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앙드레 말로,소설 ‘인간의 조건’ 첫 문단에 장개석의 상하이 쿠데타를 영상 르포처럼 시작하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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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말로,소설 ‘인간의 조건’ 첫 문단에 장개석의 상하이 쿠데타를 영상 르포처럼 시작하다.

지성인간 2024. 4. 1.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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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1927년3월21일 밤 0시30분 “모기장을 쳐들어 볼까? 아니면 그대로 모기장째 찌를까? 첸은 긴장한 나머지 뱃속이 뒤틀리는 듯했다. 그는 자신의 과감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에는 그런 생각조차 그저 맥 빠진 듯 몽롱하게 떠오를 뿐 천장으로부터 늘어져 있는 흰 모슬린 모기장에 홀려 정신이 흐리멍덩할 뿐이었다. 모기장 속에는 그림자보다도 희미한 사람 몸뚱이 하나가 가로놓여 있었다. 그 몸뚱이에서 한쪽 발 만이 밖으로 삐죽이 나와 있었다. 잠들어 반쯤 기울어진 자세였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발-사람의 육체 일부임이 틀림없는 발이. 방안에 스며드는 광선이라고는 이웃 빌딩에서 비치는 불빛뿐이었다. 직사각형의 희미한 전등 불빛이 새까만 창살 그림자로 인해 줄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그중 한 그림자가 바로 침대 위에 비어져 나온 발을 가로 자르고 있어 마치 그 발의 부피와 생명을 강렬히 드러내기라도 하는 듯싶었다. 밖에서 네댓대의 자동차 클랙슨 소리가 한꺼번에 울려왔다. 발각되었을까? 차라리 싸웠으면! 자신를 방어하는 적들-잠든 육체가 아니라 눈뜬 적들과 정면으로 싸웠으면!”(앙드레 말로 저, 김붕구 역, 지식을만드는지식, 2013)

소설 ‘인간의 조건’을 낸 직후인 1933년 마리안느(Marianne) 좌상 앞의 앙드레 말로. 마리안느는 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 혁명정신과 프랑스공화국을 상징하는 여성상이다.www.naver.com

1.정확한 시점과 생생한 묘사를 통해 르포르타쥬(Reportage) 소설임을 드러내며 시작하는 첫 문단이다. 시작하는 문장에 테러리스트(자객)의 고민을 그대로 드러내 몰입감을 배가하고 있다. 독자가 마치 현장에서 살인 장면을 보고 있는 듯한 리얼한 풍경(?)과 심리 묘사가 압권으로 다가온다. 영화에서 사용되는 샷 기법으로 긴장감을 더하고 있다. 도입부부터 극적인 장치와 문체도 주목도를 높이고 있다.풀이가 필요하지 않는 어휘가 이어지는 쉬운 문장으로 독자들의이 편안한 읽기를 유도하고 있다.

1933년 프랑스 파리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나온 소설 '인간의 조건' 초판본 표지 이미지.www.google.com

2.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La condition humaine,1933)’은 르포르타주(Reportage) 형식의 소설 중 으뜸으로 꼽히는 작품이다.이국의 무대와 배경,  폭동에 이은 테러, 군부 쿠데타, 이데올로기와 장렬한(?) 죽음이 르포기사체로 실감나게 묘사된 명작이다.  이 소설은 32세라는 젊은 나이의 저자를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렸다.
파리에서 나오는 월간 라 누벨 르뷔 프랑세즈(La Nouvelle Revue française,1908년 11월 창간)와 잡지 마리안느(Marianne)에 발췌 연재됐다가 갈리마르(Gallimard)에서 1933년 출판됐다. 책은 네덜란드 작가 에디 뒤 페롱(Eddy du Perron,1899~1940)에게 헌정됐다.
소설은 실존 철학이 내재한데다 내용과 배경도 어려웠다. 하지만 소설 무대가 동양이라는 것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이국(異國) 취미로 관심이 높아졌다. 또 1920년대의 심리소설 유행에 대한 반동으로 르포르타쥬 소설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특히 그해에 프랑스 최고문학상인 공쿠르상(Prix Goncourt)을 우여곡절 끝에 받은 것도 인기에 한몫했다. 당시 문단에 영향력이 큰 출판인 가스통 갈리마르(Gaston Gallimard)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데다 공쿠르상 심사위원장인 J.H. 로시니(본명 Joseph Henri Honoré Boex, 1856~1940, 벨기에 출신의 프랑스 작가)의 이중 투표 덕분이었다. 공쿠르상을 받은 이후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프랑스에서 단행본으로 500만 부(2021년 기준) 이상 팔렸다. 이는 공쿠르상을 받은 작품 중 가장 많이 팔린 것이다. 최종 개정 및 수정판은 1946년 7월16일 완료, 인쇄됐다.
프랑스에서 1950년 ‘반세기 최고의 소설 그랑프리’ 목록에 올랐고, 1999년 르 몽드/프낙(FNAC,프랑스 유통채널)이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책’ 100권 중 5위에 기록됐다. 영어로는 1934년 ‘Man's Fate’로 첫 번역됐다. 이후 ‘The Human Condition’으로도 번역된다. 한국에서 쓰는 ‘인간의 조건’은 일본어 ‘人間の條件(Ningen no jōken)’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1940년대 폴리오 출판사에서 나온 소설 '인간의 조건' 표지로 쓰인 사진.1932년 인도차이나에서 말로의 친구였던 조르주 R. 마누에(Georges R. Manue)가 기고한 잡지 'Voila'의 표지로 쓴 것을 재인용했다.www.google.com

