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특성 없는 남자-20세기 독일 1위 소설의 첫 문단은 1차 세계대전 전후 유럽 모순을 담백하게 그려낸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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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없는 남자-20세기 독일 1위 소설의 첫 문단은 1차 세계대전 전후 유럽 모순을 담백하게 그려낸다.

지성인간 2025. 1. 20.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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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특성없는 남자'는 번영과 퇴폐,빈부격차의 벨에포크를 지난 유럽이 전쟁과 파시즘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상황을 묘사한 걸작으로 꼽힌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북부 프리드베르크(Fredberg) 출신 현대 미술가 야나 오일러(Jana Euler, 1984~현재)가 2012년 그린 '유럽을 파시즘으로 되돌리지 않고, 하나 이상이 되는 법'. 두 개의 지구를 저글링하는 부풀어 오른 머리를 가진 명상하는 이를 통해 100년 전과 비슷한 현재 유럽의 복잡한 상황을 그렸다. www.frieze.com

1부 일종의 머리말 1. 여기서는 어떤 일도 주목할만한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대서양 상공에 기압계상 최저기압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기압은 러시아 상공의 고기압을 향해 최대쪽으로 이동했는데, 이 고기압을 북쪽으로 비켜갈 조짐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등온선과 등서선은 제몫을 다했고, 기온은 연평균 온도뿐 아니라 가장 추운 달과 가장 따뜻한 달의 온도, 비주기적인 월간 온도의 변동과도 통상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일출과 일몰, 월출과 월몰, 달과 금성과 토성환의 빛 변화, 그리고 다른 많은 주요 현상들도 천문학 연감의 예측과 일치했다. 대기 중의 수증기장력은 최고치를 나타냈고, 대기 습도는 낮았다. 약간 구닥다리 표현같지만 실재하는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정확히 묘사하자면 때는 바야흐로 1913년 8월의 어느 아름다운 여름날이었다.  자동차들이 깊고 좁은 거리에서 얕고 환한 과장으로 질주했다. 어두운 보행자 무리는 구름 형태의 실타래를 형성하고 있었다. 한층 강렬한 속도의 선들은 다소 느슨하게 우직이는 보행자 무리를---."(로베르트 무질 저, 박종대 역, 문학동네, 2023)

1930년 11월 저자의 50번째 생일 3주 후에 독일 베를린 로볼트(Rowohlt)출판사에서 나온 소설 '특성없는 남자' 초판본.www.google.com

1.천문학을 이용해 1913년 유럽 정세를 서술하고 있다. 공화국과 왕국, 제국은 물론 가톨릭, 정교회, 프로테스탄트, 이슬람, 유대교 등이 뒤범벅된  중동부 유럽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아무일도 없고 천문학 연감과 일치할 정도로 모든 것이 평온하다.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한 해 같다. 이는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다. 1913년 유럽은 모순이 뒤범벅돼  비등점을 찍고 있었다. 기압을 통해 중부 유럽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몰락과 유럽 질서의 대 변동을 예견하는 보기드문 첫 문단이다. 고기압(갈등 비등점의 유럽),러시아(제국 붕괴), 질주하는 자동차(무기발달), 느슨한 보행자(이데올로기 정체), 교통사고(1차세계대전) 등이 적절히 배치됐다. 불온한 시대에 맞게 매우 긴밀하고 담백한 문체다. ‘에세이즘’이라고 불리는 저자의 문체가 독특하고 매력적으로 반영된 첫 문단이다. 본문에 나오는 *.등온선(等溫線)은 지도상에서 기온이 같은 지점을 연결한 선으로 지역의 온도변화를 파악한다. *.등서선은 평균온도가 같은 값의 지점을 연결하는 선 *.수증기장력(水蒸氣張力)은 대기 중의 수증기의 압력이다.

