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시학(詩學)-인류의 스승이 쓴 예술 이론의 원전은 강의형 설명문으로 시작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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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학(詩學)-인류의 스승이 쓴 예술 이론의 원전은 강의형 설명문으로 시작된다

지성인간 2023. 6. 4.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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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무엇이고, 갈래는 몇 가지이며, 각 갈래에는 어떤 특징과 효과가 있는가? 좋은 시가 되려면 플롯을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가. 시의 구성 요소는 몇 가지이고, 성격은 각각 어떠한가? 여기서는 이런 것을 주로 다루겠지만 그 밖에 이 주제와 관련있는 내용도 언급할 예정이다. 먼저 이 주제와 관련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원리부터 말하는 것이 순서상 자연스러울 것이다. 서사시와 비극, 희극과….”(박문재 역, 현대지성, 2021)
 
1.예술론의 시초로 대단한 앎의 의지와 예지력을  지닌 첫문단이다.  어려운 예술론을 청중 대상으로 강의하는 형식이어서 아주 쉽게 읽힌다. ‘시(희곡 등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를 설명문 형태로 너무나 쉽게 제시한 것이다.
상징이나 은유, 풍자가 없는 강의 맞춤형 도입부로서 흠잡을때 없는 도입부라 하겠다. 기원전 고대 그리스 시대에 이같은 예술 담론을 펼쳤다는 것이 실로 놀라울 뿐이다. 중소규모 학술 모임, 이슈 토론, 불특정 청중 대상 강연 등을 진행할 때 문제 제시형으로 활용할 수 있는 문장 구성이다.

2.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 Poetics)’은 인류 예술 이론의 시작을 알리는 최초의 명저(名著)다. 스승 플라톤의 예술무용론(시인 추방론)을 극복하고, 처음으로 예술 이론을 체계화 한 것이다.
저자 생전 나온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BC340년 전후로 강의한 내용을 묶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영어로 ‘Poetics’로 번역됐지만 훨씬 포괄적 개념이다. 한문 ‘詩學’에서 ‘詩’는 현대적 의미의 ‘운문(詩)’이 아니라 비극과 희극 등을 포함한 예술 전체를 의미한다.
원래 저작물은 비극과 희극을 논하는 2부로 구성됐다고 추정하고 있으나 1부(비극)만 필사본 형태로 전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어 원제는 ‘περί ποιητικής(시 창작 기술에 관하여, 예술창작론)이다.

3.고대 그리스에서 예술(희곡 등)은 사실상 주류 학문에서 비켜나 있었다. 진리를 찾는 학문의 길에서 부가(附加) 요소였기 때문이다. 특히 철학의 아버지 플라톤(BC427~BC347)은 시인(예술인) 추방론까지 내세웠다. 이데아(idea, 시대와 상상을 초월한 진리)와 거리가 멀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시(비극 등 예술)는 ‘미메시스(μίμησις, Mīmēsis, Mimesis)의 미메시스(모방행위의 모방)’여서 진리에 다가갈 수 없다고 못박았다.
하지만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과 견해를 달리했다. 그는 미메시스를 발전시켰으며, 이론과 원리를 정리해 체계화했다.최초의 예술론이 탄생한 것이다.
미메시스는 한국에서 모방(模倣, Imitation), 재현(再現) 정도로 해석한다. 이는 일본식 작명(번역)의 산물인데 일제 치하를 거치며 대부분의 한국 학자도 고민없이 사용해 굳어져버렸다.
중국도 흉내내기, 모사(模寫) 정도의 뜻인 ‘니타이(拟态)’로 해석하고 있다. 미메시스가 동양에 와서 아주 좁은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미메시스는 이미테이션(Imitation), 카피(Copy), 모방, 재현이 아니다. 예술이 지닌 창조적 모방력이 투영된 개념이다.

4.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예술은 자연의 미메시스라 인식했다. 극(劇)을 ‘행위의 미메시스’라고 한 것도 이미 행위가  자연속에 존재했던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최고의 예술이었던 시(예술) 중의 하나인 비극에 대해서도 ‘미메시스화 한 행위’로 봤다.
그래서 고대 서사 작가 호메로스(BC800?~BC750)의 서사시 '일리아스(Iliad)' 등과 고대 그리스에서 대중의 인기를 끈 비극(Tragedy)을 높이 평가했다.

5.아리스토텔레스가 발전시킨 미메시스는 후대에 수많은 해석과 평설(評說)을 낳았다.그중 뛰어난 연구는 독일 학자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1892~1957)와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1903~1969)다.
아우어바흐는 나치독일의 박해를 피해 튀르키예로 건너가 이스탄불에 머물면서(튀르키예 국립대 교수 역임) 미메시스에 천착(穿鑿, 구멍을 파듯이 어떤 것에 집중하는 것)했다.
그는 ‘미메시스-서양문학에 나타난 실재의 표현’에서 미메시스에 대해 현실(모방)이 아닌 진실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한국에서 ‘미메시스(김우창 역, 민음사,2012)’로 발행됐다. 아우어바흐는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가 예일대 교수 등을 지냈다.
아도르노는 예술, 미학을 넘어 역사철학, 인식론까지 미메시스 개념을 확장했다.