3.소설은 1927년 당시 중국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Jiang Jieshi, 蒋介石, 장개석, 1887~1975, 중화민국 제1~5대 총통)가 일으킨 ‘4.12 상하이(上海) 쿠데타’가 소재다. 그해 3월~4월 상하이를 시간,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상하이 쿠데타는 장제스 중심의 국민당 우파가 당내 좌파와 공산당을 몰아내기 위한 계획된 군사쿠데타였다. 이 쿠데타 결과 1차 국공합작(國共合作, 1924~1927) 이후 위기에 몰렸던 국민당 우파는 좌파와 공산당을 타도하고 난징(南京) 국민정부를 수립, 주도권을 잡았다. 특히 장제스는 공산당과 완전 결별하고 난징 국민정부의 헤게머니를 장악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기나긴 국공내전(國共內戰,Chinese Civil War,1927~1950)의 시작이 됐고, 결국 공산당에 대륙을 빼앗기는 단초가 됐다.
한편 르포 회고록 ‘아리랑(님 웨일즈 저, 1941년 뉴욕 출판)의 주인공 한국인 항일운동가 ‘김산(본명 장지락,1905~1938)에 의하면 4.12 상하이 쿠데타에 이은 4.15 광저우 쿠데타 때 조선인 20여 명도 좌경혐의자로 체포됐고, 14명이 국민당 육군 감옥에서 처형됐다.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예술가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1898~1967)의 1935년 작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영국 노퍽 박물관 소장. 출처=예술의 지식.www.superprof.fr

4.소설의 모델은 중국 공산당 지도자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국무원 총리 겸 외교부장)라는 분석이 많다. 저우언라이가 주요 등장인물에 투영돼 있다는 게 정석이다. 실제로 저우언라이는 2차 상하이 폭동(1927년 2월21일 무장봉기)을 준비하고 실행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등장인물은 프랑스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낭만적인 지식인 기요시(Kyoshi, 기요), 독일인 아내 메이(May), 아편 중독자이자 대학교수 아버지 지조르(Gisors), 가장 과격한 테러리스트 첸(Tchen), 러시아 출신 직업 혁명가로서 의학도 카토프(Katow)가 중요하게 나온다.
또 중국 국민당 장성 장제스,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는 에멜리크(Hemmelrich)와 루 위쉬안 부부, 프랑스 골동품 상인이자 무기 밀매인 클라피크(Clappique) 등도 나온다. 이밖에 권세욕과 에로티시즘의 화신 같은 자본가인 야심 찬 프랑스 기업인 페랄(Ferral), 현실을 잊으려는 성격파탄자, 공산당에 대한 증오에 불타는 비밀 경찰서원 등이 등장한다.

