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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청춘의 바이블 소설 첫 문단은 서간체로 아주 담담하게 시작한다. 본문
제 1부 1771년5월4일
"그렇게 떠나오고 나니 얼마나 행복한 지 모르겠네! 내 소중한 친구,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대체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을까! 그렇게도 아끼고 헤어지길 가슴 아파했던 자네를 남겨두고 오고도 이렇게 기뻐하고 있으니 말이야! 물론 자네라면 이런 나의 마음을 헤아려 주리라 믿네. 자네 이외의 사람들과의 관계는, 마치 운명이 나와같은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려고 그렇게 정해놓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좋지가 못하네. 불쌍한 레오노레의 경우만 봐도 그래! 하지만 그건 나에게만 잘못을 물을 문제는 아닌 것 같네. 그녀의 여동생이 가진 묘한 매력에 빠져 내가 희희낙락하는 동안에 그 가엷은 레오노레의 마음속에 열정이 생겨난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게 전혀 책임이 없다고 할수는 없겠지. 행여 내가 그녀에게 먼저 의도적으로 추파를 던진 것은 아니었을까?어디까지나 진실하고 꾸밈없는 그녀의 애정 표현을. 사실 조금도 우스꽝스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웃음거리로 삼으면서 내심 그것을 즐긴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나는-이런, 또 나자신에 대한 푸념만 늘어놓았군. 친구, 내 자네에게 약속하건대 앞으로는 행동을 고쳐보겠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안장혁 역, 문학동네,2010)
1.저자의 심경을 고백하는 형식으로 편안하게 쓴 도입부다. 문장 하나하나와 내용이 쉽고, 담담하다.친구에게 쓰는 편지 글인만큼 꾸밈이 없다고나 할까. 하지만 다음 문장이 저절로 읽히는 등 독자를 작품 속으로 강하게 몰입시키는 첫 문단이다. 서간체 형식 소설의 장점이기도 하다. 편지 형식의 글이지만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거는 듯한 느낌 등 근대적인 소설 기법까지 고스란히 녹아 있다.거대 서사나 상징은 없지만 본문에 나오는 운명, 불안, 열정, 웃음거리,푸념 등이 앞으로의 소설 전개와 결말을 암시하고 있다.모든 연애편지의 교과서같은 첫 문단이다
2.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 1774)'은 세계 최초의 초 대박 베스트셀러이자 시대를 초월한 명작이다. 세계 소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걸작 중 걸작으로 청춘의 바이블, 연애편지의 교과서 같은 작품이다.이 소설 하나로 유럽 문단의 변방에 있던 독문학이 세계문학사의 중심으로 이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소설은 총 82편의 편지를 1,2부로 나눈 형식을 취했다. 베르테르가 친구 빌헬름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다. 저자가 실제 경험당 을 토대로 약 14주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1774년 라이프치히 웨이간드북샵(Weygand'sche Buchhandlung)에서 익명으로 나왔다. 출간 일주일도 안돼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날개 돋힌듯 팔렸다. 1775년 초에 프랑스어로, 1779년에 영어로 출판됐다.이탈리아는 1781년, 스웨덴에서는 1783년에 나오는 등 순식간에 유럽 전역에 괴테의 이름를 각인시켰다. 출간 10년도 안돼 유럽의 왕족과 귀족, 글을 아는 평민 등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읽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출판이 수요를 못따라가 해적판까지 나돌 정도였다.개정판은 초판이후 13년만에 독일 바이마르에서 나왔다.
