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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어린왕자-철학적 사유와 통찰력을 담은 잠언 모음 같은 소설의 첫 문단은 동화처럼 서두를 연다 본문
"내 나이 여섯 살적에, 한번은 '체험담'이라고 부르는 원시림에 관한 책에서 멋진 그림 하나를 보았다. 보아뱀 하나가 맹수를 삼키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걸 옮겨 놓은 그림이 위에 있다./ 그책에 이런 말이 있었다. '보아뱀은 먹이를 씹지않고 통째로 삼킨다. 그러고 나면 몸을 움직일수가 없어 먹이가 소화될때까지 여섯달동안 잠을 잔다.'/ 나는 그 그림을 보고나서 밀림의 가지가지 모험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며, 드디어는 나도 색연필을 들고 나의 첫 그림을 용케 그려내었다. 나의 그림 제1호, 그건 다음과 같았다./ 나는 내 걸작을 어른들에게 보여주며 내 그림이 무섭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다./ 어른들은 대답했다. 아니, '모자가 왜 무서워.'/ 내 그림은 모자를 그린 게 아니라 코끼리를 소화시키고 있는 보아뱀을 그린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른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보아뱀의 속을 그렸다. 어른들에겐 항상 설명을 해줘야 한다."(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저, 황현산 역 열린책들 2015)
1.소박하고 간결한 문체가 첫 문단을 흥미로 이끈다. 어린 아이 시선처럼 느껴지는 부드러운 문장 구성과 전개 방식이다.1인칭 시점에서 철학적 사유가 묻어나는 이야기 이지만 어렵지 않게 읽힌다. 문장 하나하나가 마치 통찰력을 담은 듯한 전개를 하고 있다.어린이와 어른의 다른 시각을 도입부에 기술함으로서 에세이같은, 잠언 모음 같은 소설의 전개를 예고 하고 있다. 따뜻한 동화같은 이야기를 전개하는 내레이터는 작가의 성장과정 등 다양한 측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꾸밈없이도 아름다운 저자의 문장력이 빛나는 첫 문단이다. 본문에 나오는 *보아뱀(Boa Constrictor)은 보아과 보아속에 속하는 뱀으로 왕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Le Petit Prince)'는 인류가 가장 사랑한 명작이다. 아름다운 문체와 동화같은 이야기, 판타지 같은 구성으로 모든 연령대 독자를 사로잡은 '걸작'이다. 미국에서 1942년 여름부터 쓰기 시작, 같은 해 10월에 퇴고했다. 책은 1943년 4월 6일 뉴욕 출판사 레이날과 히치콕(Reynal & Hitchcock)에서 영어판과 프랑스어판으로 동시 출간했다.나오자마자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2주 동안 있었다.
그런데 저자의 거의 모든 글에 대한 저작권 계약을 했던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는 파리 출판을 두고 뉴욕 레이널 출판사와 분쟁했다. 그래서 프랑스 비시(Vichy) 정부(19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후, 독일군 비점령 지역인 프랑스 남부 비시에 세운 친독親獨 정권)시기에 해적판이 나오다가 2차세계대전 종전 후에 기존 출판된 원고의 타자 본을 바탕으로 1945년 11월 프랑스에서 정식 출간했다.
세계에서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됐다. 전 세계적으로 약 2억 부가 팔렸으며, 2024년 말 9월 기준 505개의 각국 언어와 소수민족 말, 지역 사투리로 번역됐다. 영어로는 미국 번역가 캐서린 우즈(1886~1968)의 1943년 번역이 최초다. 영어 제목은 'The Little Prince', 일본어는 '어린왕자(若い王子)' 아닌 '별의 왕자님(星の王子さま)'이다.
3.'어린 왕자'가 세상에 나온 계기는 뉴욕 출판업자 유진 레이널( Eugene St. Rose Reynal, 1902~1968)이 저자와 식사 중 크리스마스를 이야기하며, 냅킨에 아이 한명을 그린 것이 시작이었다. 어린이와 꿈 소재에 저자가 1935년 사하라 사막에 부조종사와 함께 불시착해 5일 동안 먹을 물 한 방울 없이 고립됐던 경험이 어우러졌다. 실제 소설 '어린왕자' 내레이터는 조종사로 추락한 항공기 옆 사막에 갇힌 것에 대해 이야기 한다. 책 속의 일러스트는 당초 다른 삽화가들에게 부탁했지만 '모두 별로'라는 인식이어서 저자가 직접 그렸다.