1927년 상하이 쿠데타 이후인 1930년대 초의 중국 상하이 거리. 유럽풍 건물이 즐비하다.www.google.com

5.줄거리는 1926~1927년 중국 상하이 폭동을 주도한 좌익 이상주의자들의 활동과 비극을 다룬 이야기다. 소설은 연대기 형식으로 시제를 명확히 하면서 전개된다. 제1부 1927년 3월 21일(실제로는 2월21일). 폭동(반란)을 수행을 위해 무기를 찾고, 무기가 든 화물을 손에 넣기 위해 첸은 무기상을 칼로 찔러 죽인다. 항구의 화물선에서 무기를 찾아 분배한다.
2부 3월 22일. 폭동은 일어났고, 경찰에 대항해 동맹을 맺은 사람들과 협력해 승리를 거둔다. 그런데 자본가 페랄이 재계를 설득, 장제스의 국민군을 지지하도록 한다.그리고 공산주의자들에게 등을 돌리고, 무기를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3부 3월 29일. 폭동이 확산함에도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 마르크스레닌주의정당 국제조직체, 모스크바)은 중립을 지키고 더 이상의 봉기를 금지할 것을 선언한다. 갈피를 못잡던 상하이 공산당원들은 장제스의 암살을 모색한다. 4부 4월 11일.경찰은 공산당원에 수배령을 내리고, 첸도 장제스 암살에 실패한다.
이어 5부와 6부, 7부는 스러져 가는 혁명과 인간의 존재, 죽음의 이야기다. 상하이 폭동을 주도한 기요는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다가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한다. 장제스 암살 시도에 실패한 첸은 거사 현장에서 죽음을 맞는다. 카토프는 자신의 청산가리를 공포에 질려있는 동료에게 주고 자신은 산 채로 불길 속에 뛰어든다. 상하이 쿠데타 끝난 지 3개월 뒤에 지조르 노인과 자부 메이는 일본 고베에서 기요의 시체를 받는다. 그 때 지조르와 메이의 대화가 '인간의 조건'에 대한 메시지를 남긴다. 지조르는 아들이 죽었는데 혁명은 무슨 소용인가 하면서 아편으로 도피처를 삼지만 메이는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남편 기요가 했던 혁명을 이어가고자 한다.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에 성공해 4월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지 모델을 장식한 장제스(장개석). 소설 '인간의 조건' 무대가 된 상하이 쿠데타를 주도한 중국 국민당 지도자였다.https://namu.wiki

6.이 소설은 실존주의 인간의 이야기이지만 정치적 행위도 끄집어 낸다. 뒷부분에 나오는 테러리스트 겸 혁명가가 자살용 청산가리를 동료에게 주고 자신은 고통스럽게 죽는 길을 선택하는 것은 희생을 강조한 행위라 볼수 있다. 혁명은 소설의 흐름일 뿐 죽음의 순간까지 자신의 운명을 도구화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조건을 이야기 한다.
또 사랑보다는 에로티시즘 묘사가 탁월(?)하다. 도박을 좋아하는 사업가 클라피크와 고급 창녀와 관계, 기요가 아내 메이와 작별 인사하는 과정에서 메이가 남편 친구 의사와 성 관계 변명,프랑스 자본가 페랄과 정부 발레리의 잠자리 묘사 등이 그렇다. 저자의 아시아 3부작으로 불리는 초기 소설 중 ‘정복자(1928)’, ‘왕도(La Voie royale, 1930)’에 이른 소설이다.

7.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는 “감탄할 만한 지성을 지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깊이 몰입하고, 헌신하고, 때로는 참을 수 없는 고뇌로 헐떡거리는 소설”이라고 평했다.
프랑스의 수필가이자 평론가 장 게헤노(Jean Guéhenno, 1890~1978)는 “모든 인간의 조건이 이 책에 담겨 있지 않다면, 적어도 그것이 더 이상 의문시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너무나 비극적이게도, 너무나 심오하기 때문에 이 책은 여전히 가장 무거운 슬픔과 가장 큰 고통에 대한 억양으로 조율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것은 탁월한 가치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다”고 평가했다.
프랑스 철학 교수이자 레지스탕스 피에르 칸(Pierre Kaan, 1903~1945)은 “공쿠르상이 프루스트 수상 이후 앙드레 말로 만큼 중요한 작가에게 주어지기는 처음”이라고 평가했다. 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는 "프랑스 문학사는 소설 '인간의 조건'을 위시한 여러 작품을 창조한 앙드레 말로에게 언제나 가장 중요한 여러 페이지를 할애할 것"이라고 말했다.

수류탄을 든 테러리스트와 중국식 건물을 일러스트로 묘사한 소설 인간의 조건 표지.1954년 파리 갈리마르 출판사 발행.www.abebooks.fr

8.비판적 시각도 있다. 영국 저널리스트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1949~2011)앙드레 말로는 중국에 거의 머물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르포르타쥬 소설로 썼지만 경험담이 아니라는 것이다.
프랑스 전기 작가 이자  저널리스트 올리비에 토드(Olivier Todd, 1929~현재)"세부 사항에서 사실도 아니고 전체적으로 거짓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상상"이라고 말했다.

