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상춘곡-봄의 꽃향과 풍류를 읊은 가장 유명한 가사문학은 안빈낙도의 귀거래사로 시작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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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춘곡-봄의 꽃향과 풍류를 읊은 가장 유명한 가사문학은 안빈낙도의 귀거래사로 시작한다.

지성인간 2024. 3. 1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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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紅塵)에 뭇친 분네 이내 생애(生涯) 엇더ᄒᆞᆫ고/ 녯사ᄅᆞᆷ 풍류(風流)ᄅᆞᆯ 미ᄎᆞᆯ가 못 미ᄎᆞᆯ가/ 천지간(天地間) 남자(男子) 몸이 날만ᄒᆞᆫ 이 하건마ᄂᆞᆫ/ 산림(山林)에 뭇쳐 이셔 지락(至樂)을 ᄆᆞᄅᆞᆯ 것가/ 수간모옥(數間茅屋)을 벽계수(碧溪水) 앏픠 두고/ 송죽(松竹) 울울리(鬱鬱裏)예 풍월 주인(風月主人) 되어셔라/ 엇그제 겨을 지나 새봄이 도라오니/ 도화 행화(桃花杏花)ᄂᆞᆫ 석양리(夕陽裏)예 퓌여 잇고/ 녹양방초(綠楊芳草)ᄂᆞᆫ 세우 중(細雨中)에 프르도다/칼로 ᄆᆞᆯ아 낸가 붓으로 그려 낸가/ 조화신공(造化神功)이 물물(物物)마다 헌ᄉᆞᄅᆞᆸ다/ 수풀에 우ᄂᆞᆫ 새ᄂᆞᆫ 춘기(春氣)ᄅᆞᆯ ᄆᆞᆺ내 계워 소ᄅᆡ마다 교태(嬌態)로다/ 물아일체(物我一體)어니 흥(興)이ᄋᆡ 다ᄅᆞᆯ소냐/ 시비(柴扉)예 거러 보고 정자(亭子)에 안자보니/ 소요음영(逍遙吟詠)ᄒᆞ야 산일(山日)이 적적(寂寂)ᄒᆞᆫᄃᆡ/ 한중 진미(閑中眞味)ᄅᆞᆯ 알 니 업시 호재로다/ 이바 니웃드라 산수(山水) 구경 가쟈스라/ 답청(踏靑)으란 오ᄂᆞᆯ ᄒᆞ고 욕기(浴沂)란 내일(來日)ᄒᆞ새/ 아ᄎᆞᆷ에 채산(採山)ᄒᆞ고 나조ᄒᆡ 조수(釣水)ᄒᆞ새/ ᄀᆞᆺ 괴여 닉은 술을 갈건(葛巾)으로 밧타 노코/ 곳나모 가지 것거 수 노코 먹으리라”(한국고전번역원, ‘불우헌집’ 제2권 ‘가곡(歌曲)’)

1.문장 하나하나에 봄의 향기가 물씬 묻어난다. 봄을 노래한 표현들이 교향곡처럼 울러 퍼지는 느낌이다. 어느 곳이 속세이고 어디가 선계(仙界)인지 알 수 없다. 국한문 혼용체임에도 서정성 짙은 낱말들이 조화롭고, 운율도 뛰어난 첫 문단이다. 시어 하나하나가 아주 쉽고 난삽하지 않아 읽는 즐거움을 더해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대구법, 직유법, 의인법이 적절히 섞여 ‘봄의 송가(頌歌)’로서 의미를 더하고 있다. 화상 카메라가 화자의 시선을 따라 봄의 경치를 쭉 읊고 있는 듯한 첫 문단이다. 모두 한글로 지었으면 더 좋은 운율이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흥양(현 전남 고흥)유생(유학을 배우는 학생)인 후손 정효목이 1786년에 편찬한 정극인 시문집 불우헌집 권2에 실려있는 상춘곡.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2.조선 초 문신 정극인의 상춘곡(賞春曲, 1470년 전후)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봄을 빗댄 귀거래사(歸去來辭,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로 돌아가는 노래)다. 꽃향 가득한 봄의 자연을 완상(玩賞, 즐기며 보는 것)하면서 안빈낙도(安貧樂道)를 표현한 이만한 시문(詩文)은 없다는 게 평단의 인식이다.
총 39행(또는 40행) 79구로 구성돼 있다. 4음보의 율격(律格)으로 종장(終章)은 3.5.4.4로 끝난다. 운문(韻文)이지만 운율을 잘 갖춘 산문(散文)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조선 전기 사대부(특히 조선 전기에 입신양명하지 못한 사림) 가사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귀거래사 이지만 시문 전체에 출사(出仕,벼슬아치로 세상에 나가는 것)에 대한 체념이 은유적으로 고스란히 녹아 있다.
출전은 저자 사후 300년 뒤인 1786년(조선 정조 10)에 나온 ‘불우헌집(不憂軒集)’권2 이다. 정조 연간에 후손 정효목(丁效穆, 흥양 유생,흥양은 현 전남 고흥군)이 선대의 뛰어난 문장가 정극인의 시가(詩歌)와 산문(散文)을 엮어 간행했다. 모두 2권 1책의 석판인쇄본(石版印刷本)이다.
불우헌집은 책머리(권두)에 황경원(黃景源,1709~1787, 정조 때 대제학 역임)·황윤석(黃胤錫,1729~1791, 전의현감 역임한 운학자)의 서문이 있다. 현대에 들어와 1969년 광주에 있는 정씨서륜당(丁氏敍倫堂)에서 중간(重刊)한 불우헌집에는 권말(卷末, 책 끝장)에 후손인 정내동(丁來東,1903~1985)·정팔성(丁八聲,정극인 18세 손)의 발문이 있다. 고려대 도서관과 서울대 규장각 소장.

