 기억과 정직한 대면을 시도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베스트셀러 ‘오리엔탈리즘’의 저자인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1935~2003, 팔레스타인 출신 미국 영문학자)는 “제3세계의 문제가 악의적인 제국주의자에 의해 파생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 자신에 의해 야기됐다는 나이폴의 시선은 이해할 수 없다”며 “나이폴의 소설은 식민주의 담론에 물들어 있다”고 직격했다.
영국 소설가 로버트 해리스(Robert Dennis Harris,1957~현재)는 “나이폴의 아프리카 묘사는 인종차별적이고 오스왈드 모슬리(Oswald Mosle,1896~1980, 영국 파시스트연합 창시자, 극우의 대부)의 파시즘을 연상시키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카리브해의 또 다른 노벨문학상 수상자 세인트 루시아(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 소앤틸리스 제도)의 시인 데릭 월콧(Derek Walcott, 1930~2017)은 나이폴을 공개적으로 경멸했고, 시집에서 나이폴에 대해 "00 자식"이라고 비하하기도 했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