소설 '특성없는 남자'는 유럽의 모순이 폭발한 1차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의 광기와 봉건 제국의 종말을 예견했다.오스트리아 화가 테오도르 자슈 (Theodor Zasche,1862~1922)가 1914년 전후 그린 전쟁 채권 매수를 독려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선전 포스터.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http://cdn.loc.gov

2.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Der Mann ohne Eigenschaften,1930)'는 20세기를 대표하는 걸작이자 미완의 대작(大作)이다. 위대한 현대 풍자 작품 중 하나이자 모더니즘(19세기 말~20세기 중반 주요 예술 사조)소설의 백미로 꼽힌다. 그래서 모더니즘 문학의 3대 정전(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올라 있다. 
소설은 1913년부터 17여년의 구상과 집필을 거쳐 1930년 11월 저자의 50번째 생일 3주 후에 독일 베를린 로볼트(Rowohlt)출판사에서 1권이 처음 나왔다. 이어 1933년 2권까지 나왔고, 독일 문학계의 권위있는 문학상인 '괴테상'을 받았다. 그후 1938년 3부의 속권을 출간하기로 했지만 교정쇄를 다 확인하기도 전에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병합되면서 출판사와 저자 모두 망명길에 올랐다. 이어 나치 독일은 출판 금지와 금서로 지정했고, 저자 사망으로 끝내 미완성됐다. 

소설 '특성없는 남자' 의 배경 이중제국-헝가리 화가 에드먼드 툴(Edmund Tull,1870~1911)이 1895년 그린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Franz Joseph,1830~1916)의 헝가리 왕 대관식(1867년 부다페스트 마치시 성당)모습. 오스트리아 화가 에두아르트 폰 엥게르스(1818~1897)의 원본 그림을 모사한 작품이다.https://de.wikipedia.org

남겨진 원고는1943년 두 번째 권의 두 번째 부분으로 나왔지만 2차세계대전으로 독자와 평단의 관심에서 벗어났다.
이후 미완성 소설의 '완전한' 독일어판은 저널리스트(편집자) 아돌프 프리제(Adolf Frisé, 1910~2003,1974년 비엔나 대학 교수)가 유고를 정리, 1951년부터 출판했다.20세기 유럽 문학을 대표하는 걸작이지만 '끝없는 이야기'의 완간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소설이 급부상한 것은 1953년 뉴질랜드 출신의 게르만 연구 학자이자 여성 번역가인 에인 윌킨스(Eithne Wilkins,1914~1975)와 오스트리아의 작가이자 번역가 에른스트 카이저(Ernst Kaiser,1911~1972)가 아돌프 프리제(Adolf Frisé, 1910~2003)의 작업물을 번역한 것이 계기였다. 영국 런던 마틴 세커앤와버그(Martin Secker & Warburg, 1953)에서 'Man Without Qualities'로 나온데 이어 그해 미국에서도 출판됐다. 1999년 르 몽드 선정 '세기의 100권의 책',  1999년 독일계작가,학자들이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독일어 소설' 1위에 올랐다.

오스트리아 화가이자 조각가, 일러스트레이터 루트비히 코흐(Ludwig Koch, 1866~1934)가 1915년 그린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군사 지휘관들과 진군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1830~1916, 재위 1858~1916,가운데 흰말 탄 이)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Wilhelm II, 1859~1941,재위 1888~1918, 왼쪽). www.dorotheum.com


3.이 소설은 형식과 구조는 물론  이야기 전개도 파격이다. 마치 미리 형식, 틀을 잘 짠것 처럼 느껴질 젓도다. 특히 깊은 사유의 에세이를 장면 단위로 나누고 소제목을 상세하게 달았다.그리고 어떤 내용이 이어질지를 미리 알려주는 구조를 만들었다. 그래서 ‘건너뛰어도 되는 장(2부 28장)’, ‘여담(68장)’ 등처럼 뛰어넘고 읽어도 되는 장을 구분했다. 기존 소설 작법인 서사나 사건 위주의 서술에서 과감히 탈피한 것이다. 이는 서사적 이야기를 파괴하고 에세이 파편 형식의 글을 전개하는데 좋은 방식이다. 이런 형식과 구조를 완성한 뒤에 사유(思惟,  thinking)를 제1덕목으로 꼽고, 글을 전개한다. 그래서 소설을 읽다보면 인간 행태, 진리 도덕뿐만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이 사유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른바 ‘사유 소설’의 전형이다. 이때문에 소설 ‘특성없는 남자‘는 당대와 그이후 '모더니스트 소설(modernist novel)'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소설 '특성없는 남자'에 등장하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Wilhelm II, 1859~1941,재위 1888~1918 )와 첫 번째 아내 아우구스타 빅토리아(Augusta Victoria,1858~1921).작가 미상.https://en.wikipedia.org

