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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에밀-루소의 통찰력이 돋보인 전인교육의 원전은 깔끔한 탁견을 첫 문단에 제시한다. 본문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모든 것은 조물주에 의해 선하게 창조됐음에도 인간의 손길만 닿으면 타락하게 된다. 식물이나 동물은 물론 기후마저도 뒤흔들어놓아 모든 것이 변형되고 뒤죽박죽으로 바뀐다. 이러한 경향은 같은 인간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인간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 같은 인간을, 마치 가축이나 정원의 나무처럼 왜곡하고 변형한다. 이로 인해 인간의 본성은 질식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교육은 어려서부터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영혼이 세상의 편견에 물들어 뒤틀리기 전에 울타리를 치고 보호해줘야 한다. 식물이 재배를 통해 성장하듯 인간은 교육을 통해 성장한다. 교육은 세 가지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자연 인간 사물이 그것이다.”(장 자크 루소 저, 이환 편역, 돋을새김, 2015)
1.첫 문단부터 뛰어난 통찰력으로 탁견(卓見)을 제시하고 있다. 핵심을 앞세운흠잡을 데 없는 역피라미드 서술 구조를 취하고 있다. 교육 이론서이지만 에세이처럼 써서 누구나 읽기 쉽게 쓴 것이 돋보인다. 방대한 분량의 책의 도입부로서는 제격인 셈이다. 둘째 문장 ‘조물주는 선하게 창조했으나 인간의 손길이 닿아 타락한다’는 너무 유명한 구절로 많은 이들이 글쓰기에도 활용했다. 상징이나 은유없이 단문체의 문장 구사력과 깔끔한 문체가 압권으로 다가온다. 다양한 글쓰기에 활용할만한 첫 문단이다.
2.루소의 '에밀-교육론(Émile, ou de l'éducation, 1762)'은 인간 혁명 교육서의 시작으로 평가받는 기념비적 작품이다. 제목 에밀은 가상의 소년 이름이다.
교육론(De l’éducation)이라는 부제 그대로 어린이 교육에 대해 쓴 역작(力作)이다. 유럽 교육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어린이 교육론의 고전으로 꼽힌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성선설(인간은 본원적으로 착하다는 학설)과 기존 제도,기득권 타파를 주장, 종교계의 견제를 받았다. 인간 원죄론을 주장한 가톨릭(개신교 포함)의 교리를 정면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예수회 등 가톨릭의 출판 방해 공작으로 초판은 네덜란드에서 나왔고, 판매금지 당했다.
책인 나온 지 몇 달만인 1762년 8월 파리 대주교 크리스토프 드 보몽(Christophe de Beaumont, 1703~1781)이 “에밀의 교육 원칙이 유해하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소르본대학 신학부도 ‘신앙과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불태울 것을 건의했다.
결국 에밀은 프랑스에서 판매금지 됐고, 루소에게도 체포영장이 발부됐다. 루소는 스위스로 피신했다가 프로이센(현 독일)으로 간 데 이어 결국 1766년 1월 영국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책은 ‘판금’에도 불구 베스트셀러가 됐다. 1800년 초 비공식 집계(J.A. McEachern)에 따르면 1762년에서 1800년까지 해적판과 번역본을 포함, 약 60여 판이 출판됐다. 영어로는 ‘Emile, or On Education’으로 번역된다.
3.에밀이라는 고아를 통해 자연의 흐름에 따른다는 교육의 이상론을 추구한 책이다. 루소는 자신의 수많은 저서 중 ‘에밀’을 제일로 꼽았다. 20년의 성찰과 3년의 작업을 거친 혼을 담은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에밀은 탁월한 통찰력으로 자연주의 교육이라는 교육 패러다임을 확실하게 제시한 걸작(傑作)이다. 수백년을 이어져 온 교사 중심 교육에서 어린이의 흥미와 개성, 경험 중심, 자연주의 교육사상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1~5부로 구성됐으며, 유아기, 아동기, 소년기, 청년기, 결혼을 다루고 있다. 1부는 한 아이(유아)를 육체적, 정서적으로 발전해 사회에 적응해 나가도록 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2부는 아이와 세상과의 초기 상호 작용, 3부는 아이가 성별과 나이, 취향에 적합하도록 적절한 롤 모델에 의한 교육을, 4부는 강한 육체, 세상 관찰, 감정(사춘기)의 활용을 담았다.