3.저자의 정열적인 사랑과 절망의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졌다.18세기 독일 문학운동인 질풍노도(Sturm und Drang,슈투름 운트 드랑) 문학의 대표작이자 출세작이다. 출간 초 익명의 저자가 신인작가 괴테 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유럽 문단이 놀랐고, 괴테는 일약 유럽의 '문학 아이돌 '로 유명세를 탔다.불과 10여년만에 영국에서는 1786년에 무명의 작가가 쓴 '샬럿(샤를로테)의 편지(The Letters of Charlotte)'가 등장했고, 전쟁중에소설을 읽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독백형태의 '베르테르리아데'를 기고하기도 했다. 영어로는 'The Sorrows of Young Werther'로 번역된다. 중국어로 '少年維特的煩惱'이다. Werthers를 維特(유특), Die Leiden를 煩惱(번뇌)로 번역했다.
4.소설은 괴테가 직접 겪은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1771년 5월 4일부터 1772년 12월 23일까지 약 1년 8개월 동안에 있었던 일(팩트)에 허구를 섞었다. 형식은 당시 유행하던 프랑스 작가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1712~1788)의 서간 소설 '신(新) 엘로이즈, Julie-ou, la nouvelle Héloïse,1761), 영국 소설가 새뮤얼 리처드슨(Samuel Richardson,1689 ~ 1761)의 '파멜라( Virtue Rewarded Pamela,1740) ' 등에서 영향을 받았다.
소설은 프롤로그로 시작, 초중반부는 주인공인 베르테르가 친구인 빌헬름에게 쓴 편지를 순서대로 보여주고, 후반부는 편집자가 베르테르의 편지와 지인들에게 얻은 정보를 엮어 사건을 재구성해 3인칭으로 서술한다.
당시 베츨라어에서 법관 시보로 근무하던 괴테는 당시 고등법원 법관의 딸이자 친구인 외교관 요한 케스트너((Johann Christian Kestner,1741~1800)의 약혼녀 샤를로테 부프(Charlotte Buff, 1753~1828, 약칭 롯데)를 사랑했다. 하지만 많은 동생을 돌보았던 롯데는 괴테의 사랑을 받아들일수 없었다.
괴테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의 비애감에 빠져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왔다. 그 무렵 상관의 부인을 연모하던 친구 빌헬름 예루잘렘(Karl Wilhelm Jerusalem, 1747~1772,괴테와 라이프치히 대학 친구)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케스트너한테 듣게 된다. 예루잘렘의 권총 자살이 괴테에게 더 충격을 준 것은 사용한 권총의 주인이 케스트너라는 것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롯데의 약혼자 케스트너가 자살용권총을 빌려준 것이었다.
5.소설은 저자의 직간접 경험과 허구, 당대의 사회상이 교묘하게 편지 형식으로 녹아든 형태로 전개된다. 작품 속 주인공도 결국 여주인공 샤를로테의 남편인 알베르트가 빌려준 권총으로 자살한다. 저자가 겪은 현실도 비극적이고, 소설도 비극으로 막을 내리는 구조다.
등장인물은 주인공으로 유복한 집안 출신의 평민 베르테르, 여주인공 샤를로테(애칭 롯데), 롯테의 약혼자로 남편이 되는 남자 알베르트, 베르테르의 친구이자 편지 수신인 빌헬름, 베르테르와 가까운 소년 필립, 베르테르가 알고 지낸 법무관인 늙은 법무관, 베르테르와 로테가 만났던 늙은 목사, 로테의 동생들 등이다. 또 늙은 목사 딸의 애인 슈미트, 베르테르의 어머니, 베르테르의 상사 C백작, 관리인 공사, 베르테르랑 친하게 지내던 여성이자 직장 동료 B양, 베르테르가 일시적으로 모셨던 공작, 목사부부, 어떠 미망인의 하인, 정신나간 청년 하인리히 등도 나온다.
6.줄거리는 산간마을 발하임(Wahlheim, 가상의 마을)으로 이주한 지식인 베르테르는 무도회에서 검은 눈동자의 롯데를 보고 첫 눈에 반한다. 베르테르는 롯데에게 접근, 친교를 맺은 후 집을 왕래할 정도로 가까워진다. 이에 롯데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커져만 간다. 하지만 롯데는 약혼자 알베르트가 있었으며, 발하임으로 돌아온다. 이에 베르테르는 크게 실망한다.
