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악의 길-사르데냐의 애틋한 정서를 쓴 노벨상 작가의 첫 문단은 한낮의 불안이 엄습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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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길-사르데냐의 애틋한 정서를 쓴 노벨상 작가의 첫 문단은 한낮의 불안이 엄습한다.

지성인간 2023. 7. 11.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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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로 베누는 로사리오 성당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이제 겨우 1시가 지났는 걸.’ 그가 생각했다. ‘노이나 집에 가는 건 너무 이를지 몰라. 아마 다들 자고 있을 거야. 그 사람들은 부자니까 낮잠을 즐기겠지.’ 잠시 망설이던 그는 누오로시의 끝자락에 있는 동네인 산투술라로 다시 걸어갔다. 9월 초였다. 여전히 뜨거운 햇빛이 아무도 없는 거리에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돌로 지은 집들 앞에는 들쭉날쭉한 그늘이 길게 드리웠고, 굶주린 개 몇 마리만이 그 아래를 어슬렁거렸다.”(이현경 역, 휴머니스트, 2023)

2023년 휴머니스트가 출간한 '악의 길' 표지 부분. 소설속에 나오는 포도를 형상화했다.

1.주변을 살피고 눈치를 보면서 자문자답하는 주인공의 심리가 교묘하게 주변 환경과 어우러진다. 여기에 9월의 뜨거운 햇살과 굶주린 개가 폭발적인 이야기 전개를 상징하고 있다. 한낮의 불안이 엄습한 듯한 느낌이다. 첫 문단에 주인공의 캐릭터를 확고히 한 것은 읽는 이들에 강력한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서술이다. 도입부 배경을 성당 앞으로 설정한 것은 죄와 도덕, 선과 악, 갈림길의 고뇌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작가가 의도한 주제가 은연  중  드러나는 셈이다.

2.그라치아 델레다의 ‘악의 길(La Via Del Male, 1896)’은 이탈리아 서쪽 섬 사르데냐(Sardegna) 출신의 여류 작가가 쓴 역작이다. 이 소설로 이탈리아  문단에서 주목받는 작가로  떠올랐고, 노벨문학상의 토대를 구축했다.
19세기 말 출판했으나 교정과 개작을 무수히 거쳐서 20년이 지난 1916년에 재출판됐다. 물론 실질적인 개작은 1906~1916년에 틈틈이 이뤄졌다.
신분 격차의 주인공들 간의 삼각관계 치정(癡情) 스릴러 소설이지만 뛰어난 리얼리즘과 자연주의를 바탕으로 사르데냐 고유의 풍경과 아름다운 문화를 제대로 녹여낸 작품이다.

10년간에 걸친 개작으로 1916년 밀라노에서 나온 '악의 길' 표지 펼침본.photo by wikipedia

3.소설의 배경은 1800년대 말 이탈리아 서쪽 섬 사르데냐다. 등장인물은 주인공인 피에트로 베누, 주인집 아가씨 마리아 노이나, 마리아의 어머니 루이사, 아버지 니콜라 노이나, 남편 프란치스코 로사나, 마리아의 사촌이자 피에트로를 사랑한 사비나 등이다.
또 피에트로의 숙모인 토니아 베누, 감옥에서 만난 안티네, 선술집 안주인 프란치스카, 목동 안토니오 페라, 늙은 목동 안드리아, 목동 투룰리아, 사비나의 구혼자 안토니아 페라, 그의 동생 주세페 등이다.

5.줄거리는 신분 차이의 남녀가 열정적인 사랑을 위해 죄악을 저지르면서  선과 악 사이에서 고뇌하는 이야기다.삼각관계로 펼쳐지지만 추리와 선택의 문제 등이 겹쳐진다.
가난한 청년 피에트로는 마을의 부잣집 하인으로 들어가고, 주인집 사촌 사비나와 썸을 타다가 어느날 주인집 아가씨 마리아의 관심을 받게 된다. 이후 피에트로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비나를 제치고 마리아를 열정적으로 사랑한다.
마리아도 피에트로에게 끌리지만 신분 차이를 극복 못하고 부자에 시의원인 프란치스코 로사나와 결혼한다. 이에 피에트로는 마을을 떠나 온갖 노력 끝에 부자로 돌아와 마리아의 사랑을 갈구한다. 그런데 어느날 마리아의 남편 프란치스코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목동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는 사이 사비나는 다른 사람과 결혼해 떠난다.
시간이 흐른 후 피에트로와 과부 마리아는 결혼을 하고 잠시의 행복을 누린다. 그러던 어느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비나의 편지가 마리아에게 도착한다.
편지는 프란체스코를 죽인 범인는 피에트로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에 마리아의 고민은 깊어간다. 피에트로가 오로지 자신을 위해 '악의 길'을 갔다고 생각하지만 자신도 갈림길에 서 있음을 깨닫는다. 묵인(악)할것인가? 신고(선)할것인가?

2007년 이탈리아에서 나온 'La Via Del Male' 표지 부분. ILISSO출판사 홈페이지.

6.이 소설은 단순하게 보면 주인공의 한 여인에 대한 집착이 빚은 ‘사랑과 전쟁’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신분 격차와 열정적 사랑, 삼각관계, 불타는 질투, 복수심, 의문의 살인 등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작품이다.
특히 사르데냐 지역의 아름다운 서정성과 농민들의 선함 등이 신실한 리얼리즘 묘사로 전개된다. 학술적으로 ‘베리스모(verismo) 기법이라고 한다.
베리스모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발전한 문학적 사실주의다. 주로 서민들의 삶을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대화 등) 자세하고 명확하게 묘사해 당대 민중의 삶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7.악의 길은 19세기 말에 나왔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대의 로맨스 스릴러 드라마 같은 전개를 보인다. 120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각 등장 인물의 심리 묘사와 구성이 압도적이다.
특히 당대의 많은 작품들이 권선징악적인 마무리를 했지만 이 소설은 선악의 갈림길에서 도덕적 규범과 인간의 현실적 선택을 묻는다. 마무리가 돋보이는 소설이라고 하겠다.

