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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 분석과 작가 이야기
폼페이의 최후의 날-향락과 퇴폐의 휴양도시 폼페이의 마지막을 쓴 소설은 지루한 대화체로 서두를 연다 본문
폼페이의 두 신사. “오, 디오메드, 잘 만났습니다. 오늘 밤 글라우코스와 함께 저녁을 드십니까?” 체격이 자그마한 청년이 말했다. 여성스럽게 풍성한 주름을 잡은 튜닉을 걸친 품이 보기에도 돈 잘 쓰는 멋쟁이였다.
“저런 아니라네. 클로디우스. 나는 초대받지 못했어.” 풍채 좋은 중년 디오메드가 대답했다. “폴룩스 신께 맹세코, 아쉬운 일이구먼! 글라우코스가 대접하는 저녁은 폼페이에서 최고라고들 하니 말이네”
“꽤 훌륭하지요. 하지만 제게는 늘 술이 부족합니다. 그 친구는 옛 그리스인의 피를 물려받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튿날까지 술이 덜 깬다고 하니.”
“술을 아끼는 데는 그것 말고도 이유가 있을 수 있네.” 디오메드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잘난 체하며 돈을 물 쓰듯 해도 그 사람이 겉보기만큼 부자는 아니지 싶어. 그래서 기지를 뽐낼 때 만큼 술 창고를 자랑하지는 않는 것일세.”
“세스테르티우스(고대 로마의 기본 화폐 단위)가 바닥나기 전에 어서 그의 대접을 받아 챙겨야 할 이유가 한가지 늘었군요. 내년에는 제2의 글라우코스를 찾아야겠습니다.”/ “그 사람도 주사위 놀이를 좋아한다지.”(폼페이 최후의 날, 이나경 역, 황금가지, 2003)
1.내레이터가 필요없을 정도로 ‘지루하다 싶을 정도의 대화체 문장’이 이어지는 첫 문단이다. 두사람의 등장인물은 대화를 통해 앞으로 나올 캐릭터의 특성을 보여주는 한편 줄거리, 정보 등을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다. 대화만 읽어도 화려한 패션, 술과 파티 문화, 벼락부자의 씀씀이 등 폼페이의 풍성함을 적나라하게 알수 있다. ‘술 창고’와 ‘세스테르티우스의 바닥’, ‘주사위 놀이’는 향락과 퇴폐의 폼페이의 현재와 미래 비극을 상징하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굳이 각색을 하지 않더라도 무대 공연을 할수 있을 정도다. 본문에 나오는 *풀룩스(Pollux)는 제우스와 레아의 아들로 쌍둥이 별자리 중의 하나, 여행자와 젊은이의 수호신이다.*.튜닉(tunic)은 유럽 고대~중세 의복, 로마인들이 입는 옷이다. *세스테르티우스는 로마의 화폐단위이다.
2.에드워드 불워리튼의 ‘폼페이 최후의 날(The Last Days of Pompeii, 1834)’은 역사 재난 소설의 수작(秀作)이다. 출간 이후 오페라와 연극, 영화 등 예술작품으로 가장 많이 만들어진 소설 중 하나다.
작가가 1834년 이탈리아 여행 중 밀라노에서 본 러시아 화가 칼 브뢸로프(Karl Pavlovich Bryullov, 1799~1852)의 그림 ‘폼페이 최후의 날(1833)’에서 영감을 받았다. 당시 지식인들에게 익히 알려진 폼페이 대재앙을 그림으로 본 작가는 큰 충격을 받고곧바로 소설 집필에 들어가 그해 탈고했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폼페이의 당시 건축양식과 풍속, 종교, 주민의 삶의 행태 등을 치밀한 고증,비극의 도시를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특히 이런 고증의 바탕 위에 사랑과 욕망, 운명, 계급과 권력(충성과 배신), 도덕적 딜레마와 윤리, 피할 수 없는 재앙, 종교와 미신 등 통속적 요소를 두루 다루고 있다. 여기에 빅토리아 시대에 유행했던 로맨스 문체를 적용해 책을 읽어갈수록 빨려들어가는 듯한 대중 영합 문학의 걸작(傑作)을 탄생시켰다.
