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성호사설-조선의 백과사전이자 세상 만물 관찰기의 첫 문단은 중화주의 한계를 극복 못한 채 시작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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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조선의 백과사전이자 세상 만물 관찰기의 첫 문단은 중화주의 한계를 극복 못한 채 시작한다

지성인간 2024. 9. 9.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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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의 중시조이자 백과사전 격인 '성호사설'을 지은 성호 이익은 경기 안산에 칩거,농사와 학문을 병행해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조선시대 농사 타작 풍경을 보여주는 단원 김홍도의 '벼타작'.출처=김홍도 필 풍속화첩. https://ko.wikipedia.org

제1권/천지문(天地門). 기지아동(箕指我東). "맹자(孟子)가 '기자(箕子)ㆍ교격(膠鬲)ㆍ미자(微子)ㆍ미중(微仲)ㆍ왕자 비간(王子比干)이다'고 했는데, 분명히 기(箕)ㆍ미(微)ㆍ왕(王)은 땅 이름이고, 자(子)는 작(爵)의 칭호요, 교격ㆍ미중ㆍ비간은 이름이다. 맹자는 또 '교격은 고기 잡고 소금 굽는 사람들 틈에서 등용되었다' 했는데 고기 잡이와 소금 굽는 것을 함께 지적한 것을 보면 이는 해변을 가리킨 것이니, 그가 과거에 서민이었던 까닭인가 보다. 은(殷)의 제도는 왕의 아들일지라도 그를 먼 곳으로 내보내어 민간의 고통을 체험하게 한 일이 있으니, 무정(武丁)의 사적에서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기자도 고기 잡고 소금 굽는 곳에서 등용되지 않았을 줄 어찌 알 수 있으랴? 기(箕)라는 나라는 곧 우리나라를 가리킨 것이다. 분야(分野)로 따진다면 우리나라가 기(箕)와 미(尾)의 지점에 해당되고 서쪽 지역이 기의 위치가 된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는 단군(檀君) 왕조의 말기에 기자가 이 기성(箕星)의 지점을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이 땅에서 봉작을 받은 것일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고기 잡고 소금 굽는 바다'라는 것이 무엇을 지적하여 말했단 말인가? 또 기가 다른 지방이라면 어째서 자기가 봉작을 받은 곳을 버리고 그 칭호를 썼겠는가? 은(殷)의 역사에서 쓴 칭호는 봉작을 받은 것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지, 봉작을 받기도 전에 이 칭호를 쓴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주(紂)가 멸망하기 이전에 벌써 기자의 교화 은택을 받았던 것이다."(한국고전번역원, 임창순 역,| 1977. http://www.itkc.or.kr 인용)

성호 이익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환국(換局) 정치의 주인공 숙종(1661~1720)이 59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것을 기념해 경희궁 경현당에서 베푼 연회를 그린 경현당석연도(景賢堂錫宴圖).2020년 국보 제334호로 지정된 기사계첩(耆社契帖) 중 일부다. 기로소는 현대로 따지면 관료 명예의 전당, 계첩이란 행사 참여 자들이 계를 조직해 만든 화첩을 말한다.https://ko.wikipedia.org