노벨문학상을 받을 무렵인 1926년 무렵의 그라치아 델레다.photo by wikipedia

#.그라치아 델레다(Grazia Deledda,1871~1936)=이탈리아 소설가. 노벨문학상(1926) 수상자. 이탈리아 현대 여류문학의 선구자. 본명은 그라치아 마리아 코시마 다미아나 델레다(Grazia Maria Cosima Damiana Deledda)이다.

1.이탈리아 사르데냐 누오로에서 농부인 아버지 조반니 안토니오 델레다(Giovanni Antonio Deledda)와 어머니 프란체스카 캄보수(Francesca Cambosu) 사이에서 태어났다.
7남매 중 넷째였다. 여자 아이에게 교육을 시키기 어려웠던 시대여서 초등교육을 받은 후 친척인 개인 가정교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글을 쓰는 것은 초등 시절부터 주목을 받아 13살 때 교사의 권유로 쓴 글이 지역 저널에 실리기도 했다. 그 무렵부터 독학으로 문학 공부를 하고, 17살부터 지역 문학동아리 활동을 했다.

2.델레다의 초기 단편 일부는 18살 무렵인 1888~1889년 사이 패션 잡지 L'ultima moda에 게재됐다. 이후 1890년 첫 단편 소설집 ‘넬 아주로(Nell'azzurro, 파랑 속으로)’가 나왔다.
이탈리아 문단에 이름이 알려진 것은 첫 장편소설 ‘피오리 디 사르데냐(Fiori di Sardegna, 사르데냐의 꽃)’가 1892년 출판되면서다.
1896년 ‘악의 길(La Via Del Male, 1896)’이 나오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1903년 ‘엘리아스 포르툴루(Elias Portolu)’를 출판, 작가로서 명성을 확고히 했다.

3.1899년 샤르데냐 최대 도시 칼리아리(Cagliari)에서 장래 남편을 만난다. 재무부 소속 공무원 팔미로 마데사니(Palmiro Madesani, 생몰 미상)였다. 둘은 1900년에 결혼, 아들 사르두스(Sardus, 1901~1938)를 낳은 후 1903년 로마로 이사했다. 로마에서는 둘째 아들 프란체스코(Francesco,1904~1981)를 낳았다.

4.델레다는 1913년 그녀의 명성을 배가 시킨 ‘바람 속의 갈대(Canne al vento, 영역 Reeds in the Wind)을 출판했다. 이후에도 많은 장단편을 발표한다.
1926년에는 작가 생애 최고의 영광인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여성으로서는 노르웨이 작가 셀마 라겔뇌프(Selma Lagerlöf, 1858~1940, 대표작 닐스의 모험) 이후 두 번째 수상이었다.
델레다의 노벨상 소식을 들은 이탈리아 파시스트이자 집권자인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1883~1945)는 델레다에게 ‘깊이 감탄하고 있다’며 자신의 서명이 있는 초상화를 보냈다고 한다.

5.델레다의 마지막 소설은 치명적인 질병을 받아들이는 젊은 여성 이야기인 ‘고독의 교회(라키에사 델라 솔리티딘, Lachiesa della solitudine, 1936, 영어 The Church of Solitude)’였다. 자신의 투병 생활을 소설화 한 반 자서전으로 평가받는다.
1936년 로마에서 유방암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유골은 나중(1959)에 고향인 사르데냐 누오로에 안장됐다.

로마 중심부 북쪽 핀치오 한 공원에 있는 델리다 흉상.아티스트 아멜리아 캄보니(Amelia Camboni)가 1947년 주문받아 제작했다. photo by wikipedia

사르데냐 누오로에 있는 출생지와 어린 시절 집은 박물관이 됐다. 이탈리아 정부가 매입해 개조, 현재 ‘델레디아노 박물관(Museo Deleddiano)’으로 운영하고 있다. 로마 중심부  핀치오의 한 공원에는 기념 흉상이 있다.
주요 작품으로 ‘이혼 후(Dopo il divorzio,1902)’, ‘엘리아스 포르톨루(Elias Portolu,1903)’, ‘체네레(Cenere,1904)’, ‘바람 속의 갈대(Canne al vento, 1913)’, ‘어머니(La madre,1920)’ 등이 있다. 사후에 자서전 격 소설 ‘코시마(Cosima, 1937)’가 출판됐다. 코시마는 델레다의 중간 이름이다.

6.델레다는 일생동안 사르데냐의 정서를 담은 소설을 많이 발표했다. 특히 사르데냐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그린 듯이 묘사했다. 또 그곳에 사는 소박한 농민들이 유혹에 빠져들어서 죄악을 저지르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실감나게 썼다.
델레다는 낭만주의에서 출발, 사실주의, 러시아 자연주의 등을 오고 갔다. 작법적으로는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 1802~2870, 대표작  삼총사)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또 이탈리아 리얼리즘 작가 지오반니 베르가(Giovanni Verga, 1840~1922)와 가브리엘 단눈치오(Gabriele D'Annunzio, 1863~1938)의 퇴폐주의 영향도 나타난다는 게 후대의 평가다. (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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