소설 속 주인공인 왕자는 어린 시절 '르 루아 솔레이유(le Roi-Soleil , 태양왕)'로 불린 저자 자신일 수도 있고, 캐나다 철학자 샤를 드 코닝크(Charles De Koninck, 1906~1965)의 아들 토마스(Thomas De Koninck, 1934~현재), 혹은 동료 비행사로 절친했던 찰스 린드버그(Charles Augustus Lindbergh,1902~1974)와 앤 모로우(Anne Spencer Morrow, 1906~2001) 부부 사이의 금발머리 아들 랜드 모로우 린드버그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여우'는 저자의 미국 절친 실비아 해밀턴 라인하르트(Silvia Hamilton Reinhard, 1910~1994, 저널리스트이자 작가, 나중에 감독이자 프로듀서인 고트프리트 라인하르트와 결혼), 친절하지만 성급하고 허영심이 강한 '로즈'는 뮤즈이자 아내 콘수엘로 순신 드 산도발(1901~1979, 엘살바도르계 프랑스 작가이자 예술가)로 추정한다. 또 왕자의 고향 소행성에 있는 세 개의 작은 화산은 아내 콘수엘로의 고향에 있는 활화산 '산타 아나'와'이잘코', 휴화산인 '세로 베르데'이다.
4.등장인물과 사물, 물체는 B-612라는 소행성에서 살고 있던 소년 어린왕자, 사막에 불시착한 조종사, 자존심이 강하지만 본심은 상냥한 꽃 장미꽃, 린 왕자가 지구에서 만난 동물들 중 하나인 여우와 노란색 뱀,어린 왕자가 방문한 첫 번째 별의 주인 늙은 왕(Roi), 2번째 별의 주인 허영심 많은 남자 (Vaniteux), 3번째 별의 주인 술꾼 (Buveur), 4번째 별의 주인 사업가 (Businessman), 5번째 별의 주인 가로등을 켜는 사람(점등인,Allumer de réverbère), 6번째 별의 주인 지리학자 (géographe)가 나온다.
또 지구의 화원에서 만난 장미꽃들, 철도를 관리하는 철도원, 갈증해소 약을 발명한 장사꾼, 소행성 B-612를 발견한 튀르키예 출신의 천문학자 등이 나온다.
6.줄거리는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한 조종사가 자기의 작은 별에서 여러 별들을 거쳐 드디어 지상에 내려온 소년의 이야기를 듣고, 결국 소년이 보아뱀에게 물려 자신의 별로 돌아갈 때까지의 이야기이다. 앙투아네트(별 이름)에서 태어난 어린왕자는 우주를 여행하며 다른 행성을 방문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하지만 그들 모두 현실적으로 성인들로 변해 실망한다.
어느 날 지구에 떨어진 어린왕자는 거친 광야에서 비행기 조종사를 만나 '별에서 내려와서 별의 꽃을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에 어린왕자는 현실의 중요성을 깨닫고 자신이 애착을 가지고 있던 장미꽃을 생각한다. 이후에도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인간의 본질과 삶의 의미를 탐구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장미꽃을 위해 죽음을 선택, 그의 별로 돌아간다. 조종사(나)는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때마다 어린 왕자와 장미꽃, 그가 그려준 양을 생각하며 어린 왕자가 어딘가에 살고 있으리라 희망을 품는다.
7.'어린왕자'는 역대 문학작품 중 가장 많은 찬사를 받은 작품 중 하나다.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주요 저서 '존재와 시간')는 “‘어린왕자’는 어린이를 위한 책이 아니다. 모든 고독을 달래주고,세상의 장엄한 신비를 이해하게끔 인도하는 위대한 시인의 메시지다.”라고 강조했다.