그럼에도 베르테르는 포기하지 않는다.알베르트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도 롯데에 대한 사랑이 깊어간 것이다. 그래서 알베르트와도 불편한 관계를 형성한다. 두사람은 헤어질 수 없는 처지로 가면서 베르테르는 가질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한다. 그래서 발하임을 떠나기도 하지만 귀족 사회의 병폐 등만 경험한다.
그런 사이 롯데는 유부녀가 되고, 베르테르의 고통은 배가된다.롯데는 베르테르에게 친밀감과 호감을 느끼지만 엄연히 남편이 있어서 거리를 둔다. 결국 베르테르는 롯데에게 키스를 시도하며 구애하지만 당황한 롯데는 절교를 선언한다. 절망에 빠진 베르테르는 알베르트에게 빌린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아 생을 마감한다.
7.베르테르와 알베르트는 친구이자 연적(戀敵)이다. 베르테르는 유부녀를 사랑할 정도로 감정적이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그런 낌새를 느끼면서도 대응을 자제한다. 이는 '감정'과 '이성'의 대립을 상징한다. 둘의 관계를 통해 '개개인의 감성'과 '획일화된 집단이성'의 갈등을 은연중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베르테르의 전쟁같은 사랑은 감성,이를 거절하는 롯데의 사랑도 이성을 나타낸다.
소설은 매혹적인 감정과 예술에 대한 이해, 귀족사회의 폐해, 당대 젊은이들의 방황과 시대와 불화 등이 절묘하게 섞여 전개된다. 편지 곳곳에 탁월한 필력으로 이런 상징과 비유를 적절히 섞어 묘사했다.
그래서 문학사에서전무후무한 베스트셀러가 된 것인지 모른다.한편 작중에서 베르테르의 생일이 8월 28일인데 이날은 괴테의 실제 생일이다.
8.당대는 물론 후대의 문호들은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나중에 유명한 극작가가 되는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1759~1805)는 16살 때 이 소설을 읽고 감탄을 거듭했다고 한다. 이후 죽을 때까지 괴테를 존경하는 절친으로 지냈다.
영국 여류 소설가 제인 오스틴(Jane Austen,1775~1827)은 1796년 쓰기 시작해 1813년에 출판한 소설 '오만과 편견'에 등장 인물 두 남자의 패션을 파란색 연미복으로 설정했다. 괴테를 존경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파란색 연미복을 그대로 쓴 것이다.
프랑스의 정복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1769~1821)도 읽자마자 충격을 받았고, 전쟁터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가지고 다니면서 16번이나 읽었다고 한다.나폴레옹은 독일 원정때 괴테를 만나 소설속 내용을 지적질했다가 괴테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 당황했다는 설도 있다.
반발하는 세계도 있었다. 교황청은 '무신론적 내용', '자살' 등을 이유로 금서(禁書)로 지정했다. 금서로 지정하자 해적판이 오히려 기승을 부려 더 팔렸다고 한다. 이 책을 20번이나 읽은 영국 총리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1st Earl of Beaconsfield, 1804~1881)는 '사악한 책'이라고 비난했다.
9.후대 작가들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드러난 괴테의 천재성을 경외했다. 독일 소설가로 4969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마스 만(Thomas Mann,1875~2955) 은 "젊음과 천재가 작품의 대상이며, 바로 그 젊음과 천재에서 이 작품이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스코틀랜드 역사가이자 수필가인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1795~1881)은 “당시 모든 가슴을 뒤흔들고 있던 이름 없는 불안과 갈망하는 불만을 표현했다”고말했다.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의 비서로 문화부장을 역임한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 마오둔(茅盾, 1896~1981,본명 선더훙 沈德鴻)은 1960년대 미국 언론인 아그네스 스메들리(Agnes Smedley, 1892~1950)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다루는 것과 같은 연애가 문학가의 상상력 속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10.시대를 초월해 세계인의 애독서가 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책을 읽고 주인공에 공감한 청년들이 베르테르 옷차림(푸른 연미복에 노란 조끼)을 하고 잇달아 자살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이후 사회적으로 존경받거나 유명한 사람의 자살에 심리적으로 동조해 모방 자살 시도가 잇따르는 사회 현상을 뜻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이 용어를 정립한 이는 1974년 사회학자 데이비드 필립스(David Philips)였다. 모방 자살 효과(Copycat suicide effect)라 한다.
