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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토황소격문-옳고 그름, 경고와 힐난, 회유 등의 형식을 모두 갖춘 격문은 화려한 변려문으로 서두를 연다 본문
“광명 2년 7월 8일에 제도 도통 검교태위 아무개는 황소에게 알린다./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리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하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지혜 있는 이는 시기에 순응하는 데서 성공하고/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슬리는 데서 패하는 법이다./비록 백년의 수명에 죽고 사는 것은 기약하기 어려우나/모든 일은 마음으로서 그 옳고 그른 것을 이루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지금 우리 왕사로 말하면 덕을 앞세우고 죽이는 것을 뒤로한다./앞으로 상경을 수복하고 큰 선의를 펴고자 하여/삼가 임금의 분부를 받들고 간사한 것들을 치우려 한다./너는 본시 먼 시골 백성으로 갑자기 억센 도적이 되어/우연히 시세를 타고 감히 강산을 어지럽게 하였다./드디어 불측한 마음을 품고 높은 자리를 노려보며 도성을 침노하고 궁궐을 더럽혔으니/죄가 이미 하늘에 닿을 만큼 극도로 되어서 반드시 여지없이 패해서 도망하고 말 것이다.”(민음사 ‘한국산문선1(이종묵, 장유승 편역,2017)’, 장박사 국어연구소 해석 등 취합 재작성)
1.첫구절에 시제와 직함 등을 알리며 전형적인 격문(檄文)으로 시작한다. 약간 긴 첫 문단에 옳고 그름을 명확히 설명하고, 경고와 힐난, 회유의 문구를 통해 반란이라는 부도덕을 질타하고 있다. 그래서 정의는 자신들 편(황제를 호위하는 집단)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치만 거의 모든 대작(代作,남을 대신해 쓰는 글)이 그렇듯이 글쓴이의 사상, 행위를 알수 없는 문장이 이어지면서 단순 격문의 형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선동적인 문장 외에는 무미건조하다. 문체적으로 문자와 문자의 조화, 화려한 문장, 수식을 추구하는 중국 고대의 변려문(騈儷文)을 취하고 있다. 이런 격문은 집회와 시위 등의 참여 호소문 등에 활용하면 제격이라 하겠다.
*.본문에 나오는 검교태위(檢校太尉)는 당나라 때 왕이 제후나 장군에 내리는 관직이다.*황소(黃巢,?~884)는 중국 당나라 말기에 반란을 일으켜 나라 멸망을 촉진한 인물. *.상경(上京)은 당나라 수도 장안이다.*.변려문은 중국 고대의 문체 중 대구(對句)를 중요하게 여기는 문체 중 하나다. 한시(漢詩)나 한문장(漢文章)에서 어휘와 문장의 대비를 통해 유려하고 조화(對句)로운 글을 지향한다. 그래서 내용보다 형식에 치우친다는 비판도 받는 문체다. 변려체(騈儷體)·변문(騈文)·사륙문(四六文)·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이라고도 한다.
2.최치원의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881)’은 당나라 말 남의 나라 민란(民亂) 진압에 참여한 신라인이 쓴 최고의 명문(名文)으로 꼽힌다. 북송(北宋) 때 문인 구양수(歐陽修,1007~1072) 등이 쓴 관찬서 ‘신당서(新唐書, 1060년 간행)’에 수록될 만큼 동양 최고의 격문이다.
작가 나이 24살 때 반란 진압군에 종군(從軍)해 당나라 관리 입장에서 농민 반란의 수장인 황소(黃巢, ?~884)를 토벌하기 위해 쓴 것이다.이른바 토벌 장군을 대리해 쓴 대필(代筆) 혹은 대작(代作,남을 대신해 쓰는 글)한 격문이다. 대필작가(Ghost writer)가 쓴 명문장인 셈이다.
요즘 말로 하면 남의 나라에서 벌어진 민란에 ‘정훈(政勳)장교(Troop Information and Education Officer)’로 참전한 작가가 그 나라와 장군의 이름으로 적을 매도하고 아군의 사기를 북돋우려고 쓴 글이다.
3.출전은 신라 말 간행된 작가의 저서를 모은 ‘계원필경(桂苑筆耕, 886년 간행)’ 20권 중 제11권에 있다. 계원필경은 작가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편찬해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과 정강왕(재위 886~887, 신라 제50대 국왕) 시기에 왕에게 올린 다섯 편의 저서 중 하나이다.
