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팡세-‘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쓴 철학 산문의 첫 문단은 쉬운 말의 난삽한 만연체로 전개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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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세-‘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쓴 철학 산문의 첫 문단은 쉬운 말의 난삽한 만연체로 전개된다

지성인간 2023. 10. 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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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머리말 1-(105) 어떤 이에 대해 타인의 판단을 물을 때 우리가 이 질문을 제시하는 방식에 따라 그의 판단을 왜곡시키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누군가가 <내가 보기에 그것은 훌륭하다, 그것은 모호하다> 혹은 이와 유사한 의견을 말하기라도 하면 그것은 상대방의 상상력을 이 판단으로 이끌어가거나 아니면 반대의 방향으로 자극하게 된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은 편이 더 낫다. 그래야만 상대방은 있는 그대로, 다시 말해 그 당시의 상태대로,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내지 않은 다른 상황들이 적용한 데 따라 판단할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덧붙인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다만 우리가 잠자코 있을 때 이 침묵에 사람들이 부여하고 싶어지는 의미나 해석에 따라, 또는 그 사람이 관상가라면 우리 얼굴의 표정과 모양새 그리고 목소리의 음색으로 추측하는 바에 따라, 이 침묵이 그 나름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만, 하나의 판단을 그 본래의 자리에서 떨어뜨리지 않기란 이다지도 어렵다. 아니, 그보다도 판단은 이토록 허약하고 불안하다.”(블레즈 파스칼 저, 이 환 옮김, 민음사, 2003)

민음사가 2003년 펴낸 ‘팡세‘ 표지 그림. 프랑스 화가 조르주 드 라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952)의 ‘불꽃과 함께 한 막달라 마리아‘로1638~1640년 사이 그렸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 소장. photo by wikipedia

1.철학 산문의 도입부치고는 쉬운 전개다. 하지만 난해하지 않은 이야기를 난삽하게 쓴 만연체의 도입부다. 원문 그대로 해석해서인지 번역문 역시 어렵게 읽힌다. 숨막히게 긴 문장을 읽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할 정도다. 첫 문단이어서인지 이렇다 할 철학적 사유나, 상징, 은유는 쓰이지 않았다. 문체적으로 참고할 정도가 아니다.

2.블레즈 파스칼의 ‘팡세(Pensées,1669)’는 서구 철학 산문의 걸작(傑作)이자 프랑스를 대표하는 랜드 마크 저서 중 하나다. 특히 세계 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기독교적 철학 사유가 담긴 ‘사색의 교과서’다. 
팡세는 쪼개듯 끊은 짧은 글(단장·斷章)이 모두 924편 실려 있다. 프랑스어로 사상, 생각, 회상, 금언, 혹은 사색집이라는 뜻이다. 작가 사후 유족이 메모를 발견,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원고를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영어로는 ‘Thoughts’로 번역되기도 한다.
초판은 사후 7년 만인 1970년(혹은 1669년) 나온 포르 루아얄(파리 베르사유 근처) 판이다. 유족들이 파스칼의 유고(遺稿)가 발견될 때마다 넘겨주는 바람에 첫 판본이 늦어졌다. 포르 루아얄은 ‘포르 루아얄 데 샹’(Port Royal des Champs) 수도원으로 가톨릭 개혁파 얀세니즘(Jansenism, 근대 첫 신학 개혁 운동)의 본산 수도원이다.
초판 제목은 ‘Pensées de M. Pascal sur la religion, et sur quelques autres sujets, et sur quelques autres sujets(종교 및 기타 문제에 관한 파스칼 씨의 여러 사상)’이다. 