11.연극,오페라, 영화,오디오북 등으로 수없이 제작됐다. 오페라로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오페라 작곡가 쥘 마스네(Jules Massenet,1842~1812)가 '베르테르'로 제작,1892년 2월 16일 비엔나 국립 오페라 에서 초연했다. 프랑스에서는1893년 1월 16일 파리 샤틀레 광장의 테아트르 리리크 극장에서 오페라 코미크에 의해 첫 공연됐다.
현대 독일에서는 작곡가 한스 위르겐 폰 보스(Hans-Jurgen von Bose , 1953~현재)도 1983~84년에 '젊은 베르테의 슬픔'으로 제작, 1986년 슈베칭겐(함부르크 국립 오페라)가 초연했다.
영화로는 1938년 막스 오퓔스(Max Ophuls , Max Oppenheimer,1902~1957) 감독이 '베르테르' 첫 제작했다. 가장 최근에는 2010년 뮌헨출신 독일 감독 필립 슈톨츨(Philipp Stölzl, 1967~현재)이 '괴테'로 내놓았다. 한편 20세기들어 독일 소설가 토마스 만(Thomas Mann,192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은 소설 '바이마르의 로테(Lotte in Weimar,1939)'를 썼다.
12.한국에서 쓰는 제목 ' 베르테르(Werther)의 슬픔'은 일본어 중역 때문에 굳어졌다. 일본 출판 제목 '若きウェルテルの悲しみ'를 그대로 번역했기 때문이다.작중 남주인공의 이름이 독일어로 베어터·베르터)'로 발음되는데 일본어 가타카나 표기 웨루테루(ウェルテル)를 한국어로 그대로 써버린 것이다. 또 독일어 die Leiden도 고통, 괴로움! 고뇌에 가까운데 그대로 쓰고 있다.이에따라 원제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 를 그대로 해석하면 '젊은 베르터의 고뇌' 다. 이를 학계에서 알고 있지만 이미 굳어진 이름이어서 고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현대에 들어와서 을유문화사와 창작과비평사에서 '젊은 베르터의 고통', '젊은 베르터의 고뇌' 등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2000년 뮤지컬 '베르테르(Werther)'로 제작,서울 종로구 종로33길 15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초연됐다. 2020년 8월에는 20주년 공연도 했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여주인공 샤를로테 이름을 쓴 대기업이다. 롯데그룹은 창업주인 고 신격호(辛格浩,1921~2020) 회장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감명깊게 읽은후 일본에서 '롯데(Lotte)'를 상호로 창업, 대기업으로 이뤘다. 그래서 롯데백화점 상품권에도 샤를로테 관련 도안이 그려져 있고, 롯데백화점 명동점에도 샤를로테 동상이 세워져 있다. 롯데월드타워에는 괴테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잠실역 인근에는 샤롯데씨어터라는 뮤지컬 전용 대극장이 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대문호. 작센바이마르 공국의 재상. 영국의 윌리엄 셰익스피어, 스페인의 미겔 데 세르반테스에 버금가는 작가. 독문학을 넘어 서양 문학의 중심인물로 세계 문학의 거장(巨長)이다.