6.이탈리아 철학자이자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932~2016, 저서 ‘푸코의 진자’ 등)는 그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소실(전하지 않는)된 ‘시학 2부(희극)’ 를 테마로 사용했다.

2019년 5월 찍은 그리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 아폴로 신전 광장에 사설 연구원 리케이온을 세워 후학을 양성했다. photo by kimgsan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BC322)=고대 그리스 철학자. 서양 철학의 아버지 플라톤(BC428~BC 348, 추정)의 수제자며,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BC 356~BC 323) 대왕의 스승이다. 모든 학문의 기초를 세운 불멸의 학자로 추앙받는다. 고대 그리스어 표기는 아리스토텔레스(Ἀριστοτέλης), 현대 그리스어로는아리스토텔리스(Αριστοτέλης)이다.

1.마케도니아 왕국 스타게이라(현 그리스 중부 마케도니아 주 할디키)에서 어의(御醫, 궁중 의사)였던 아버지 니코마코스와 어머니 파이스티스 사이에서 출생했다.
17세 때 아테네로 유학해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이아(아카데미)’에서 20년간 공부했다.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아카데미의 정신’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보다 진리를 더 중요시했다. ‘플라톤은 소중한 벗이다. 그러나 진리는 더 소중한 벗이다’고 말할 정도였다.
플라톤 사후 아카데미 좌장(원장) 1순위였으나 마케도니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아테녀 출신들의 비판이 커지면서 포기했다.

2.아리스토텔레스는 절친 헤르미아스(Hermias)가 참주로 있는 소아시아(현 튀르키예 남부)의 도시 아소스(Assus)로 가서 머물면서 학당을 세우고 결혼까지 한다.
상대는 헤르미아스의 인척(이복동생 혹은 조카) 퓌티아스였다. 둘 사이에 아들이 있었으나 퓌티아스가 일찍 죽었다.
아소스에서 수년간 머물다가 고향 마케도니아에 돌아와 필리포스(Philippos) 2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개인 교습한다. BC355년 즈음에는 아테네로 돌아와 아폴론 신전 광장옆에 사설 연구원 ‘리케이온(Lyceum)’를 설립, 13년 동안 제자를 양성한다.
리케이온에서 산책을 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친 것이 ‘페리파토스(산책길이라는 뜻) 학파(Peripatetic school, 소요(逍遙)학파)’로 발전했다.

3.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가 정복 활동 중 사망(BC 323)하자 아테네 지식층에 숙적 마케도니아에 대한 지역 감정이 짙어졌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에서 젊은이를 가르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사제들이 고발한다.
이에 어머니 고향인 마케도니아 에보이아(Evvoia) 칼키스(Khalkis, 현 그리스 중부 칼키스)로 이사갔고, 1년 후 위장병 등이 겹쳐 영면한다.
저서로는 ‘논리학’, ‘자연학’, ‘형이상학’, ‘정치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등이 있다.

4.아리스토텔레스는 인류의 스승, 서양 학문의 아버지로 불린다. 물리학, 형이상학, 시학, 생물학, 동물학, 논리학, 수사학, 정치학, 윤리학 등 모든 주제에 대해 통달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물(강의 및 강의 노트, 발언록 등)을 처음 편집해 간행한 이는 리케이온의 수장 안드로니코스라고 한다.
안드로니코스는 BC 60~40년 쯤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을 출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포함한 저작물이 이슬람 학자들에 의해 전승된다.
이슬람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첫 스승(The First Teacher)’으로 불렀다고 한다.
특히 이슬람 철학자 이븐 루시드(1126~1198, 라틴어 이름 아베로에스) 등의 주석(註釋)이 달리고, 이 주석서가 유럽으로 유입돼 서양철학의 근간이 됐다.

5.르네상스 시대 천재 화가 라파엘로 산치오(1483~1520)의 유명한 그림 ‘아테네 학당’에 나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두 철학자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플라톤의 손(손가락)은 천정(하늘)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손은 바닥(땅)을 향하고 있다. 이는 플라톤이 추구한 것은 세상 너머 이상(理想)의 철학, 이데아(Idea)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 그 자체인 에이도스(Eidos)를 추구한 것으로 뜻한다.
두 철학자가 들고 있는 책도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천문학),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다. 손과 책이 두 사람의 학문 지향점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7.로마의 정치가이자 웅변가인 키케로(BC 106~BC43)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저작물)은 황금이 흐르는 강’이라고 했고, 단테(1265~1321,르네상스 시대 대문호)는 ‘지식인들의 마에스트로’라고 불렀다.
2016년은 유네스코(UNESCO)가 지정한 ‘아리스토텔레스 기념의 해’였다.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있는 국립대학인 아리스토텔레스대학교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2400년’이라는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테살로니키(중부마케도니아 주도)에는 ‘아리스토텔레스 광장’이 있고, 동상도 서 있다.(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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