영국 런던 리처드 벤틀리 (Richard Bentley) 출판사가 저작권을 사서 간행했는데 나오면서부터 인기를 끌어 20년 이상 스테디 셀러로 자리잡을 정도였다. 이탈리아에서는 1840년대에 ‘Gli ultimi giorni di Pompei’로 번역 소개됐다.
3.실제의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극대화해 쓴 비극적인 재난 영화같은 소설이다. 특히 인간사에서 나타나는 선과 악, 종교 갈등 등을 총동원해 독자의 말초신경을 자극할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전개한다.
역사 기록에서 폼페이는 나폴리 부근에 있는 사르누스강 하구 도시로 베스비오 화산과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베수비오 화산 아래 강가에 조성된 인구 2만여 명의 로마 제국 귀족들의 휴양 도시였다. 이런 대도시에 서기 79년 화산이 덮친 것이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지진과 용암, 화산재가 쏟아지면서 폼페이는 거주민 2000명과 함께 묻히는 대재앙을 맞는다. 18시간 동안 무려 수백억 톤에 달하는 화산쇄설류가 쏟아졌고, 그 위로 화산재가 내리며 도시는 지면 3미터 아래에 묻혔다. 물론 베수비오 화산 밑의 조그만 항구로 그리스 영웅 헤라클레스의 이름을 딴 도시 헤르쿨라네움(현 이탈리아 캄파니아주 나폴리현에 위치한 코무네인 에르콜라노), 스타비아이(폼뻬이에서 5킬로 떨어진 바닷가 마을)도 묻혔다.
당시는 티투스(Titus Flavius Vespasianus, 39~81) 황제가 막 제위에 오른시기였다. 등극 두 달 만에 대참사가 난 것이다. 티투스는 장군 시절 예루살렘 점령과 파괴 과정에서 유대인 100만여 명을 죽인 것으로도 유명하며, 재위 기간 중 폼페이 대참사, 로마 대화재(80) 등의 어려움을 겪다가 81년 사망했다.
4.폼페이가 세상에 다시 알려진 것은 대재앙이후 1500여 년이 지난 1549년이다. 수로 건설 도중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는 이탈리아가 도시국가, 교황령, 외부 왕국령 등으로 분리된 시기여서 사실상 발굴이 되지 않았다.
본격 발굴은 1709년 헤르쿨라네움(현 에르콜라노)에서 시작됐고, 1748년 폼페이 발굴 작업도 펼쳐졌다. 그리고 1763년 폼페이 비문이 발견됐다. 그렇치만 산채로 희생당한 거주민 흔적이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였다.
1860년 로마 대학 고고학자이자 발굴 책임자 주세페 피오렐리(Giuseppe Fiorelli, 1823~ 1896)는 도시 발굴 중 사람 흔적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이에 빈공간에 석고를 붓도록 했고(고고학계에서 피오렐리 공정이라고 함), 인간의 형상이 드러난 것이다. 이후 폼페이는 현재까지 발굴이 이어지고 있다. 유네스코는 1979년 폼페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서기 79년의 대 분출이후 베수비오 화산은 여전히 활화산으로 남아 소규모 분출을 이어왔다. 가장 최근 분화는 1979년이다.
5.기원 후 79년 8월24일 불의 신 불카누스(Vulcanus) 축제일에 시작된 폼페이 참사는 당시 17세였던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카이킬리우스 세쿤두스(작은 플리니우스)에 의해 생생하게 기록됐다.
로마 제국 박물학자이며 해군 제독인 삼촌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큰 플리니우스, 저서로 박물지가 있음)를 따라 나폴리만 미세눔에 있던 작은 플리니우스는 헤르쿨라네움(현 에르콜라노) 해안으로 배를 끌고 가서 화산재가 덮쳐옴에도 삼촌, 선원 등과 함께 구조 활동에 나선다.