1.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법학자인 아버지 요한 카스파 괴테(Johann Caspar Goethe,1710~1781)와 카타리나 엘리자베스 텍스토르(Catharina Elisabeth Textor,1731~1808)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고향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시장인 요한 볼프강 텍스토어(Johann Wolfgang Textor,1693~1771)의 딸이다. 어머니가 괴테를 낳았을 때는 18세(아버지는 39세)였다. 부모는 괴테를 포함 7명을 낳았으나 성인으로 자란 것은 괴테와 여동생 코르넬리아(, Cornelia, 1750~1777,둘째를 출산한 26세에 사망) 뿐이었다.
2.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괴테는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원속에 라틴어 뿐만 아니라 그리스어,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를 교육받았다.아버지가 구비해준 수많은 장서와 언어 교육은 문학적 성장의 밑거름이자 촉매 역할을 했다.
괴테의 사상은 유년기에 일어난 18세기의 세계대전인 7년 전쟁(Seven Years' War,1756~1763, 프로이센 승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7년전쟁은 프로이센에게 패배해 독일 동부의 비옥한 슐레지엔을 빼앗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가 그곳을 되찾기 위해 프로이센과 벌인 전쟁이다. 영국은 프로이센,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동맹, 전쟁을 치렀다.
괴테는 구(舊)세계인 오스트리아에 의한 질서를 옹호한 외할아버지와 이에 대립한 프로이센(신체제) 옹호자 아버지 사이에서 다양한 시각을 배우며 성장했다. 이런 영향으로 7년 전쟁 와중에 독일로 진격한 프랑스 점령군 사령관 토랑 백작이 괴테의 집에 머물자 아버지를 설득, 토랑 백작의 부하에게서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다. 나중에 토랑 백작은 프랑스에 유학 온 괴테의 숙소를 알선해주 주고 인연을 이어갔다.
3.괴테는 아버지의 권유로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진학, 법률학을 전공해 22살 때 변호사 사무소를 열었다. 이후 프랑스로 건너가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도 2년 동안 법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법학과 함께 문학에 심취, 24살 때 희곡 '괴츠 폰 베를리힝엔'를 썼다.
이후 1774년 25살 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익명으로 발표, 뒤늦게 저자롤 알려지면서 유럽의 스타 문인으로 발돋움한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이탈리아 등 다른나라에서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인기는 엄청나 괴테 스스로가 불만을 가질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돈은 벌지 못했다. 출판 계약 당시 별볼일 없는 신인 작가인 괴테에게 인세를 많이 줄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또 저작권이 없는 시대여서 유럽 곳곳에서 무단 출판(해적판)이 정본보다 더 많았다.
4.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성공에 힘입어 당시 작센바이마르(Sachsen-Weimar) 공국의 카를 아우구스트( Karl August,1758~1815) 공작의 초청으로 공무원으로 고용됐다. 특채 공무원이었지만 3년동안 공작의 최측근 실세로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괴테는 '박수칠때 떠나라'는 것을 잊지 않고 35세 무렵 아우구스트 공작과 벗들이 함께 한 보헤미아 왕국(Königreich Böhmen, 1198~1918. 현 체코)의 칼스바트(온천도시 카를로 바리,Karlovy Vary) 휴가 도중 몰래 이탈리아로 떠났다. 이를 안 공작은 괴테의 이탈리아에서 여행과 예술 활동을 후원했다. 이 여행(1786∼1788)에서 나온 작품이 유명한 '이탈리아 기행(1816년 초판,완성본 1829년 발행)'이다.
이탈리아 기행은 출판이후 유럽 젊은이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이같은 사실은 영국 여성작가 조지 엘리엇(George Eliot, 본명 메리 앤 에반스,Mary Ann Evans, 1819~1880)의 대작 소설 '미들마치(Middlemarch-A Study of Provincial Life.1871~72년 사이 8부로 완간)'에 다소 풍자적으로 묘사돼 있다.괴테는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유명세를 한 몸에 받고 살았다. 아우구스트 공작의 지원속에 철학과 식물학, 미술 등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괴테의 유명세는 나중에 친구가 된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의 만남을 가져왔다. 괴테의 추천 등으로 극작가 거듭난 것이다. 실러는 나중에 명작 '빌헬름 텔','군도'등을 썼다.