1670년 파리에서 나온 '팡세' 표지 다음장.photo by wikipedia

3.파스칼은 1662년 사망 전 책의 제목, 순서 등을 정하는 작업을 시작했을 것으로 보고 있으나 유족들은 흔적은 찾지 못했다. 이에 초판본은 누나 프랑수아즈 길베르트 페리에(Françoise Gilberte Périer, 1620~1687)의 아들(파스칼의 생질甥姪에티엥느 페리에(Etienne Perier, 1642~1680)가 서문을 썼고, 제목도 정했다 이후 나온 책 대부분은 초판 ‘Pensées’을 취했다.
초판본은 난해한(?) 철학적 사유를 담은 책이어서 출간 초기 주목받지 못했다. 지식인이 골똘한 사유없이는 내용 파악이 쉽지 않아서 읽기에 어려운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성과 자아의 가치에 대한 사색 등이 독자들에게 다가와 스테디셀러가 되면서 수많은 판본이 나왔다.
첫 영역은 파리에서 나온 초판보다 1년 이상 빠른 1688년 영국 런던에서 존 워커(John Walker)가 번역했지만 실제 완전본으로 출판되지 않았다.
나중에 영미권에서 인기를 끈 윌리엄 핀레이슨 트로터(William Finlayson Trotter,1871~1941)의 번역본은 시인 토마스 스턴스 엘리엇(T. S. Eliot, 1888~1965, 미국 출생, 영국 정착)의 소개로 1931년 출판됐다.

파스칼의 팡세를 첫 출판한 파리 근교에 있는 포르 루아얄 수도원(Port-Royal-des-Champs) 의 1710년 모습을 찍은 판화. photo by wikipedia

4.팡세는 유고(遺稿)를 묶은 만큼 포르 루아얄(파리 베르사유 근처판 이후 판본이 수차례 바뀌어 나왔다. 1776년에 초판에 빠진 단장(斷章,쪼개듯 끊은 짧은 문장)을 보충한 콩도르세 판이, 1779년에는 보슈 판이 나왔다.
이후 1842년 철학자이자 정치인 빅토르 쿠쟁((Victor Cousin,1792~1867)이 기존 팡세의 문제점(원고 삭제, 가필 흔적 등)을 지적, 프랑스 문화원에 다시 출판할 것으로 제의했다. 그래서 1844년 나온 것이 포제르 판으로 파스칼의 초고에 가장 충실했다는 평을 받는다.
하지만 오늘날 가장 널리 읽히는 판은 초판이후 130여년이 지나 1897년 나온 철학자 레옹 브랑슈비크(Léon Brunschvicg,1869~1944) 판이다. 이 판본은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내용을 분류해 편집, 인기를 끌었다. 이 판이 프랑스 문호 총서 ‘파스칼 전집’에 실려 있다. 이후에도 많은 판본이 나왔다. 그래서 각국에 소개된 ‘팡세’는 출판사, 번역자에 따라 많이 다르다.

5.팡세는 보통 2부로 나뉜다. 1부는 ‘신 없는 인간의 비참함’을 제시해 독자에게 신의 탐구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는 부분이다. 2부는 성경에 의거해 그리스도교가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변증론을 설파한다.
파스칼은 가톨릭 개혁파 얀세주의자 답게 기독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가톨릭을 설명하고 전도하려는 목적에서 팡세를 썼다. 그래서 기독교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성격을 띠고 있다. 특히 가톨릭 예수회 자유 사상가의 주장을 논박하고, 사람들을 그리스도교의 신앙으로 유도하는 글이 대부분이다.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자연에서 가장 약한 갈대'. 장소 시간 미상.photo by wikipedia