‘행운은 대담한 사람을 좋아 한다’고 했던 작은 플리니우스 기록에 의하면 폼페이 바로 옆 바닷가 마을 스타비아이로 가서 친구까지 구출했다. 하지만 화산재와 유독가스가 배를 덮치며 자신은 의식을 잃었고, 삼촌 플리니우스는 끝내 질식사했다.
작은 플리니우스는 나중에 당시 상황을 묘사한 편지를 역사가 타키투스(Publius Cornelius Tacitus, 56?~120?)에게 보냈고, 타키투스에 의해 전해지게 됐다. 폼페이 대 참사때 목숨까지 버리며 재난 구제활동을 했던 큰 플리니우스의 이름은 화산 분화 양식 중 하나인 ‘플리니식 분출’에 명명됐다.
6.소설은 단순 명쾌하게 진행된다. 풍경화 같은 도시 묘사와 귀족과 벼락부자들의 삶과 향락,재앙을 맞은 인간 사이에 드러나는 부도덕과 갈등 화려한 문체로 그려진다. 특히 엄습하는 파멸의 전조(화산의 소규모 분출)에도 검투 시합, 퇴폐의 향락, 사랑과 증오, 음모와 배신이 생생하게 묘사돼 읽는 재미를 더한다.
등장인물은 잘생긴 아테네 귀족으로 주인공 글라우쿠스, 그의 약혼자인 고아 이오네, 이오네의 보호자이자 제사장 아르바세스, 꽃파는 어린 노예로 글라우코스를 짝사랑하는 니디아,페이의 부자 상인이자 버릇없는 딸 줄리아의 아버지 디오메드 등이다.
또 아르바케스에게 살해당한 이오네의 동생 아파에키데스, 에피쿠로스 학자 살루스트. 이시스 교단의 탐욕스런 사제 칼레누스, 이시스 신전을 강탈한 칼레누스의 동생 부르보, 기독교인 올린투스, 도박을 좋아하는 귀족 클로디우스, 글라우쿠스, 살루스트, 클로디우스의 친구인 귀족 레피두스가 주요 등장인물이다.
이밖에 화산 폭발을 예언하고 탈출하는 베수비오의 마녀, 디오메드의 노예 검투사 라이돈과 메돈, 니디아의 전 여주인이자 부르보의 아내 스트라토니케 등도 나온다.
7.줄거리는 폼페이가 매몰되는 79년, 아테네의 명문 귀족 글라우쿠스와 연인 이오네가 장님 노예 여자 니디아의 도움으로 피난하는 이야기이다.
글라우코스는 화려한 로마 마을 폼페이에서 아름다운 그리스 여인 이오네와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이오네의 옛 보호자 마법사 아르바세스는 이오네를 유혹하고, 음모를 꾸민다. 이오네의 동생 아파에키데스를 꾀어 이시스 사제단에 합류, 파멸로 인도한다.
글라우쿠스는 노예 니디아를 구출하고, 이시스에 빠졌던 아파에키데스는 기독교에서 새로운 종교를 발견한다. 이런 상황에서 줄리아는 글라우코스의 사랑을 얻기 위해 물약을 훔쳐 투여 한다. 그런데 글라우코스는 살인사건에 연루되고, 유죄 판결을 받는다.
폼페이 주민들은 살인자들을 피의 원형경기장으로 데려가 사자들과 싸우게 한다.그런데 사자가 화산 폭발의 동물적 감각으로 우리로 다시 돌아가버리고, 화산 폭발이 시작된다. 눈먼 소녀 니디아는 화산재 속에서 글라우쿠스와 이오네를 나폴리 만 피난길로 인도한 후 죽는다. 10년이 지나고, 글라우쿠스는 로마에 살고 있는 살루스트에게 편지를 쓰고,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8.케임브리지 고전학 교수이자 방송인인 메리 비어드(Winifred Mary Beard, 1955~현재)는 “19세기 베스트셀러 역사소설”이라며 "고대 세계를 환상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출생으로 옥스퍼드 대학 졸업 후 논픽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인 사이먼 윈체스터(Simon Winchester, 1944~현재)는 “화산의 과학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지는 않았지만, 인간은 지질학적 동의에 따라 이 행성에 살고 있으며, 이는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다는 경구를 가르쳐 주는 소설”이라고 말했다.