1.단군과 기자조선을 이야기 하기 위해 첫 머리를 중국 이야기로 장식한다. 우리를 두고 남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은 '소중화'를 자처했던 조선 양반사회의 일반적 상황이었다.  성리학(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의 준말)의 조선 사회 선비들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첫 문단인 셈이다. 기자 동래, 맹자의 사례, 은유와 상징을 빌어 우리나라(옛 조선)을 이야기 하지만 '봉작',  '교화'를 통해 은연중 중국의 수혜를 받은 것으로 묘사한다. 특히 '기지아동(箕指我東)'처럼 기자 동래설을 이야기하는 것은 중화주의 조선 선비의 명백한 글쓰기 한계라 할 수 있다. 소제목에 나오는 *기지아동(箕指我東)은 기자조선은 우리나라(동국)를 가리킨다는 뜻이다. 기자에서 기(箕)는 땅 이름, 자(子)는 작(爵)을 말한다. 본문에 나오는 *맹자(孟子, BC 372?~BC289?)는 중국 전국시대 추나라사람으로  공자의 사상을 이어 발전시킨 유학자다. *기자(箕子,생몰 미상)는  중국 상나라 문정(文丁)의 아들, 왕족이자 기자조선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 인물 *교격(膠鬲,생몰 미상)은 중국 상나라의 충신으로 재상을 지낸 인물 *미자(微子,생몰 미상)는 중국 상나라의 왕족이자 전국시대 송나라 태조. *미중(微仲,생몰 미상)은 중국 전국시대 송나나 두번째 군주 *왕자 비간(王子比干,생몰 미상)은 상나라 주왕의 숙부이다. * 단군(檀君)은  고조선의 제1대 왕이자 명칭이다. 단군 명칭의 왕들의 재위 기간은 BC 2333~BC1122년이며 단군왕검·단웅천왕이라고도 한다. *은(殷)은 중국의 고대 국가,  상(商)나라다. *주(紂)는 중국 상 왕조의 마지막 왕이다.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 필사본.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2.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1760년경)은 조선 제일의 실학백과사전, 즉 세상만물 관찰기다. 조선 인문학의 진수를 볼수 있는 역작이다. 사농(士農)일치의 삶 속에서 뚜렷한 자아의식, 사회 개혁에 대한 열망이 녹아 있는 학문의 금자탑 같은 저작물이다. 굳이 유럽으로 따지자면 프랑스 작가 몽테뉴(1533~1592)의 ‘수상록’과 견줄만 하는 걸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호(星湖)는 호이고, 사설은 매우 얇은 이야기다. 성호가 쓴 잡다한 이야기라는 뜻이다.집안의 조카들이 성호 말년인 1760년경에 모아서 정리했다. 총 3007편 항목에 30권 30책으로 구성됐다. 현재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성호의 수제자이자 '동사강목'이라는 불후의 역사서를 쓴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1712∼1791)의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 類選)'이다.
조선 시대에는 간행본없이 여러 필사본만 존재했다. 필사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본, 일본 동양문고 재산루(在山樓)소장본, 서울대 규장각본, 일본의 도요문고본.와세다대학소장본 등이 있다. 이중 중앙도서관 소장본을 성호 자필 원고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재산루(在山樓)는 조선 중기 문신 김육(金堉, 1580~1658,대동법 시행)이 살던 남산 아래(현 중구 회현동) 누각 이름인데 일제시대 대마도 출신 한국어 연구가 마에마 교사쿠(前間恭作,1868~1941,외국인 최초 한국학 전문학자)가 일제 점령기 서울 남산 아래 재산루에 살면서 부른 이름이다. 성호사설이 실제 간행본으로 나온 것은 '성호사설 유선'을 모본(母本)으로 일제시대(1915,조선고서간행회) 때이다.1929년에는 문광서림(文光書林)에서 역사학자 정인보(鄭寅普,1893~1950)가 교열해 선장본(線裝本 ,인쇄면의 가운데를 접고 끈으로 묶어 낸 책,5책)과 양장본(상·하 2책)으로 동시에 출판했다. 원본 '성호사설'이 간행된 것은 1967년이다. 경희출판사에서 상하 2책으로 영인,출판했다. 전문 번역은 1977∼1979년 사이에 차례로 간행한 '국역성호사설-11권(민족문화추진회)'이다. 오늘날 '성호사설'이라고 하면 안정복의 '성호사설유선'을 가리킨다.

실학자 순암 안정복(1712~1791)이 엮은 '성호사설유선' 권1. 서울대 규장각 소장.

3.성호사설은 실학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반계수록(磻溪隨錄)'의 저자 반계 유형원(柳馨遠,1622~1673)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
실학자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 1563~1629)의 선구적 저술인 '지봉유설(芝峰類說,1614)'도 글쓰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구성은 천지문(天地門)·만물문(萬物門)·인사문(人事門)·경사문(經史門)·시문문(詩文門)으로 돼 있다. 총 3007편의 항목이다. 1부인 천지문(天地門)은 천문과 지리에 관한 서술, 만물문에는 생활에 직접·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것을 다뤘다.한민족이 어떤 땅에 살며, 내력과 처지를 이야기 한다.
2부인 ‘만물문’은 생생한 조선 후기 풍물판이다.실생활의 거의 모든 것을 망라해 당대 일상을 눈앞으로 가져온 느낌이다. 3부는 인사문이다. 문신 우대의 '문약(文弱)조선'에 일침을 놓으며, 문무 균형을 강조하고 있다. 4부는 ‘경사문(經史門)’으로 국내외 역사서·경서를 이야기하고 자신의 주장을 싣는다. 육경사서(六經四書)와 중국·우리나라의 역사서의 잘못된 해석에 대해 자신의 의견를 넣으 것이다. 
5부 ‘시문문(詩文門)’에서는 중국 시문 등을 평가하고 있다. 한편 시문 평가 들에서는 당대 유학자들이 멀리하던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영남학파의 주요 유학자)과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파을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인조로 옹립) 이후 역적의 대명사로 몰린 정인홍(鄭仁弘, 1536~ 1623,조선 중기 문신)에 대해 후한 평가를 한다.