6.파스칼 하면 떠오르는 가장 유명한 경구(警句),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는 이 책에 나온다. “인간은 갈대일 뿐이다. 자연에서 가장 약한 갈대다. 하지만 생각하는 갈대다(L'homme n'est qu'un roseau le plus faible de la nature:mais c'est un roseau pensant)”.
현대의 사람들은 파스칼이 팡세에 쓴 이런 잠언 같은 경구들만 알고 있다. 하지만 팡세는 인간 관찰, 사유의 책이기 이전에 교화 목적이 강한 기독교 변증론의 단장(斷章)이다.
그런데 종교적 내용보다 인간의 위대함과 함께 인간의 비참함, 신을 향한 사랑 등이 잘 드러나 있다. 삶의 유한과 허무, 떠도는 인간의 삶에 대한 경구가 잘 포착돼 있는 것이다.
팡세에서 인간은 무한히 넓은 우주에서 하나의 점, 갈대처럼 약한 존재로 인식한다. 다만 인간의 생각, 존엄성은 확고히 한다. 그리고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신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설파한다. 신앙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7.프랑스 문학 평론가 샤를 오귀스탱 생트 뵈브(Charles Augustin Sainte-Beuve, 1804~1869, 문예비평의 기초를 세운 인물)는 “프랑스어로 된 최고의 책”이라고 격찬했다.
미국의 역사가이자 철학자 윌 듀란트(Will Durant, 윌리엄 제임스 듀란트, William James Durant, 1885~1981)는 "프랑스 산문에서 가장 웅변적인 책"이라고 말했다.
8.한국에는 현재 여러 권의 번역서가 나와 있다. 이환(전 서울대 불문과 교수) 역 ‘파스칼-팡세’(민음사), 김형길 역 ‘팡세’(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박철수 편저 ‘파스칼의 팡세’(대장간), 안웅렬 역 ‘팡세’(동서문화사) 등이 있다.
또 정봉구 역 팡세(육문사), 김화영 역 ‘팡세-분류된 문장’(IVP), 하동훈 역 ‘팡세’(문예출판사), 조병준 역 ‘파스칼의 팡세’(샘솟는 기쁨), 혀니애 역 ‘팡세’(을유문화사), 신상초 역 ‘팡세’(집문당), 최종훈 역 ‘팡세’(두란노)도 있다.

1691년 프랑수아 2세 퀘넬이 벨기에 출신 프랑스 조각가 제라르 에델랑크(Edelinck, 1640~1707)를 위해 그린 파스칼 초상화. photo by wikipedia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자연과학과 응용과학의 선구자. 17세기 프랑스 사상가이자 과학자, 수학자이다. 프랑스 사상사의 거목이다.

1.프랑스 중부 오베르뉴 지방 클레르몽 페랑에서 지역 판사인 아버지 앙티엥느 파스칼( Étienne Pascal, 1588~1651)과 어머니 앙투아네트 베공(Antoinette Begon)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누나 프랑수아즈 길베르트 페리에(Françoise Gilberte Périer, 1620~1687)와 여동생 재클린느 페리에(Jacqueline, 1625~1662)가 있다. 어머니는 파스칼 생후 3년째에 사망했다. 아버지는 재혼도 하지 않고 아이들 양육에 전념했다. 살림을 하는 하녀 루이스 델포(Louise Delfault)만 고용했다.

파스칼 탄생지인 오베르뉴 지방 클레르몽 페랑에 있는 주택 1934년 일러스트. photo by wikipedia

2.어린 파스칼은 수학과 과학에 대한 놀라운 적성을 보였다. 소년 천재로 이름났다. 이에 아버지 앙티엥느는 1631년 자녀 교육을 위해 파리로 이주했다.
과학과 수학 재능이 뛰어난 파스칼의 아버지 앙티엥느는 채권에 투자했다가 실패, 가난뱅이로 전락했다.1638년 총리 겸 외무장관이자 1대 리슐리외(아르망 장 뒤 플레시스 리슐리에,Richelieu, Armand-Jean du Plessis 1582~1642) 공작의 정부 채권에 대한 채무 불이행을 선언으로 낭패를 당한 것이다.
엥티엥느는 리슐리외 정책에 격렬히 저항했지만 별무효과였고, 그해 파리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결국 세 자녀는 당시 파리의 유명한 마담 생크토(Sainctot)의 보살핌을 받았다. 엥티엥느가 다시 파리로 돌아온 것은 앙티엔느의 딸 재클린느의 연극에 감동한 리슐리외가 사면했기 때문이다. 이후 1639년 프랑스 북부 루앙(Rouen)의 세금 감독관이 됐다.