1927년 2월 상하이 폭동 때 경찰과 국민당 우파에게 잡혀가는 공산당원들.이들은 4월12일 일어난 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 때 대부분 처형됐다.www.google.com

9.1947년 프랑스 시인이자 라디오 진행자 뤽 데코네스(Luc Decaunes,1913~2001)는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을 라디오용으로 각색, 1947년 12월 31일 방송했다.
영화 제작을 네 번이나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1969년 오스트리아계 미국 감독 프레드 진네만(Fred Zinnemann(1907~1997)이 감독하고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Metro-Goldwyn-Mayer,MGM)가 제작에 들어갔으나 촬영직전 취소됐다.
이후 이탈리아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1941~2018)1980년대에 중국 정부에 영화 제작을 제안했는데 중국이 역제안황제 푸이(Puyi,1906~1967)의 삶을 기반으로 한 1987년 전기 영화인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 만들어 히트했다.한편 1996년 중국에서는 人的命运(Ren de Mingyun. 청두 Sichuan Wenyi Chu Ban She, 1996)’으로 출판됐다.

프랑스 제5공화국 문화부장관 재임시절의 앙드레 말로.독일계 미국 작가 오토 베트만(Otto Bettmann, 베트만 아카이브 설립자) 작품. Bettmann Archive https://en.wikipedia.org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 1901~1976)=프랑스 소설가이자 정치인(문화부 장관). 레지스탕스 출신 실존주의 소설가이자 문화행정가.본명은 조르주 앙드레 말로(Georges André Malraux).

1.파리 18구의 담레몽 가 53번지에서 프랑스 서부 덩케르크 출신의 미국 은행 파리 지점장인 페르낭 조르주 말로(Fernand-Georges Malraux, 1875-1930)와 식료품 상인의 딸 베르트 펠리시 라미(Berthe Félicie Lamy, 1877~1932)와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런데 부모는 1905년 말로가 세 살 때 별거했다. 이혼한 아버지는 마리 루이즈 고다르(1879~1946)와의 두 번째 결혼에서 롤랑 말로(1912~1945)와 클로드 말로(1920~1944)라는 두 아들을 낳았다.어머니는 별거 직후 친정인 파리 북동부 센생드니(Seine-Saint-Denis)의 봉디(Bondy)로 갔고, 말로는 어머니와 외할머니 아드리엔 라미(Adrienne Lamy  본명 로마냐), 식료품점을 운영하던 외숙모 마리 라미(Marie Lamy)의 손에서 자랐다. 그런데 아버지는 1930년 말 자살했다.

프랑스 파리 근교 베리에르 르 뷔송(Verrieres-le-Buisson)에 있는 앙드레 말로 문화센터(Centre Culturel Andre-Malraux).https://en.wikipedia.org/

2.외가에서 지낸 유년기 동양어학교(東洋語學校)에서 산스크리트어와 중국어를 배웠다. 말로는 1915년에야 파리의 École Supérieure de la rue Turbigo (미래의 투르고 고교,Lycée Turgot)에 입학했다.
하지만 열일곱 살에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포기했고, 1918년 파리의 리세 콩도르세(Lycée Condorcet) 입학을 거부당한 후 학업을 멈췄다. 1919년에 희귀 서적 거래 서점이자 출판사 인 르네 루이 다옹(René-Louis Doyon)에서 일했다.
말로는 18세 때 다다(Dada,1916년 부르주아 예술가와 그의 예술을 조롱하는 문화운동)와 초현실주의(Surrealism, 1차세계대전 후 일어난 문화운동, 1917년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ermo Apollinaire, 1880~1918)가 작명)의 선구자인 화가 막스 제이콥(1876~1944, 프랑스 모더니스트 시인, 소설가 및 화가)에 심취했다. 1921 심보 크라 출판사에 문학편집장으로 취임최초의 작품 종이달(Lunes en papier)’를 출판했다.