소설 제목 '특성없는 남자'에서 특성은 개성, 혹은 자질이 없다는 뜻이 아닌 특정의 무엇인가로 유형화 할 수없는 것을 뜻한다. 제목 자체가 반어법으로 특성, 자질이 없는 게 아니라 충분히 갖추고 있는데 실천이 어그러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제목이 여러가지 뜻을 내포하듯이 소설 속 아이러니와 은유를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상징과 비유, 역설, 우화적 표현이 많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똥같은 별볼일 없는 것, 즉 배설물의 뜻을 가진 카카니아(Kakania,약칭 카카)로 쓴다. 카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중 군주국을 지칭한다. K는 제국(kaiserlich), 왕실(königlich)의 첫글자다. 카카는 부패한 낙관주의와 무의식적인 사악함, 비이성주의를 뜻한다. 이밖에 고대 그리스 제자로 아카데메이아의 창설자 플라톤(Platon,BC427~BC347)의 심포지움(Symposium)에서 나오는 사랑의 대사제(프라톤 스승 소크라테스의 여사제이자 현명한 여교사)인 디오티마(Diotima)가 저급한 상류사회 부인(에르멜린다 투치,Ermelinda Tuzzi)으로, 로마 순결한 처녀여신 보니데아(Bonadea)가 매춘부 이름으로 등장한다. 아가타도  착한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Agathe)다. 그리스어 아가토스(agathos)다. 

독일 화가 오거스트 리터 폰 마이슬(August E. Ritter von Meissl, 1867-1926)이 그린 1차 세계 대전 중 유럽에서 가장 긴 포위전인 '1차 프리미실 공방전(First Przemyśl Fortress siege)'. 폴란드 남동부 산 강에 있는 요새 도시 프리미실(Przemyśl Fortress)에서 러시아군의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 포위전(1차, 2차)이다.러시아군은 1914년 9월 16일 포위해 요새를 점령하려 했으나 1만여명의 사상자를 낸 채 10월14일 격퇴당했다. 하지만 러시아군은 11월5일 다시 포위를 시작(Second siege), 보급로를 차단해 오-헝연합군은 5만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궁지에 몰렸다. 이에 오-헝연합군은 모든 식량과 자재를 폐기하고 항복하라는 사령부 지침에 따라 1915년 3월23일 러시아군에 항복했다. www.invaluable.com

4.소설은 19세기 말~20세기 초의 퇴폐와 번영, 유럽의 모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몰락을 완전하게 기록해낸 작품이다. 서구에서 어리석음의 시대(1차 세계대전을 잉태한 해)라 부르는 1913년 오스트리아 비엔나가 배경이다.1차세계대전으로 유럽 질서와 가치 붕괴에 대한 자의식으로  쓴 장송곡같은 소설이다. 겉으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몰락에 대한 애잔함과 가치 붕괴를 그렸지만, 체제가 정신적 무정부 상태와 혼돈으로 천천히 붕괴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파시즘을 받아들인 사회를 고발하는 웃지 못할 희극소설이다. 한편 19세기말~20세기 초 오스트리아 비엔나는 봉건체제 속에서 이념과 종교의 범람,예술의 용광로 같은 곳이었다. 유럽의 모순이 세기말  비엔나에 집약된 것이다. 유명시인이자 극작가 후고 폰 호프만스탈(Hugo von Hofmannsthal, 1874~1929), 소설가이자 극작가 아르투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1862~1931),  20세기 클래식 음악의 최고 거장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1874~1951, 1936년 미국 이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작곡가 겸 지휘자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1860~1911), 화가 에곤 쉴레(Egon Schiele, 1890~1918),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 화가 오스카 코코스카(Oskar Kokoschka, 1886~1980)등 예술가의 무대였다.
또 비엔나는 범독일주의(독일과 오스트리아 통합)와 유럽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반 유대주의 부상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반유대주의자들의 본거지답게, 역설적으로 유대주의 깃발도 펄럭였다. 저널리스트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  시오니즘의 주창자) 등 유대인 지식인들의 이스라엘 건국 운동도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소설 '특성없는 남자'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독일 프랑크푸르트 북부 프리드베르크 출신 현대 미술가 야나 오일러(Jana Euler, 1984~현재)의 2012년 작품 '자질이 없는 남자에서 사명을 가진 남자로'. 출처=브뤼셀 아티스트 디펜던스.