성호 이익시대 조선 왕 영조(1694~1786) 어진(보물 제932호).1900년 서울 경운궁(慶運宮)의 선원전(璿源殿)이 불타면서 어진이 사라지자 1744년(영조20) 그린 육상궁(毓祥宮,영조 생모 숙빈최씨 사당) 어진을 본떠 그린 것이다. 주관 화사(畵師)는 채용신(蔡龍臣, 1850~1941년)과 조석진(趙錫晉, 1853~1920년)이었다.오른쪽 위 표제는 고종이 썼다.국립고궁박물관 소장.

4. 성호사설은 개혁적인 의론(議論)들이 많다.  신분 타파론, 양반 농사론, 중농주의, 실증주의, 허례허식 비판,탈중화주의 등이다. 특히 탈중화주의는 성리학 지배이론의 조선 사회에서 대단히 위험한 주장이었다. 탈중화, 즉 '조선은 중국의 속국은 아니며 자주적인 학문 연구, 자주적인 세계관을 구축해야한다'가 지론이었다. 우리 역사는 중국의 역사와 다르다(東國自東國)는 점도 명확히 했다. 이는  후계자이자 수제자인 안정복의 '발해는 우리 역사' 인식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개혁적 의론에도 불구, 성리학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유학 중심, 타 종교와 이론 배척  '중농주의' 등이다. 특히 상공업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사치하는 데 돈이 필요하다면 이따위 돈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며 폐전론(廢錢論)을 주장했다.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 사회를 파괴하는 주범으로 상품화폐 경제 발달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익을 창출하는 화폐를 암덩어리로 본 것이다. 이는 100여년 전 반계 유형원이 화폐를 '화천(貨泉, 재화의 샘)'이라 부르며 유통을 적극 주장한 것 매우 대조적이다.

기사환국(1689,숙종 15) 후 영의정 권대운(權大運, 1612~1699,가운데 오른쪽 두번째)의 기로소 입회와 정치적 재기 자축 연회를 1689년 그린 '기로연회도' 중 ’종남사로회(終南四老會)’. 종남4로는 가운데 부분 권대운, 좌의정 목내선(睦來善, 1617~1704,왼쪽 두번째), 예조판서 이관징(李觀徵, 1618~1695,왼쪽 첫번째), 공조판서 오정위(吳挺緯, 1616~1692,오른쪽 첫번째)이다.왼쪽 두명은 이관징 아들 이옥(李沃, 1641~1698), 목내선 아들 목임일(睦林一, 1646~?)이다. 오른쪽은 권대운 아들 권규(權珪, 1648~1722),오정위 아들 오시만(吳始萬, 1647~1700),권대운 손자 권중경(權重經, 1658~1728,오른쪽 끝 빨간 옷)이다.기로소는 현대로 따지면 명예의 전당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https://namu.wiki

5.성호사설은 성리학 체계 아래서 지배층의 부패, 명분 뿐인 도덕론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 때문에 명백한 한계의 글들도 많다. 조선 초 실존 인물로 조선 제10대 국왕 연산군(燕山君,1476~1506) 시기 도적 홍길동(洪吉同), 조선 명종 시절에 활동했던 도적 임꺽정(林巨正,1504?~1562), 숙종(肅宗, 1661~1720조선 제19대 국왕) 때의 도적 장길산 등을 조선의 3대 도적으로 꼽은 것도 이런 맥락이다. 도적이 된 이유 등을 살펴서 백성의 삶의 근간을 마련하는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한편 이익은 고려말 조선 초의 재상으로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鄭道傳,1342~1398, 조선 건국 작업을 이끈 개국공신)을 일컬어 '죽을 만한 일을 한 위인'이라며 평가절하했다.

#.이익(李瀷, 1681~1763)=조선실학의 비조(鼻祖). 조선시대 후기 중농주의 실학자이자 교육자. 호는 성호(星湖)이며, 본관은 여주. 실학자 반계 유형원에게는 외6촌 동생. 조선문화의 절정기인 18세기 실학파의 중심인물.실학을 개척한 ‘재야의 지식인’이다.