3.1923년에 말로의 인생에서 가장 큰 흑역사(黑歷史)로 남아 있는 일이 시작됐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고고학적 조사에 참가한 것이다. 말로 일행은 캄보디아 등에서 많은 조각상을 발굴, 프랑스로 가져왔다. 제국주의 국가의 ‘도굴’과 ‘강탈’에 합류한 것이다.
그런데 그해 조각상을 밀반출하려다 체포돼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다급해진 말로는 아내 클라라 (Clara Goldschmidt, 1897~1982)에게 요청, 프랑스 지식인들의 구명 운동이 벌어졌고, 2심에서 금고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아 풀려났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당시 구치소 생활을 거울삼아 인도차이나 사회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1921년 10월 21일 망중한을 즐기는 앙드레 말로와 첫 아내 클라라 골드슈미트. 장소불명. 개인 소장.출처= 아카이브 Charmet / Bridgeman

4.말로는 1920년대 중반 중국 광둥(廣東)에 국공합작(國共合作) 정부가 성립되자 큰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1925년에는 광둥 총파업을 배경으로 한 소설 ‘정복자들’을 출간, 일약 소설가로 유명해진다. 이후 1927년 장제스(蔣介石)의 ‘상하이 쿠데타’로 국민당 우파의 공산당 탄압사건이 벌어지자 중국 국민당과 손을 끊었다. 말로는 이때의 사건을 소재로 유명작 ‘인간의 조건’을 쓴다.

앙드레 말로 첫 부인 클라라 골드슈미트의 말년 모습.https://en.wikipedia.org

5.말로의 첫 뮤즈는 독일 국적의 클라라 골드슈미트(Clara Goldschmidt, 1897~1982, 나중에 클라라 말로,Clara Malraux)였다. 둘은 클라라가 1920년 아방가르드 잡지인 ‘Action’의 번역가로 일할 때 만났고, 1921년 10월 21일 결혼했다.
그런데 부자 아내의 돈을 당시 폭락하는 멕시코 주식(특히 금광에 투자한)에 넣었다가 가정 경제가 파탄 일보 직전까지 갔다. 말로는 이를 만회할 목적으로 1923년 아내와 불알 친구인 루이 슈바송(Louis Chevasson)과 함께 캄보디아로 가서 크메르 제국 조각상을 훔쳐 되팔 생각을 한다.
그해12월 중순쯤 캄보디아 씨엠립 앙코르 와트 반테이 스레이(Banteay Srei) 사원에 도착, 일곱 개의 얕은 돋을새김을 잘라 포장해 파리로 가기 위해 프놈펜으로 간다. 말로는 그곳에서 체포돼 가택 연금을 당했다가 곧 구치소에 수감된다. 이후 1924년 10월 28일 징역 3년, 루이 슈바송은 징역 1년 반을 선고받는다. 아내 클라라 말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클라라는 파리로 돌아와 곧바로 남편 구명운동에 나선다.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 마르셀 아를랑(Marcel Arland,1899~1986), 시인 루이 아라공(Louis Aragon,1897~1982), 시인이자 미술이론가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1896~1966), 소설가 프랑수아 모리악(François Mauriac,1885~1970), 소설가 앙드레 지드(André Gide), 시인 막스 자코브(Max Jacob,1876~1944)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을 총동원, 남편 석방 운동을 벌였다. 이런 노력으로 항소심에서 말로의 형량은 1년 8개월로 감형됐고,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1925년 다시 인도차이나로 돌아간 말로는 사이공의 콘티넨탈 호텔에 머물면서 클라라와 함께 인도치네(Indochine)를 창간했다. 이 신문은 나중에 사슬에 묶인 인도차이나(L'Indochine enchaînée)가 되었다. 그런데 말로 석방운동과 인도차이나에 머무는 사이 아네 클라라 말로는 아편에 심하게 중독됐다.
1933년 3월 클라라 말로는 플로렌스 말로(Florence Malraux, 1933~2018, 나중에 영화감독)를 낳았다. 하지만 1947년 그녀는 앙드레 말로와 이혼했다.