5부는 에밀의 아내가 될 소피의 교육에 대한 것이다. 소피가 이상적인 여인이며,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 대하여 설명한다. 5부는 루소 사후 출간된 미완성작 ‘에밀과 소피(Émile et Sophie)’에서 소피에게 에밀을 장가보내는 것과 연결된다.
4.루소는 에밀에서 여성 교육에 대해 짧게 언급하고 있다. 제5부에서 에밀의 배필이 되는 가상의 소녀 소피를 통해서다. 이 때문에 여성 교육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당대에는 볼테르나 디드로 등의 공격을 피하기 어려웠고, 최초의 페미니스트로 꼽히는 영국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Wollstonecraft, 1759~1797)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메리는 자신의 저서 ‘여성의 권리 옹호(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에서 루소를 강하게 비판했다. 메리는 유명한 고딕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셸리(Mary Wollstonecraft Shelley, 1797~1851)의 어머니다.
하지만 후대에 와서 루소의 여자 어린이 교육론은 차별이 아니라 남녀의 차이를 고려한 교육이라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이 나왔다. 남녀 성적(性的) 특성을 고려해 남아(男兒)와 여아(女兒)의 교육을 나눠 다뤘다는 것이다.
5.에밀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후 유럽 각국의 어린이 교육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많은 지식인들이 ‘에밀’에 나온 방법대로 자녀 교육에 나섰다.
대표적인 이가 전류와 자기장의 관계를 나타내는 '앙페르의 법칙'을 발견한 프랑스 물리학자 앙드레 마리 앙페르(Andre Marie Ampere,1775~1836)다.
또 베네수엘라의 독립 혁명 지도자 볼리바르(Simón Bolívar,1783~1830, 베네수엘라의 국부)도 에밀에 나오는 대로 교육을 받으며 훌륭하게 성장했다.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 16세도 어렸을 때 열쇠공 교육을 받았다. 혁명의 기운이 감도는 불온한 시대여서 언제 왕에서 추락할지 몰라서 루소의 조언대로 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6.에밀은 교육 이론서이지만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루소의 내면 사유의 영향으로 문학성도 뛰어나다는 평가다.그래서 당대 유럽 철학과 문학 등 학계와 예술계에 큰 영향을 줬다. 이는 저명인사들의 다양한 에피소드에서 ‘에밀’의 유명세를 쉽게 찾아볼 수 있기도 하다.
독일(당시 프로이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1724~1804)는 정확한 시간 지키기로 유명했다. 칸트의 산책 시간을 보고 이웃 사람들이 몇 시인지 알 정도였다.
그런 칸트가 산책 시간을 생애에 두 번 어겼는데, 첫 번째가 ‘에밀’을 읽었을 때라고 한다. 루소의 글이 워낙 뛰어나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는 것이다. 나머지 한번은 1794년 일어난 프랑스 혁명을 신문으로 접했을 때 ‘충격’을 받고, 산책 시간을 어겼다고 한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는 “호주머니에는 언제나 호메로스(BC800년 전후 고대 그리스 서사시 ‘일리아스’의 저자)를, 머리에는 언제나 에밀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었다”고 말했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Napoléon I, 1769~1821)은 진중(陣中)문고에 ‘에밀’을 꼭 챙겼다고 한다.
6.에밀은 출판과 함께 교육계에도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스위스의 교육자 페스탈로치(Johann Heinrich Pestalozzi,1746~1827)는 루소의 ‘에밀’을 읽고 감동해 어린이 교육에 일생을 바쳤다
19세기 신인문주의 교육자 가운데 한 사람인 프리드리히 프뢰벨(Friedrich Fröbel, 1782~ 1852, 독일 교육학자)은 페스탈로치와 만남을 통해 루소의 교육철학에 공감, 교육 운동을 전개했다.
