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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열하일기-중화주의에 빠진 조선 선비의 비애를 녹여 낸 첫 장은 우울했다 본문
“오후에 압록강을 건넜다. 30리를 가서 구련성(九連城)에서 노숙했다. 밤에 큰 비가 내리더니 곧 그쳤다. 앞서 용만(龍彎) 의주관에서 묵었다. 방물(方物, 중국에 바칠 우리나라 특산물)이 다 들어오는데 무려 열흘이나 걸리는 바람에 일정이 몹시 촉박해졌다. 한바탕 장마로 두 강물이 온통 불어났다. 나흘 전부터 쾌청했는데도 물살은 여전히 거세다.”(김풍기·길진숙·고미숙 공역, 북드라망, 2013)
1.전형적인 여행 일기 형식으로 쓰여졌다. 읽는 이들이 시제와 날씨, 무슨 목적으로 가는지를 알 수 있도록 있는 그대로를 묘사했다. 노숙과 큰 비, 방물, 강의 물살 등은 앞으로 여정이 험난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한문 일기를 번역했지만 문체가 깔끔하다.
첫 문단에 나오는 구련성(九連城)은 변경의 문이라는 뜻의 변문(邊門)으로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넌 사신이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현 단둥(丹東) 변두리)이다. 용만은 의주.
2.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1780)’는 청(淸)나라 황제 피서지인 러허강(熱河,열하)과 청 수도인 연경(燕京, 현 베이징)을 다녀온 여행 일기다.
열하는 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 북부 청더(承德)에 있다. 주변 온천에서 흘러드는 뜨거운 물 때문에 熱河라는 지명이 붙었다. 열하일기는 26권 10책으로 행계잡록(杏溪雜錄, 단국대 소장) 등에 수록돼 있다. 다만 실학파의 거두 연암이 언문(한글)으로 썼다면 최고의 수필 문학이 됐을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3.연암은 청 6대 황제 건륭제(乾隆帝) 70살 축하 사절인 진하사(進賀使)로 열하와 연경을 가게됐다.
연암과 8촌 사이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 1725~1790)의 자제 군관(개인 수행원) 자격이었다.
박명원은 당대의 최고 실세 중 한명이었다.조선 제 21대왕 영조(英祖,1694~1776)의 부마(駙馬, 사위)로 왕의 신임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영조의 후궁 영빈이씨의 딸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1735~1762) 누나인 화평옹주(1727~1748)의 남편이다.
4.열하일기에는 곳곳에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실 바탕 진리 추구) 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또 처음 가본 대국(?) 여행기답게 문화충격(컬쳐 쇼크) 내용이 많다.
이국(異國)의 문물을 접한 소감과 다양한 해프닝 등이 해학적으로 쓰여져 있다. 이국에서 밤에 몰래 출타한 일, 도박판 이야기, 청 문인들과 교류 등이다.
당대의 유명한 번화가인 유리창(琉璃廠, 현 베이징 화평문 바깥 골돗품 거리 이름) 관련 내용도 있다. 청 제국 시대 중화주의(中華主義,중국 우월주의)의 허상도 거침없이 비판했다.
5.연암은 열하일기 등 다양한 작품을 구어체(口語體) 한문으로 썼다. 특히 평민과 시중에서 사용하는 말을 다채롭고, 거침없이 표현했다.
열하일기는 나올 때마다 서로 구해보려고 하는 등 인기를 끌었다. 앞다퉈 베끼느라고 종이값이 올랐다는 설도 있다. 이런 이유로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正祖,1752~1800)의 문체반정(文體反正)을 가져온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문 표기였지만 구어체 패관(稗官, 민간의 풍습,소문) 문체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정조는 정통유학자 등과 합세, 옛글(古文,고문, 사마천의 사기 등 중국의 여러 책)로 돌아가자는 문체반정을 단행했다. 정조는 1791년 명·청 패관소설 수입금지령을 내리고, 연암에게 반성의 의미로 고문을 써서 올리도록 했다. 검열의 희생양으로 필화(筆禍,글을 써서 입는 불행한 일)를 겪을 뻔한 것이다.
6.필화의 위기를 겪자 손자뻘 되는 일가인 박남수(박지원은 할아버지 육촌형제)가 가문의 화근이 될 것을 우려해 연암의 저작들을 불태우려다가 다른 식구들 반대로 남았다고 한다.
#.박지원(朴趾源,1737~1805)=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자이자 문장가다. 반남(潘南, 현 전남 나주시 반남면) 박씨로 호는 연암(燕巖). 황해도 금천 첩첩산골에 있는 연암협(燕巖峽, 제비바위 골짜기)에서 따왔다.
1.정통 노론 가문의 양반계급 출신이지만 어릴 적 부모를 잃고 형수의 손에서 자랐다. 16살(1752)에 처사 이보천(李輔天)의 딸 전주이씨((1737~1787)와 결혼했다. 벼슬(양양 부사)도 높지 않았고, 말년에는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다. 청년기와 장년기에 양반전(兩班傳), 허생전(許生傳) 등의 11편의 풍자 소설을 썼다.
2.부인과는 사별했는데 재혼도 안 하고 첩도 안 들이고 살았다. 깨끗하게 목욕시켜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한성부 가회방(嘉會坊)의 재동(齋洞)에서 영면했다. 당시 경기도 장단군 송서면(松西面) 대세현(大世峴)에 안장됐으나 현재는 북한 개성시 판문구역 은덕동에 있다고 한다.
3.연암집은 1901년 구한말 천재 중의 한명인 김택영(1850~1927,독립유공자)에 의해 처음 간행됐다.
최초의 번역은 역사학자 김성칠(1913~1951, 전 서울대 사학과 교수, 6.25전쟁 중 피살)이 1948~1950년 내놓았으나 미완성(사망하면서 중단)이었다.
북한에서 한문학자 리상호가 첫 완역(1955~1957)해 발간했다. 주요 역본으로 이가원(1917~2000,전 단국대 중문과 교수)이 번역한 ‘국역 열하일기(1966~1973)’ 등이 있다.
기존 번역의 문제점을 지적한 김혈조(1954~현재, 전 영남대 한문교육학과 교수)의 완역본(2009)도 나왔다.
4.조선 최고의 문장가 중 한 사람인 연암은 언문(諺文,속된말, 한글)을 아예 쓰지 않았다. 실사구시를 지향한 대 문장가 연암의 ‘한글 문맹’은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라고 할 수있다.
연암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실학파(다만 홍대용(1731~1738)은 한글 편지가 남아 있음)도 언문 서책이나 편지를 남기지 않았다. 이는 실학파보다 100년이나 앞서 살았던 서포(西浦) 김만중 (金萬重. 1637~1692, 숙종시대)이 한글로 많은 글을 남겼다는 점에서 비교된다.
5.아들 박종채(1780~1830)가 ‘과정록(過庭錄,1826)’을 써 아버지를 기록했다. 이 책은 현대와 와서 후손들이 ‘나의 아버지 박지원(박희병 옮김,1998,돌베개)’으로 출판했다.
박종채는 구한말 개화파의 시조로 1866년 9월 평양 대동강에서 미국의 무장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침몰시킨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1807~1877,고종 때 우의정)의 아버지다.
6.연암 사망 때의 제문(처남 이재성 씀)에 나오는 말이 박지원을 웅변한다.
“보검이나 큰 구슬은 시장에서 살 수 없는 법이고 하늘이 내린 글이나 신비한 비결은 보통의 책 상자 속에 있을 턱이 없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