어린이도서 메리 포핀스(Mary Poppins) 시리즈 저자인 호주 출신 영국 작가 P. L. 트래버스(Pamela Lyndon Travers, 1899~1996)는 "어린 왕자는 옆에서 빛나며 아이들에게 빛을 비출 것이다. 그것은 아이들이 이해할 때까지 그들의 마음이 아닌 어딘가를 비추고 그곳에서 빛날 것이다."고 격찬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닐 클라크(Neil Clark,1966~현재)는 2009년 "인간에 대한 조감도를 제공하며 인간 조건에 대한 지금까지 쓰여진 가장 심오한 관찰을 담고 있다"고 논평했다. 그는 "단순히 이기심과 물질주의에 대한 경멸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준다"고 말했다.
8.수많은 에술작품의 모티브가 됐다. 영화는 1966년 리투아니아 출신 소련 영화감독 아루나스 제브리우나스(Vytautas Arūnas Žebriūnas, 1930~2013)가 최초로 '어린왕자'로 내놓았다. 1974년 뮤지컬 영화도 미국에서 처음 나왔다. 감독 스탠리 도넌(Stanley Donen, 1924~2019)이 연출했으며, 동식물 캐릭터들을 모두 의인화했다.
애니메이션은 1979년에는 미국 애니메이션 감독 윌 빈튼(Will Vinton, 1947~2018)이 30분 정도 하는 짧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일본에는 테레비 아사히에서 1978년 '별의 왕자님(星の王子さま, 푸치 프란스,プチ・プランス)'로 39부작(1978년 6월 4일~1979년 3월 27일)으로 만들어 방영했다. 미국에는 '어린왕자의 모험(The Adventures of the Little Prince)'으로 소개됐다.
2002년 프랑스 장-루이 마르티노티(Jean-Louis Martinoty)이 연출한 뮤지컬이 파리 '카지노 드 파리(Casino de Paris)' 에서 2002년 10월 초연됐다. 음악은 리카르도(리차드, 리샤르) 코시안테(Richard Cocciante)가 맡았다. 이 뮤지컬은 2003년 1월까지 공연됐다.
9.한국에서는 1956년 4월 2일부터 5월 17일(총 44회)에 조선일보에 연재됐다. 한국불어불문학회 회장을 역임한 안응렬(1911~2005) 전 한국외대 교수 번역으로 국내 첫 소개됐다. 번역 연재물을 묶어 1960년 ‘어린 왕자’로 처음 출간됐다. 어린왕자 국내 출판본 1000여종 중 600여종을 수집한 이도 있다. 수집가 김규언(1951~현재) 소화병원 원장(전 연세대 의과대학 강남세브란스병원 소아청소년과 과장)이다.
HJ컬쳐에서 2019년 창작 뮤지컬(연출 이대웅)로 제작됐다. 서울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홀에서 초연됐다. 한편 프랑스 파리 프랑스 항공우주박물관은 생텍쥐페리 특별 전시회를 상시 열고 있다.어린 왕자의 다양한 초기판, 실종된 자유 프랑스 공군 P-38 라이트닝의 잔해(2004년 지중해 회수)가, 전시되고 있다. 일본 하코네에는 어린 왕자 박물관이 있었지만 2023년 폐쇄했다.
10.'어린왕자'는 명언 화수분이다. 그중 유명한 것은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사막여우)", "모든 어른들은 한때 어린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어린왕자)", "너는 나에게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거고, 나도 너에게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거야",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야(어린왕자)", "사람들 속에서도 외로운 건 마찬가지야(뱀)", "누군가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은 눈물을 흘릴 일이 생긴다는 것일지도 모른다(사막여우)", "만약 (당신이)오후 4시에 네가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사막여우)" 등이다.
11. 어린왕자에서 영어로 쓰는 'Prince'는 '왕의 아들'이라는 뜻인 왕자라기보다는 '공국의 군주'를 뜻하는 '대공(大公)', 군주(君主)의 뜻을 갖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왕자보다 실제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실권자 군주 또는 제후(諸侯), 족장(부족국가)의 뜻이 더 강하다. 고귀한 혈통의 실권을 가진 권력자의 뜻인 셈이다. 예를들어 모나코의 군주를 'Prince(Prince of Monaco)'라 하는데 '독립적 통치자'의 의미를 갖고 있다. 영국 왕세자의 칭호 '프린스 오브 웨일즈(Prince of Wales)'도 '웨일즈 왕자'가 아닌 '웨일즈 대공(제후)'등으로 해석한다. 중세 르네상스 시대 마키아벨리의 저서 'Il Principe(The Prince)'도 한자로 '군주론'으로 번역하고 있다.