프뢰벨은 초등학교에 취학 전 아이 교육에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그가 만든 3세에서 6세 이전 취학 전 교육 기관 ‘킨더가르텐 (Kindergarten)’은 오늘날 '유치원'의 실천적 골격을 제공했다.
미국 진보 교육 운동 대표자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 전 시카고 대학 교수)도 루소의 교육 철학에 영향을 받아 전통적 지식관이나 학교관을 비판하면서 다양한 실험학교를 설립했다.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18세기 대표적인 계몽주의 철학자. 다양한 장르의 통찰력 있는 저서들로 인해 ‘신과 같은 루소(divine Rousseau)’, ‘움직이는 타깃(moving target)’으로 불린다.
당대의 고명한 철학자 볼테르(Voltaire, 본명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François-Marie Arouet,1694~1778),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3)와 불화(不和)로도 유명하다.
1.스위스 제네바(당시 제네바 공국)의 그랑 뤼 40번지(Grand'rue 40)에서 시계공인 아버지 아이작 루소(Issac Rousseau)와 시계 제조업자의 딸인 어머니 수잔 버나드(Suzanne Bernard) 사이에서 태어났다. 불행하게도 어머니는 출산 후유증으로 9일만에 사망했다. 아버지가 제네바를 방문중인 영국 군인과의 다툼에서 시 당국이 군인 편을 들자 1722년 니옹(Nyon)으로 이사했다.
인근 기숙학교에서 공부했으나 10세 때 아버지가 루소를 외삼촌에게 맡기고 떠나버렸다. 열두살 때인 1724년부터 동판 조각가에게 맡겨져 도제(직업 교육)가 됐다. 하지만 곧 그만뒀다.아버지는 1726년 재혼했고,아들과 인연도 끊었다.
2.15살에 가출해 사보이 지역으로 가서 가톨릭교회에 피난처를 찾았다. 이듬해 루소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가톨릭 세례(세례명 장 조세프)를 받아 개종했다.
이후 세례 신부의 소개로 샹베리(Chambéry, 프랑스 오베르뉴론알프 사부아 데파르트망의 주도)로 가서 프랑수아즈-루이즈 드 바랑(Françoise-Louise de Warens,1699~1762) 남작 부인을 소개받았다.
바랑 부인은 29세의 유부녀 였지만 남편과 별거 중이었다. 그런데 16세의 루소가 바랑 부인을 '엄마'로 생각한 것과 달리 그녀는 루소를 남자 집사이자 '애인'으로 삼았다.
바랑 부인의 후원으로 신학교에 들어갔다가 사제가 되기 싫어 신학 공부를 포기했다. 대신 음악 공부에 심취했고, 스무살 무렵 스위스 로잔과 리옹 등에서 음악 교사를 하기도 했다.
루소가 파리로 떠난 것은 바랑부인이 다른 남자 집사를 구해 애인으로 삼으면서다. 루소는 바랑 부인을 사랑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3.파리로 간 루소가 계몽주의에 본격 몰입한 것은 서른 살 무렵인 1741년 계몽주의자인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 1717~1783, 수학자이자 철학자), 드니 디드로와 만난 것이 계기였다.
이후 루소는 파리에서 1742년 새로운 악보 표기법을 정리해 발표하지만 큰 호응을 얻지 못했고, 1743년 '현대 음악 연구(Dissertation sur la musique moderne)'를 출판한 후 베네치아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대사인 몽테귀 백작(Comte de Montaigu)의 서기를 맡았지만 1년도 안돼 사퇴하고 파리로 갔다.
4.루소는 바랑 부인과 헤어진 후 여러 귀족 부인과 바람을 피웠다. 하지만 결혼은 10살 연하의 호텔 세탁부였던 23살의 마리 테레즈 르바쉬에르(Marie-Thérèse Levasseur,1721~1801)와 했다. 다만 공식 결혼은 오랜 동거 끝에 1768년(56세)에야 했다.