앙드레 말로와 그의 연인 조제트 클로티스.조제트는 1944년 열차사고로 사망, 말로에게 큰 충격을 준다.www.granger.com

6.말로는 1933년 12월에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조제트 클로티스(Josette Clotis, 1910~1944)를 만났다. 조제트는 당시 누벨 레뷔 프랑세즈(The Nouvelle Revue française, NRF)가 창간한 문학 주간지 마리안느(Marianne)에서 기자로 일했는데 둘은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
둘은  공식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1940년 11월 5일 조제트 클로티스는 뇌이 쉬르 센에서 앙드레 말로의 첫 아들 피에르 고티에를 낳았고, 1943년 3월 11일 둘째 아들 앙드레 말로를 낳았다.
그런데 동거녀 조제트와 아들 둘은 비극적으로 사망, 말로에게 큰 충격을 줬다. 조제트 클로티스는 2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 중부 코레즈(Corrèze)의 코레즈철도(포-코레즈,PO-Corrèze)의 생샤망(Saint-Chamant) 역으로 갔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철도 발판에서 미끄러져 기차에 의해 다리가 찢어졌고, 며칠 후 인근 튤레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로부터 16년 후인 1961년 5월 23일에는 20세와 18세였던 둘의 두 아들 고티에 말로와 뱅상 말로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1963년1월8일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모나리자가 미국 워싱턴 국립 미술관에서 대여 및 전시 중인 모습.오른쪽부터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1917~1963), 프랑스 피아니스트이자 앙드레 말로 파트너 마들렌 말로(1914~2014), 프랑스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1901~1976),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1929~1994), 부통령 린든 베인스 존슨(1908~1973). 출처=미국의회도서관.Getty Images.

7.말로의 두 번째 결혼은 1948년 3월 13일 피아니스트이자 작가의 이복동생 롤랑 말로(Roland Malraux,1912~1945)의 미망인인 마리 마들렌 리우(Marie-Madeleine Lioux,1914~2014)와 했다.
말로는 그녀의 아들 알랭(Alain, 1944~현재, 말로의 이복동생 아들)을 입양했다. 알랭은 로랑(Laurent, 1977년생), 셀린느(Céline), 안느(Anne)라는 후손을 남겼다. 1966년 둘의 관계는 악화했고, 부부는 별거에 들어갔다. 마들렌은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 정착해 살았다. 말로는 1960년대 작가 루이즈 드 빌모랭(Louise de Vilmorin,1902~1969)과도 연인관계를 유지했고, 사망후에는 그녀의 조카와 말년을 함께 했다.

1944년 알자스에서 독립투쟁을 벌이던 레지스탕스 베르제 대령 시절의 앙드레 말로(왼쪽두번째).www.google.com

8.말로는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스페인에서 공화군에 합류했다. 국제 항공 비행대의 대령으로 공중 임무를 수행했다. 이 때 스페인에 대한 의료 지원을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말로는 스페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희망(L'Espoir, Man's Hope)을 1937년 출판했다. 1938년에는 바르셀로나에서 영화도 만들었지만 상영되지 않았다.
독일 히틀러 정권이 군국주의로 변하며 1939년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반파시즘 운동에 투신했다. 프랑스 전차 부대에 사병으로 입대한 것이다. 그런데 독일군에 체포됐으나 우여곡절끝에 자유지대(Free Zone)로 탈출해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했다.
이후 대독 저항(對獨抵抗)운동에 본격 나서 전차대여단장(戰車隊旅團長)의 임무를 수행했고, 1944년부터 ‘베르제 대령’이라는 이름으로 레지스탕스를 지휘, 알자스 로렌 지역 해방의 주역 역할을 했다.

제5공화국 대통령 샤를 드골과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 Getty Images

9.1945년 레지스탕스 지도자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1890~1970,프랑스 제18대  프랑스 대통령)을 만난 이후 1969년 드골의 대통령직 사임 때까지 절친 관계를 유지했다. 1958년 드골이 프랑스 대통령이 되자 말로는 문화부 장관(Minister of Cultural Affairs)으로 임명됐다.
말로는 장관 재직 때인 1964년 12월 19일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전설적 지도자 장 물랭(Jean Moulin, 1899~1943,게슈타포에 체포된 후 고문 사망)의 유골을 파리 팡테온으로 옮겼다. 또 1965년 9월 3일 루브르 박물관 안뜰에서 열린 유명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1887~1965) 장례식 조사(弔辭)를 했다.
말로는 1968년 ‘6.8혁명’으로 드골이 사임하자 10년 동안 유지한 장관 직을 내려놓는다. 이후 동파키스탄(방글라데시)의 독립운동에 의용군으로 지원하기도 했다.1971년에는 샤를 드골 연구소의 초대 원장에 취임했다.