계원(桂苑)은 계수나무 정원(동산) 즉, 과거 급제를 뜻한다. 중국 장쑤성(江蘇省) 양저우(揚州)의 옛 이름(당나라 행정 중심지)이기도 하다. 필경(筆耕)은 붓으로 밭갈이를 한다는 뜻이다. 중국에서 과거에 급제해 글(문장)로 삶을 연명했다는 뜻과 당나라 행정 중심 도시에서 썼다는 두가지 뜻이 담겼다고 볼 수 있다. 한문 원문 제목은 ‘격황소서(檄黃巢書)’이다.
4.중국에서 쓴 한문 격문이어서 우리나라 문학으로 포함하는 데는 논란이 있는 시문(詩文)이다. 특히 작가 자신의 이야기나 느낌이 들어가 있지 않은 대작(代作,대신해 쓰는 글)이어서 더욱 그렇다. 당나라 정서를 그대로 담은 중국식 격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또 작가가 조국으로 돌아와서 낸 ‘계원필경’ 서문에 ‘중화 6년 정월일 전도통순관 시어사내공봉 사자금어대 신 최치원 장주(中和正月日前都統巡官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臣崔致猿狀奏)’라 쓴 것도 올곧이 국문학사에 넣기를 주저하게 한 요소로 보인다. 신라 직함 대신 당나라 관직을 썼기 때문이다.
한국 민중문학파 일부에서는 중국의 부패한 지배세력을 몰아내려는 혁명세력(황소의 군대)에 비수(匕首, 등이 없는 작은 칼)를 들이 댄 문장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도탄(塗炭, 진흙과 숯구덩이)에 빠진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는데 이런 절규를 외면하고 영혼없는 어용(御用) 글을 썼다는 것이다.
5.하지만 이런 논란을 차치하고 토황소격문은 명문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한문학계에서 3대 격문으로 불린다. 다른 2개는 중국 삼국시대 전략가인 제갈량(諸葛亮, 181~234, 촉나라 승상)의 ‘출사표(出師表, 신하가 출전 전 주군에게 올리는 표문)’와 임진왜란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1533~1592, 임란 초기 금산 전투에서 순절)의 ‘마상격문((馬上檄文, 말을 타고 가면서 쓴 격문)’이다.
6.토황소격문에 흔히 붙어 다니는 말이 있다. 반란군의 수장(首將) 황소(黃巢, ?~884)가 이 격문을 읽다가 놀라서 부지불식(不知不識) 간에 침상에서 떨어졌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현재까지 알려진 중국 문헌에 나오지 않는다. 출전은 우리나라 고려시대 관찬 사서 ‘삼국사기(三國史記,1145)’의 ‘최치원 열전’이다.
또 조선 초기 편찬된 관찬 사서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1476), 동국통감(東國通鑑,1485), 조선 중기 유학자 박세채(朴世采,1631~1695)의 글 등에서 나와 광범위하게 퍼진 것이다.
7.후대에 격찬과 비판이 잇따랐다. 고려 무신정권 시기의 최고 문장가 이규보(李奎報, 1169~1241)는 ‘토황소격문’을 읽고 "만일 귀신을 울리고 바람을 놀라게 하는 솜씨가 아니라면 어찌 이 정도에 이를 수 있겠는가(如非泣鬼驚風之手 何能至此)"라고 감동의 평가를 했다.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아들 이함(李涵)이 아버지 사후 간행)’의 주인공이다.
고려 후기 문신으로 ‘제왕운기(帝王韻紀, 1287)’를 쓴 이승휴(李承休,1224~1300)는 “문장으로 어떤 이가 중국을 움직였는가? 청하공 최치원이 바야흐로 영예를 얻었도다”고 평가했다.
8.조선 초 학자이자 문신 서거정(徐居正,1420~1488)이 중심이 돼 편찬한 동문선(東文選,1478)에서는 “우리 동방의 시문집이 지금까지 전하는 것은 부득불 이 문집을 개산비조(開山鼻祖, 시조)로 삼으니 이는 동방 예원(藝苑,예술 동산,즉 문장을 모아놓은 정원)의 본시(本始)”라고 높이 평가했다.
조선 성종 때의 문신 용재(傭齋) 성현(成俔,1439~1504)은 ‘용재총화(傭齋叢話,1525)’에서 “우리나라 문장은 최치원에서 처음으로 발휘되었다”고 격찬했다.용재총화는 성현 사후에 간행한 책으로 ‘용재가 쓰고 모은 여러 이야기를 모아놓은 것’ 이라는 뜻이다.