9.연극과 오페라로 먼저 나왔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출신 유명 작곡가 조반니 파치니(Giovanni Pacini,1796~1867)가 줄거리를 바꿔 오페라 ‘L'ultimo giorno di Pompei’로 만들어 1825년 나폴리에서 첫 공연했다.
독일에서는 1853년 페터 뮐러(Peter Müller, 1791~1877)가 불워리튼의 소설을 바탕으로 작곡, ‘Die letzten Tage von Pompeii’로 그해 12월25일 독일에서 초연했다.
1858년에는 이탈리아 작곡가 에리코 페트렐라(Errico Petrella, 1813~1877)가 소설을 바탕으로 오페라 ‘존(Jone)’으로 밀라노 라 스칼라에서 초연, 대 성공을 거뒀다. 이 대본을 바탕으로 만든 오페라는 세계 순회 공연을 했고, 1981년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런던에서는 1877년 코벤트 가든 롱 에이커 퀸스 극장(Queen's Theatre)에서 베수비오 화산 폭발 등을 무대장치를 만들어 연극 공연에 나섰으나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8.영화는 1900년 영국에서 처음 나왔다. 영국 영화 선구자 월터 R. 부스(Walter Robert Booth, 1869~1938) 감독이 무성영화로 만들었다. 이탈리아에서는 1908년 아르투로 암브로시오(Arturo Ambrosio, 1870~1960)와 루이지 매기(Luigi Maggi,1867~1946) 감독이 무성영화로 만들어 내놓았다.
1913년에는 이탈리아 시나리오 작가겸 감독 엘레우테리오 로돌피(Eleuterio Rodolfi,1876~1933) 와 마리오 카세리니(Mario Caserini,1874~1920) 감독 작품이 나왔다.
또 그 해에 조반니 엔리코 비달리와 우발도 마리아 델 콜레 감독 영화도 나왔다. 이탈리아에서는 1926년 카민 갈론(Carmine Gallone,1885~1973) 감독 영화도 상영됐다.
1935년에는 미국 배우 프레스턴 포스터(Preston Stratton Foster, 1900~1970)와 바질 래스본((Philip St. John Basil Rathbone, 1892~1967) 주연의 RKO(RKO Radio Pictures Inc.할리우드 빅5 스튜디오) 영화가 나왔다.
1950년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합작으로 마르셀 르비에(Marcel L'Herbier,1888~1979,프랑스 영화 제작자)와 이탈리아 파올로 모파(Paolo Moffa, 1915~2004)가 공동 감독, 영화로 내놓았다.
또 1959년에는 이탈리아 배우 겸 감독 마리오 보나르(Mario Bonnard, 1889~1965)와 세르지오 레오네(Sergio Leone, 1929~1989)가 공동 작품으로 내놓았다.
스페인에서 마리오 보나드 감독의 1959년 작 영화도 나왔다. 또 이탈리아의 영화 감독 겸 작가 마리오 카세리니(Mario Caserini,1874~1920)의 작품도 있다. 한편 가장 최근에는 2014년 로버트 해리스(ROBERT HARRIS, 1957~현재)의 책을 토대로 폴 앤더슨 감독의 ‘폼페이 최후의 날(Pompeii)’이 나왔다.
9.텔레비전 미니시리즈로는 1984년 이탈리아, 영국, 미국 합작으로‘폼페이의 마지막 날’로 나왔다. 미국 ABC-TV와 이탈리아 Rai(이탈리아방송협회, dio Audizioni Italia)에서 방영됐다.