3.1640년 17세의 나이에 오늘날 ‘파스칼의 정리’로 알려진 수학 이론을 정립, 프랑스 수학 및 과학계를 놀라게 했다. 파스칼의 정리는 평면 위에 있는 6개 점(A, B, C, D, E, F)이 같은 원뿔곡선 위에 있으면 이 6점으로 이루어지는 6각형 대변의 교점은 같은 직선 위에 있게 되며 그 역도 성립한다는 이론이다.
이에 당대의 석학(철학자이자 과학자)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1596~1650, 근대 철학의 아버지)는 ‘파스칼의 정리는 어린 파스칼이 아니라 아버지 앙티엔느의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파리 국립기술공예박물관에 전시된 파스칼이 개발한 계산기 파스칼린(Pascal's calculator). photo by wikipedia

4.수학 천재 파스칼의 진가는 계산기 발명으로도 이어졌다. 1642년 세금 감독관 아버지의 끝없이 소모적인 계산과 재계산을 해결하기 위해 ‘계산기’ 만들기에 나선 것이다.
이후 1년도 안돼 오늘날 ‘파스칼의 계산기(Pascal's calculato)’ 또는 ‘파스칼린(Pascalin)’이라고 불리는 덧셈과 뺄셈이 가능한 기계식 계산기를 발명했다.
이 기계는 그후 개선을 거듭하면서 10년 동안 20개의 완성된 기계를 더 만들었다. 하지만 상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제작비 등이 너무 많이 들어 비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 기계는 이후 계산 공학 발전의 선구적 역할을 했고, 20세기 컴퓨터 공학의 시금석이 됐다. 현재 기계 8개가 보존돼 있다. 그 중 4개는 파리 국립 기계공예박물관(Musée des Arts et Métiers)에, 2개는 독일 드레스덴 쯔빙거(Zwinger) 궁전(미술관,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5.유명한 ‘파스칼의 내기(확률)이론’은 1654년에 나온다. 당시 파스칼이 파리 사교계(도박과 춤, 이성 만남)에 빠져 있을 때다. 친구인 작가 앙투안 곰보(Antoine Gombaud, 1607~1684, 다름 이름 슈발리에 드 메레, Chevalier de Méré)의 권유로 수학자 피에르 드 페르마(Pierre de Fermat, 1607?~1665, ‘페리마의 원리’로 유명)와 도박 문제를 편지로 주고 받은 것이 계기였다.
이때 도박의 ‘기대 가치’ 개념이 도입됐다. 파스칼과 페르마의 확률 계산법(내기 이론과 기대가치 개념이 포함된)은 나중에 독일의 수학자이자 철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로 이어진다. 라이프니츠의 미분과 적분 공식화를 위한 중요한 토대가 된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수학은 컴퓨터 발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서, 그를 ‘컴퓨터 과학의 창시자’로 부르기도 한다.

파스칼(Blaise Pascal, 가운데)이 파리의 한 탑에서 수은 기압계로 실험을 하고 있다. 1878년 라 나뚜르(La Nature) 판화. www.britannica.com 재인용

6.1654년 오늘날 ‘파스칼의 삼각형(Pascal's triangle)’으로 알려진 책을 쓴다. 이 책은 1665년 파스칼 사후에 ‘삼각형의 특성(Traité du triangle arithmétique)’으로 출판된다.
파스칼은 물리학, 유체 역학 및 압력 분야에 크게 이바지했다. 발명품에는 유압 프레스( hydraulic press) 등이 있다. 파스칼의 이같은 과학적 공로를 기리는 상, 블레즈 파스칼 상(Blaise Pascal Chairs, Chaires Internationales de Recherché Blaise Pasca)은 1996년 만들어졌다.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외국 과학자에게 시상한다.