9.다만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혹평을 한 이들도 있었다. 실학자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를 낸 이덕무(李德懋, 1741~1793)와 조선 후기 정조~헌종 연간 문신 홍석주(洪奭周, 1774~1842, 헌종 때 좌의정)는 “중국에서 유행이 지나 한물간 문체를 모방한 아류(亞流)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최치원(崔致遠, 857~?)=남북국 시대(통일신라)의 문장가. 경주 최씨(慶州 崔氏)의 중시조.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고전소설 ‘최고운전(1580년 전후 창작 추정)’의 주인공이다. 신라 말 고려 초의 ‘신라 삼최(三崔,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중 으뜸이다.
1.신라 47대 헌안왕 원년(857) 경주 사량부에서 최견일(崔肩逸, 생몰 미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생으로 승려 현준(賢俊)이 있다. 이는 삼국사기 기록으로 이 사서에는 고운의 고향을 왕경(王京, 수도) 사량부(沙粱部) 사람이라고 썼다.
하지만 다른 기록, 일연(一然,1206~1289)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본피부(本彼部, ?), 또다른 기록에는 중원경(현 충주) 사량부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또 전래 설화에는 전북 옥구(현 군산시 옥구읍)로도 전한다. 실제 옥구에는 탄생설화와 최치원 관련 지명이 남아 있다.옥구 탄생 설화는 옥구 금저굴(金猪屈)에 사는 금빛 돼지머리를 한 괴수가 최치원의 어머니와 관계해서 낳았다고 전한다. 그곳에는 현재 금저굴, 금저양(金猪洋, 금빛나는 돼지 바다)이 있다. 그래서 옥구읍 광월길 옥구향교 내에는 최치원의 위패를 모신 ‘문창서원(文昌書院)’이 있다. 이 서원 현판 글씨는 1971년(신묘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다.
2.열두살에 당나라로 가는 무역선 해박(海舶, 상선)을 타고 도당(度唐)한다. 고운이 당에 가기 전 아버지 최견일은 "10년 내에 급제(及第, 과거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가서 힘써 하라" 고 격려했다고 한다.
고운은 도당 6년만인 874년 당나라 예부시랑(禮部侍郎) 배찬(裵瓚)이 주관한 외국인 과거시험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한다. 당시 18살이었다. 하지만 2년 동안 관직을 얻지 못하다가 스무살에 현재의 강소성(江蘇省) 남경시(南京市) 율수구(溧水區)인 선주(宣州) 율수현(溧水縣) 현위(縣尉, 종9품)로 보임됐다. 현위는 문자 그대로 미관말직(微官末職)이었다.
한편 신라에서는 27대 국왕 선덕여왕(善德王, 580?~647) 때인 640년 5월 당나라에 처음으로 유학생을 보내 국자감((國子監, 수나라 때 생긴 고등교육기관)에 입학시킨 이후 유학 붐이 일었다. 특히 숙위학생(宿衛學生, 신라 때 10년 기한으로 당나라 국자감에 파견한 유학생)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젊은이가 당나라로 갔으나 빈공과 급제 등 성공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신라말까지 도당 유학생은 2000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3.당나라가 기울기 시작한 800년대 말 중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중 소금을 밀매해 돈을 번 염상(鹽商, 소금업자) 황소(黃巢, ?~884)가 이끄는 반란군 세력이 으뜸이었다.
고운은 878년 미관말직 마저 그만 두고 중국 회하(淮河, 淮水,Huai River, 황허와 양쯔 강 사이 화베이 평원의 강) 남쪽을 관장하는 회남부로 간다. 이후 880년 회남절도부대사(淮南節度付大使)이자 제도행영도통(諸道行營都統)인 고병(高騈, ?~887)를 만나 종8품 관역순관(館驛巡官)으로 들어가 조세 징수, 곡물 운송, 운하 관리 등을 맡는다.
이후 종사관(從事官, 서기)이 되고, 이듬해는 종6품 도통순관(都統巡官, 전황 보고 및 군령 하달 직책)에 올랐다. 고운의 나이 24세 때이다. 이때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를 지어 필명을 날렸다. 고운은 고병 도통 휘하에서 4년 동안 표문(表)·장계(狀)·서한(書)·계사(啓) 등 1만여 편에 이르는 글을 쓰면서 문장가 역할을 톡톡히 했다.