5. 등장인물은 주인공 울리히(Ulrich)와 파트너 레오나(버라이어티 쇼의 콜걸), 여동생 아가타(Agathe), 상류사회의 유부녀 보나데아, 미용실 여인 디오티마(Diotima, Ermelinda Tuzzi 에르멜린다 투지)와 남편으로 고위공무원 튜지(Tuzzi), 보수적인 현실 정치가 레인스도프(Leinsdorf )백작, 비즈니스 거물이자 지적인 작가 폴 아른하임(Paul Arnheim,디오티마 추종자), 디오티마의 종업원 라셀(Rachel) 과 솔리맨(Soliman), 상급기관 군장성 스튬 반 보드베어(Stumm von Bordwehr) 장군 등이 나온다.
또  망상가로 섹스중독자인 매춘부 살인자 모스브루거(Christian Moosbrugger), 울리히의 친구 클라시스(Clarisse) 와 발터(Walter) 부부, 울리히의 지인으로 유대안 은행가 레오 피셜(Leo Fischel)과 딸 젤다(Gerda), 젤다가 가입한 반유대 단체(기독교 민족주의)의 활동가 한스 셉(Hans Sepp), 그의 아내 클레멘타인(Klementine), 울리히 여동생 아가타의 남편 고티리에브 하가우어(Gottlieb Hagauer) 교수, 아가타의 조언자 교육자 오거스트 린드너(August Lindner)

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인 1913년 전후 중동부 유럽 지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현재의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등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있는 광범위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https://en.wikipedia.org

6.줄거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군주 체제 속 비엔나의 상류와 하류 사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야기다. 1부는 '일종의 머리말'로 성(姓)도 없는 젊은 지식인 울리히를 통해 이야기하는 유럽인의 자기 조롱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의 오스트리아의 방황(정체성 위기, 영적, 문화적, 정치적인 측면)이 펼쳐진다.  주인공 울리히는 심각한 정체성 위기 속에 군주제의 영향력 있는 집단의 우두머리로 1918년 즉위 70주년을 맞는 프란츠 요제프1세(Franz Joseph,1830~1916, 재위 1858~1916) 황제 기념식(병행 캠페인) 준비단에 참여해 활동한다.
2부는 '비슷비슷한 일이 일어나다'로 울리히는 여동생 아가타도 만난다. 병행 캠페인인 1918년 열릴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통치 70주년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통치 30주년 보다 더 성대하게 계획한다. 이는 아이러니다. 1914년 1차 세계 대전은 곧 발발하고, 행사는 결코 열리지 않을 것인데도 소설은 이를 무시한다. 울리히는 여동생 아가타를 샴쌍둥이, 소울메이트로 비유하며 근친상간적 행위를 한다. 이는 전통적인 부르주아 도덕 규범을 부수는 것이다. 이후 소설은 미완성 노트, 초안, 여담으로 끝난다.

1938년 3월15일 오스트리아 비엔나 호프 부르크 궁전 앞 공간인 헬덴플라츠(Heldenplatz)에서 안슐루스(Anschluss, 독일과 오스트리아 합병)를 선언하는 아돌프 히틀러. 히틀러의 공식 사진작가이자 출판인 하인리히 호프만(Heinrich Hoffmann, 1885~1957) 작품. 호프만은 2차세계대전 후 전범으로 잡혀 10년형을 받았고, 유대인 약탈 미술품 모두를 압수당했다. 호프만의 두 번째 부인(1929년 재혼)으로 작곡가인 에르나 그뢰브케(Erna Gröbke, 1904~1996)는 뮌헨 스튜디오 운영 당시 조수 에바 브라운(Eva Anna Paula Braun, 1912~1945)을 히틀러에게 소개했다. 워싱턴 DC 미국 국립기록보관소 소장