미국의 드러머 그랜드 하트(Grant Vernon Hart, 1961~2017)가 결성한 얼터너티브 록 밴드 노바 몹(Nova Mob, 밴드) 데뷔 스튜디오 음반 ‘The Last Days of Pompeii’가 1991년 발매됐다.
10.한국에서는 1920년대 일부가 번역 소개됐다. 시인이자 번역가 김억(金億, 1896~?)이 번역 소개했다. 이후 1977년 ‘계몽사 문고본’로 나왔고, 1997년에는 김덕문 번역으로 출판시대에서 간행됐다.
1998년에는 박우사에서 서현섭 번역으로 간행됐다. 2000년대 들어서는 황금가지 등 여러곳의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했다.
1997년 7월23~9월3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에서 ‘폼페이 최후의 날’ 유물 전시회가 열렸다. 당시 시공디스커버리 총서에서 동명의 책도 냈다.
11.2022년 5월 덴마크 코펜하겐대, 이탈리아 살렌토대, 브라질 미나스제라이스연방대, 미국 어바인 캘리포니아대(UC어바인) 등 4개국 공동연구팀이 인골 분석에 성공했다.
예전에 폼페이 유적지에서 발견된 35~40세로 추정되는 남성의 DNA를 추출, 유전자 서열 분석에 성공한 것이다. 분석 논문은 국제 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트’ 5월26일자에 발표했다.(인용 www.dongascience.com)
#.에드워드 불워리튼(Edward Bulwer-Lytton,1803~1873)=영국의 소설가, 시인, 극작가.빅토리아 시대 저명한 작가이자 정치가이다. 전체 이름은 에드워드 조지 이얼 불워리튼 1대 리튼 경(Edward George Earle Lytton Bulwer-Lytton, 1st Baron Lytton)이다.
불워리튼은 ‘씻지 않은 위대한 자(the great unwashed)’, ‘펜은 칼보다 강하다(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어둡고 폭풍우가 치는 밤이었다.(It was a dark and stormy night.)’와 같은 문구를 만든 당대의 인기 작가였다.
미국 최초 단편소설 작가이자 외교관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 1783~1859)이 쓴 말인 ‘전능한 달러’를 유행어로 만들기도 했다.
1.영국 동부 노퍽(Norfolk)주 출신의 장군 윌리엄 얼 불워(William Earle Bulwer,1757~1807)와 엘리자베스 리튼(Elizabeth Barbara Warburton-Lytton, 1770~1843) 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현재의 런던 베이커 스트리트 7번지가 출생지다.
위로는 윌리엄 얼 리튼 불워(William Earle Lytton Bulwer, 1799∼1877)와 헨리(Henry, 1801∼1872)라는 두 형이 있었다. 그런데 4살 때인 1807년 아버지가 사망해 어머니, 형들과 함께 런던으로 이사했다.
2.어린 시절 사립하교 교육을 집중 받았다. 1812년 풀럼(Fulham)에 있는 러독 박사의 학교(Dr. Ruddock's school)에 보냈지만, 그곳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이에 그의 어머니는 로팅딘(Rottingdean)에 있는 후커 박사의 학교(Dr. Hooker's school)로 전학시켰다.
하지만 학업적으로 별다른 성취를 못했고, 어머니 엘리자베스는 막내 아들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할 까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이에 어머니는 1820년 무렵 아들을 찰스 월링턴(Charles Wallington) 목사 밑으로 보내 라틴어, 그리스어, 역사, 수사학을 공부하도록 했다.
3.1822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에 입학했다. 대학 때는 나중에 지질학자이자 예술가로 활약하는 캐나다계 영국인 존 리처드슨 아울조(John Richardson Auldjo,1805~1886)와 절친했다.