고병은 당나라 유주(幽州, 현 베이징과 텐진 주변지역) 출신으로 제18대 황제 희종(僖宗, 862~888, 황소에게 장안을 빼앗기고 청두(成都)로 도망갔다.) 때 회남(淮南) 절도사, 염철전운사(鹽鐵轉運使)를 지내고, 민란이 일어나자 제도행영도통(諸道行營都統)을 겸임했다.
하지만 고병은 황소 반란군의 기세에 눌려 양주(揚州) 일대를 지키는 데 주력했다. 그러다가 도교에 빠져 군무(軍務)를 소홀히 하다가 자신 밑의 부장(部將) 필사탁(畢師鐸, ?~888)에게 피살됐다.
4.황소의 난 진압에도 불구, 휘청거리던 당나라는 황소의 부장 주온(朱溫, 주전충(朱全忠, 852~912)에 의해 멸망했다. 주전충은 907년 당 20대 황제 애황제(哀皇帝)로부터 선양받아 후량(後粱,907~923)을 세웠다. 시호는 태조 성황제(太祖 聖皇帝)이다. 하지만 칼과 부도덕의 시대, 살부살제(殺父殺弟)의 시대였다. 주전충도 셋째아들이자 서자 주우규(877~913,후량 2대황제)에게 참살당했다. 이후 주우규는 넷째 아우 주우정(881~923, 후량 3대 황제)에게 살해당했다.
5.황소의 난에 종군한 공로로 희종(僖宗, 재위 873~888)으로부터 881년에 비은어대(緋銀魚袋, 5품이상 관리에게 주는 은 장식 띠)를 하사받았다. 또 이듬해에는 도통순관승무랑 시어사내봉공(都統巡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의 직책과 자금어대(紫金魚袋, 3품 이상의 관리에게 하사한 금 장식 띠)를 받았다.
하지만 당나라에서 외국인이었던 고운의 삶은 팍팍함 자체였다. 출세도, 문명(文名)을 날리기도 쉽지 않았다. 강동의 시인 나은(羅隠, 833~909, 당나라 때 문인), 과거 시험 동기인 문인 고운(顧雲)과 교류하며 지냈지만 희망을 찾지 못했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꿈이 사라진 것이다.
6.당나라 생활을 청산하고 28세에 신라(헌강왕 11년)로 돌아오는 귀령(歸寧, 歸鄕)을 선택했다. 고운의 귀국 얘기를 들은 당 희종(僖宗)은 사신 조서를 주고 귀향하게 했다.
고운은 신라에 돌아왔으나 골품제도의 벽은 여전히 높았다. 겨우 말직(末職)인 ‘시독(侍讀) 겸 한림학사(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郎), 지서사감사(知瑞書監事)’라는 외교 문서를 다루는 직책을 받았다.
이후 태산군(太山郡, 전북 태인), 천령군(天嶺郡, 경남 함양), 부성군(富城郡, 충남 서산)의 태수(太守)를 지냈다. 893년에는 견당사(遣唐使)로 임명됐으나 흉년과 도적 횡행으로 길이 막혀 무산됐다. 고운은 이후 당나라에 1회 다녀왔을 뿐이다.
7.신라는 889년 진성여왕(眞聖女王, 865~897, 재위 887~897) 3년부터 농민 봉기가 이어지면서 국기(國基)문란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891년 죽주(竹州, 경기 안성시 죽산)의 기훤(箕萱), 북원(北原, 강원 원주)의 양길(梁吉, 생몰 미상)이 동해안과 중부 지방을 공략, 통제가 어려운 군벌로 우뚝 선다.
이때 기훤 밑에 있던 궁예(弓裔, ?~918)가 양길 세력에 합류해 독자세력 기반을 다지고, 이듬해에는 견훤(甄萱,867~936)이 후백제를 건국하는 등 후삼국 시대가 본격화 하기 시작했다.
고운은 진성여왕 때인 894년 2월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 라는 국정 쇄신책을 올렸으나 진골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6두품이라는 상한 출세(득난, 得難) 직으로 국왕도 제어할 수 없는 진골귀족 권벌 세력의 벽에 막혔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운은 897년 병환이 짙은 진성여왕(그해 12월 훙거, 薨去, 왕의 죽음)이 물러나는 ‘양위표(讓位表)’와 효공왕의 즉위를 알리는 ‘사사위표(謝嗣位表)’를 쓴 후 관직인 아찬(阿飡, 신라 관직 직급 중 6등위, 6두품의 최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난세에 골품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불만과 불운의 시대, 천재의 ‘귀거래(歸去來)’였다.