1.조선 후기의 남인 계 문신 매산 이하진(李夏鎭,1628 ~ 1682,대사헌 역임)의 유배지인 평안도 운산(雲山)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매산의 둘째부인 안동 권씨, 권대후(權大後)의 딸이다. 아버지는 당시  경신대출척(경신환국,庚申換局,1680)에 연루, 유배중이었다. 경신환국은 영의정 허적(許積,1640~1680)의 유악(油幄, 비가 새지 않도록 기름을 칠한 천막) 사건으로 남인이 대거 실각한 일을 말한다. 
아버지와 선대의 고향은 경기도 안산이다. 증조부는 광해군때 좌찬성을 역임한 이상의(李尙毅,1560~1624), 할아버지 이지안(李志安,1601~1657)은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가문은 서인(西人)이 조선 제15대 국왕 광해군(光海君,1575~1641) 및 대북파을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1595~1649)을 인조로 옹립한 사건인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으로 몰락했다.
생후 한살때 아버지가 향년 55세로 사망한데 이어 이복 형 이해는 성년이 될 때까지 살았으나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고, 둘째 형은 요절했다. 22년 연상으로 어버이 같고 스승같던 셋째 형 이잠(李潛, 1660~1706)은)도 26세 나던 해 장살(杖殺, 매 맞아 죽는 것)당했다.향년 47세였다. 이잠은 1706년(숙종 32) 진사 신분으로 서인(西人) 중신(重臣)의 잘못을 비판하고 희빈 장씨의 복권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역적으로 몰려 곤장을 맞고 죽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1689년 송시열 중심의 서인이 실각한 사건)으로 아버지 이하진의 직책은 되돌려 받았지만 1694년 숙종의 폐비(廢妃) 민씨(閔氏,숙종의 제1계비 인현왕후, 仁顯王后) 복위 운동을 둘러싸고 소론이 남인을 몰락시킨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이 숙청당하면서 다시 추탈됐다.

성호 이익의 스승 송곡 이서우(李瑞雨, 1633 ~1709) 초상(1708년 작). 송곡은 조선 후기의 문신, 정치인, 서예가이며 남인 중진으로 활동했다. https://ko.wikipedia.org

2.셋째 형 이잠(李潛)의 옥사 이후  조선 후기의 문신, 시인, 작가, 서예가인 송곡 이서우(松谷 李瑞雨,1633~1709,예문관 제학 역임)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송곡에게서 5년 동안 수학(修學)했는데 1705년 증광과에 합격했다. 그런데 답안지(科紙)에 적은 이름(錄名,과거에서 응시자의 신원, 예비 시험 통과 여부 등을 확인하고 응시 자격을 부여하는 절차, 인사검증)이 잘못됐다는 이유로 불합격됐다.이후 관직에 뜻을 버리고 고향인 경기 광주부 안산군 첨성리(瞻星里, 현 안산시 일동)에 칩거했다. 영조가 1727년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건축물의 신축, 영선營繕-편의시설 보수 정비, 토목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것,종9품 임시 관직)으로 임명했으나 사양했다. 
안산 거주지 옆에 성호(星湖)라는 저수지가 있어, 자택 이름은 성호장,  호는 성호가 됐다. 한편 이익은 1715년 어머니 권씨마저 병으로 잃었다.

안산시가 만든 '성호 이익'캐릭터. 안산시 제공

3.1710년 경 고령 신씨와 혼인했다. 부인 고령신씨는 정언(正言)을 지낸 신필청(申必淸,1647-1710)의 따님이지만 자식이 없었다. 이에 사천목씨(泗川睦氏) 목천건(睦天健)의 딸을 재취로 맞아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이맹휴(李孟休, 1713~1751)가 있다. 
이익은 성호학파를 형성할 정도로 제자들이 많았다.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1712∼1791), 윤동규((尹東奎, 1695년 ~ 1773), 신후담(愼後聃, 1702~1761), 이중환(李重煥, 1691~1756) 등이다. 안정복은 자신의 저서들을 출간할 때 특별히 스승인 이익에게도 일부 보내 감수, 교정, 교열을 받았다. 학통은 제자들을 통해 정조 시대 대표 정승(좌의정으로 3년간 홀로 정무 처리) 채제공(蔡濟恭, 1720~1799),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이가환(李家煥, 1742년 ∼ 1801, 이익의 종조카), 이현일(李玄逸, 1627-1704, 남인의 이론가이자 영남학파의 거두) 등으로 이어졌다
성호 이익은 뛰어난 제자들을 많이 길러 냈지만 여성 교육에는 매우 부정적이고, 인색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거치면서 여자의 권리 상승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피력했다. 특히 일부 사대부가와 중인층에서 딸에게 글공부를 가르치는 것을 잘못이라 생각했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을 지켜야 한다'는 게 지론이었다.
또 여성 화장도 부정적이었다. '혼례를 올리는 날에 사람들이 모여서 소란 피우는 풍습은 좋지 못하다. 부녀자들은 왜 아름답게 화장하여 남의 눈에 띄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화장한 여자 얼굴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모두 점잖은게 아니다. 평생 남편이나 모시면 될 일이지 대체 무엇 때문에 남들에게 예쁘게 치장한 모습을 보이려 하는가. 이는 엄하게 타일러야된다'고 했다. 이밖에  칠거지악(七去之惡)을 중요시했고, 부인을 집에서 쉽게 쫓아내는 것 역시 지극히 당연하다고 설파했다.
한편 이익은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해 "여자가 담장 위에 얼굴을 내밀 때(墻上), 말을 타고 있을 때(馬上), 누각 위에 있을 때(樓上), 여행 중에 있을 때(旅中), 술에 취했을 때(醉中), 밝은 태양 아래 있을 때(日中), 달빛 아래 있을 때(月下), 촛불 아래 있을 때(燭下), 발 아래 있을 때(簾下) 아름답게 보인다는 옛말이 있다"고 썼다. 