7.'특성없는 남자'는 출간 당시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당대 문인들의 호평이 이어지고 노벨상 후보에도 올랐다. 1932년에는 베를린에서 로베르트무질협회가 설립됐다. 하지만 평단의 격찬에도 불구 상업적으로는 실패했다. 책이 팔리지 않자 가난한 생활에 익숙해 있던 저자도 크게 낙담한다. 그래도 저자는 이 소설에 대해 "타인의 판단에 맡기지 말고, 직접 읽기를 권한다"고 말했다.  
베를린 유력 일간지 보시안신문(Vossische Zeitung, 1704년 허가, 1934년 폐간)은 "우리 시대의 '빌헬름 마이스터(괴테의 소설)'의 책"이라며 "생각의 혼란을 풀고, 선별하고, 설명하는 책"이라고 썼다. 오스트리아 저널리스트로 극작가이자 평론가인 오스카 마우루스 폰타나(Oskar Maurus Fontana , 1889~1969)는 "지난 수십 년 동안의 독일 소설 중 이보다 더 똑똑하고 지적으로 탄탄하며, 라틴계의 사고와 감정이 명확하게 담긴 소설은 없었다"고 격찬했다.
독일 소설가로 1929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은 1932년 12월 특성없는 남자 2권 출간을 계기로 “독일 소설의 발전, 고양 및 정신화에 대한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 시적 사업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행스럽게도 이 반짝이는 책은 더 이상 소설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비교할 수 없는 다른 것"이라고 호평했다.
독일  튀빙겐 에버하르트 카를대학 교수로 현대 문학평론가인 잉카 뮐더-바흐(Inka Mülder-Bach, 1953~현재)는 "유럽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시작(詩作) 소설 중 하나"라며 “거의 어떤 독자도 이 소설의 매력에 저항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1차세계대전 전 발칸의 혼란-1878년 그린 보스니아 사라예보 전투 중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점령 에 맞선 보스니아 무슬림의 저항을 그린 1878년10월5일 사라예보 전투. 프랑스와 영국에서 활동한 독일 태생의 화가 고드프로아 뒤랑(Godefroy Durand, 1832~1896)이 런던신문 'The Graphic'에 연재한 작품. https://en.wikipedia.org


8.체코 출신 포스트 모더니즘 소설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1929~2023)는 "소설 역사상 사유가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작품으로 ‘사유(思惟)소설의 정수‘라며 "세기를 통틀어 비할 데 없이 탁월한 실존의 백과사전"이라고 언급했다. 
미국 뉴욕잡지 '더 뉴요커'는 서평에서 “지고의 예술성과 최상의 흥미를 자아내는 대작”, 미국 워싱턴DC에서 나오는 뉴리퍼블릭(The New Republic)은 “(특성없는 남자 작가)무질은 조이스(아일랜드-영국), 프루스트(프랑스), 카프카(체코), 스베보(이탈리아)와 함께 유럽 소설가들의 위대한 성좌를 이루고 있다.” 고 썼다.
독일 시인 마이클 호프만 (Michael Hofmann, 1957~현재)은 "볼테르(Voltaire,1694~1778, 프랑스 철학자) 만큼 신랄하고,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 1854~1900, 아일랜드 출신 영국 작가)만큼 재치 있고 ,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1862~1931,오스트리아 극작가) 만큼 음란하다"고 말했다.
영국 저널리스트이자 편집자 로버트 맥크럼(Robert McCrum, 1953~현재) 은 '특성없는 남자'를 20세기 최고의 책 10권 중 하나로 선정하면서 "이 책은 거대한 기계 속에서 길을 잃은 작은 인간의 곤경에 대한 명상으로 의심할 여지 없이 유럽의 20세기 걸작 중 하나"라고 말했다. 
독일 문학평론가 월터 판타(Walter Fanta,1958~현재) 클라겐푸르트대 교수는 "가장 중요한 독일어 모더니스트 소설 중 하나이자 독특한 문학-철학적 실험으로 자리매김했다"고 말했다. 한편 1996년 미국 알프레드 크누프(Knopf)출판사는 새로운 영어 번역본을 출판, PEN 번역상 특별상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케른텐주의 주도이자 가장 큰 도시 클라겐푸르트 암 뵈르터제(Klagenfurt am Wörthersee)의 무질 하우스에 있는 로베르트 무질 초상.

#.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 1880~1942)=오스트리아 소설가로 에세이즘 소설의 선구자. 20세기에 발표된 가장 중요한 독일어 소설 1위 저자. 20세기 '모더니스트 소설(modernist novel)'의 권위자.