어린왕자의 상표권은 프랑스 생텍쥐페리 유족재단(SOGEX)이 갖고 있으며, 2000년대 들어 저자 사망 50주년이 지나자 프랑스 정부가 30년 연장했다. 소설 '어린 왕자'의 140페이지 분량의 원본 친필 원고는1968년 뉴욕 맨해튼 피어폰트 모건 도서관(현재 모건 도서관 및 박물관 )의 큐레이터 허버트 카훈(Herbert Cahoon, 1918~2000)이 저자의 절친한 친구인 실비아 해밀턴 라인하르트(Silvia Hamilton Reinhard, 1910~1994,미국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에게서 입수했다.
소설 '어린 왕자'를 헌정 받은(서문에 나옴) 레옹 베르트(Léon Werth,1878~1955)는 프랑스 작가이자 미술 평론가로 저자의 절친이다. 한편 2007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제13회 2년차 도서박람회에 출품된 포르투갈어 번역본은 '세계에서 가장 큰 책(높이 2.01m, 너비 3.08m,128페이지)'으로 선정돼 기네스 세계 기록에 올랐다. 2020년부터 6월 29일은 국제 어린 왕자의 날이다. 이날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생일이다. 2012년 4월 프랑스 파리의 한 경매장에서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두 개의 초안 원고 일부 페이지가 나왔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éry, 1900~1944)=프랑스 비행 조종사이자 소설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어린 왕자'의 저자. 본명은 앙투안 마리 장바티스트 로제 드 생텍쥐페리(Antoine Marie Jean-Baptiste Roger de Saint-Exupéry)이다.
1.프랑스 리옹에서 장 드 생텍쥐페리 자작( Jean de Saint-Exupéry, 1863~1904)과 마리 드 퐁스콜롱브(Marie de Fonscolombe,1875~1972) 사이의 다섯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성주(城主)이자 보험사 르솔루이(Le Soleil, The Sun,태양)사의 중개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저자가 4살 때 뇌졸중으로 사망했고, 10대 시절에는 가장 절친한 동생 프랑수아도 잃었다.
생텍쥐페리는 귀족 가문의 성(城)에서 자라면서도 일치감치 연극 대본 등 예술을 가까이했고, 좋아했다. 다만 학교 성적은 좋지 않았다. 1917년에 보쉬에 학교와 생루이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으나 1차(필기)에서 떨어졌다. 이후파 리에 있는 국립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 건축학과에 비학위 과정 청강생으로 들어갔다. 생텍쥐페리는 대학을 적성에 안맞는 학과 청강생으로 간만큼 학업보다는 대학가 카페와 센 강변의 여러 곳을 전전하는 것을 즐겼다. 그러다 1921년 4월 프랑스 육군 이등병으로 육군 제2항공연대 항공정비병으로 입대한다. 직후부터 비행기에 매력을 느껴 그해 6월 자비로 민간항공기 조종훈련을 받고 민간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듬해 육군 상등병 진급과 동시에 군용기 조종 면허장을 취득했다. 이를 발판으로 그해 4월 파리에 있는 육군 사관후보생으로 입교, 예비 소위로 임관했다. 1922년 8월 모로코 카사블랑카 육군 제37항공연대에 이어 10월 프랑스 파리 르 부르제에 있는 육군 제34항공연대에 근무한다.
2.비행 중 항공기 추락 사고로 두개골이 골절된 생텍쥐페리누 1923년 소위로 전역했다. 이후 보알롱 타일제조회사의 제품 검사원, 1924년에는 트럭회사 자동차판매 영업사원으로 이직했다. 그런데 1년 6개월간 1대의 트럭을 판매하고 사직했다.하지만 현업보다 문학에 몰두하면서 회사를 그만두고 산문과 시를 발표한다. 그리고 1926년 첫 저서인 ‘비행사(L'Aviateur)’를 낸다. 같은 해 라테코에르 항공사에 취업, 프랑스령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와 현 세네갈의 다카르간의 정기 항공우편 조종사로 근무했다.