특이하게도 루소는 5명의 자녀 모두를 고아원에 보내는 냉혈한 면모를 보였다.물론 여러 해가 지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을 때 아이들을 찾았지만 기록이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다만 루소를 비난할 것이 못되는 것은 당대는 그런 일이 흔했다고 한다. 프랑스 동남부 데파르트망의 주도 샹베리( Chambéry)의 경우 신생아의 사분의 일이, 파리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신생아가 고아원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루소는 바쉬에르와 생애를 함께 했지만 다른 귀부인들과 끊임없이 관계를 했고, 부인 르바쉬에르 역시 제임스 보스웰(James Boswe) 등과 연애했다.
루소는 또 1755년 20년 연하인 25세의 소피 디 후데토(Sophie d' Houdetot)과 연인 관계로 지내기도 했다. 소피는 루소의 후원자이자 집주인인 디피네(d'Épinay) 부인의 사촌이자 손님이었다.
한편 루소 부인 르바쉬에르는 유일한 상속자였지만 1년 후 재혼했다. 상대는 루소의 제자인 르네 드 지라르댕 (René de Girardin,1735~1777)의 대리인 장 앙리 발리(Jean-Henri Bally)였다.
5.1749년부터 본격적으로 드니 디드로와 친교를 맺은 데 이어 그의 도움으로 프랑스 아카데미 학술 공모전에 '학문 및 예술론'을 응모해 1등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이때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백과전서’ 편찬에 참여해서 음악과 정치경제 항목을 집필했다. 1750년 무렵에는 '학문예술론'을 출판, 호평을 받는다.
1752년에는 작사·작곡한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를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1757년 디드로와 연극의 사회적 기능을 두고 논란을 벌이다가 다음해 절교까지 갔다. 이즈음 볼테르와도 불화를 겪었고, 둘과는 죽을때까지 화해하지 못했다. 서민 지성 루소와 귀족 지성 볼테르,드니로의 간극이었다.
6.루소는 1554년 제네바로 돌아와 개신교로 개종했고, 시민권을 회복했다. 그리고 이듬해 ‘인간 불평등의 기원과 기초에 관한 담론(불평등에 관한 담론, the Discourse on the Origin and Basis of Inequality Among Men, the Discourse on Inequality)’을 완성했다.
1961년 편지 형식의 연애 소설 '신 엘로이즈(La Nouvelle Héloïse)' 가 초유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나중에 집계한 바에 따르면 18세기 유럽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로 등극했다.
루소는 유럽의 '셀럽 중의 으뜸 스타'로 올라섰고, 문예사조까지 바꿨다.당시까지 고전주의 소설이 대세였으나 '신 엘로이즈' 발표이후 낭만주의 사조로 급변한 것이다.
참고로 '신 엘로이즈'는 중세(12세기) 성직자 아벨라르(39세 철학자, Pierre Abélard,1079~1142)와 엘로이즈(17세 소녀, Heloise, 1098~1164)의 파멸의 사랑을 담은 서간집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에 따왔다.
5.유명한 저서 '사회 계약론'은 1754년 디종의 학술원 공모전에 제출한 '무엇이 인간 불평등의 근원인가?'라는 주제 논문이 바탕이 됐다. 이 논문 에세이가 1762년 '사회 계약론'으로 나온 것이다.
1762년 저서 '에밀'을 통해 자연 종교의 이론(종교 전통과 기득권 부정하고 현 제도 타파)을 설파했다. 이에 로마 가톨릭은 루소의 저서 ‘사회 계약론’과 ‘에밀’에 대해 금서로 지정했고, 프랑스에 이어 스위스도 판매금지와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루소는 급히 프로이센으로 피신,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II. 1712~1786, 프로이센 3대 국왕)의 보호로 뇌샤텔(Neuchâtel, 독일어 노이엔부르크,Neuenburg)의 모티에 마을에서 생활했다.
