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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첫문단과 작가 이야기
“오랜 어둠속에서/세상이 처음 생길 때/천황씨는 머리가 열셋이요/지황씨는 머리가 열 하나라/그들은 생김새부터/이렇게 신기하였도다/그뒤를 이어/성스러운 임금 차례로 나왔으니/모든 신비로운 사적들/옛 글에 밝혀져 있어라. 여절은 무지개처럼 흐르는 큰 별을 보고/소호씨를 낳았으며/여추가 전욱을 밸 때도/또한 밝은 빛을 보고 느꼈음이라.”(이규보 저 동명왕편 서장(序章), 김상훈·류희정 역, 보리, 2005) 1.한문으로 쓴 서사시답게 운율(韻律)이 잘 맞춰진 노래이다. 한글로 번역했어도 그 리듬이 살아 움직일 정도다. 첫 구절이어서인지 상징이나 은유보다는 세상의 탄생을 과장되게 이야기하듯이 썼다. 우리 말로 입에서 입으로 내려 오는 구전(口傳) 이야기를 새롭게 쓴 것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창의력이 뛰어난 느..
“정말로 그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아마도 가장 먼저 알고 싶은 것은 내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나의 엉망인 어린 시절이 어떠했는지, 우리 부모가 나를 낳기 전에 뭘 하느라 바빴는지 뭐 그런 데이비드 코퍼필드류의 쓰레기겠지만 그런 이야기는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첫째로 그런 건 따분하고, 둘째로 우리 부모는 내가 그들의 아주 사적인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남에게 하면 각각 뇌일혈을 두 번쯤 일으킬 거다. 우리 부모는 그런 거에는….”(공경희 역, 민음사,2023) 1.반항기의 청소년의 독백을 자연스럽게 쓴 첫문단이다. 최대한 객관적인 것처럼 이야기 해 술술 읽히지만 길게 이어지는 어휘들의 나열은 어색한 느낌은 지울수 없다. 특히 첫 문장의 마침표가 제대로 찍혔는지 다시 확인할 정도로 혼란스..
“사람들이 아주 다른 말을 쓰던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따뜻한 나라들에는 크고 화려한 도시들이 세워져 있었다. 거기에는 왕이 산 궁전이 우뚝 서 있고, 넓은 도로와 좁은 길과 꼬불꼬불한 골목길이 있었다. 황금과 대리석으로 조각된 신의 상이 서 있는 웅장한 사원도 있고, 세계 곳곳의 왕국에서 들여온 온갖 다채로운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시장도 있었으며, 사람들이 새로운 일을 이야기하고, 연설을 하거나 듣기 위해 모였던 넓고 아름다운 광장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기에는 극장이 있었다.”(한미희 역, 비룡소, 2003) 1.그림을 그리는 듯한 표현으로 옛날 이야기를 듣는 느낌을 준다. 동화의 전형적인 도입부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문장이 이어진다. 오늘의 폐허를 강조하기 위한 대조적 관계의 하나로 옛..
“간통을 뜻하는 프랑스어 아뒬테르(adultère)는 그리스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리스어에서 간통은 ‘모이케이아’이며, 거기서 나온 라틴어 ‘모에쿠스’역시 프랑스어와는 관련이 없다. 그렇다고 고대 시리아에서 온 것도, 시리아에서 파생된 히브리어에서 온것도 아니다. 히브리어로 간통은 ‘나아프’다. 아뒬테르에 해당하는 라틴어 아둘테라티오(adultèratio)는 변조, 위조, 다른 것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 문서 위조, 모조 열쇠, 위조 계약, 위조 수결(手決) 등을 뜻했다. 그리고 남의 침대에 몰래 올라가는 사람을 다른 사람의 자물쇠에 모조 열쇠를 밀어넣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아둘테르(adulter)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사이에-출판기획 및 번역 네트워크. 옮김, 민음사,2015) 1.계몽서 답게 처음..
“푸리아들이 수사학 선생들을 선동해 이렇게 외치며 죽는시늉을 하게 만듭니다. ‘나는 우리의 자유를 위해 싸우다 이 상처들을 입었소이다. 이 눈도 여러분을 지키다 잃었습니다. 나의 자식들을 잘 인도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불구가 된 다리로는 내 몸조차 가눌 수가 없소이다.’ 학생들이 능변에 이르는 왕도를 배울 수만 있다면야, 뭐 이런 영웅담쯤은 참아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강미경 역, 공존, 2008) 1.광장을 지나가는 인파에게 외치는 호객 행위같은 직접화법 서술이다. 첫 문단에 독자의 관심을 부르는 복수의 여인 푸리아, 불구의 몸 등 관심 유도 장치를 넣은 것도 설득을 위한 장치다. 상징이나 은유, 구체적 비유는 없지만 호소하는 사람을 ‘줌업’ 한 것도 그렇다. 독백 형식의 대화형 문장..
“보케르 부인은 콩플랑 집안에서 태어난 늙은 여자다. 그녀는 파리의 생마르소 성 밖 지역과 라탱 구역 사이에 있는 뇌브생트 주느비에브 거리에서 40년 전부터 하숙집을 경영해 왔다. 남녀노소 누구든지 ‘보케르의 집’으로 알려진 이 하숙집에서 숙식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이 존경할 만한 하숙집의 풍속에 대해 결코 험담하지 않는다. 젊은이가 이곳에 하숙하려면 그의 가족은 쥐꼬리만한 한 하숙비를 그에게 보내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30년 전부터 이곳에서는 젊은 사람을 한 명도 볼 수 없다. 그런데….”(박영근 옮김, 민음사,2000) 1.현미경을 들이대듯이 거리낌없이 쑥 들어온 듯한 첫 문단이다. 싸구려 하숙집을 사실주의에 기초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서술이다. 전지적 작가 시점 소설로 작가(발자크) 특유의 호..
“어떤 마을이 있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특정하지 않는 게 현명하겠고, 굳이 가상의 이름을 붙이지도 않겠다. 이곳에도 여러 공공건물이 있었고, 크든 작든 마을이라면 으레 있기 마련인 공공건물, 정확히 말하면 구빈원이 있었다. 이 구빈원에서 목숨이 위태로운 아기 하나가 태어났는데 출생 요일과 날짜는 독자에게 전혀 중요치 않으니 따로 거론할 필요가 없겠고 아기의 이름은 이 장의 말머리에 밝힌 대로다.”(황소연 역, 시공사,2020) 1. 상징과 은유, 문체는 필요없다는 듯이 학술 논문 쓰듯이 구성한 첫 문단이다. 독자를 도발하면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자극 서술마저 재미있게 느껴진다. 작가의 의도적인 소설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번역문체인데다 난삽(難澁)한 문장 전개여서 굳이 글쓰기 연습할 필요가 없을 정도..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을 무엇일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거나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이재룡 역, 민음사,2018) 1.철학 책을 읽는 것처럼 무겁게 다가오는 첫 문단이다. 철학에 개입한 종교을 해석하는 느낌이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개인의..