생텍쥐페리는 1927년 야간 항공우편 비행을 시작했고, 불시착 항공기 수리 업무와 조난 비행사 구조 업무도 했다. 그해 ‘남방 우편기(Courrier Sud)’를 발표, 작가로 데뷔했다. 이 저술은 3년 뒤인 1930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나왔다. 출세작 ‘야간 비행(Vol de Nuit)’를 집필한 것은 1930년 6월 무렵이었고, 이듬해 출간했다. 12월에 ‘야간 비행’으로 당대 유명 문학상인 페미나상을 받으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3.생텍쥐페리의 뮤즈는 여러명이었다. 중등학교 시절에 댄스파트너 오데트 드 시네티 (1897~1987)와 만났으나 얼마 못가 헤어졌다. 첫 사랑은 그르네티에 가문의 딸인 루이즈 드 빌모랭(Louise de Vilmorin, 1902~1969, 시인)이었다. 생텍쥐페리는 그녀와 약혼까지 하고 1923년 결혼하려 했으나 양가 집안의 반대로 파혼했다.
결혼은 두 명의 남편과 사별한 부유한 미망인과 했다. 1930년 말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알리앙스 프랑시스(Alliance Française)의 살롱에서 만난 엘살바도르 출신 콩쉬엘로 순신 산도발 세세냐(Consuelo Suncín-Sandoval Zeceña, 1901~1979, 화가이자 조각가)였다. 콩쉬엘로는 당시 아르헨티나 대통령 히폴리토 이리고옌(Hipólito Yrigoyen,1852~1933, 민주적으로 선출된 최초의 대통령)의 초청으로 프랑스 작가 그룹과 함께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방문했는데 그 때 만났다.
둘은 생텍쥐페리 가족의 반대에도 1931년 4월 22일 프랑스 니스 시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남프랑스 지방 귀족 가문의 보수적인 생텍쥐페리 가문은 그녀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았다. 생텍쥐페리 가문은 결혼 이후뿐만 아니라 생텍쥐페리가 죽은 1944년까지도 그녀를 무시했다.
생텍쥐페리는 이밖에도 아름다운 귀족이자 사교계 명사 넬리 드 보게(Nelly de Vogüé, 1908~2003)와 염문을 뿌렸다. 유부남 유부녀의 불같은 사랑이었다. 보게는 나중에 피에르 슈브리에라는 필명으로 콩쉬엘로를 음해하는 책을 쓰기도 했다. 또 러시아 귀족 출신 나탈리 페일리 (Natalie Paley, 1905~1981, 본명 Natalia Pavlovna), 여배우 애너벨라(1907~1996, 본명 수잔 조젯 샤르팡티에,Suzanne Georgette Charpentier), 지휘자이자 교사 나디아 불랑제 (Nadia Boulanger, 1887~ 1979, 파리 음악원 교수), 1942년 초 뉴욕에서 만난 젊은 저널리스트 실비아 해밀턴(Sylvia Hamilton, 나중에 미국 프로듀서 고트프리트 라인하르트, Gottfried Reinhard와 결혼)도 연애 상대였다.
4.생텍쥐페리는 소설 '야간 비행'으로 유명해진 이후에도 위험한 비행을 즐겼다. 특히 1935년에는 코드롱사(Société des avions Caudron)에 의뢰해서 개인 전용기 '코드롱 씨630 시몬(Caudron C.630 Simoun)'를 구매해 탄다. 그런데 그해 11월 파리~사이공 구간의 비행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장거리 비행 연습 도중 기체 결함으로 리비아 사막에 불시착해 실종됐다가 5일 만에 구조된다. 1938년에는 과테말라 상공에서 항공기 엔진 폭발로 불시착, 두개골과 좌측 쇄골이 파열되는 중상을 입는다.