그런데 현지 목사가 주민들을 선동, 루소를 몰아낼 계획을 세우자 결국 기존에 알고 지내던 철학자이자 외교관인 데이비드 흄(David Hume,1711~1776,영국 외무장관 역임)이 있는 영국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흄도 루소의 유명세를 이용했다. 루소의 편지를 검열하고 가로채기도 했다.이에 루소는 1767년 프랑스로 돌아왔다. 다음해 장기 동거 중이던 르바쉬에르와 공식 결혼했다.
7.1769년 1월 부인과 함께 프랑스 남동부 이제르 주 그르노블(Grenoble)로 이사갔다. 하지만 불과 2~3년만에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루소가 죽음의 위기로 간 것은 1776년 10월 24일 일어난 사고였다. 파리의 좁은 거리를 걷고 있을 때 귀족의 마차가 반대 방향에서 돌진해 부딪친 것이다. 뇌진탕을 일으켰고, 나중에 사고 후 간질 발작으로 고통 받기 시작했다
1778년 지라르댕 후작(Marquis Girardi)은 루소에게 프랑스 북부 오아즈 주에 있는 그의 성 에르메농빌(Ermenonville)에 거주할 것을 제안했고, 루소와 테레즈는 5월20일 그곳으로 갔다.
그런데 두달도 안된 7월2일 뇌출혈로 쓰러진 뒤 점심 무렵 숨을 거뒀다. 이때 그의 나이 66세였다. 이틀 후인 7월4일 에르메농빌의 호수에 있는 작은 숲이 우거진 섬에 묻혔다. 루소의 무덤은 화가 휴버트 로버트 (Hubert Robert,1733~1808)가 설계했다.
하지만 루소 유해는 프랑스 혁명 후인 1794년 국가 영웅들의 묘인 팡테옹으로 이장됐다. 그런데 팡테옹의 옆 묘는 볼테르였다. 두 사람은 결국 죽어서 나란히 묻혔다.
8.루소는 귀족 외 급진과 보수주의자 모두 좋아했다. 저서 대부분이 기득권 타파로 귀결됐기때문이다. 사망 11년 뒤인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이때 혁명에 참가한 모든 사람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았다.
주요 작품으로는 근대음악론(Dissertation sur la musique moderne, 1736), 학문예술론(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 1750), 희극 나르시스(Narcisse ou l’Amant de lui-même, 1752), 마을의 점쟁이(Le Devin du Village: an opera, 1752), 인간 불평등 기원론(Discours sur l'origine et les fondements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 1754), 정치경제론(Économie politique, 1755),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연극에 관한 편지(Lettre à d'Alembert sur les spectacles, 1758), 신 엘로이즈(Julie, ou la nouvelle Héloïse, 1761), 에밀(Émile ou de l'éducation, 1762),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 ou Principes du droit politique, 1762), 말제르브에게 보내는 편지 (Four Letters to M. de Malesherbes, 1762), 피그말리온(Pygmalion-a Lyric Scene, 1762), 산에서 쓴 편지(Lettres de la montagne, 1764), 고백록(Les Confessions, 1770, 출판은 1782), 코르시카 헌법 초안(Lettres sur la législation de la Corse, 1772), 폴란드 정부론(Considerations on the Government of Poland, 1772) 등이 있다.
사후에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Essai sur l'origine des langues, published 1781),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Rêveries du promeneur solitaire, incomplete, published 1782),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대화(Dialogues: Rousseau Judge of Jean-Jacques, published 1782) 등이 출판됐다.
8.루소는 유럽의 철학·정치·교육·문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후대 철학자 중에서는 독일(당시 프로이센)의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큰 영향을 받았다. 루소의 초상화를 서재에 걸어놓을 정도로 흠모했다고 한다.
칸트는 "나는 인식에 대한 무한한 갈증을 느낀다. 그것만이 인류에게 명예를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나를 루소가 옳은 길로 인도했다"고 말했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와 타임이 뽑은 ‘지난 1000년 동안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의 한명으로 루소를 꼽았다. 1위는 징기즈칸이었다. 루마니아에서는 1962년 루소를 기리는 우표가 나왔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