아울조의 ‘베수비오 화산 폭발의 시작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주요 분출에 대한 짧은 설명이 포함된 베수비오 스케치(나폴리, 1832)’는 소설 ‘폼페이 최후의 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826년 케임브리지 졸업 후 언론인, 작가로 활약했다. 이후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의 추종자로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1831년에 주간지 뉴 먼스리(New Monthly)의 편집자가 됏으나 이듬해에 사임하고 자유당 의원으로 의회에 입성했으나 1841년 사퇴했다.
의원직을 사퇴 한 직후인 1841년 반(半)과학 잡지인 월간 크로니클(Monthly Chronicle)을 창간했다. 1852년 보수당으로 갈아탔고, 하트퍼드셔의 의원으로 하원으로 돌아왔다.
4.뮤즈는 1818~1820년 경 만난 소녀 ‘루시 D-(Lucy D-)’ 였으나 그녀 아버지의 반대로 사랑을 이루는 데 실패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강압으로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그런데 3년 후 그녀는 ‘여전히 사랑하며, 죽어가고 있다’는 편지를 보냈고,그 직후인 1823~25년 사이 사망했다. 이때 불워리튼은 ‘바이론적 우울증(Byronic melancholy)’에 빠졌다. 그는 나중에 이 실패한 사랑이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했다.
스물네살 때인 1827년 어느 파티에서 만난 아일랜드의 유명한 가문의 딸로 여권 신장론자이자 저널리스트 로지나 돌리 휠러(Rosina Doyle Wheele, 1802~1882)를 만났다. 둘은 그해 8월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교회에서 결혼했다. 둘은 딸과 아들을 뒀으나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부인 로지나의 정치 분야 글쓰기가 결혼 생활에 타격을 주었고, 특히 불워리튼의 불륜도 원인이었다. 유명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1824) 경의 전 정부이자 로지나의 스승 캐롤라인 램 남작 부인(Lady Caroline Lamb)과 잠깐 불륜을 저지른 것이다. 서로의 가정 충실성에 문제가 생기면서 둘은 1833~1834년 이탈리아 여행을 끝으로 헤어진 후 1836년 공식 이혼했다.
5.불워리튼은 아내와 이혼했음에도 관계가 정리되지 않았다. 여권 운동가임에도 불워리튼의 불성실을 용서 못한 로지나는 이혼 3년 후 ‘체블리(Cheveley), 또는 명예의 남자(1839)’를 출판, 남편의 행실을 강하게 비꼬았다.
로지나는 이후에도 끊임없이 불워리튼을 공격했고, 이혼 20년이 지난 1858년 6월 불워리튼이 하트퍼드셔의 보궐선거에 출마하자 여권론자들과 함께 현장을 찾아와 방해해 불워리튼이 긴급히 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결국 불워리튼이 전 부인 로지나를 정신병원에 감금시키는 사태로 발전해 최악의 스캔들로 치달았다.
당시 아들 로버트는 어머니의 아버지 선거 방해에 대해 시(詩)를 써서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하트퍼드에 마차를 타고 온 사람은/칭찬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내 시대의 작가에 대해서/나의 어머니’
딸 에밀리 엘리자베스(Emily Elizabeth,1828~1848)은 스무살에 사망했다. 아들 로버트는 인도 초대 총독과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를 역임한 정치가 로버트 불워-리튼(Robert Bulwer-Lytton)이다.
6.불워리튼은 휘그당원(자유당)으로 1831~1842년 사이 의회 의원으로 정치경 력을 쌓았다. 이후 의회에서 법안 트러블이 생기면서 사직하고 보수당원으로 변신, 1852년부터는 보수당 의원으로 활약한다.
1843년 어머니가 사망한 이듬해 어머니의 뜻에 따라 성을 Bulwer에서 Bulwer-Lytton으로 바꾼다. 어머니의 성 리튼을 더한 것이다.
1862년 그리스의 왕 오토(Otto, 1815~1867,1862년 10월 23일 일어난 쿠데타로 폐위)가 퇴위하자 불워-리턴은 그리스 왕관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 당시 그리스는 오스만투르크와 독립전쟁을 치열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1858년 선거에서 당선돼 하원에 진입했고, 에드워드 스탠리 더비(더비 백작, Edward (George Geoffrey Smith Stanley, 14th earl of Derby, 1799~1869) 내각에 진출했다. 식민지인 미국 브리티시 컬럼비아(British Columbia)국무 장관(1858~1859)이 된 것이다.