한편 생텍쥐페리의 절친 앙리 기요메(Henri Guillaumet, 1940년 이탈리아군에 격추 사망)도 남미 횡단 비행기를 몰다가 안데스 산맥에 추락했으나 6일만에 살아서 돌아온다. 이 실화는 1995년 장자크 아노(Jean-Jacques Annaud, 1943~현재) 감독의 아이맥스 영화 ‘사랑의 날개(Wings of Courage, 40분, 소니 픽처스)’로도 제작 상영했다.다만 흥행은 실패했다.
5.제2차 세계 대전을 목전에 둔 1939년 2월 소설 ‘인간의 대지(Terre des Hommes)’를 출판, 그 해 권위있는 프랑스 문학 아카데미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émie FranÇaise)’의 소설 대상을 받는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1939년 9월 3일 군에 동원됐고, 민항기 조종 경력을 인정받아 공군 대위로 공군 제33정찰비행대대 2비행대에서 정찰기 조종사로 근무한다. 1940년 5월10일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전쟁이 본격화 하면서 정찰 출격, 독일 전차부대를 발견한 직후 대공화기에 피격됐다. 그럼에도 무사 귀환해 정찰비행 사진을 제공한다. 1940년 6월 2일 훈장을 받았지만 파리가 완전 함락되면서 공군도 와해된다.
그해 ‘성채(Citadelle, 시타델)’ 집필에 들어갔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12월에 미국 망명을 위해 뉴욕으로 떠난다.1941년 1월 뉴욕에 도착해 ‘전시 조종사(Pilote de Guerre)’를 집필한 데 이어 2년 뒤 4월에는 대표작 ‘어린 왕자(1943)’를 출간했다.
6.뉴욕에 있는데 프랑스 친독(親獨) 정권 비시 정부(19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후 비시에 세운 친독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부 요직에 임명한다. 전쟁 발발에도 뉴욕에 있는 생텍쥐페리의 엉거주춤한 상황을 이용한 것이다. 이에 자유 프랑스 정부 샤를 드골(Charles André Joseph Marie de Gaulle,1890~1970, 제18대 대통령,1959~1969) 장군이 생텍쥐페리를 '친독일 인사'라고 비난한다.
오해를 받은 생택쥐페리는 자유 프랑스군에 재입대하기 위해 1943년 5월 4일 프랑스령 알제리로 간다. 43세의 생텍쥐페리는 조종사 연령제한(35세 이하)에도 유명인사인 데다 고위 장교들과 친분으로 예비군 공군 소령 계급을 달고, 조종사로 복무한다. 1943년 7월21일 튀니지 부근의 라 마르사 기지 미 제7군 소속 자유 프랑스 공군 제33정찰비행대대 2비행대였다.
그런데 2번째 출격 후 착륙 과정에서 조종 미숙으로 항공기를 고장내자 비행대장이 지상근무를 명령, 8개월간 하늘을 날지 못한다. 이에 지중해 지역 연합공군사령관 아이라 C. 이커(Ira C. Eaker) 미 육군 중장에게 청탁, 1944년 5월16일 이탈리아 섬 사르데냐(Sardegna) 알게로 기지에서 다시 비행대에 복귀한다. 1944년 6월 29일 출격 순서가 아님에도 사부아(Savoie, 프랑스 남동부 주) 지역 정찰을 이유로 비행하다가 엔진 고장으로 나치독일 점령지인 이탈리아 제노바 상공에 진입, 격추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그런데 사고는 다음 달 났다. 7월17일 코르시카 바스티아(Bastia) 인근 보르고(Borgo)로 기지를 이동, 8월 15일로 예정된 남프랑스 상륙작전(용기병 작전)을 위한 상륙지역 지도 제작용 항공사진 촬영 임무를 수행하면서다. 7월 31일 오전 8시 25분 생텍쥐페리는 일상적인 정찰비행을 위해 비무장으로 6시간 분의 연료를 탑재한 정찰기 ‘ F-5B-1-LO 라이트닝’를 몰고 이륙했다. 하지만 이륙 8시간 30분 뒤 실종 신고됐다. 세계적인 작가 생텍쥐페리의 실종은 세계적인 톱뉴스였으나 전쟁 중이어서 추락 추정 지역 등에 대한 조사나 사고 원인은 이뤄지지 못했다. 공식 실종 사망 처리는 전쟁이 끝나고 한 참 지난 1948년이었다. 프랑스는 ‘전쟁 중 사망’으로 인정했다.