8.관직에서 물러난 해인 897년(효공왕 원년) 6월 가야산(伽耶山) 해인사(海印寺, 경남 합천)로 들어갔고, 이후 은둔 주유(周遊, 두루 떠돌아 다니는 것) 생활을 택해 전국을 유랑했다.
왕경인 경주의 남산, 강주(剛州, 현 영주)의 빙산, 합주(陜州, 현 합천)의 청량사, 지리산의 쌍계사(雙溪寺), 합포(현 창원 마산 일대)의 별서(別墅, 별장) 등에서 지냈다.
후삼국이 쟁패하던 말년에는 가족을 데리고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隱居)했다. 908년 ‘신라 수창군 호국성 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고운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아 언제 영면(永眠)했는지는 모른다.
고운은 은거하면서 고려 태조 왕건((王建, 847~918, 고려 태조)의 흥기(興起)를 빗대 개국할 것임을 예단했다. 왕건에게 보낸 서찰에서 "계림(雞林, 신라 경주)은 누른 잎이요 곡령(鵠嶺, 고려 송도)은 푸른 솔(松)-雞林黃葉松(계림황엽송) 鵠嶺靑松(곡령청송)"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고려 제8대 대왕 현종(顯宗, 992~1032, 재위 1009~1032, 왕건의 손자로 사생아였지만 강조의 정변으로 즉위) 은 고운에게 내사령(內史令, 고려시대 중요 신하에게 주는 명예직)을 증직(贈職)했다. 또 시호(諡號)를 추증해 문창후(文昌侯)를 내렸다.
9.신라 말(894) 진성여왕에게 올린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는 널리 알려지면서 고려와 조선시대 정치가들 상소문(上疏文)의 전범(典範)이 됐다. 수많은 상소문의 원조인 셈이다.
경남 하동 쌍계사에 있는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대한민국 국보 47호)’는 고운이 직접 짓고 쓴 것으로 유명하다. 고운의 필적을 직접 볼 수 있다.
최치원의 생애를 허구적으로 소설화 한 고전소설 ‘최고운전(崔孤雲傳, 조선 1656년 이전에 쓴 작자·연대 미상 소설)’은 일본에서 조선어 역관 양성소 교재로 쓰였다.
일본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8)에 활동한 외교관이자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1755)가 쓰시마 후추 번에 세운 조선어 역관 양성 소학교의 조선어 교재로 ‘임경업전’과 함께 썼다고 한다.
한편 이본(異本)이 200종 이상 있는 최고운전은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언어),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국어) 영역에 출제됐다.
10.고운은 고려 현종 때 문창후로 봉해진 이후 고려말 이후 정읍 태인 무성서원(1483년 재건) 등 전국 19곳의 서원에 봉안됐다. 1561년부터 숙종 때까지 경주 서악서원, 함양 백연서원, 안동 용강서원, 군산 염의서원과 문창서원, 1623년 서악서원이 사액됐다.
조선 선조 때 부성사가 위패를 모신 문중 사우로 처음 건립됐고, 1737년에 광주 지산재가 설립됐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경북 의성 고운사 입구에는 최치원 문학관이 건립됐고, 고운사에서 ‘최치원문화제’가 열린다.
11.중국 장쑤성 양저우시 수서호 남문 밖 당성(唐城) 유허지에는 최치원기념관이 있다. 부산 해운대구와 공동으로 2007년 한중 문화교류사업으로 세웠다. 기념관에는 고운 시(詩) ‘범해(泛海)’가 새겨져 있다. 범해는 2013년 한중정상회담에서 인용되기도 했다.
‘돛을 달고 푸른 바다에 배 띄우니/ 바람 불어 만리 길 나아가네// 해와 달은 허공 밖에 있고/ 하늘과 땅은 태극 가운데 있네/ 봉래산이 지척이라 가까이 보이니/ 나 또한 신선을 찾아 가리라.’
12.부산 해운대 동백섬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시비(詩碑)와 동상이 있다. 시비는 노산 이은상(李殷相1903~1982)이 번역한 ‘봄 새벽’ 등 9편이 조각돼 있다.
경남 함양군 함양읍 대덕리에는 고운이 가꿨다는 상림(上林,1962년 천연기염물 지정)이 있다. 이곳은 현재 역사공원으로 고운기념관이 들어서 있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