더비 내각에서 오랜 친구이자 나중에 영국 보수당의 대부가 된 벤자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1st Earl of Beaconsfield, 1804~1881)와 함께 봉사했다. 디즈레일리는 1968~1880년 영국 총리를 지냈다.
이때 식민지 브리티시 컬럼비아의 톰프슨강과 프레이저강이 합류하는 캠친(옛 HBC 댈러스 요새)은 1858~1860년 사이 제임스 더글러스 주지사가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리튼으로 개명했다.
7.글래스고 대학교 총장(1856~1859, 의원 겸직 가능)을 지낸 불워리튼은 만년에 잉글랜드 웨스트 런던 풀럼의 크레이븐 코티지(Craven Cottage)에서 지냈다. 크레이븐 코티지는 1888년 화재로 방치돼 폐허가 됐다가 나중에 풀럼의 축구경기장으로 거듭난다.
오랫동안 귀의 질병으로 고통받아온 불워리튼은 크레이븐 코티지에서 휴양을 위해 1871년 잉글랜드 데본 주에 있는 해안 도시 토키(Torquay, 추리 작가 아가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 1890~1976)의 고향)로 이사간다. 당시 청각 장애를 치료하기 위한 수술했으나 농양이 커져서 귓속이 파열되는 고통이 이어졌다.
8.토키(Torquay)에서 1873년 1월18일 70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영면했다. 사망 원인은 분명하지 않았지만 귀 농양이 뇌에 영향을 미치고, 이에 따른 발작이 사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추정했다. 현대 학자들은 ‘악성 중이염의 희생자’라고 분석한다.
그의 조용한 장례를 원했으나 뜻과는 달리 많은 지인들이 성대한 장례를 준비했다. 그래서 시신은 런던으로 옮겨져 웨스트민스터 애비(Westminster Abbey)에서 장례식이 열렸다. 인근 성 에드먼드 예배당에 묻혔다.
9.불워리튼은 대중의 취향 변화를 예측하고 만족시키는 글 솜씨가 뛰어났다. 그를 대중 작가이자 유명 저널리스트로 오르게 한 ‘펠럼(Pelham,1828)’도 고딕 로맨스와 당대 풍조를 교묘히 결합해 히트한 작품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폼페이 최후의 날(The Last Days of Pompeii,, 1834)’도 거의 서스펜스 로맨스가 갖춰야할 조건을 두루 갖춘 소설이다. 그 밖의 작품으로 ‘리엔지’ 희곡 ‘금’ 등이 있다. 사후에 ‘아테네-그 흥망성쇠(Athens: Its Rise and Fall)’가 출판됐다.
10.런던에는 불워리튼이 살았던 피너 교외에 그의 이름을 탄 도로 ‘리튼 로드’가 있다. 호주 퀸즐랜드주 브리즈번 교외 지역 이름 리튼 , 모레톤섬의 불워 마을, 인근의 불워섬 등도 리튼의 이름을 땄다.
캐나다 퀘벡주 리튼(오늘날 몬터프-리튼의 일부)은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리튼과 아이오와주 리튼과 마찬가지로 그의 이름을 땄다. 뉴질랜드 지스본의 리튼 로드, 바로 옆 리튼고교(Lyton High School)도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됐다.
11.불워리튼이 정립한 말 중에는 ‘펜은 칼보다 강하다(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가 가장 유명하다. 1839년 연극 ‘리슐리외, 또는 음모(Richelieu five-act play in blank verse)’에 처음 썼다. 리슐리외(cardinal et duc de Richelieu,1582~1642)는 프랑스 재상이다.