1920년대 소련을 방문, 소설 어머니의 저자 막심 고리키(오른쪽)를 만난 앙드레 말로(가운데). 장소 불명. Getty Images, www.google.com

10.말로는 작가이자 연인인 루이즈 드 빌모랭 (Louise de Vilmorin,1902~1969)과 말년을 함께 한다. 빌모랭을 따라 1969 년 베리에르 르 뷔송(Verrières-le-Buisson))의 빌모랭 집(Château de Vilmorin)로 이사했다. 하지만 빌모랭이 곧 죽었고, 그녀의 조카딸 소피 드 빌모랭(Sophie de Vilmorin, 1931~2009)과 함께 했다.30년  연하의 소피는 말로의 남은 여생을 함께한다.
말로는 1975년 1월 베리에르 르 뷔송(Verrières-le-Buisson)의 집(연인 빌모랭이 남기고 간 사또 빌모랭)을 개조, ‘앙드레 말로 문화 센터(André-Malraux Cultural Centre)’로 개관했다. 그해 12월 말에는 소피 드 빌모랭과 아이티로 개인 여행을 했다. 이듬해  멕시코에서 시상하는 알폰소 레예스 국제상(Alfonso Reyes International Prize)을 받았고, 그해 프랑스 국립 미술 아카데미(National Academy of Fine Arts)의 정회원으로 임명됐다.

파리 팡테옹에 있는 앙드레 말로 묘.1996년 베리에르 르 뷔송의 빌모랭 사또에서 팡테옹으로 이장했다.wikipedia.org

11.말로는 1976년 11월 15일 파리 남동부 일드 프랑스 크레테유(Créteil)에 있는 앙리-몽도르(CHU Henri-Mondor) 병원에 폐울혈로 입원했는데 실제로는 피부암이었다. 말로는 일주일 후 23일 병원에서 영면했다. 향년 75세. 마지막까지 소피 드 빌모랭이 함께 했다.
말로가 사망하자 프랑스 정부는 27일 루브르 궁전의 쿠르 카레(Cour Carrée, 루브르 궁 안뜰)에서 국장(國葬)급 경의를 표했다. 유해는 그의 희망대로 베리에르 르 뷔송의 빌모랭 사또에 묻혔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말로 사망 20주년을 추도하는 해인 1996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자 정치인 피에르 메스메르(Pierre Messmer, 1916~2007)의 선동으로 유골을 파리에 있는 애국열사들의 영묘격인 팡테온으로 이장했다.
저서로 평론 ‘서 유럽의 유혹’, 소설 ‘정복자’, ‘인간의 조건’, ‘침묵의 노래(Les Voix du silence, 1951)’, ‘세계 미술의 역사와 철학(Le Musée imaginaire de la sculpture mondiale(1952~54) 등이 있다.

미국 유명 주간지 타임지의 1955년 7월 18일자 표지로 나온 앙드레 말로.https://picclick.com.au/

12.여담이지만 1957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1913~1960)는 선정 소식을 전해 듣고 첫 말로 "노벨문학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말로인데"라며 앙드레 말로가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 것을 애석해했다.
하지만 프랑스 전기작가 올리비에 토드(Olivier Todd, 1929~현재)와 같은 일부 비평가들은 말로에 대해 "자신의 신화를 효과적으로 구축하는 데 성공한 당대 최초의 작가"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1965년 8월 중국 특사로 베이징을 방문, 중국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 왼쪽 두번째)과 총리 류사오치(劉少奇,왼쪽 첫번째)를 만난 앙드레 말로(오른쪽 두번째).www.gettyimages.ca

13.미국정부가 은퇴한 앙드레 말로를 초청한 일이 있었다. 1972년 2월 중국을 방문할 예정인 리처드 닉슨(Richard Milhous Nixon,1913~1994, 37대 대통령)의 미국 정부는 말로를 워싱턴으로 초청했다. 닉슨과 참모들이 말로에 대해 1930년대 중국에서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를 알고 지낸 인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말로를 만난 닉스 참모들은 평가 절하했다고 한다. 존 스칼리(John Scali,1918~1995,UN주재 미국대사)는 말로에 대해 “혼란스럽고 모순적이며 망각이나 비논리로 가득찬 인물”이라며 “"낡은 관념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상을 위한 특별한 틀로 엮어내는 허세를 부리는 늙은이"이라고 평가했다.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1923~2023)는 1979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중국에 대한 말로의 지식은 한참 뒤떨어져 있고, 그의 단기적 예측은 터무니없이 틀렸다“고 말했다.(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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