파스칼의 '팡세'에 큰 영향을 준 여동생 재클린느 파스칼(Jacqueline Pascal, 1625-1661) 수녀 모습. photo by wikipedia

7.아버지 앙티엔느가 1651년 사망한 이후 함께 살던 여동생 재클린느는 오빠 파스칼의 집요한 만류에도 불구, 얀센주의(Jansenism, 프랑스 가톨릭 내 개혁 신학운동)수녀원 포르 루아얄 참프(Port-Royal-des-Champs, 약칭 포르 루아얄, 프랑스 파리 근교에 1204년 설립된 수도원)에 들어가 버린다.
얀센주의는 네덜란드 신학자 코넬리우스 얀센(Cornelius Jansen,1585~1638)의 사후 출판된 작품에서 시작된 가톨릭 개혁(근대 신학) 운동이었으나 로마 교황청 등 예수회에서 반대했다.
1953년에는 아버지가 남긴 유산 중 여동생 몫을 포르 루아얄 수도원에 기부했다. 수도원에 들어간 여동생의 적극적인 설득에도 파스칼은 1654년 10월까지도 신(神)에게 다가가지 않은 사실상의 무신론자였다.
그리고 슈발리에 드 메레 등과 교류하면서 사교계 생활에 빠진다. 하지만 1654년 11월23일 밤 파스칼은 엄청난 종교적 경험을 했고, 회심(悔心, 뉘우치고 돌아서서 신에게 의지하는 것)한다. 다음해 1월 여동생이 있는 포르 루아얄 수도원을 방문, 2주간 얀센주의를 수련했다.

8.문학에서도 파스칼은 많은 영향을 미쳤다. 파스칼은 프랑스 17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이며, 특히 프랑스 산문의 풍자와 재치, 비판의 전통을 만들었다.
파스칼은 1656~1657년 사이에 가톨릭 사상가들(특히 예수회)이 활용하던 대중에 대한 신비주의를 정면 공격하며 가톨릭 개혁을 부르짖는다. 파스칼은 가명 루이 드 몽탈테(Louis de Montalte)라는 이름으로 ‘The Provincial Letters(시골 편지)’라는 서신 시리즈를 잇달아 발표했다.
파스칼은 가톨릭 신비주의를 ‘도덕적 해이와 모든 종류의 죄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복잡한 추론’이라고 비판했다. 예수회 중심의 종교권력 프랑스 가톨릭계의 개혁을 촉구한 것이다.
모두 18통에 이르는 '편지 시리즈(The 18-letter series)'가 잇달아 발표됐고, 마지막 편지는 1657년 당시 교황 알렉산더 7세(Alessandro VII, 1599~1667)에게 보냈다.
프랑스 왕실과 가톨릭(예수회)은 격분했다. 논란이 커지자 당시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Louis XIV,1638~1715, 별칭 태양왕)는 1960년 18통의 편지를 모두 찢어 없앨 것을 명령했다.

파스칼이 회심(悔心)후 머물렀던 포르 루아얄 수도원은 가톨릭 개혁을 부르짖은 얀센주의의 본산이었다.이 곳 수녀들은 프랑스 당국이 1709년 강제 해산시킨다. 이후 이 수도원은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photo by wikipedia

그럼에도 파스칼은 ‘양식 서명에 관한 글’을 내면서 굴복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그러자 정부는 1961년 포르 루아얄의 얀센교파 수도원 폐쇄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포르 루아얄 수도원은 결국 1709년 수녀를 강제 이주 시킨다.

9.프랑스 집권세력과 가톨릭계는 격렬하게 반발, 얀센주의 교파를 타도했지만 파스칼의 시골 편지 시리즈는 당대부터 호평을 받았다.
유머, 조롱, 악랄한 풍자, 권력 비판 등 프랑스 산문의 위대함을 여실히 보여줬기 때문이다. 특히 편지에서 보여준 경쾌하고 솔직한 표현은 프랑스어에 새로운 문체(文體)를 도입한 결과로도 이어졌다.