이 연극은 런던 코벤트 가든 극장에서 윌리엄 찰스 맥레디(William Charles Macready, 1793~1873)가 주연을 맡아 공연됐다. 당시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1819~1901)도 공연을 지켜봤을 정도라 힌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의 비슷한 원전은 고대 메소포타니아 지역 일대를 장악한 아시리아(BC21~BC14)의 현자 아히카르(아시리아 왕 산헤립과 에사르핫돈의 신하)의 글을 모아놓은 ‘아히카르의 가르침(Teachings of Ahiqar)’에 나오는 데 ‘말씀은 칼보다 강하다’로 기록돼 있다고 한다.
12.너무 대중적인 문장과 문체로 동시대 작가와 문학 비평가들의 공격을 많이 받았다. 당대 유명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William Makepeace Thackeray, 1811~1863)는 ‘프레이저 매거진(Fraser's Magazine)’에서 그를 무자비하게 비판했다.
새커리는 "(불워리튼의 글은) 지나치게 화려하고, 사치스럽고, 선정적이며, 살인, 광인, 마술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했다. 새커리는 또 불워리튼에 대해 “이 소설가는 은색 포크 연마공"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상류사회 소설의 종(상류사회 읽을거리에 아부하는 작가)을 묘사하는 용어였다.
불워리튼이 1830년 쓴 소설 ‘폴 클리포드(Paul Clifford)’의 첫 문단 첫 구절 ‘어둡고 폭풍우가 치는 밤이었다(It was a dark and stormy night)’는 대표적인 통속 매너리즘 문장으로 비판받았다. 화려한 소설 쓰기와 멜로 드라마 스타일의 전형적 예라는 지적이었다. 다만 이 문구는 불워리튼이 쓰기 전에도 비슷한 형태로 존재했다고 한다.
13.식상한 매너리즘 소설쓰기를 비판하기위해 1982년 이래 미국에서 매년 열리는 ‘불워리튼 소설 콘테스트(Bulwer-Lytton Fiction Contest)’가 있다. 이 대회는 ‘가능한 모든 소설 중 최악의 문장’을 찾는 행사다. 산호세 주립대학교 스콧 라이스 교수가 창립했고, 이 대학 영문학과가 후원한다.
2008년 증손자인 시나리오 작가 헨리 리튼-코볼드(Henry Lytton-Cobbold, 1962~현재)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 리튼 마을에서 열린 불워리튼 소설 콘테스트 토론회에 초청됐다. 당시 헨리 리튼은 이 대회에서 창립자 스콧 라이스(Scott Rice)와 한 토론에서 "라이스 교수가 완전히 잘못된 이유로 대회의 이름을 불워리튼으로 정한 것은 매우 불공평하다"고 말해서 참석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14.많은 비평가들이 ‘어둡고 폭풍우가 치는 밤이었다(It was a dark and stormy night)’를 비판함에도 불구, 여러 작가들이 첫 구절로 많이 사용했다.
미국 작가 매들렌 렝글 캠프(Madeleine L'Engle Camp, 1918~2007)의 유명한 소설인 ‘시간의 주름(A Wrinkle in Time,1962)’과 에드가 앨런 포(Edgar Allan Poe's)의 소설 ‘바긴 로스트(The Bargain Lost,1931)’의 첫 문단을 장식하기도 했다.
또 만화가 찰스 슐츠(Charles Schulz)의 피너츠(Peanuts) 연재 만화 캐릭터 ‘스누피(Snoopy)’도 "어둡고 폭풍우가 치는 밤이었다"라는 문구로 소설을 시작한다.
캐나다 출신의 유명 가수이자 화가 조니 미첼(Joni Mitchell, 1943~현재)의 앨범 ‘Taming the Tiger,1998)’에 수록된 노래 ‘Crazy Cries of Love’는 ‘It was a dark and stormy night’로 시작한다. 아메리칸 북리뷰(American Book Review)도 ‘소설 최고의 첫 줄’ 목록에서 이 문장을 22위로 선정했다.(콘텐츠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