로베르트 무질의 아버지 호프라트 알프레드 에들러 폰 무질(Alfred Edler Musil, 1846~1924) 브르노공과대학 기계공학과 교수와 어머니 헤르미너 베르가우어(Hermine Bergauer, 1853~1924). https://en.wikipedia.org

1.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최남단 동알프스 케른텐(Kärnten) 클라겐푸르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호프라트 알프레드 에들러 폰 무질(Alfred Edler Musil, 1846~1924, 브르노공과대학 기계공학과 교수)는 엔지니어였고, 어머니 헤르미너 베르가우어(Hermine Bergauer, 1853~1924)는 부유한 유대계 딸이었다. 가족은 어머니가 데려온 의형 하인리히 라이터(1881년 합침)가 있다. 또 무질이 태어나기 전 유아기에 사망한 누나 엘자도 있다. 체코의 동양학자이자 탐험가 알로이스 무질(Alois Musil, 1868~1944, 흔히 '체코의 로렌스'로 불림)과는 사촌 사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최남단 동알프스 케른텐(Kärnten) 클라겐푸르트에 있는 로베르트 무질의 생가와 안내판(별도 찍은 사진 합성) 모습.https://en.wikipedia.org

생후 몇달도 안된 이듬해 무질 가족은 체코 공화국의 우스티나트라벰 지방에 있는 도시 보헤미아의 호무토프(Chomutov, 프라하 북서쪽)로 이주했다가 다시 슈타이어(Steia)로 이사한다. 12살 무렵부터 무질은 체구는 작았지만 레슬링을 잘해 부모는 군인으로 크기를 원한다.  이에따라 부르겐란트주의 주도로 철의 도시라는 뜻을 지닌 아이젠슈타트(Eisnstod,1892~1894)의 군사학교에 이어 '변경,국경'의 뜻을 지닌' 흐라니체(Hranice, 1894~1897, 현 체코 올로모우츠 지역)의 군사 기숙 학교에 보낸다. 졸업한 해인 1897년 가을에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군사아카데미에서 공부했고, 직후 브르노공과대학으로 간다. 그러나 무질은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다. 낮에는 공학, 밤에는 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것이다.
공학 공부를 마친 무질은 1902~1903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칼 폰 바흐 기계 공학 교수의 무급 조수로 일했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결국 베를린 대학교에서 당대 유명 철학자 칼 슈툼프(Carl Stumpf, 1848~1936) 교수 지도 아래 철학, 심리학, 수학, 물리학을 공부했고, 스물 여덟살 무렵인 1908년 오스트리아 물리학자이자 철학자 에른스트 마흐(Ernst Waldfried Josef Wenzel Mach, 1838~1916)에 관한 과학철학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늗다.

로베르트 무질의 흐라니체(Hranice, 현 체코 올로모우츠 지역)군사학교 시절(1894~1897) 모습.https://en.wikipedia.org

2.무질은 서른 네살무렵인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8월20일 군에 입대, 티롤과 이탈리아 볼차노의 군사령부에서 1917년 말까지 복무했다. 이 때 프라하를 방문,  독일어를 쓴 유대인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 대표작 '성', '변신' 등)를 만나 격려를 받는다. 1차 세계대전은 독일ㆍ오스트리아 동맹국의 참패로 끝나고 무질도 일상으로 복귀했지만 제국은 해체된다. 무질은 앞서 1910년대 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사망을 예견했었다.
무질은 1923년 11월 오스트리아 독일 작가보호협회 부회장에 선출된다. 1927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했지만 좌우 권위주의에 반대한 개인주의자였다. 이는 1935년 반파시스트 문화 수호를 위한 국제 작가 대회에 참석, 국가, 계급, 민족, 종교의 요구를 비판하고 권위주의 타파를 주장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1930년과 1933년 '특성 없는 남자' 를 1,2부 출간한다. 이때(1932년) 베를린에서 1929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 소설 몽유병자로 유명한 헤르만 브로흐(Hermann Broch, 1886~1951)  등이 주선해 '로베르트 무질 협회(Musil Society)'가 설립된다.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 대표작 소설 '마의 산')과 헤르만 브로흐(Hermann Broch, 1886~1951)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무질을 금전적으로도 돕기까지 한다. 1929년 무질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Gerhart Hauptmann,1862~1946,191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을 받는다.