상춘곡이 실린 1786년 간행 불우헌집 표지.저자 사후 300년이 지난 뒤 편찬됐다.출전 한민족문화대백과

3.1980년대까지만 해도 최초의 가사(歌詞)문학으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고려말(高麗末) 나옹화상(懶翁和尙, 1320~1376,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의 왕사(王師), 법호는 혜근, 惠勤)의 ‘서왕가(西往歌)’를 효시로 본다.
상춘곡은 은일(隱逸,속세에 숨는다는 뜻) 가사, 강호(江湖) 한정가(閑精歌,한가한 정서를 노래)이다. 서사(序辭)·춘경(春景)·상춘(賞春)·결사(結辭) 4단으로 구성됐다. 각 단에 주제어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제1단은 풍월주인(風月主人), 제2단은 물아일체(物我一體), 제3단은 자연 예찬, 제4단은 자연귀의(自然歸依)와 안빈낙도다.
상춘곡에 나오는 시어(詩語)는 오늘날에 많이 쓰는 낱말이 많다. *.답청(踏靑, 봄의 파란 풀을 밟는 것,중국에서 청명절에 자연을 즐기던 풍속), *.욕기(浴沂, 중국 기수(沂水)에서 목욕하는 것, 유유자적하는 것), *.단표누항(簞瓢陋巷, 좁고 지저분한 거리에서 먹는 밥과 물, 선비 청빈 생활) 등이다.

'상춘에 새참'조선 후기 화가 김준근이 그린 19세기 말 농촌의 봄. 출전=기산풍속도첩. 독일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 소장.한국학중앙연구원

4.상춘곡의 형식은 고려 제23대 대왕 고종(高宗,1192~1259) 때의 ‘한림별곡(翰林別曲, 현전 가장 오래된 경기체가, 1215년 전후 창작 추정)’, 고려 말 공민왕 왕사(王師, 왕의 스승) 나옹화상의 ‘서왕가(西往歌)’ 등의 형식을 따왔다.
상춘곡은 문자 그래로 ‘봄을 즐기는 노래’, 봄의 흥취에 젖어 부르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노래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찬가이자, 귀거래(歸去來,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가는 것) 예찬이다.
조선 중기 문신 송순(宋純, 1493~1583, 선조 때 대사헌)의 '면앙정가(俛仰亭歌,1524)'에 영향을 주었고, 다시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 선조 때 좌의정)의 '성산별곡(星山別曲,1560)'과 '관동별곡( 關東別曲,1580)'으로 이어지는 가사문학의 주요 맥 역할을 했다.)

정극인이 전북 태인에 은거할때 성종이 정3품 벼슬을 내리자 감격해 지은 시 불우헌가.출처=1969년 중간한 불우헌집. 한국학중앙연구원.

5.한국 국어 시험의 단골 소재다. 모의평가와 대학수학능력시험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1980년대까지 국정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을 정도다.물론 교과서가 검정으로 바뀐 뒤에도 고교 '국어'에 실렸다. 거의 모든 고교 국어 시험에는 무조건 나오는 작품이라고 봐야 한다.
작자가 정극인이 아니라는 주장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지만 확실하게 ‘아니다’라는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아직도 학계에서 ‘상춘곡’의 작가가 ‘100% 정극인’이라고 확인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씨 문중에 전하는 정극인 초상.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태산선비문화사료관 소장. 작자 연대 미상.