파스칼의 산문을 극찬한 당대 작가 샤를 페로의 1685~1700년경 초상화. 1671년 페로의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 선출을 기념했다.photo by wikipedia

당대 프랑스 동화작가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1628~1703)는 파스칼의 '팡세'와 '시골 편지'에 대해 "언어의 순결, 사고의 고귀함, 추론의 견고성, 난간의 기교, 다른 곳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불만 등이 모든 것이 있다“고 격찬했다.
파스칼의 산문과 문체는 볼테르(Voltaire, 1694~1778, 본명 François-Marie Arouet)와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 1802~1885), 에밀 졸라(Émile Zola, 1840~1902) 등 후대 프랑스 작가들의 산문에 큰 영향을 미쳤다.

10.파스칼은 1650년대 말부터 자유사상가들을 논박하고, 가톨릭 전도 등을 목적으로 철하적 사유와 경구가 담긴 ‘팡세’을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1659년 파스칼은 병에 걸렸고, 의사의 사역을 거부 한 채 글쓰기에 매진한다. 파스칼은 “병은 그리스도인의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말했다.
1661년 여동생 재클린느가 갑작스럽게 죽은 이후 파스칼의 병은 더 심해졌다. 그는 건강악화를 인식하고 1662년 유언 집행자로 누나 길베르트를 지명했다.
파스칼은 뒤늦게 병원으로 갈 것을 희망했지만, 의사들은 너무 불안정해 운반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런 며칠 후인 8월18일 파스칼은 경련을 일으켰고, 다음 날 아침에 영면했다. 39세 젊은 나이의 요절이었다.

프랑스 파리 5구 판테옹(Panthon) 근처 몽테뉴 생테제네비에브에 있는 생토티엔 뒤몽 교회에 묻혀 있는 파스칼 묘의 묘비명. photo by wikipedia

11.파스칼의 마지막 말은 "하나님이 결코 나를 버리지 않으시기를"이었다. 사망 후 부검을 한 결과 위장과 다른 복부 기관, 뇌 등에서 심각성이 드러났다.
하지만 부검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사인은 찾지 못했다. 파리 5구 판테옹(Panthéon) 근처 몽테뉴 생테제네비에브에 있는 생토티엔 뒤몽 교회에 묻혔다.
묘비에는 “근대 최고의 수학자, 물리학자, 종교철학자인 파스칼. 그는 여기 잠들었지만 팡세는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파스칼이 7년 후 묻히는 파리 생토티엔 뒤몽 교회의 1655년 모습(왼쪽). 오른쪽은 수도원이다.photo by wikipedia

12.파스칼의 마지막 주요 업적은 파리 버스 노선 운영 원칙이다. 객차에는 고정 경로(노선), 고정 가격(요금)이 붙어 있고, 승객이 없어도 떠나는 것(제 시간 출발)이었다.
이같은 대중 교통에 대한 아이디어는 100년을 앞선 것이다. 하지만 당국의 인식 부족과 계몽되지 않은 이용자들로 인해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고, 마지막 버스 노선은 1675년에 폐쇄됐다.

13프랑스 클레르몽 페랑(Clermont-Ferrand)의 대학 중 하나인 블레이즈 파스칼 대학교(Université Blaise Pascal)는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된 것이다. ‘행성 4500 파스칼’도 그를 기리기 위해 명명됐다.
1969년 나온 프랑스 소설가이자 유명 영화감독 에릭 로메르(Eric Rohmer, 1920~2010)의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Ma Nuit Chez Maud, 영어 My Night At Maud's)'은 파스칼를 소재로 하고 있다. 주인공 장 루이가 철학자 친구 비달과 파스칼에 대해 토론한다.

파스칼에 대해 토론하는 장면이 나오는 프랑스 영화 '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1969)' 스틸 컷.photo by movie.daum.net

이탈리아 유명 영화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1906~1977)는 1971년 영화 '블레이즈 파스칼(Blaise Pascal)'을 감독, 이탈리아 텔레비전에서 방영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3년 탄생 100주년을 기념, 블레이즈 파스칼에게 헌정한 ‘사도적 편지(Sublimitas et miseria hominis)’를 발표했다. 팡세의 내용 그대로 ‘인간의 웅장함과 비참함(THE GRANDEUR AND MISERY OF MAN)’을 주제로 한 긴 편지였다. (콘텐츠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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