경기 안산이 낳은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 , 1681~1763)선생을 기리는 박물관. 2002년 5월 안산시가 건립한 1종 전문 박물관이다.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5.만년은 가정이 불행했다. 1728년 일어난 이인좌의 난(李麟佐, ?~1728)이 노론에 맞선 소론 세력의 반란 격이 되면서 남인의 문인, 제자들이 대거 화를 당했고, 생활고을 겪기 시작했다. 이는 말년까지 이어졌다. 아들 이맹휴(李孟休)가 과거에 급제, 예조정랑, 만경현감을 지냈으나 이잠의 조카라는 이유로 출사에 불이익을 당했다. 이맹휴는 병치레까지 해 가산도 탕진했고, 이익보다 먼저 사망했다. 
성호 이익은 60대 이후 등과 가슴에 악성 종기가 심해져서 고통받았다. 1751년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에게 이황(李滉,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워진 도산서원(安東 陶山書院,안동시 도산면)을 그리도록 특별히 부탁, '도산서원도(陶山書院圖)'가 애장품이 됐다. 

강세황 필 도산서원도. 1751년(영조 27년) 서화가인 표암 강세황(1713~1791)이 칠순의 이익을 병문안했을 때 도산서원 풍경을 그려달라고 부탁, 표암이 그려 선물했다.이익 문중, 육당 최남선, 경주 최부잣집(12대 종손 최준)을 거쳐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보물로 소장.

6.83세 되던 1763년(영조 39) 조정에서 명예직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조선 시대 중추부 中樞府의 정3품 당상관)에 임명됐다. 그해 11월 병상에 누웠다가 1개월만인 12월 17일에 영면했다. 제자 안정복 등이 임종을 지켰다.향년 83세.  자헌대부 이조판서(資憲大夫 吏曹判書)를 추증됐다.
묘원은 경기 안산군(현 안산시 상록구 일동 555)에 2명의 부인 고령신씨, 사천목씨와 함께 합장됐다. 하지만 이 묘소는 직계 후손이 없어 방치됐다가 1967년 5월 성호이익추모회에 의해 정비됐다.이후 성호이익기념관이 건립됐고, 묘소는 1977년 10월 13일 경기도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됐다. 주요 저서로는 '성호문집(星湖文集)', '이자수어(李子粹語,퇴계의 언행을 간추린 글)', '성호질서(星湖疾書, 이익이 빨리 쓴 글)', '곽우록(藿憂錄, 벼슬을 하지 않는 사람의 기록)' 등이 있다.

경기 안산시에 있는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 , 1681~1763)선생 묘.출처=성호박물관

 6.애제자 안정복(安鼎福)은 이익의 인품에 대해 “강의독실(剛毅篤實), 이것은 선생의 뜻이요, 정대광명(正大光明),이것은 선생의 덕이요,선생의 학은 정심굉박(精深宏博)하고, 기상은 화풍경운(化風景雲)이요,금회(襟懷)는 추월빙호(秋月氷壺)이다.”이라고 말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성호선생께서 집안에 화를 당한 뒤로 이름난 학자가 되셨으니, 권세 있는 부호가의 자제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고 평하기도 한다. 정조 때 학자이자 재상 채제공은 "내가 일찍이 경기 감사로 있으면서 첨성리의 선생 댁을 찾아뵈었는데, 처마가 낮은 왜소한 집에 정좌해 계시는 선생의 모습은 눈빛이 날카로워 사람을 꿰뚫는 것 같았다"며 "경전을 논하는 데에 고금을 두루 통하였고 그 전에는 듣지 못했던 것도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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