5.괴테의 연인은 많았다. 괴테는 여성의 신분, 재산, 나이 등에 구애받지 않았다. 10대 때 그레트헨과 만났고, 19살에 어머니의 친구이자 26살이나 연상인 주잔네 폰 클레텐베르크(1723~1774)와 사귀었다.
괴테는 1770년 10월 프랑스 북동부 그랑에스트(Grand Est)바랭(Bas-Rhin)주(현 알자스) 세센하임 (Sessenheim) 마을을 여행하던 중 프리데리케 엘리자베스 브리온(Friederike Elisabeth Brion, 1752~1813)을 만나 사랑에 빠졌으나 이듬해 8월 헤어졌다. 라이프치히 대학 때인 1776년 3살 연상의 안나 카타리나 쇤코프((Käthchen Schönkopf,1746~1810)와 사랑에 빠져 'Annettenlieder(Annette에게 바치는 노래 )'라는 시집을 헌정했다.
배우자는 16살 연하인 크리스티아네 폰 불피우스(1765~1816)이다. 소설가이자 극작가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불피우스(Christian August Vulpius, 1762~1827)의 여동생이다. 괴테는 크리스티아네와 17년을 동거하다가 1806년 10월 19일에서야 바이마르의 야콥스키르헤에서 조용한 결혼식을 했다. 아들 아우구스트 폰 괴테(1789~1830)를 낳았다. 10년 후 아내 크리스티아네는 병으로 죽었다. 이후 공식 혼인은 없었다. 74살에는 55살 연하의 울리케 폰 레베초프(Baroness Ulrike von Levetzow,1804~1899)에게 청혼까지 했다.
하지만 레베초프의 어머니와 레베초프, 괴테의 아들도 반대, 무산됐다. 레베초프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괴테는 청혼 무산이후 "여기에서 나는 사랑을 하고 그리하여 사랑받으면서 행복했노라 (Hier war ich glücklich, liebend und geliebt)"고 말했다.
이와관련, 현대 독일 소설가 마르틴 발저(Martin Walser )는 2008년 낸 소설 '사랑에 빠진 남자(A Man in Love)에 울리케에 대한 괴테의 열광은 투영했다.이즈음에 괴테는 33세의 폴란드 피아니스트 마리아 시마노프스카(Maria Szymanowska) 와도 깊은 감정적 유대감을 형성했다. 괴테의 여인들 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등장하는 샤를롯테 부프(1753~1828)는 친구의 아내였고, '파우스트'의 그레트헨은 10대 때 첫 눈에 반한 첫사랑이다.
6.괴테는 문학외에 연극 무대 경영·연출·배우 교육에서도 대박을 터트리곤 했다.또 식물학에 대한 책도 내는 등 당대 식물학자 중에서 '톱 클라스' 였다. 이밖에 치의학과 해부학에도 조예가 깊어 진화론의 사상적 근거에도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평생 동안 그린 그림이 1000점이 넘는 괴테는 미술학(특히 색채)에도 영향을 미쳐서 나중에 하이젠베르크가 논문 '현대 물리학의 관점에서 본 괴테와 뉴턴의 색채론'을 쓰기도 했다.
7.괴테는 당시에 보기드물게 만 82세까지 장수했다. 아들과 아내는 물론 10살 후배 실러보다 오래 살았다. 실러는 1805년 45살 때 병사했다. 괴테의 사인은 폐렴과 심부전이었다.1832년 3월 22일 낮 1시 반, 괴테는 심장 발작으로 영면했다.