7.실종, 사망 처리됐던 생텍쥐페리는 그로부터 53년이 지난 1998년 4월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 남동쪽 지중해 해저(海底)에서 흔적이 나왔다. 트롤 어선 로리종호의 선장 어부 장 클로드 비앙코가 우연히 그물로 건져 올린 팔찌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직후 마르세유의 전문 잠수부가 수중 탐사 장비로 바다 깊숙히 가라앉은 라이트닝 정찰기를 발견했다. 비행 동체에서는 총탄 자국을 발견하지 못했으나 윤활유 누수 흔적은 찾았다.
그런데 2008년 3월의 나치 독일의 헤르만 괴링(Hermann Wilhelm Göring,1893~1946) 공군 원수에게서 훈장도 받은 독일 조종사 호르스트 리페르트(Horst Rippert. 1922~2013)가 생텍쥐페리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전히 격추설, 자살설이 상존하고 있다. 자살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생택쥐페리의 절친 기요메의 죽음을 이야기한 편지를 제시하고 있다. 편지는 '죽음 속에서, 안데스 산맥을 걸어서 빠져나온 그 친구도 결국 격추당해 죽음을 피할 수 없었네....나도 그럴까?' 라는 글귀가 있다. 주요 작품으로 비행사(L'aviateur,1922), 남방 우편기(Courrier Sud, 1927), 야간비행(Vol de Nuit, 1931), 인간의 대지(Terre des Hommes, 1939), 전시 조종사(Pilote de Guerre, 1941), 어린 왕자(Le Petit Prince,1943) 등이 있다. 미완성 유고인 ‘성채(Citadelle)’가 있다.
8.생텍쥐페리는 1931년 프랑스의 권위있는 문학상 페미나 상을 받은데 이어 레지옹 도뇌르 훈장(1930, 1939)을 두차례나 받았다. 1939년에는 프랑스 아카데미 프랑세즈 문학상, 이듬해에는 내셔널 북 어워드를 수상했다. 한편 생텍쥐페리 소설 가장 잘 알려진 ‘어린 왕자(Le Petit Prince)’는 전세계에서 2억 부가 팔렸다.
생텍쥐페리 고향 리옹은 위대한 작가는 물론 항공 우편의 선구자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사톨라스 공항을 리옹 생텍쥐페리 국제공항으로 명명했다. 아르헨티나에서도 산 안토니오 오에스테의 공항을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공항으로 이른 붙였다. 앙트완 드 생텍쥐페리 이름을 딴 교육기관(2015년 조사 기준)은 418개(초중고, 대학 등)나 된다. 이는 빅토르 위고 (365), 루이 파스퇴르 (361), 마리 퀴리 (360)보다 많으며, 전체 중 8위에 해당한다. 1위는 성요셉(880개)이다.
1975년 11월 2일 러시아 천문학자 타마라 M. 스미르노바(Тамара Михайловна Смирнова,1935~2001)가 발견한 작은 소행성은 ‘2578 생텍쥐페리(2578 Saint-Exupéry)’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994년 로버트 엔리코(Robert Enrico)가 TV 영화 ‘생텍쥐페리-마지막 임무(Saint-Exupéry: The Last Mission, 프랑스 3(France 3)TV 방영)’를 제작했다.
9.생텍쥐페리 학회와 재단 등도 여러나라에서 운영되거나 활동하고 있다. 앙트완 드 생텍쥐페리 청소년 재단은 2009년 앙트완 드 생텍쥐페리의 후원자들이 프랑스 재단의 후원 아래 설립했다. 프랑스와 전 세계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젝트를 지원한다. 앙트완 드 생텍쥐페리 컬렉션(참조 번호 153AP)은 프랑스 국립 기록 보관소에 있다. 2009년부터 생텍쥐페리 가문의 역사적인 유산인 생 모리스 드 레망 성(Château de Saint-Maurice-de-Rémens, Ain)은 작가와 어린 왕자를 둘러싼 기념하는 박물관 개관을 준비(2020년 기준) 중이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