말년의 로베르트 무질과 7살 연상의 부인 마르타 마르코발디 하이만(Martha Marcovaldi, 1874~1949).www.google.com

4.무질은 첫 뮤즈는 피아니스트이자 산악인인 발레리 힐퍼트 (Valerie Hilpert)였다. 하지만 둘은 이뤄지지 못했다. 무질은 이름없는 여성들과도 수없이 만났다. 1902년 3월에는 수은 연고로 매독 치료를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옷가게 종업원 헤르미네 디에츠(Hermine Dietz, ?~1907)와 수년간의 관계를 시작했는데 헤르미네는 아이를 매독 유산했고, 곧이어 1907년 사망한다.
그 와중에도 두 아이의 어머니이자 유부녀로 7살 연상인 마르타 마르코발디 하이만(Martha Marcovaldi, 1874~1949)을 만난다. 마르타는 1911년 이혼하고 무질과 결혼한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가 집권하자 아내 마르타와 독일을 떠나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갔고,  나치에 오스트리아가 합병되는 안슐루스(Anschluss, 1938년 3월12일)가 일어나자  몇 달 후 아내 마르타(Martha) 등 가족과 비엔나를 떠나 스위스로 망명했다. 최종 정착지는 제네바 근처 첸 부제리스(Chêne -Bougeries)였다. 나치는 무질의 책들을 금서로 지정한다. 

오스트리아에서 1980년 로버트 무질(Robert Musil, 1880~1942)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발행한 우표.

5.1936년 수영을 하던 중 첫 뇌졸중을 겪는 등 건강 이상 신호를 감지한 무질은 스위스로 망명했지만 지병이던 뇌졸중과 계속되는 생활고를 겪었다. 무질은 1933년 나치의 점령을 1914년의 1차세계대전보다 더 끔찍한 것으로 규정하고 '특성없는 남자'의 다음편을 쓸 채비를 했지만 작업은 순탄하지 못했다. 
그런데 1942년 '특성 없는 남자' 3부를 인쇄소에 주었다가 다시 원고를 회수해 작업을 진행하던 4월 어느날 갑자기 쓰러졌다. 아침 체조를 하던 중 허혈성 뇌출혈로 쓰러져 끝내 영면했다. 향년 62세. 하지만 전쟁중이어서 장례는  치르지 못했다. 미망인 마르타는 1946년 7월까지 제네바 아파트에 무질의 유품과 유골 항아리를 보관했고, 미국 필라델피아에 살던 딸을 만나러 떠나기 전에 아파트단지  내 무성한 정원 가장자리에 유골을 뿌렸다. 이후 제네바 로이스 묘지(Cimetière des Rois)에 묘원이 마련됐다. 앞서 마르타는 엄청난 양의 유고 중 일부를 1943년 두서없이 출판했다.
무질의 작품은 사망이후 전쟁의 패전과 그 후유증 등으로 독일어권 국가에서조차 거의 잊혀졌다가 1950년 초 영어권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 1953년 본격 번역됐다. 주요작품(소설)으로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Die Verwirrungen des Zöglings Törleß,1906)', '합일(Vereinigungen,1911)', '세 여인(Drei Frauen,1924)', '특성 없는 남자(Der Mann ohne Eigenschaften ,1930, 1933, 1943)' 등이 있다.

오스트리아 튀빙겐의 칼과 엘리자베스 코리노 정원에 있는 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 1880~1942) 가면 형식의 흉상. https://en.wikipedia.org

6.1970년 프랑스계 독일 문학가 마리 루이스 로스(Marie-Louise Roth,1926~2014)는 '오스트리아 문학과 문화-로베르트 무질 연구를 위한 작업기구(AfÖLK)를 독일 자를란트주에 있는 자를란트 대학교(Saarland University)에 설립했다. 루스는 또 1974년 비엔나에서 당시 오스트리아 총리(1970~1983년 총리 역임) 브루노 크라이스키(Bruno Kreisky, 1911~1990)를 후원자로 삼아 '국제 로베르트 무실 협회(International Robert Musil Society, IRMG)'를 설립, 2001년까지 회장으로 활동했다.
2014년 사우스 티롤 주립 문화 및 지역 역사 박물관에서 '죽음의 노래-로버트 무실(Robert Musil)과 제1차 세계대전'를 전시회가 개최됐다. 클라겐푸르트(Bahnhofstrasse 50)에는 무질(Robert Musil) 문학관이 있다. 1956년에 비엔나-오타크링(16구)의 '무질플라츠(Musilplatz, 무질 광장)'에 명명됐다.(콘텐츠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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