임종은 과부가 된 며느리 오틸리 폰 괴테(Baroness Ottilie Wilhelmine Ernestine Henriette von Goethe ,1796~1872), 손자인 발터 볼프강 프라이헤르 폰 괴테( Walther Wolfgang Freiherr von Goethe , 1818~1885)와 프라이헤르 폰 괴테(1820~1883), 손녀인 알마 폰 괴테(1827~1844) 이렇게 4명이었다.
괴테는 며느리에게 재산을 물려주었다. 괴테의 유언은 "좀 더 빛을… 조금 더 빛을…", 또는 "창문을 열어달라고 전해다오… 빛이 더 들어오게….", "오줌이 마려우니. 요강 좀 가져와라."는 등 다양하다. 3월 26일 바이마르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이 누워 있는 곳에 안치됐다.
8.괴테의 유물은 사망 2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많이 보전돼 있다. 어릴적 작문학교에서 받아온 성적표라든지 일기장 등 무수하게 남아 프랑크푸르트 괴테하우스 등에 전시되고 있다. 다만 괴테의 후손은 손자에게서 끊겼다. 아들은 괴테 생전인 40대에 사망했고, 임종을 지킨 손녀인 알마는 17세, 두 손자는 독신으로 살다 60대에 사망했다. 괴테의 하나뿐인 누이동생 코르넬리아네의 큰 딸인 마리아 앤 루이즈는 콜로비우스(Nicolovius) 와 결혼, 5남 3녀를 낳았다.
괴테는 말년에 종교없이 지냈다. 프로테스탄트인 루터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포르투갈 리스본 대지진(1755)과 7년 전쟁을 계기로 기독교 신앙에 회의를 가지면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1782년 괴테는 "난 반 기독교인이나 말뿐인 기독교인(un-christian)이 아니라 비 기독교인(non-christian)이다"고 말했다.
9. 괴테의 시대는 질풍노도(슈투름 운트 드랑,Sturm und Drang,18세기 독일에서 이성의 계몽주의에 반발해 일어난 문예운
동, 고전 낭만, 감성을 중요시 여김)의 시대였다. 17살 무렵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7년 전쟁이 벌어졌고,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등장과 몰락이 이었졌다. 기존의 질서와 권위가 전복되던 시대였다.
괴테는 당대의 우상이었다. 여성작가 베티나 폰 아르님(Bettina von Arnim, 1785-1859)의 주선으로 음악의 신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과도 만나 매우 친하게 지냈지만 나중에는 단절했다. 괴테 시 '마왕'을 독일 가곡으로 작곡한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1797~1828)도 외면했다. 다만 모짜르트(Wolfgang Amadeus Mozart,1756~1791)는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나중에 유명한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은 "역사상 가장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평했다.아인슈타인은 괴테의 전집을 소장하고 흉상까지 소장할 정도였다.
한편 괴테는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1788~1860)의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의 살롱에 자주 방문, 어린 쇼펜하우어를 만났는데 격찬했다고 한다.1813년 가을쯤 괴테는 쇼펜하우어를 집에 초청, 토론를 벌이기도 했다. 세르비아계 발명가이자 전기 기술자인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1856~1943) 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괴테의 파우스트(Faust)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10.세계 각국의 독일문화원 명칭은 괴테 인스티튜드(Goethe Institut, http://www.goethe.de)다.예술 부문에서 큰 이바지를 한 비독일 국민에게 '괴테 메달'을 수여한다. 괴테 생가는 괴테 하우스로 공개되고 있다. 대학을 다닌 라이프치히도 마찬가지로 괴테 학습 박물관, 유학해 다니던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는 괴테학습박물관, 괴테 동상, 괴테의 길이 있다.
독일에는 '괴테의 와인'이라 불리는 '시인의 꿈'이라는 뜻의 와인 '디히터트라움(Dichtertraum)'이 있다. 와인을 사랑한 괴테는 "맛없는 와인을 먹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고 말했다고 전한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