#.정극인(丁克仁, 1401~1481)=조선 초 문신. 영광 정씨(零光 丁氏). 호는 불우헌(不憂軒), 다헌(茶軒) 또는 다각(茶角). 사후 300년 뒤인 정조 임금때 후손 정효목(흥양 유생)이 간행한 ‘불우헌집’으로 조선 전기 문장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
생전 벼슬은 사간원 정언(조선시대 정6품)에 그쳤으나 처가인 태인(泰仁, 현 전북 정읍)에 은거할 때 직위는 있으나 직무가 없는 관직인 ‘산관(散官, 정3품)’에 임명됐다. 추증 예조판서 겸 지춘추관성균관사(知春秋館成均館事). 호 불우헌은 세상을 잊고 근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경기 광주목 두모포리(현 서울 성동구 옥수동)에서 아버지 정곤(丁坤, 혹은 丁寅, 종 5품 무관 역임)과 죽산 안씨(竹山 安氏) 안정(安挺)의 딸 사이에서 7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429년(세종 11) 29세의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생원과 진사를 뽑던 과거로 합격하면 성균관 입학 자격)에 합격한 후 문과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그런데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인 1437년 당시 세종대왕이 흥천사(興天寺) 중건을 위해 토목공사를 일으키자 앞장서서 권당(捲堂, 동맹 휴학)을 해 성균관에서도 퇴출됐다. 당시 진노한 세종이 정극인을 참형(斬刑)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영의정 황희(黃喜,1363~1452) 등이 겨우 말려서 간신히 북방 귀양으로 마무리됐다.

2006년 3월 10일 전북 정읍시 칠보면 원촌마을 태산선비문화관 사료관옆에 세운 불우헌 정극인선생 동상 제막식 모습. 태산문화선비관 제공

2.세종 흉거 후 귀양지인 북방에서 풀려나서 1451년(문종 1)에 천거를 받아 6품 벼슬인 광흥창 부승(廣興倉 副丞, 종9품 잡직)이 됐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난 1453년(단종 1) 식년 문과에 응시해 정과(丁科) 13위로 급제했다. 과거 급제로 전주부교수참진사(全州府敎授參賑事, 흉년 등에 구휼 일을 하는 잡직)를 제수받았다.
하지만 쿠데타(계유정난)에 성공한 수양대군이 보위에 오르는 1455년 처가(妻家)로 하향(下鄕, 귀거래 歸去來)했다. 부인 임실 임씨(任實 林氏) 임은(林殷)의 딸의 친정인 전라도 태인현(泰仁縣)으로 귀거래한 것이다. 정극인은 태인에 집을 짓고 ‘불우헌(不憂軒)’으로 불렀다.
그런데 그해 말 조정에서 인순부승록(仁順府丞錄)으로서 좌익원종공권(佐翼原從功券) 4등을 내리자 다시 출사했다. 이후 성균관 주부(主簿), 종학박사(宗學博士, 정7품), 사헌부 감찰 및 통례문통찬(通禮門 通贊, 제사 의식을 진행하는 임시직) 등 한직을 맴돌았다. 나이가 들어 1469년(예종 원년) 69세 때 조산대부행 사간원 정언(朝散大夫行司諫院 正言, 정6품)을 끝으로 퇴직했다.

2013년 문예원에서 나온 국역 불우헌집.

3.상춘곡 등과 함께 유명한 시문(詩文)인 불우헌가(不憂軒歌), 불우헌곡(不憂軒曲)을 짓게 된 것은 성종 초인 1472년 향리의 자제를 열심히 가르친 공으로 조정에서 3품 산관(三品散官)을 제수하자 감격해 지은 것이다. 이른바 송축시(頌祝詩)인 셈이다.
1481년 81세의 나이로 향리 태인에서 영면했다. 사후 예조판서 겸 지춘추관성균관사에 추증됐다. 사후 전북 정읍 칠보면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향됐다. 묘는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은석동에 있다.

불우헌 정극인을 배향한 전북 정읍 칠보면 무성서원 정문. 1968년 사적 제166호로 지정받은데 이어 2019년 7월 6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4.정극인은 조선 관료사에서는 미약한 인물이다. 한직만 맴돌다 추증(사후 조정에서 올려주는 명예 관직) 예조판서가 최고 관직이어서다. 하지만 문학사에서 위상과 영향을 지대하다. 상춘곡은 물론 단가(短歌)인 불우헌가, 한림별곡체(翰林別曲體)의 불우헌곡 등을 지어 문학사에 큰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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