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사기-本紀-대의멸친과 중화주의 뿌리, 설명문체로 시작하다 본문

카테고리 없음

사기-本紀-대의멸친과 중화주의 뿌리, 설명문체로 시작하다

지성인간 2023. 5. 6. 11:05
728x90
반응형

“황제(黃帝,중국 신화의 한족 시조)는 원래 소전 부족으로 후손으로 성은 공손, 이름은 헌원이다. 태어나면서 신령스러웠고, 생후 이내 말을 했다. 어려서부터 매우 영리했고, 자라면서 성실하고 영민했다. 어른이 되어서는 널리 보고 들어 사리분별이 명확했다.”(신동준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5)

현대에 들어와 중국에서 공식 펴낸 '사기'첫 페이지. 1982.중화서국.photo by wikipedia

1.전설 혹은 신화를 그대로 설명하는 형식을 취했다. 구전 이야기의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첫 문단부터 황제(黃帝)의 영특함을 세세하고 과장되게 서술, 실제의 역사가 아니라 신화라는 점을 은연 중에 암시 하고 있다. 어떤 인물을 신화, 전설적으로나 과장되게 표현할때 적절한 서술기법이다.

2.사마천의 ‘사기(史記,BC 108~BC 91)’는 동양사에서 전무후무한 서서이자 불멸의 고전이다. 한나라 무제(漢 世宗 孝武皇帝 劉徹, BC156년~BC 87) 때 쓰여진 사찬(私撰, 개인이 간행한) 역사서다.
원래 책 이름은 ‘태사공서(太史公書)’혹은 ‘태사공기(太史公記)’였다. 나라의 명을 받들어 기록한 관찬(官撰, 국가 공공기관 편찬)이 아니어서 사마천이 아버지와 자신의 직명인 태사를 붙인 것이다.
사마천 사후 300여 년이 지난 뒤 위나라 때 순열(荀悅, 148~209)이 지은 ‘한기(漢紀)’에 ‘태사공사마천사기(太史公司馬遷史記)’라고 언급 되면서 점차 ‘사기’로 굳어졌다. 오늘날은 사기를 말하면 사마천을 떠올릴 정도로 고유명사가 됐다.

사마천의 '사기' 첫 페이지.시기 미상. photo by wikipedia

3.사기는 원저(原著) 그대로의 형식과 내용이 전해지지 않는다. 후대에 수없이 가필(加筆)됐다. 총 130권으로 본기(本紀), 표(表), 서(書), 세가(世家), 열전(列傳)으로 구성돼 있다. 역사 뿐만 아니라 학문 전 분야를 다룬 백과전서이기도 하다.
사기는 최초 기전체(紀體,사건과 인물 따로 기술. 자세히 쓸수있고,평가도 쉽다) 역사 책이다. 직전까지 역사서는 모두 편년체(體, 시간에 따라 기록, 세세하게 쓸수없고  평가도 쉽지  않다)로 쓰여졌다.  

4.세계적인 고전으로 꼽히지만 중국 중심 통일국가와 천자(天子, 황제)에 대한 기록이어서 비판도 적지 않다.
특히 중화 역사의 시작이라고 현대의 중국인들이 주장하는 '삼황(三皇-복희, 신농, 여와씨) 시대'가 없는 것이 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삼황시대는 주변국(특히 한민족 조상 동이족)의 역사여서 뺐다는 주장도 있다. 이를 보면 중화주의 역사서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는 평이다.

5.청나라 말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한 사상가 양개초(梁啓超,량치차오,1873~1929)는 사마천을 '역사계의 조물주'라고 떠받들었다.
소설 '아Q정전'을 쓴 근현대 중문학의 아버지 루쉰(魯迅,1881~1936)은 사기를 ‘역사가의 빼어난 노래요, 운율 없는 이소(離騷)다.’라고 격찬했다. 이소는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시인 굴원(BC 343?~BC 277?)의 장편 서정시다.

6.사기는 우리나라에 일찌감치 전래돼 사서 쓰기의 전범(典範)으로 인식됐지만 악영향도 없지 않다. 중화주의 사관(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확산이 그것이다. 이 사관은 실학파는 물론 일제식민사관으로 확대,지금까지 한민족 역사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내 첫 완역본은 소설가 김병총의 ‘평역 사기(전 10권 집문당, 1994)’ 다.

사마천 초상화. 시기,작자미상. photo by wikipedia

#. 사마천(司馬遷, BC 145~BC86?)=중국 전한 말기 역사가. 사가(史家)의 대명사. 동양 역사학의 선구자. 서양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에 버금가는 인물이다. 중국어 발음으로는 쓰마첸, 영어로는 Sima qian으로 쓴다.

1.중국 산시성(陝西省) 용문(현 韓城縣)시 하양(夏陽) 출신이다. 부친 사마담(司馬談, 생년 미상~BC 110)은 한나라 말 태사령(천문, 역법, 학문 연구직)을 지냈다.
열살때 고문(古文)을 깨치고, 스무 살(BC 126) 때 전국을 돌며 세상사를 체득했다. 38세(BC 108)에 아버지의 대를 이어 태사령이 됐다. 당시 황제였던 한무제에 밉보여 사형과 다름없는 궁형(宮刑,성기 거세 형벌)을 당하고, 고통속에서 사기를 집필했다.

2.아내는 유씨(柳氏)였고, 거세 이전에 아들 둘과 딸을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딸의 아들 양운(楊惲)사기를 보관했다가 세상에 내놓았다고 한다. 이에 전한(전한)을 멸한 왕망이 사마천의 후손을 찾아서 사통자(史通子)라는 사관 벼슬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3.사마천은 아직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 기원전 86년 전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후손들은 처형당했을 것으로 믿고 있다. 그래서 후손들은 성을 사마(司馬)가 아니라 사마에서 사(司)와 마(馬)를 분리, 변형해 동(同)씨나 풍(馮)씨로 썼다고 한다.

4.사마천은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로 서구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토스(BC 484~BC 425, 저서 ‘Historiae’로 유명)와 어깨를 겨루는 역사학의 북극성이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일본의 유명 소설가 후쿠다 사다이치(福田定一, 필명 시바 료타로(司馬 遼太郎, 1923~1996)는 사마천을 매우 존경해 '사마천을 따라가려면 멀었다'는 뜻의 필명(司馬 遼太郎)을 지었다고 한다. 그는 또 "내 작품이 뛰어나다고 해도 '스승' 사마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콘텐츠 프로듀서)

728x90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